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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교구 역촌동 성당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peater
제1독서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2-28
사랑하는 여러분,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23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야 아버지도 모십니다.
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25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26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28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9-28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4,1-7.11-13)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말씀의 초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며, 처음부터 들은 것을 간직하여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제1독서). 사람들이 요한에게 누구인지 물었을 때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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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라고 한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하며, 자신은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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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이라며,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라고 한다(제1독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밝힌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라고 말합니다. 저는 ‘광야’라는 낱말을 보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앞섭니다. 광야에 서면 나 자신의 모든 것이 그대로 다 드러나고, 나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마주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삶의 어떤 조건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그곳은, 내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욕심에 가득 차 있는지를 깨닫게 할 것 같아, 할 수 있는 한 광야보다는 세상이라는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광야는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1,27)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당당히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은수자가 광야에서 주님을 찾았듯이, 우리도 광야에 서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 속에서, 우리는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자연스럽게 겸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모두 ‘광야에 선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앞길을 준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이철구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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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바실리오 성인과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카파도키아의 교부로, 우정과 신앙 안에서 어려움과 즐거움을 같이한 평생지기입니다. 바실리오는 당대 최고의 교육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테네에서 공부한 뒤 수사학 교사로 크게 성공합니다. 세상의 명성에 취하였던 그는, 누이 마크리나의 도움으로 깨우침을 얻고 회심하여 금욕적인 이상에 삶을 바칩니다. 그리고 수도승 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주교로 서임되어 사목자로 하느님과 교회에 봉사하게 됩니다. 이때 이미 생전에 ‘대 바실리오’라 불리며 사람들의 존경을 한껏 받습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의 영향을 받아 한동안 수도 생활에 자신을 바칩니다. 그러다가 나지안조의 주교였던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사제품을 받습니다. 사제품을 받은 뒤 갑자기 몸을 숨겨 버린 그는 뒷날 자신의 저서 「연설」에서 당시의 심경을 밝힙니다.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깨닫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 그리스도와 참된 친교를 맺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레고리오는 사제나 주교로 봉사하기보다는 은수 생활로 돌아가기를 끊임없이 바라던 성인이었습니다.
힘겨웠던 박해 시기가 지나 신자들과 성직자들에게 신앙의 불꽃이 시들고, 수도승들은 극단적 엄격주의와 영적 엘리트주의로 치닫던 시절에 대 바실리오 성인은 이 모든 것 뒤에 ‘하느님 말씀에 대한 복종의 결핍’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경 말씀이 수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과 행실의 토대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혜안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김동희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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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왔다는 것은, 세례자 요한이 당시에 정치권에서도 의식할 정도로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여겨볼 점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도, 그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 증언과 함께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을 향하게 합니다.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 앞에서도 그는 예수님을 증언하여,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훗날 자기 곁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스승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3,26)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참된 증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을 이용해서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은 유혹을 겪습니다.
내가 기억되기를 바라고 내가 주목받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내 노고를 인정하여 주지 않으면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을 좇다 보면, 우리의 믿음은 어느새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부르심을 받았든지, 어떤 직분을 받았든지,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묵상하며, 교회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곰곰이 성찰하면 좋겠습니다.(김재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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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찬가’라고 부르는 서문(요한 1,1-18 참조)을 제외하면 요한 복음은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조금은 어색한 이 표현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언급되는 “너희가 모르는 분”, “내 뒤에 오시는 분”과 이어집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가지고 있던 생각이 틀렸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뒤에 오시는, 아직은 사람들에게 드러나시지 않은 예수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인지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독특하게 세상에서 죽음을 맞지 않고 하늘로 불려 올라간 구약의 예언자입니다(2열왕 2,1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를 종말의 때에 앞서 백성들에게 보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말라 3,23 참조). 다시 한번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 예언자인지 묻습니다. 그의 답은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그 예언자”는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미 정해진 인물을 가리킵니다. 그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으로 후손들 가운데에서 일으켜 세울 ‘모세와 같은 예언자’입니다(신명 18,18 참조).
오늘 복음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세례자 요한의 대답을 통하여 오히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면서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예언자, 곧 종말론적인 예언자이십니다. 두 표상 모두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실 구원자에 대한 기대를 나타냅니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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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찾아와 “당신은 누구요?”라고 질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와 있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더욱이 자신은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때로는 물질로 자신을 평가하기도 하고, 자신의 권력과 명예가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자신을 알게 되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예수님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아 갈수록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이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닦는 사명을 완수하게 하듯, 우리의 겸손함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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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자동차는 자동차로 쓰이고 비행기는 비행기로 쓰여야 합니다. 자동차가 하늘을 날려 하고 비행기가 도로를 달리려 하면 불행해집니다. 누구나 자신이 생겨난 이유를 알아 그 목적대로 사용되어야 기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습니다. 정체성을 묻는 것입니다. 요한은 명확하게 “나는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소명’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소명이 곧 정체성입니다. 만약 요한이 “나는 유다 산악 지방 출신이고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다.”라고 대답하였다면, 여전히 그가 왜 세례를 주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이러한 일을 하려고 하느님에게서 파견받았다.”라는 식으로 대답하여, 자신이 하는 행위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누구이다.”라는 각자의 대답 안에 주님께 받은 소명이 들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실제로 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나는 의사이다.”와 “주님께서 내가 의사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천지 차이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각자에 대한 어떠한 창조 목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목적 없이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를 만드실 때 저마다 소명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왜 만드셨는지 알아야 삶이 의미 있어집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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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내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곧 그분에게서 “처음부터 들은 것”,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기에 하느님과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고, 이 영원에 대한 갈망은 누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미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라면 확신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진리는 사람들의 왜곡과 편견에 맞서 참된 확신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진리는 세상의 어떤 권력과 힘의 무상함에 맞서 인간의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인생의 신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이 신비가 세상을 구원할 것임을 미리 깨달았고, 그래서 유다인들이 그를 위대한 엘리야나 메시아로 받들려고 했을 때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고,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진리는 불변하지만, 진리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변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된 구원자로 고백하기 힘들어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맛본 사람들은 이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 안에 머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사람들임을 말뿐만 아니라 삶으로 보이며 살아갑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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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 기억하는 두 분의 성인,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 안에서의 우정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 주신 분들입니다. 두 분 모두 학문과 덕행에 출중하셨으며 은수 생활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를 관상하며 그분과의 일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한 분은 체사레아의 주교로서, 다른 한 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서 아리우스 이단과 맞서 진리를 수호하셨습니다. 두 분은 마치 하나의 영혼처럼 일치하여 하느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전하셨습니다.
두 분의 성인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느슨해질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교와 삶으로 보여 주십니다. 신앙의 위기를 느끼고 세상의 유혹이 거셀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두 분은 사도들로부터 들은 진리를 간직하고 후대에 물려주셨습니다. 두 분은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고 고백한 분들이었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하려고 주님 앞에 머물며, “나는 누구인가?” 하고 화두를 던져야 합니다. 신앙의 위기를 느낄 때나 이단으로 신앙이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이미 교리 교육에서 배운 진리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되새겨야 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고 올바른 길을 걷는 신앙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조언을 들음으로써 우리는 많은 선한 것들과 하느님의 진리를 새롭게 우리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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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적’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가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주장으로 신자들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와는 정반대로 그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온 이스라엘 앞에서 증언합니다. 자신을 낮추면서 예수님을 드러내어 많은 이들을 그분께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는 데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명백히 다른 이들 앞에서 고백할 수 있어야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 자신이 메시아라고 외칠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마치 내가 정의와 진리의 기준인 듯이 행동하기는 생각보다 쉽습니다. 동이 트면 울던 수탉이,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울지 않으면 아침이 오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자기를 드러내려는 생각으로 가득할 때, 내 힘으로 세상을 구원할 듯한 착각 속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고 맙니다.
대림 시기에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알려 주는 역할을 맡았던 세례자 요한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미 와 계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자신을 감추고 예수님을 드러냈기에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세례자 요한에게서, 진리에 이르는 길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겸손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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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샛별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별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새벽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새벽별은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새벽별은 가장 먼저 뜨는 별이 아니라 가장 나중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별이 하나둘 사라질 때 밤하늘을 지키다가 마침내는 붉은 해에게 건네주고 자신은 말없이 사라지는 별이 새벽별입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을 6월 24일에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가장 길었던 낮이 짧아지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탄생 시기는 밤이 가장 길었던 동지에서 낮이 점점 길어지는 때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도 자신의 탄생 시기가 갖는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앞서 닦아 놓고 자신은 점점 작아집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욕심이 생길만도 한데, 오히려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립니다. 심지어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하며 스스로 낮춥니다.
세상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고 해에게 말없이 자리를 내어 주는 새벽별 같은 사람, 끝까지 변하지 않고 세상에 희망을 주는 사람,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며 남에게 공로를 돌리는 사람, 이런 사람들 때문에 아름답게 바뀔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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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불확실한 ‘데이터’로 남을 비판합니다. 빈약한 자료로 이웃을 판단합니다. 그러면서도 잘 알고 있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상대가 알려진 사람이라면 더욱 심합니다. ‘잘 모른다는 말’은 여간해서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알게 된 정보이건만 내색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많이 알고 있는 이들이 자신을 낮춥니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이들은 고개를 듭니다.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못 알아준다고 서운해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알이 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숙이고 싶어도 못 숙입니다. 알이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평소 단식하며 절제했던 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르면 ‘한 발자국’ 물러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송구스러운 분’이 없는지요? 그런 분을 알고 있는 이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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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착각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례를 베풀고, 죄를 용서하는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하느님의 힘이 전해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가 그리스도로 대접받고 싶어 합니다. 영적 능력이 조금만 있어도 사람들 위에 서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해서 조직을 이루며 분가하는 것이 신흥 종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빠진 것은 그의 세례 때문이었습니다. 요르단 강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죄가 용서된다고 하니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렇게 하니까 죄 사함의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요한의 말과 행동에 힘을 실어 주셨던 것이지요. 강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에게 죄 사함의 느낌을 선물로 주셨던 겁니다.
요한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착각했더라면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본래 위치를 제대로 보는 행동입니다. 재물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면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홀히 대하면 금방 불쾌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한 삶은 축복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한의 처신과 자신의 태도를 비교하며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면서 이혼하겠다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혼의 이유 중에서 무엇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까요? 대부분이 ‘성격 차이’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성격이란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다릅니다. 그렇다면 성격 차이라는 것은 자기 성격에 상대방이 맞춰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 성격에만 맞추길 바란다면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차라리 ‘개’를 키우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젊은이 중에는 결혼하지 않고 대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부정하는 사람은 남도, 더 나아가 세상까지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제대로 알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또 세상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넓은 마음을 갖게 하는 시작이 됩니다.
자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함께 사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함을 갖게 되며 더 나아가, 이렇게 부족한 ‘나’를 사랑해 주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회개의 설교를 듣고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에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타인의 기대나 칭송에 취해 있었다면, 그리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원했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냥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고 말하지요. 소리는 뜻을 전달하고 나면 사라지고 맙니다. 이처럼 요한은 자기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고 사라지는 도구임을 보여줍니다. 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주인의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다인 노예에게는 시키지 않는 비천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자기를 낮추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자기를 제대로 알고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일인데도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영역에 있는 것인데,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함부로 말합니다.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바치면서, 마치 종 부리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우리,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실천이 말보다 낮다(벤저민 프랭클린).
매질 당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명기 우리 가톨릭 교회는 참으로 험난하게 굴곡진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4세기에 이르러 그토록 잔혹하고도 오랜 박해 시대가 끝나게 되는데, 이제야 좀 편안해지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박해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이런저런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겨우 안정된 교회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은혜롭게도 인간 역사 속 깊이 현존하시는 주님께서는 위기 중의 교회를 위해 그때 그때 적절한 선물을 보내셨는데, 그들이 바로 교회의 중심을 잡아줄 위대한 교부들이요 성인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대 바실리오 주교와 나지안조의 성 그리고리오 주교 학자입니다.
바실리오 성인은(330~379) 신앙이나 인성, 덕행이나 추진력이 얼마나 탁월했던지 그냥 바실리오 성인이라고 하지 않고 대 바실리오라고 칭합니다. 그의 가문은 성덕의 온상이요 학교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두분다 성인이었습니다. 조부는 순교자, 조모 역시 성인이었습니다. 누님 마크리나도 성녀, 동생 그레고리오도 성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성인의 탄생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탈리아 북쪽에 위치한 도시 토리노 같은 경우도 특별합니다. 돈보스코를 중심으로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탄생합니다. 그의 영적 지도자 요셉 카파소 신부, 그의 이웃 요셉 코톨렌고도 성인, 그의 애제자 도미니코 사비오도 성인, 그와 교육 이념을 같이한 마리아 마자렐로도 성녀, 그의 영성에 매료되어 중국까지 선교를 왔던 베르실리아 주교, 까라바리오 신부도 성인... 이렇게 한 명의 성인은 또 다른 성인의 탄생을 견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한국 교회에서 순교 성인 외 증거자 성인의 탄생이 그토록 절실한 것입니다.
탄탄한 가문,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청년 바실리오는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등지에서 깊이 있는 공부를 거듭한 끝에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높은 경지에 도달합니다. 당시 대세 학문이었던 수사학 교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의 강의실은 언제나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실리오의 마음은 광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사막 안으로 들어가 하루 온종일 하느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수도자로서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홀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던 은수자들을 모아 수도회를 건립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형제들을 위한 영적 안내서를 집필했습니다. 수도원 부속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작했고 병원을 만들어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그 무렵 바렌스 황제가 아리우스파 이단으로 기울어져 가톨릭교회를 공공연하게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에 크게 분노한 바실리오는 수도원을 잠시 나와 체사레아로 갔습니다. 강력하고 설득력있는 어조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옹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근으로 힘겨워하는 시민들의 구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당시 시민들은 그를 친 아버지처럼, 참된 목자처럼 존경했습니다. 370년 대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바실리오를 후계자로 천거했습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바렌스 황제는 어떻게든 바실리오를 아리우스파로 끌어들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협박을 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재산의 몰수나 매질, 귀양이나 사형, 그중에 하나는 면하기 힘들 것이다.”라고 하며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바실리오 대주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추호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는 수도자이므로 몰수당할 재산도 없습니다. 고행 역시 몸에 밴 것이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매질 당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진정한 고향은 천국뿐이므로 저를 어디로 귀양 보낸다 할지라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사형에 처한다면 즉각 천국에 갈 수 있으므로,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바입니다.”
바실리오 대주교의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 앞에 황제도 감탄을 하며 그의 적극적인 후원자요 지지가 됩니다. 벌을 주기보다 그가 관심을 보인 자선 사업에 힘을 실어줍니다. 체사레아 부근의 별장지를 내어주는데, 바실리오 대주교는 그 장소에 병원과 보육원, 양로원을 세워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요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우리는 교회의 큰 두 기둥인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를 기념합니다. 혼란스러웠던 시대 속에서 두 성인은 서로의 우정을 바탕으로 교회를 지키고, 삼위일체 신앙을 변함없이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코린토 1서에 대한 해설을 읽었습니다. 코린토 공동체는 여러 질문 속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혼인과 독신에 관한 문제, 우상에게 바친 고기, 전례와 성찬례의 질서, 영적 은사의 사용, 그리고 몸의 부활 문제에 대해 분명한 식별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혼인을 하든 독신을 살든, 중요한 것은 사라질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일임을 선언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고기는 먹을 수 있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 그가 보는 앞에서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지식보다 앞서는 것은 형제에 대한 배려임을 가르칩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가 세속의 만찬과 결코 섞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성찬은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신비이며, 남녀평등의 원리는 강조하되 무분별한 무질서를 경계합니다. 영적 은사는 개인의 명예나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총임을 설명하며, 그 모든 은사 위에 ‘사랑’이라는 최상의 은총을 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의 부활을 분명히 확인합니다. 썩을 몸이 불멸의 몸으로 변화할 것이며, 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얼마 전 AI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보다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웁니다. AI는 인간의 지식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인간에게서 배웁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예수님의 황금률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농업혁명 시대에도, 산업혁명 시대에도, AI 혁명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계명입니다.” 결국 시대가 변해도 신앙인의 기준은 사랑이며,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새로운 질서를 이야기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권력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에게 혁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질서를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보았습니다. 신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식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 할 때는 식별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없는 활동은 공허하고, 활동 없는 기도는 관념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2026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아니기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요한 1,20)
나는 빛이 아니기에
빛을 머금어야 하고
빛을 머금을 수 있으니
오롯이 빛을 머금을 따름입니다
나는 길이 아니기에
길을 따라나서야 하고
길을 따라나설 수 있으니
기꺼이 길을 따라나설 따름입니다
나는 믿음이 아니기에
믿음을 보듬어야 하고
믿음을 보듬을 수 있으니
마음껏 믿음을 보듬을 따름입니다
나는 희망이 아니기에
희망으로 물들어야 하고
희망으로 물들일 수 있으니
깨끗이 희망으로 물들일 따름입니다
나는 사랑이 아니기에
사랑에 사로잡혀야 하고
사랑에 사로잡힐 수 있으니
송두리째 사랑에 사로잡힐 따름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는 당시 사람들에게 위대한 예언자로서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혹시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언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겸손했고, 진정 메시아가 누구이신지를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늘상 자신의 권위만을 추구하면서 다른 이의 권위를 존중할 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곧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서 참된 권위에 순종할 줄 모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결국 자신이 소유한 권위마저도 사라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우화에서 나오듯이 위대한 인물이 나귀를 타고 가는 데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절을 하자 우매한 나귀가 느끼기에 사람들이 자기한테 절을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사도직을 수행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이시지 결코 자기 자신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참된 겸손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세상에 주님을 증언하는 참된 예언자 직무를 수행해 나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리스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바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일상과 생활 속에
구현되어야 할
우리의 신앙입니다.
겸손 이전에
정직입니다.
정직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자리를
정확히 압니다.
진실성은
자기를 부풀리지
않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렇듯 깨달음은
새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가로막지 않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앞에
설 줄 아는 사람만이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계시는
사람을 통해
말해지지만
결코 사람에
머물지 않는
은총을 보여줍니다.
비움으로써
참된 중심을
드러내는 것이
참된 열림의
길입니다.
그는 오실 분을
준비할 뿐,
그분의 자리를
결코 차지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아니다”라고
고백함으로
참된 길을 밝힙니다.
메시아 역할을
붙잡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중심에 두는
어리석은 집착에서
우리는 벗어납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본다는 것은
삶의 중심이
나에게서
그분으로
옮겨지는
체험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시는 사랑을
알아보는 기쁜
하루 되십시오.
그리스도를
알아본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마음을 여는
우리 생활의
참된 기쁨입니다.
이석원 작가의 ‘나를 위한 노래’에서 세상의 행복을 어른의 행복과 아이의 행복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신나고 재미있으면 행복하지만, 어른은 고통이 없어야 행복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공감 가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더 행복한가 봅니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고통을 피하면 행복할 텐데, 고통의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기에 불행을 더 쉽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가진 것이 적고, 능력과 재주가 없는 것도 고통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을 바라보니 고통이 떠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작은 기쁨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아이의 마음이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물면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기쁘게만 살라고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절제하는 것’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사랑이 있음을 말합니다.
러셀 로버츠의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이라는 책에서는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소유하지 않고 절제하면서도 사랑해야 우리는 가짜 행복에서 벗어나 진짜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더불어 나의 희생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면서 자기 삶이 풍성해지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자기희생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는 유다인들의 기대에 맞춰서, 메시아, 엘리야, 예언자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기대를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기대를 따릅니다. 즉,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는 것을 기쁘게 따릅니다. 오실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세상의 높은 자리보다 낮은 자리를 선택하십니다.
광야에서의 삶이 결코 고통 없는 삶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큰 고통이 동반되는 힘든 삶입니다. 그러나 고통 없는 삶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 그였습니다. 자기희생을 기꺼이 선택하면서 진짜 행복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고통 없는 삶,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에서만 행복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하느님의 기대를 따르는 사람만이 진짜 행복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진실이 신발을 신고 있는 동안, 거짓말은 지구의 반 바퀴를 돌 수 있다(마크 트웨인).
참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위해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종종 교우들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듣게 됩니다. 기분 좋은 내용도 참 많습니다. “새로 부임하신 주임 신부님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판박이입니다. 자상하고 편안하며, 늘 격려하고 칭찬하십니다. 강론도 교우들 눈높이에 맞춰 정성껏 준비하시니, 성당 가는 것이 너무나 행복해졌습니다. 쥐구멍에도 해뜰 날이 있다더니, 언제나 상처투성이였던 우리 본당에도 이런 신부님이 오시다니 꿈만 같습니다.” 듣고 있는 제가 다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그런데 걱정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어디 가면 치유나 예언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분이 계신다. 한번 같이 가보시겠느냐? 많은 환자들이 치유되고 은혜를 입는다. 너무 위험한 것 같아, 조금 알아보니, 우리 교회가 가장 경계하고 우려해야 할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은밀히 홍보를 하고, 사람들을 끌어가고, 교묘히 뭔가를 요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거짓 목자, 거짓 예언자들은 마치 독버섯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잘못 빠져들어 갔다가는 독버섯 먹고 즉사하듯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니, 언제나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크게 돋보이는 인물이 있었으니,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벌인 세례 동은 당시 범국민적인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다른 거짓 예언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시원시원 거침없었으며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웠습니다. 때로 그 칼끝이 부패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할 때면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뒤가 구린 지도자들과는 달리 세례자 요한은 아무리 뒷조사를 해봐도 티끌 한 점 구린 구석이 없었습니다. 청렴결백했고 그로 인해 당당했으며 부패한 권력자들 앞에서 꿇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혹시나 세례자 요한이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등장과 세례를 통한 전 국민적인 정화 운동에 겁을 집어 먹은 유다 최고 의회는 세례자 요한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 세례자 요한을 취조합니다. 취조 과정에서 놀랄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조사관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요?”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데, 세례자 요한은 펄쩍 뛰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메시아가 아닐까, 의혹은 품는 것조차 송구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도 꺼내기 전에, 비교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기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며 서둘러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향한 종으로서의 충실함과 충직함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을 누구요?”라는 거듭된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게 자신의 신원을 밝힙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너무나 겸손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의 위엄과 영광에 비하면 자신은 정녕 아무것도 아니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나란 존재는 그저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벌써 모든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다하기 시작합니다.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좀 더 각광받고 구세사의 무대 위에 완전히 자리 잡도록 철저하게도 자신을 감춥니다.
선구자로서, 예언자로서, 종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너무나 잘 수행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거칠지만 소박하고 꾸밈없고 거짓 없는 세례자 요한의 삶 앞에 갖은 겉꾸밈으로 요란한 우리들의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참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위해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 앞에 어떻게 해서든 한번 드러내 보이려고, 있어 보이려고 애를 쓰는 우리들의 가식적인 삶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대림 특강 때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강사 신부님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속에서 드러난다.(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 구약과 신약은 서로 독립된 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중심으로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임을 강조합니다. 아담은 인류의 첫 번째 사람이며, 원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으로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원죄를 가져온 아담과 구원을 가져오신 예수님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이 사랑이 드러납니다. 노아의 방주는 홍수를 통해 악에서 구원받는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세례 성사는 물로 죄를 씻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성사입니다. 방주는 구원을 위한 예표이며, 세례는 그 예표가 성취된 사건임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으셨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 높은 자리를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겸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았고, 그 일을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성서는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극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톨스토이는 3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라고 합니다. 지나간 과거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잡은 핸들이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듯이, 사람의 몸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누군가를 위한 삶을, 본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깊이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멈추면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영광과 찬미는 하느님께 돌리면 좋겠습니다. 수고와 노력은 나의 몫으로 알면 좋겠습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2025년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아닌 이와 더불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요한 1,25)
오직 빛만
비추는 것 아니니
빛 스민 이
비록 빛은 아니어도
담은 빛
홀로 가두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건네기 때문입니다
오직 샘만
솟구치는 것 아니니
샘 깃든 이
비록 샘은 아니어도
머금은 샘
홀로 들이키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남김없이
나누기 때문입니다
오직 길만
이끄는 것 아니니
길 부른 이
비록 길은 아니어도
따르는 길
홀로 걷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두렴없이
열기 때문입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자 요한은 서슴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하면서 자신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당시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를 넘어서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분명하게 자신은 그리스도에 앞서서 보내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는 그렇게 겸손하게 자신의 소명이 진정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 소명을 진실하게 살아간 진정한 예언자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명을 진실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정치인은 국민을 섬기고 잘 다스리는 소명이 있고, 군인은 몸을 바쳐 국가를 지키는 소명이 있고, 의사는 모든 환자의 병을 고치고 살리는 소명이 있습니다. 또한 학자는 진리를 추구하며 세상 속에 그 진리를 가르치는 소명이 있고, 성직자는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봉사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의 모습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리는 그 소명을 살아가지 못하고 다른 욕심들을 추구하며 살아가곤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소명을 살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 바로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잘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며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대단한 분이랬죠.
나는 그리스도 아니고 그분의 종될 자격도 없는 미소한 자라고 했어요.
바로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며 그리스도시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레위인들에게 요한이 하신 이 대답은 바로 우리에게 한 것과 같습니다.
광야에서 회개하라 외친 요한의 선포대로 방향을 예수님께 전환합시다.
올바른 인생길은 예수님께 집중해야 된다는 세례자요한의 말 들어야죠.
예수님 맞으려면 요한은 굽은 길 곧게 하고 언덕은 깍으라 준비시켰죠.
예수님 앞에서 말씀하신 요한의 겸손한 말씀 듣고 예수님 잘 모십시다.
가톨릭알림 말: 세례자 요한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읍시다.
앞서가는 사람이 바르게 가야 목적지에 이른다.<요한<1/19-28>1/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앞서가는 사람이란? 부모로부터 시작하여 나라의 대통령 정치지도자 공동체의 장상이나 책임자 교육기관은 선생 종교기관은 목사나 사제들이 있으며 앞서가는 사람은 하느님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앞서가는 사람이 진 선 미 를 따르지 않으면 뒤따르는 사람이 진실 하고 선 하고 아름답게 살지 못합니다. 또한 앞서 간다고자기중심적이 되어 자기 생각 자기말 행동에 집중하면 나만 있고 너는 없어집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선 세례자 요한이 자기를 따르는 사람 보고 자기만 바라보라 하고 이끌었으면 주님의 자리는 없어지고 구원이 잘모괼 수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려면 “당신은 누구요?” 하니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광야에 외치는 소리다.” 하시며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들릴만 하지도 않다고 하시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하심 같이 우리는 주임의 종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알주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믿지않고 너만 믿으라 하면 자기는 주님에게 순종 하지 않고 너만 순종하라하면 자기는 청빈 하지 않고 너머 청빈하라 하며 자기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면 독재자 자기를 위한 사람입니다.
겉모양만 지도자요 앞서가는 사람이지 속 내용은 자기욕심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앞서가는 사람이 자기 멋대로 지식을 사용하고 배운 바를 자기 생각대로 산다면 아는 것 잘못 배우고 가진 것 잘못 사용하고 자기 명예에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위해 지도자가 되고 능력자가 되고 거룩한 자리를 직업인처럼 산다면 섬기고 나누고 친교는 살아지고 섬김을 받고 자기주머니만 체우고 자기 얼굴만 내미는 사람입니다.
수도자는 나는 없고 너만 있으며 순명으로 봉사를 위한 것이고 청빈은 가지바를 나누는 것이며 순결은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수도자는 닫친 문이 아니라 열린 문이여야 합니다. 이길은 믿음과 희망과 사람의 길을 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미 세례를 받으며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 체면을 앞세우고 자기이익만 앞세우고 자기명예만 앞세우고 살려고 믿음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님의 빛석에실며 주님 뜻대로 살기위해 믿음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걷고 주님의 뜻을 따르려 살고 있어야 합니다. 제제대상에 올라서 미사를 들리고 빛나는 제의를 입고 서있는 것은 주님의 현존이며 주님의 소리입니다. 주님을 대신하여 있고 소리를 내면서 살아가야 그 위대한 주님의 길을 가고 목적지에 이릅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시려는 길의 참 안내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성무일도 기도문 중에 이런 구절이 기억납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지나간 과오에 억눌리지 말고, 지나치게 죄책감에 빠져있지 말라.”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나간 관계와 그 관계들 속에서 생겼던 모든 과오에 빠져 스스로 움츠리고 생의 관계와 범위를 축소하며 좁고 쪼그라든 인생을 살지 말고, 지난 일들을 잊고 새로이 시작합시다. 주님 사랑에 의지하여 내 죄를 용서받고 나에게 잘못한 이들의 죄악을 용서하며 서로 묻고 다시 새롭게 시작합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 스스로를 지칭하여 고백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지난 과오는 과오대로 두고 그 과오를 채우고 극복하기 위하여서라도, 오늘을 새롭게 바르고 다시 곧게 살아갑시다. 주님 사랑에 의지하여 서로 용서하며 새로운 관계를 생성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합시다.
꼭 해야 할 말
박민우 알베르토 신부님
‘편향’의 사회.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편협한 시선으로 내 주장만을 내세우는 분위기가 여러 곳에서 펼쳐집니다. 그러다 보니 때론 쓸데없는 논쟁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결론을 내기 위한 의견 나눔이 아닌, 상대방을 헐뜯고 무너뜨리기 위한 논쟁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도 이런 논쟁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적대적으로 다가온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에게 질문을 퍼붓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질문과 세례자 요한의 답은 앞뒤가 맞질 않습니다. 처음에는 요한의 소통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답만 따로 놓고 보면 온전한 내레이션이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해 파견된 이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 뿐이지만, 내가 감히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으신 분께서 내 뒤에 오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쓸데없는 논쟁에 휘말리는 대신 본인이 전해야 할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편향의 사회에서 저도 가끔 소모적인 논쟁에 휩쓸립니다. 짐짓 저의 옳음을 인정 받고 싶어서 과장된 언행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고칩니다. 앞으로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해 꼭 필요한 말만, 꼭 해야 할 말만 입에 담고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함승수 신부님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양심’이라는 내비게이션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식별해가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올바른 식별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만나게 되기에 참 어렵지요. 그 장애물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먼저 ‘교만’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그분 자리를 차지하려는 교만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욕심’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이미 드넓은 정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봇의 포도밭 마저 빼앗으려는 탐욕에 빠져 죄를 지었지요. ‘게으름’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게으름과 안일함 때문에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지 않았다가 신랑을 마중나가지 못했고 혼인잔치에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인색’이 있습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있는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 조차 베풀지 않은 인색함 때문에 부자는 죽어 지옥에서 불타는 고통을 받아야 했지요. ‘질투’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질투에 눈이 멀어 다윗이라는 충신은 물론 왕권까지 잃었습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 왕은 성적 욕망에 휘둘려 부하 장수의 아내와 부정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부하의 목숨까지 빼앗았지요.
만약 이들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식별했다면 그런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올바른 식별을 하지 못한 것은 귀로 들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마음에 간직한 하느님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심판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할 큰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에 담아주신 말씀을 고스란히 마음에 담아 간직했고, 마음에 간직한 말씀들은 철저히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랬기에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자신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구약에서 예고한 참된 예언자도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을 드높이고 싶은 교만에 휘둘려 “내가 그리스도다”라는 거짓 증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에 비추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자신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그분의 ‘소리’일 뿐이라고, 자신은 구세주로 오실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도 합당치 않은 비천한 존재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세례자 요한의 그런 점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아니며, 당연히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굳게 믿으며 그분 뒤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일 뿐이지요. 이 점을 마음에 분명히 새기고 하느님 말씀을 내 삶의 참된 기준으로 삼으며 따라야 엉뚱한 길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봐야겠습니다. 혹시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며 따르기보다 그분을 등에 업고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지 찬찬히 돌아보며, 겸손과 순명의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야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릇된
신앙을
바로잡는
기준점은
다름 아닌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겸손입니다.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겸손하고도
힘찬 고백의
새날입니다.
우리의
세례를 믿고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풀리지 않던
우리 마음을
풀어주십니다.
그리스도의
깊은 뜻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문제의 빠른
해결과
해답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만나는
겸손은 언제나
깊은
깨달음이 됩니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의
교만을 버려야
깨달음은
현실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겉모양만
보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하시는
그리스도십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앞에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짊어진
고민들을
그리스도께
내려놓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마음은
따듯합니다.
교만하지
않기위해
겸손하기 위해
늘 그리스도께
기도드립니다.
겸손이
은총입니다.
낮추면
듣게되고
낮추면
그리스도께
속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스도의
새날입니다.
어떤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보다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가는 글을 쓸 때 쾅쾅 울리는 시끄러운 옛날 노래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 글이 잘 써져서 빗소리 ASMR을 듣는다는 분, 클래식을 듣는다는 분, 벌거벗은 채로 글을 쓴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거의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지만(주로 제 방입니다), 잘 써지지 않을 때는 백색 소음이 있다는 카페를 이용하곤 합니다.
글 쓰는 것은 똑같은데 그 상황은 모두가 달랐습니다. ‘같은 일도 다르게 한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다르게 한 것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다를 수도 있는 부분을 틀렸다고 하면서 자기 방식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까지 잃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라면서 획일화시키려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에게 ‘같은 일도 다르게 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르게 하는 그 과정 안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결과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더 큰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는 것과 남이 찾아주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같은 일도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주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성장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려고 할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의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고도 그러했습니다. 자기들과 달리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엘리야의 모습으로 극기와 겸손의 삶을 산 것입니다.
자기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바리사이들은 따지듯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답인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말했으면 편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남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선택하면서, 스스로 낮춥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얼마나 겸손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교만과 이기심으로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인생은 너무 짧아서 다투고 사과하고 가슴앓이하고 해명을 요구할 시간이 없다. 오직 사랑할 시간만 있을 뿐. 하지만 그 시간마저도 순식간에 지나간다(마크 트웨인).
저는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년간의 전문가 양성 코스를 시작할 때가 생각납니다. 첫 시간, 참석자들이 서로를 소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분 한분 소개될 때마다 저는 무척이나 주눅이 들었습니다. 다들 그간 쌓아온 스펙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에 비해 저는 얼마나 초라하고 일천한 지...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랬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쥐뿔도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누구요?”라며 집요하게 정체를 물어대는 유다인을 향해 세례자 요한도 비슷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 23)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 그 어떤 과장도 덧칠도 없이, 솔직하고 명쾌하게 증언한 지극히 겸손한 예언자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스스로 자신을 소개한 대로, 휘황찬란한 도심 예루살렘을 떠나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고독과 추위, 유혹과 배고픔과 싸워가면서 시종일관 맑고 깨어있는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 영적·육적 깨어있음은 세례자 요한을 용감하고 당당한 예언자로 설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정치 세력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지도자들을 향해서도 날 선 경고장을 두려움 없이 날릴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향해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가 혹시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단호하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나는 한낱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다.”
정신 나간 자칭 이 땅의 지도자들과, 틈만 나면 기승을 부리는 사이비 교주들의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스스로가 왕이 되고 싶습니다. 스스로를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자칭 재림 예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는 행동들을 보면 이미 왕좌에 높이 올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이 ‘혹시 이분이 왕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정확하고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나는 왕이 아니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오. 나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이토록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신원의식은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무리 없이 연착륙하실 수 있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 역시 때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누구냐?”라고 질문을 던질 때, 솔직하게 소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주님 자비를 힘입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주님 크신 사랑으로 인해 오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합니다. 저는 이 세상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일 뿐입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확연한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비안코(BIANCO)는 1987년에 설립된 덴마크의 신발 브랜드입니다. 2019년 비안코는 ‘승강기’(The lift)라는 타이들의 짧은 공고를 선보였습니다.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두 남녀가 주인공입니다. 승강기에서 종종 마주치던 이들은 금세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머릿속으로는 결혼까지 상상합니다. 하지만 여자가 회사를 그만두는 날까지 두 사람은 서로 망설이다 끝내 입을 열지 못합니다. 그리고 광고의 마지막 메시지가 뜹니다.
“Step out of your head(머릿속에서 걸어 나와라).”
사람 대부분은 ‘자존심’이라는 배에 타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면 나는 버틸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과감히 전진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망망대해에 가라앉고 있는 배 위에 서서 먼 곳만 바라보는 한 남자와 같습니다.
“엄마는 항상 이런 말을 했어요.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 네가 어떤 것을 얻게 될지 결코 알 수 없거든.”
영화 ‘포레스트 검프’ 속 주인공의 말처럼 인생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맛이 없는 초콜릿이 걸릴 수 있고 맛있는 초콜릿이 걸릴 수 있습니다. 실패를 주저하다가는 맛있는 초콜릿을 결코 입에 넣어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행하려면 자존심에 타지 말고 거인의 어깨 위에 타야 합니다.
야구선수 추신수는 롯데 자이언츠 선수였던 외삼촌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야구에 입문했습니다. 이대호와 부산 수영 초등학교 동기였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미국에 진출했습니다. 시애틀 매리너스 마이너리그로 시작한 그는 매년 3할이 넘는 타격과 도루도 20~30개씩 하고 홈런도 두 자릿수를 넘기는 장타도 많이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팀에서는 그를 메이저리그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같은 포지션에 메이저리그 안타왕 스즈키 이치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구선수는 최저임금 적용 대상이 아니기에 한 달에 1,000달러(약 120만 원) 정도를 겨우 벌었던 그는 식비를 아껴 아들 기저귀를 사야 했습니다. 빵에 잼을 발라 먹는 게 식사의 전부였습니다. 이렇게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마이너리그에서 7년을 버텼습니다.
그러나 그는 근력 운동과 배팅 훈련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코치들을 찾아다니며 더 배울 것이 없나를 찾았습니다. 결국 팀을 옮기면서 메이저리그로 승격 했고 점차 주전 선수로 경기에 나서게 됩니다. 2013년에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간 총 1억 3,000만 달러(약 1,600억 원)에 계약했고, 2018년에는 현역 메이저리거 최다 연속 경기 출루 기록(52경기)을 세우며 한국인 타자로는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 올 스타 전에 출전하기도 합니다. 2020년 추신수의 연봉은 팀 내 최고액인 2,100만 달러(약 259억 원)이었습니다.
그가 메이저리그로 호출 받고 첫 게임에 들어섰을 때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아내가 그 경기를 TV로 봤다. 2회부턴가 3회부턴가 더그아웃 카메라에 내 모습이 잡혔다더라. 내가 장갑 끼고, 방망이 쥐고, 헬멧도 쓰고 감독 옆에 앉아 있었다. 감독이 누군가 대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준비된 상태로 눈에 띄도록.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5회 이전에는 대타 안 쓰지 않나. 그런데도 계속 그러고 있었다. 아내가 그거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추신수는 그날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는 기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은 운이 좋은 케이스가 맞다. 하지만 그 운을 잡으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갑 끼고, 헬멧 쓰고 감독 옆에 앉아 있었다. 기회는 1년 뒤, 어쩌면 10년 뒤에 올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일 올 수도 있다. 기회가 눈에 띄게 올 수도 있고, 몰래 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잡으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하고, 나는 그 준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뒤에 누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엄청난 거인이십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누군가를 모시고 오려면 자신의 자존심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그 누군가를 믿으면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가 무릎밖에 안 차는 거인 손 위에서 육지를 찾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가라앉을 일이 없습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항우와 유방은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시대의 라이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격돌은 약 8년 동안 지속되었고 처음에는 항우가 유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항우는 기원전 232년 초나라 명문가에서 태어나 키가 8척이 넘었고 힘은 커다란 쇠솥을 들어 올릴 정도였습니다. 가히 힘은 산을 뽑을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만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자기를 믿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이 몇 번이고 유방을 쳐야 한다고 간청했지만, 그는 주저하며 그 기회를 잃었습니다.
반면 유방은 결단에 머뭇거림이 없었습니다. 본래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방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건달들과 어울리던 시정잡배 주정꾼이었습니다. 장년에 이르러서야 하급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유능한 부하들이 생겨났고 결국 빠른 결단력을 내려야 할 때 주저하지 않아 세력을 키워 한나라의 첫 재상이 됩니다. 유방은 항우와의 전투에서 연패 했지만 결국 해하 전투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사면초가에 이른 항우는 자결합니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딛고 서 있는지 살피고 깨달아야 합니다. 언제나 성공하는 이들은 수많은 실패도 아랑곳하지 않는 자존심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인의 어깨에 타고 실패에도 두려움 없이 나아갑니다. 세례자 요한의 기개가 그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기대하지 맙시다. 거인에게 파견 받읍시다. 우리의 거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행동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기꺼이 배우는 것입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도 있습니다. 3명이 길을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문홍보를 다니면서 미주 한인 공동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봅니다. 신부님들의 사목에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미사 전에 신자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하고, 성체현시를 하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미사의 분위기가 한층 엄숙하고, 정갈하였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신자들과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창틀을 구입해서 신자들과 함께 성당의 창틀을 교체하였습니다. 구역을 찾아가서 미사하였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낮은 자세로 신자들과 함께하니 공동체가 한층 밝고, 따뜻해 보였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분위기를 활기차게 하였습니다. 미사 후에 인사할 때 아이들에게는 스티커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신부님께 인사하면서 스티커를 받았습니다. 스티커를 포도송이에 붙이면 나중에 선물과 교환해 준다고 합니다. 주보에도 짧은 글과 그림을 넣어서 그 주일 복음 말씀을 묵상하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함께하는 공동체는 활력이 넘쳐보였습니다. 저는 2012년부터 특수사목을 하였습니다. 본당을 떠난 지 어느덧 12년이 되었습니다. 저의 사목이 다른 사제들의 ‘타산지석’이 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2024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존경 받았습니다. 요한은 따르는 사람이 많았고,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겸손하였습니다. 자신은 하느님께서 보낸 메시아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겸손한 요한은 참된 메시아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메시아를 위해서 길을 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였습니다. 교회는 겸손한 요한을 교회의 스승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았던 요한에게 사랑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요한의 ‘겸손’을 따르는 2024년 새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빛을 됫박으로 가리는 사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이웃을 환하게 비추는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소금은 녹아서 음식에 풍미를 더해주고, 맛을 내줍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소금이 되어 공동체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소금이 되어 공동체가 더욱 성장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된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 주교의 삶과 가르침으로 교회를 빛내셨으니 저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으로 충실히 실천하게 하소서.”
<나는 참으로 아는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
어둠 가운데에
빛 계심을
어둠은 모르지만
빛 품은 이는 안다네
비록 빛은 아닐지언정
혼돈 가운데에
길 계심을
혼돈은 모르지만
길 걷는 이는 안다네
비록 길은 아닐지언정
거짓 가운데에
참 계심을
거짓은 모르지만
참된 이는 안다네
비록 참은 아닐지언정
미움 가운데에
사랑 계심을
미움은 모르지만
사랑하는 이는 안다네
비록 사랑은 아닐지언정
절망 가운데에
희망 계심을
절망은 모르지만
희망하는 이는 안다네
비록 희망은 아닐지언정
죽임 가운데에
살림 계심을
죽임은 모르지만
살리는 이는 안다네
비록 살림은 아닐지언정
우상 가운데에
하느님 계심을
우상은 모르지만
하느님 닮은 이는 안다네
비록 하느님은 아닐지언정
금도끼 은도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어떤 나무꾼이 벌목을 하다가 도끼를 강물에 빠뜨리고 울고 있었다. 그런데 제우스 신의 명령을 받고 제우스의 명령을 전하러 가던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이 모습을 목격하여 그 이유를 듣고 측은히 여겨 강 속에 들어가 금도끼를 들고 나와 이것이 잃어버린 도끼냐고 물었다. 나무꾼이 아니라고 대답하자 이번에는 은도끼를 들고 나왔다. 은도끼도 나무꾼의 물건이 아니라고 하자 헤르메스는 세 번째로 물 속에 들어가 나무꾼의 쇠도끼를 들고 나왔다. 쇠도끼야말로 자신의 도끼라고 대답하자, 헤르메스는 나무꾼의 정직함을 가상히 여겨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모두 주었다.
나무꾼은 친구 나무꾼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배가 아파진 친구는 즉시 강으로 달려가 도끼를 강물에 집어던지고 엉엉 울었다. 헤르메스 신이 나타나 금도끼를 보여 주자 친구는 금도끼가 바로 자기 것이라고 대답했다. 친구의 욕심과 거짓말을 괘씸하게 여긴 헤르메스는 금도끼를 빼앗고 도끼를 찾아주지도 않은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오랜만에 꺼내본다. ’정직함‘을 교훈으로 들려 준다.
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세례자 요한에게 찾아와 묻는다. ’당신은 누구요?‘ 인기가 하늘을 닿을 때 만나는 질문이다. ‘그리스도요? 엘리야요? 그러면 그 예언자요?’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답한다.
‘나나는 주님의 길 닦는 도구입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입니다. 당신께서 말하는 그분은 제 뒤에 서 계십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들릴 만한 자격 조차 없다‘ 하고 답하며 가서 들은대로 전하라고 한다.
세례자 요한의 예수님께께 대한 답은 정직함 그 자체이다. 소리는 사라지고 말씀은 커지셔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처음에는 정직하게 말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쭐 되고 하늘 높은 줄 모른다. 특히 난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보면 남을 속이고 자기가 최고가 된다. 인생 실패작이다. 새해에 모두가 정직함을 살았으면 한다. 겸손하게 순수하게 아름답게 자기 위치를 파악하고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자 되면 좋겠다.
쇠도끼는 쇠도끼일 뿐이다. 금도끼 은도끼로 둔갑 자신을 속이면 있는 것마저 빼앗긴다.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당신은 누구요?” 이 질문의 깊은 의미는 정말 요한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세례자 요한의 모든 것을 막기 위한 질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안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그 예언자도 아님을 밝힙니다. 그리고는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세례자 요한이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외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요한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어 자신을 밝혔던 것이지요. 특히 우리는 광야에 대해 주목해보았으면 합니다. 복음에서의 광야는 삶에 대해 무너짐, 희망이 없음, 빛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의미가 있는 곳에서 주님의 메신저가 빛으로 오실 메시아를 알려주신다는 것은 메시아가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이고 우리의 희망이 우리의 빛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내하며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는 이들이 되어야 하면 우리 역시 이 광야의 세상에서 세례자 요한처럼 그분의 메신저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의 이 외침이 그분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 소리가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유다인들이 보낸 이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질문을 한 것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요.” 여러분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아멘!
김준수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 (1,19)
흔히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을 얻고 옳은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지만 성경에도 아주 의미롭고 심오한 질문이 많이 있습니다. 아담을 향한 하느님의 “너 어디에 있느냐?” (창3,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16,15)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21,16)라는 질문은 단지 한 개인에게 던진 질문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향한 질문이며, 이 질문에 우리 각자는 필히 지체하지 않고 즉시 대답해야 합니다. 사실 모세는 미디안에서 양들을 치면서도 줄곧 자기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1,19)
옛날 로마 제국 시절,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전한 개선장군들이 로마로 입성하면 백성들이 모두 몰려나와 연도에 늘어서서 환호성을 지르며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때 로마로 입성하는 장군들은 노예 한 명을 마차 뒤에 숨겨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이유인 즉, 백성들이 환호할 때마다 장군의 뒤에서 그 노예는 ‘너는 신이 아니다! 신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역할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는 참으로 지혜로운 처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실 사무엘서에 보면,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백성들이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18,7)라고 노래하자 사울 왕이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 장군들은 스스로 삼가 조심하였다고 봅니다.
어쩌면 겸손과 섬김의 자세를 갖춘 세례자 요한은 변덕스런 사람들과 세상인심을 간파하고 터득했기에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았기에 사람들의 당신은 누구요?, 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예언자도 아니다.” (1,19~21참조) 고 답변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이전에 우리가 또한 누군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욱 요한복음에서, 세 번의 부정 ‘나는 ~이 아니다.’ 는 형식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나는 ~ 이다.’라고 반복해서 표현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의 신원이나 정체성을 확언하는 표현입니다. 즉 그분께서 ‘에고 에이미 즉, 나는 ~~이다.’라고 할 때 이는 곧 그분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분의 전 존재를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복해서 당신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포도나무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목자이다.’,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등등.
그러기에, 요한 세례자가 말하는 ‘나는 ~이 아니다.’는 고백은 요한의 겸손함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 신원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은 분명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자신과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과의 차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이나 신분이나 역할을 착각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솔하게 밝힐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그리고 엘리야도 그 예언자 곧 모세(신18,18)도 아니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물론 요한은 엘리야가 아니었지만, 엘리야와 같은 역할, 백성들의 회개를 위해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확신한 자신의 정체성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1,23)고 고백하며, 그 정체성에서부터 자신의 소명이란 바로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네가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너 자신에 대하여 알도록 하라.”는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말처럼, 요한은 진정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던 참된 인간이었으며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늘뿐만 아니라 올 한 해 동안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할 우리의 영적 안내자이자 길잡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당신은 누구요?,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세례자 요한처럼, ‘나는 ~이 아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우리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 교만의 선을 넘어서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도 세례자 요한처럼, 진리가 아니며 다만 진리를 증언하는 역할을 맡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 안에 굳건히 머묾을 통해서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며, 배운 바를 삶으로 실천하는 올 한해가 되도록 합시다. 사실 우리가 누구인가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요한이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1,26) 고 증언한 대로 이미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 마음을 모으면서 올 한 해의 마지막 날까지 항구하게 걸어가도록 합시다. ‘그리스도 이미 오셨고, 내 앞에 계십니다. 아멘’.
자기 객관화
한재호 루카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성경에서 ‘자기 객관화’가 상당히 잘 되어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그는 당대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물이었음에도, 자신이 누군지를 객관적으로 알았습니다. 자신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저 광야의 소리일 뿐이며 구세주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가 아님을 명백히 밝혔던 그가 요한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머리글에서 예수님 외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또 거기서 예수님의 육화를 묘사하는 동사 ‘되다(에게네토)’(1,14)가 요한의 등장(1,6)에도 똑같이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증언을 위해 외치시는(크라조) 것처럼(7,37; 2,44), 요한도 외침으로써 증언의 예언직을 수행하고(1,15)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파견을 받으신 것처럼(3,17), 요한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으로 묘사되었습니다(1,6; 3,28). 마지막으로 예수님처럼 세례자 요한만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은 것으로 그립니다(1,33). 그렇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잘 알았기에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함승수 신부님
저는 타고난 ‘길치’이지만 운전할 때 길 찾아갈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느 길로 가야할 지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안내해주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가야할 길을 놓쳐 다른 길로 접어들더라도 곧 새로운 경로를 검색해서 알려줍니다. 게다가 요즘은 인공지능까지 발달되어 교통량과 도로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제안하기도 하고, 주변에 어떤 편의시설이 있는지 어느 주유소에 가야 더 싼 값에 기름을 넣을 수 있는지까지 알려줍니다. 그런 편리함을 누리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를 향해 길을 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을 하느님께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은 없을까? 다행히 우리들 각자는 구원의 내비게이션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르지요. 어떤 일을 할 때 마음에 거슬릴 것이 없다면 그대로 진행하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뭔가 탁 걸린 듯이 불편하고 양심이 찔린다면 그 일은 즉시 중단하고 다른 길을 찾는게 맞습니다. 이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기준이 있으니 길 찾기가 어렵지 않지요.
그런데 양심이라는 내비게이션이 종종 오작동을 일으켜 우리를 방황하게 만듭니다. 그 요인들에는 여러가지가 있지요. 먼저 교만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그분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욕심도 있습니다. 아합왕은 충분히 많은 것들을 가지고 누리면서도 나봇의 하나 뿐인 포도밭을 빼았았다가 하느님께 책망을 듣습니다. 게으름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이 게으름 때문에 방심하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무관심이 있습니다.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병든 채 누워있던 라자로를 거들떠보지 않았기에 지옥에서 고통받습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 왕은 자기 휘하 장수 우리야의 아내를 탐하여 간음을 저질렀다가 하느님께 벌을 받습니다. 질투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한 나머지 계속해서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 제 탓으로 자기 왕권을 잃고 맙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극기와 고행으로 욕망을 다스리고 하느님 뜻에 만 집중했기에, 그런 요인들에 휘둘리지 않고 맑고 깨끗한 양심을 간직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답할 수 있었지요. 교만에 마음이 흔들렸다면 자기를 드러내어 높이고 싶은 마음에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답했을 겁니다. 엘리야인지, 아니면 모세가 예언한 그 예언자인지를 묻는 질문에 굳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적당히 거짓과 타협하며 인기와 명예를 얻고자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맑고 깨끗한 양심이 그의 영혼을 비추고 있었기에,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있었기에, 요한은 주님보다 먼저 와서 그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만 집중할 수 있도록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미덕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한 대답은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야 할 대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단지 그분을 증거하고 따르는 제자일 뿐이지요. 그럼에도 주님이 아니라 나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그분의 뜻을 따르기 보다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지는 않는지, 주님을 이용하여 내 목적을 이루는데 열을 올리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외치는 이’가 아니라 외치시는 분의 ‘소리’가 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먼저 나를 비우고 그 안에 주님의 말씀을 채워 그분 말씀이 내 삶을 통해,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널리 울려 퍼지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처럼 내 안에 뭔가를 채우는데에서 기쁨을 찾으려 하지 말고, 내 주관, 고집, 욕심 등을 비우는데에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비워진 그 자리에 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분께서 직접 내 삶을 주관하시며 내가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만이 문제의 해결사이시다. <요한 1, 19-28> 1월 2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현실에 부딪히거나 문제를 풀려고 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집이면 설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자동차나 기계도 만든 사람이 고장 난 것을 풀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서서 자기 경험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말을 하지만, 문제를 풀지 못하고 설계자나 만든 사람을 찾아 배우고 듣고 연구한 다음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오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오심은 인간끼리 고심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풀려고 할 때 풀리지 않는 것을 풀어주고 해결해 주시려고 주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신 분이 누구신지 어머니 태 안에서부터 알아본 분이어서 주님의 출현을 반기며 “너희 가운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않다.”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강한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반기며 하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총으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영접하고 함께 살려고 구십 평생을 살다 보니 요한의 말씀이 참이고, 진실이고, 따라 살아야 할 말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많은 이들을 상담하면서 공부 체험으로 주님만이 해결사임을 알게 됩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 중의 하나였습니다. 교수님이 이런 말을 제게 해주셨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의문이 많아야 합니다. 질문도 배움에 필요한 것입니다. ‘왜 사느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 알아서 바르게 사는 길은 의문을 가지고 푸는 사람입니다.
또한, 저는 노트 정리를 하면서 한쪽 면을 비워 뒀다가 해결점을 찾으며 그 말을 기록하고 나중에 참고로 삼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주님의 업적입니다, 지금도 기도와 묵상이 아니면 아무 데서도 주님의 지혜를 얻을 수 없고 태양 없는 어두운 밤이 됩니다.
수도 생활의 큰 은총은 하루에 몇 차례 기도하는 데 있습니다. 잘 정비된 내용이 사람들 안에 흘러 들어가고 마음속에 새겨질 때 알지 못하는 사이 주님의 힘과 생명이 영 안으로 들어가 자리 잡고 다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저는 제가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우연 같지만 우연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만나러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청하는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작동하는 것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신발 끈을 풀고 맬 수는 없어도 주님의 일을 주님 뜻에 따라가기는 합니다.
기도와 묵상 중에 주님의 진실하고 사랑 넘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듣고, 늘 깨어 있으며, 주님의 일을 보고 느끼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오실 분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요즘 아침저녁으로 주일에 이어 어제 월요일에 또 미사를 드리며 매일 신자들을 뵈오니 좋습니다. 몸은 힘들지만, 한쪽으로는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합니다. 사제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뇌면서 교회의 정신을 말로 풀어나가면서 그리스도와 그에 따른 교회의 행위를 재현할 때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 취지와 내용을 실제로 이루어 주신다는 성사라는 제도를 만들어 주신 것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 것인지 생각하게 해줍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복음에서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라고 자신의 신원을 밝히면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26-27절)
우리가 고해성사를 보려면 부끄럽고 귀찮고 심적으로 큰 부담을 가지게 되지만, 만일 고해성사라는 교회의 성사제도가 없다면, 죽을 때까지 우리가 지은 죄의 죄책감으로 발 뻗지 못한 채로 잘 것이고 양심의 가책이 우리를 때때로 괴롭혀 우리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할 것입니다. 죄로 피해를 입힌 상대에게 사과나 보상과 배상 없이 고해소에만 들어오는 모욕스런 성사생활은 문제겠지만, 정상적으로 살면서 고해성사를 보고 나면 실제로 우리가 해방된 듯한 날아갈 듯한 자유와 기쁨을 간직할 수 있게 해줍니다.
주님 복음 말씀에서 생명의 양식을 얻고, 그 생명의 양식을 실현하여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도록 하는 성체성사가 없다면, 우리는 참으로 힘겹게 모진 풍파 세상을 살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선물로 남겨주고 가셔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길을 걸을 때, 실제로 함께하시면서 위로와 힘을 주시고 마침내 이루어내도록 해주십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말씀과 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펼쳐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성령께 감사드리며 간절히 청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는 말은 사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참 의미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정말 적막한 광야에서 소리를 질러 본다고 한들 그 소리는 곧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는 그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그 겸손의 영성이 얼마나 대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역시도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와도 같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울리는 하나의 소리일 때, 그분은 그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한 올 한해 역시도 우리가 세례자 요한의 모습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 주님의 오시는 길을 열어가는 참된 사도로서의 모습을 살아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 20)
힌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참모습은
참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시금
성찰합니다.
신앙의
지침서는
매일매일의
양심성찰입니다.
양심성찰은
우리모두의
소명입니다.
참된 성찰이
우리를 키웁니다.
성찰을 통하여
주님을 뜨겁게
만납니다.
소유와 명예가
무너져 내린
곳에서
만나게되는
주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일방적인
교만과
고집이 아닌
소통과
어우러짐으로
이어집니다.
겸손한 성찰로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우리가 살아갈
존재의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성찰을
바탕으로 한
의지와 결심
각오와 다짐이
필요합니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뜨겁게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이제는 형식보다는
실제의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소중한 생명의
시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성찰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참사람의 길은
참된 성찰이며
참된 실천의
길입니다.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습니다.
성찰을 도와주시는
성령께서 새로운
변화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 변화의 날이
바로 소중한
오늘입니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모습에 감탄합니다. 거리가 깨끗하다는 것, 화장실도 너무 청결하다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쇼핑몰 같다고, 지하철도 너무 편안하다고, 음식도 맛있고 사람들의 인심도 너무 좋다는 식의 칭찬 일색입니다.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모습이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저는 건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부위가 생겨서 수술해야 했습니다. 수술 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건강했을 때 얼마나 감사했는가?’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건강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결핍을 체험해야 감사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결핍을 체험하기 전에 미리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조금 더 힘차게 그리고 현재의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그토록 이스라엘이 기다려왔던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어떻게 알았는가? 당신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가 바로 ‘나’ 맞소.”라고 말만 해도 사람들의 엄청난 섬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답변하지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이렇게 답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몫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였기에 예수님을 가장 잘 준비할 수 있었고, 교회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으며, 기쁘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힐 때 다른 쪽 행복의 문이 열린다. 하지만 닫힌 문만 오랫동안 바라보기 때문에 새로 열린 문은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헬렌켈러).
솔직함에 겸손의 덕까지 더한 세례자 요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이 등장으로 인해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바짝 긴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종래 예언자나 지도자들과는 다른 촌철살인의 설교와 함께, 구름 군중을 불러 모으며 유명세를 떨쳤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찬밥 신세인데, 다들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가고,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심기가 엄청 불편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두고 유다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 설왕설래도 많았을 것입니다.
“보아하니, 오시기로 된 메시아가 분명해!” “입고 다니는 옷을 봐. 초라하고 남루한 행색을 봐서 그럴 리가 없어.” “그런데 신선하고 거침없는 언변에, 강력한 카리스마에, 메시아가 맞을지 몰라.”
고민 끝에 그들은 사제들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 그의 정체를 파악하라는 미션을 줍니다. “당신은 누구요?” 질문에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세례자 요한은 길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딱 잘라 본론만 말하는데, 그야말로 솔직담백함의 극치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복음 1장 19절)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복음 1장 23절)
뿐만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솔직함에 겸손까지 더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복음 1장 26~27절)
구약시대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대 예언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정체,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하늘을 찌르는 인기 앞에 조금도 우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유효 기간이 언제까지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떠날 순간이 왔음을 인지하자, 단 한 순간도 지체 없이, 그 어떤 미련도 없이, 잘 마련된 무대를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넘겨드린 다음, 신속히 구세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뭐 그리 아쉬움이 많은지, 미적미적, “아직 떠날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어요. 좀 더 있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바람처럼, 구름처럼, 홀연히 떠나가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은 처음 가는 길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방향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자칫 길을 놓쳐서 다른 길로 갈지라도 내비게이션은 곧 새로운 방향을 알려줍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발달해서인지 더 빠른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합니다. 내비게이션은 인공위성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받아서 목적지를 향해서 갑니다. 202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나라를 향해서 길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식별’이라고 합니다. 먼저 우리의 올바른 식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교만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욕심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자신의 포도밭이 충분히 있으면서도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았습니다. 게으름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인색이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질투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하였습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하였습니다. 분노가 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서 공든 탑을 쉽게 무너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해에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영적인 장애물들을 피하면 좋겠습니다. 영적인 장애물을 피하는 것이 바로 ‘식별’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식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을 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 할 때는 식별을 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 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든 식별의 시간이 왔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넷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2023년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과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비록
그분은 아니지만
그분의 사람이기에
그분처럼 믿고
그분처럼 바라며
그분처럼 사랑하네
나 결코
그분일 수 없지만
그분의 사람이고자
그분처럼 믿고
그분처럼 바라며
그분처럼 사랑하네
순수하게 사는 한 해!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요한1,19) 사람들은 혹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궁금했다.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의 일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세례자 요한은 단호했다. ‘나는 나 보다 앞서신 분으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않다.‘
요한은 순수하고 거짓이 없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사람들은 남 앞에 인기가 상승하면 우쭐대고 교만하며 자신을 가짜로 포장한다. 이것도 자주하면 습관이고 버릇이 되어 자기를 남에게 속인다.
‘진짜요?’ 얼마나 거짓이 심각하면 그리 되 묻는가? 2023년은 가짜가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 순수한 액면만을 드러내며 내가 아닌 오실 분이 곧 오신다는 준비에 충실한 자 되길 다짐해 본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 겸손하게 자신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며 자신을 낮추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구세주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립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고 그 자리에 주님을 모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사라진 그 자리에 주님이 드러나시는 것이 바로 구원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서거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경우도 진정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현대신학에 있어서 최고의 신학자이시기도 하신 분이셨지만 당신의 건강이 악화되자 바로 사임하시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교황직을 넘겨주셨던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완전하신 주님을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완전하신 주님을 모시고 참된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정체를 확실히 밝히며 예수님을 따르라 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하였지요.
예수님께 대해 철저히 겸손한 자세를 보이신 요한에게 머리 숙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여자들이 낳은 자식중 요한보다 큰 인물 없다했죠.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표현에서 하늘 보물 같은 말씀이란 생각 듭니다.
태중에 계실 때부터 서로 알아보고 기뻐했다는 성경도 기가 막혔고요.
이처럼 사람들이 모두 하늘 뜻에 연루됐다고 믿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금년부터는 서로 겸손하고 칭찬하면서 하느님의 가족정신 함양합시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19-23)”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의 증언은 정말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인가?
중요하다면,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인가?
성령 강림 후에 행한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보면, 베드로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아도 그렇고, 사도들의 편지를 보아도 그렇고,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세례자 요한이나 그의 증언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 후에 신앙인이 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그러면 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생각을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복음서의 머리글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8).”
요한복음 3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5)”
우리는 예수님과 요한이 경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을 경쟁 관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누가 진짜 메시아인가?” 라고 다투었던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요한의 증언을 듣고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몇 명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요한 곁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의 증언을 흘려들었을까? 아니면 알아듣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사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사도들은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라고 말하고 싶었을 텐데, 복음서에 기록할 때에 요한 자신의 증언으로 바꿔서 기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엘리야, 그 예언자’는 모두 ‘메시아(구세주)’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 예언자’는 신명기 18장 15절에 언급되어 있는 예언자인데, 당시 사람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또 엘리야가 메시아로서 다시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서 40장 3절에서 인용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라는 말은 “회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라는 말은, 표현되어 있는 대로 ‘외치는 이’와 ‘소리’를 구분해서 해석할 수도 있고, ‘외치는 소리’ 라고 하나로 합해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외치는 이’와 ‘소리’를 구분한다면, ‘외치는 이’는 ‘주님’이고, ‘소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입니다. 요한이 자신을 ‘소리’ 라고 표현한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보다 낮은 자” 라고 스스로 낮춘 것으로 해석됩니다.
<‘말씀’은 ‘소리’보다 훨씬 더 격이 높습니다.>
‘외치는 이의 소리’를 그냥 ‘외치는 소리’로 생각한다면, 이 말은 ‘회개를 선포하는 예언자’로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됩니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4-27)”
여기서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당신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왜 메시아 행세를 하는 것이오?” 라는 뜻입니다.
요한의 답변은, “나는 메시아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대화를 사도들의 입장에서 다시 풀어 쓰면,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라고 생각해서 그를 따랐지만, 그는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의 일을 준비한 예언자였을 뿐이다.”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서 저자는 왜 이 대화를 복음서에 기록했는가?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을(예수님만) 바라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라는 말은, “내가 물로 주는 세례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세례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구원의 세례’입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라는 말은, “너희는 모르고 있지만, 그분은 이미 너희 가운데로 오셨다.” 라는 뜻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높으신(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징검다리로 사는 행복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면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설교했습니다(루카 3,3.8). 유다인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그에게 보내 그가 누구인지 알아봅니다. 누구냐는 그들의 질문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니다”(요한 1,19-22)라고 정직하게 증언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1,23)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1,27)라고 말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눈길을 돌리도록 이끌었습니다. 회개는 요한 자신이 아니라 구세주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오시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심부름꾼임을 분명히 인식하며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1,27),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라고 말합니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뚜렷한 자아정체성을 지니고, 자기 위치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철저히 살았습니다. 그에게 위협을 느낀 헤로데는 결국 그를 죽여버립니다.
요한은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하느님의 영에 따라 행한 영적인 사람”(성 바실리오, 성령론)이었고,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원하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음이 분명합니다.
숨돌릴 틈조차 없이 바삐 돌아가는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이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영적 치매'를 앓고 있는 듯합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나를 향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뭐라 답하시겠습니까? 실제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살아내지 못하면서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 학벌과 부, 외모, 과거의 경력과 업적을 늘어놓는다면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말로 장식하는 내가 아니라, '실제로 사는 만큼의 나'를 나라고 답할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늘 자신을 하느님 앞에 두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성숙은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나는 그분의 보잘것없는 종임을 인식하고 그런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처신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지닌 재능과 재물, 지식 등에 종속되거나 의존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아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일치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나 자신을 감출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께로 건너가도록 돕는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깨닫고 알아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하게 자신의 자리를 맹신하거나
다른 사람을 얕보고 무시하는 유혹에 흔들리게 되지요.
반대로 과한 겸손이 때로는 자신을 위축시키고
끊임없는 자책으로 자신을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자신의 부르심과 가야할 길을 잘 아는 지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현명함을 택하는 식견
조급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는
겸손한 마음과 침묵속의 기도안에 얻어질 수 있음을 바라봅니다.
좁디 좁은 마음과 여러 유혹들 앞에서
세례자 요한과 같은 겸손한 믿음을 청해 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The one, whose sandal strap I am not worthy to untie.
예수님은 발광체(發光體), 성인들은 반사체(反射體) -이단에 대한 답은 성인들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동방교회의 4대 교부는 성 아타나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오늘 축일은 지내는 성 대 바실리오와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두분은 절친이었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주교직까지 수행한 분들입니다. 330년 같은 해에 오늘날의 소아시아 터키 지역의 카파토키아에서 태어났으며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안 이단과 격렬히 싸우며 끝까지 정통 교리를 수호했던 분들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는 교회 역사상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중 하나였습니다. 할머니 마크리나, 부친 바실리우스, 모친 에멜리야, 큰 누이 마크리나, 두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세바스테의 베드로 모두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동방수도생활의 아버지라 할 정도로 수도생활에 대한 업적도 지대합니다. 성인의 회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이는 세바스테의 주교, 에우스타시아였으며 다음과 같이 바실리오는 회심 체험을 고백합니다.
“나는 어리석은 일들에 대해 시간을 많이 낭비했으며, 헛된 일에 나의 젊음을 거의 소진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어리석게 만든 지혜를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다. 그러다가 문득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복음서의 진리가 내포한 경이로운 빛을 목도했으며, 이 세계의 왕자들의 지혜는 공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대로 복음서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 회심 체험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인은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아리우스파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정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성인보다 10년 정도 오래 살았던 절친인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역시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데 큰 공적을 남겼으며 생애 후반은 수도원에 은거하여 저술활동과 수도생활에 전념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교회를 사랑했던 교회의 사람, 성령의 사람, 기도의 사람인 성인들은 이단에 대한 답임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전 읽은 천사적 박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했는지 ‘공부전에 바쳤던 기도문’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오, 형언할 수 없으신 창조주 그리스도님,
당신은 당신 지혜의 보고로부터 천사들의 세 품계를 가려, 저 높은 하늘 위에 배치하시고, 광대한 우주 질서를 참으로 아름답게 안배하셨나이다. 당신은 참빛과 참지혜의 원천이요, 최고 원리이시니, 제 아둔한 정신을 당신의 투명한 빛살로 환히 비추시어, 제 안에 타고난 뿌리깊은 두가지 어두움, 곧 죄악과 무지의 어두움을 말끔히 거두어 내소서.
당신은 어린아이의 혀를 달변으로 키워내는 분이시니, 날카로운 통찰력과, 오래오래 간직하는 기억력, 유순하게 배울 줄 아는 겸손과, 철저하게 파헤치는 해석력, 그리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슬기를 허락하소서.
진리탐구를 시작하는 저의 정신을 밝게 비추어 주시고, 힘차게 정진할 수 있도록 손잡아 이끌어 주시며, 모자람없이 완성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허락하소서. 당신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얼마나 깊고 아름답고 겸손한 기도문인지요! 말그대로 모든 이단에 대한 답이 들어있는 기도문이요,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던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 교회의 사람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지난 12.31일 선종하신 베네딕도 16세 교황 역시 여기에 그대로 해당되는 성인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말씀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요한1서는 당시 요한계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치열한 이단들, ‘그리스도의 적’과 대결중인지 알게 됩니다. 요한 사도 역시 다음의 간곡한 말씀을 통해 정통 교리의 수호자임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분께서는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음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분안에 머물게 됩니다. 참으로 그분 안에 머무를 때 무지에서 벗어나 자신을 알고 주님이신 그분을 앎으로 저절로 겸손과 지혜의 사람이, 교회의 사람, 성령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니 결코 이단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알면 알수록 참 자기를 아는 겸손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적그리스도의 이단자들은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교만에 눈먼 자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고백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다. 다만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정말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그분 안에 머무르는 참빛이신 주님의 증언자, 참으로 겸손한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인 세례자 요한의 고백입니다. 참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발광체發光體라면 겸손한 성인들은 예외없이 시종여일, 일편단심 주님만을 사랑하며 모두가 참빛인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이자 증언자로 살았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안에 머물러 발광체이신 참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로, 겸손한 진리의 증언자, 협력자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나는 누구인가?
이재욱 요한 신부님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은 사회적 요구에 따라 형성되는 인격을 뜻하는데, 원래 가면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광대들이 왕의 역할을 할 때는 왕의 가면을 쓰고, 병사의 역할을 할 때는 병사의 가면을 씁니다. 그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페르소나들을 갖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제인 저도 신자들을 만나고 성무를 집전할 때는 사제로서 역할에 충실합니다만, 만나는 사람들과의 다양한 관계에 따라 그 역할과 위치가 달라집니다. 예컨대 어머니를 만날 때는 아들로서, 친구들을 만날 때는 인간적인 친구로서, 강의를 할 때는 강사의 위치에 서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관한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가, 엘리야인가, 예언자인가 등등의 물음에 세례자 요한은 오직 주님과의 진실된 관계만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이며 어떠한 사명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의 결정적인 신원은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흐르지 않고
고여있으면
수도 생활도
썩어 갑니다.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신앙의
여정입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마음의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자존심과 고집
허세와 부정직의
그림자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것은
삶의 새로운 행복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기반은
믿음의 본질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있는 그대로를
보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위기와
혼란 속에서도
이겨내고
뛰어넘는
겸손입니다.
모든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감사와 은총이
될 것입니다.
현실에 충실한
삶이 바로
행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이란
우리자신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참된 자유를
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우리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자기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고 가벼워지는
자유를 따릅니다.
우리의 삶을
깨우시는 분,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 하나씩
한 걸음 한 걸음씩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실천하는 우리의
행복입니다.
고여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행복입니다.
어느 신혼부부가 부부싸움을 엄청나게 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의 원인은 아침밥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자취를 하며 살아왔던 남편은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해 주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출근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니까 아침은 알아서 해결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 가사만 담당하는 아내가 당연히 아침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어떻게 당연한 것이 있냐면서 그 무엇도 강요하면 수평적인 부부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아침밥 문제가 결국 이혼 이야기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아침밥’만의 문제일까요?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식의 당위적 요구와 기대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침밥을 아내가 해줘야 한다는 당위적 기대를, 아내는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 수평적 부부관계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서로 다른 기대가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도 또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당연히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안 좋은 결말을 가져올 뿐입니다.
주님과 나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당위적 요구와 기대를 없애야지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 겸손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는 대사제의 아들로 좋은 가문 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물음에 ‘그리스도’라고 대답했다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후에 비참하면서도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자기만을 드러내다 보면 하느님을 보려는 마음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했기에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끝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겸손을 우리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1요한 2,27 참조).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이기주).
아무리 뻔한 것도 내세우는 용기와 자신감
오사카에 가면 광고문구 하나로 매출을 7.5배 더 올린 자전거 가게가 있습니다. 광고문구는 이렇다고 합니다.
“펑크 수리 5분 이내에 가능합니다.”
5분 이내에 펑크 수리를 할 수 있는 특별한 자전거 가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수리점을 하시는 분은 이 문구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펑크 수리는 5분 이내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저도 5분이면 충분합니다).
아무리 뻔한 것이라도 내세울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용기와 자신감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용기와 자신감을 내세우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요?
우리는 길이 아니라 이정표,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주인·왕이 아니라 종,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시건방지기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수탉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다른 수탉들과는 달리 유난히 크고 붉은 닭벼슬과 화려한 색상의 털은 지니고 있었기에 건방을 떨었나 봅니다. 다른 수탉들은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스스로를 닭 세계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탉은 더 큰 착각을 한 가지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동틀 무렵에‘꼬끼오!’하고 외쳐야 태양이 뜨고 새벽이 온다고 여겼습니다. 수탉 자신으로 인해 이 세상이 시작되고,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역시 그런 수탉의 착각에 빠질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내가 없으면 이 공동체가 절대 돌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모두 들러리로 여깁니다. 나로 인해서 이 공동체가 평화롭고, 나로 인해 이 공동체가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외칩니다. “나야 나! 나 말고 누가 있어?”
그러나 실상은 어떠합니까?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입니까?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떻게 눈을 뜹니까? 창조주 하느님의 오묘하고 신비스런 섭리와 질서의 손길에 의해 이 세상은 시작됩니다.
태양은 새벽녘에 아주 미세한 여명을 보내시어 깊이 잠들어있는 수탉을 흔들어 깨우십니다. 옅은 빛으로 인해 닭장 안에 잔뜩 깃들이고 있던 짙은 어둠이 조금씩 어두움이 가시는 것을 감지한 수탉은 달라진 분위기에 기지개를 펴며 ‘꼬끼오!’하고 외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나로 인해 공동체가 돌아가고, 나로 인해 공동체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착각 중에서도 너무나 큰 착각입니다. 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 인간 개개인 각자는 얼마나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 누구든 이 세상에 홀로 설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공동체란 이름 아래 엮어주셨습니다. 각기 한없이 부족하고 보잘 것 없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면서 살아가라고 한 울타리 안에 엮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명확한 신원의식, 자아정체성은 얼마나 큰 교훈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그가 탁월하고 강력한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등장하자 사람들은 큰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이 사람이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가 아닐까?’
이런 이유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몇몇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복음 1장 19절)
그러자 요한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은 탁월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때, 그야말로 잘 나가던 때, 그를 바라보던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대단했습니다.
촌철살인 같은 메시지, 극도로 청빈했던 삶, 강직한 인품, 쌍날칼보다 날카롭던 그의 설교...그의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던지 그를 따르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한때 ‘세례자 요한 당(黨)’까지 형성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명료한 신원의식과 명확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저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진 자, 자신은 길이 아니라 이정표,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주인·왕이 아니라 종,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때가 이르자, 즉 구세사의 주인공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자 스스로를 소멸시켜나가기 시작합니다.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낮추며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오랜 세월 공들여 양성시켰던 제자들도 미련 없이 예수님께로 떠나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완벽히 소멸되기 위해 헤로데 왕가의 타락을 공개적으로 거듭 질타합니다. 그 결과 순교라는 완벽한 소멸을 맞이합니다.
자녀임을 포기할 때 얻을 수 있는 참 자녀의 자격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은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며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밝힙니다. 몇몇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명확히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대답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 누구나 “너는 누구냐?”란 질문을 받을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하늘나라 상속권을 받으려 할 때 야곱에게 이사악이 누구냐고 물어본 것과 같습니다. 그때 하느님과 관련된 정체성이 나와야지 이 세상 부모와 관련된 대답이 나오면,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어떤 도움도 받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나와 사귀는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받으면 그의 정체성에 내가 조금 개입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결혼해서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라고 대답하는 것은 이미 둘이 한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혹은 ‘누구의 자녀’, ‘누구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그것과 섞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정체성이 바뀐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나 엘리사벳이 있었다면 마음이 어땠을까요?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자신들의 이름이 조금이라도 거명되었으면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부모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면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과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끌어주신 분, 그래서 너무 작아져 자녀에게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 분들이 바로 요한의 부모들입니다. 그들은 요한을 하느님 것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위대한 부모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서 자신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위대한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러기 위해 더 큰 부모가 주는 정체성으로 자녀를 인도해야 합니다. 내가 준 정체성 안에 자녀를 가두려 하면 자녀도 죽고 자신도 죽습니다.
전설적인 흥행을 기록했고 성탄절이면 여지없이 TV에 방영되었던 ‘맥컬리 컬킨’의 영화는 무엇일까요? 누구나 다 ‘나 홀로 집에’임을 알 것입니다. 성탄절마다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의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모였습니다. 특별히 아버지였습니다.
맥컬린 컬킨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과 7남매가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교회를 관리했고 어머니는 전화 교환원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 돈으로 7남매를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여운 외모의 맥컬리 컬킨을 아역배우로 쓰기로 합니다. 아버지도 예전에 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었고 그쪽에 인맥이 있었기에 기회만 되면 아들을 무작정 출연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전국적으로 흥행한 ‘아저씨는 못 말려’라는 영화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나 홀로 집에’가 제작됩니다. 예상외로 엄청난 흥행을 하고 ‘나 홀로 집에 2’는 그것보다 40배 이상의 출연료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는 교회 관리인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아들의 매니저가 됩니다. 아버지는 이제 할리우드에서 흥행 보증수표인 아들 덕분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인에 들어갑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아버지의 욕심은 날로 커져만 갑니다. 다른 자녀들을 맥컬리와 함께 써달라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고, 맘에 안 드는 대사는 고치지 않으면 아들을 출연시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망치기만 해봐. 맞을 줄 알아!”라고 협박을 하곤 했습니다. 맥컬리는 아버지와 함께 단둘이 호텔 방에 묵는 것이 감옥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혹사합니다. 7년 동안 무려 17편에 달하는 엄청난 영화를 찍습니다. 정신이상자 연기, 욕설이나 담배를 피우는 연기 등 닥치는 대로 시킵니다. 이렇게 되자 맥컬리의 연기 의욕은 빠르게 저하되었고, 대부분이 흥행에 참패하게 됩니다. 그러자 더는 맥컬리를 찾는 감독이 없어졌습니다. 아버지에게 맥컬리는 더는 유용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부모는 이혼소송에 따른 양육권 분쟁을 하는데, 맥컬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해서 양육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내가 벌어들일 돈을 생각해서 싸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애 가장 좋았던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나서야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아들을 공식적으로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하는 학교생활, 대인관계는 쉽지 않았습니다. 17살에 결혼하고 거의 바로 이혼하고, 방황하고, 술과 마약 등에 찌들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큰 흥행은 못 하지만 조금씩 부모의 압박에서가 아닌 자유의지로 연기를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출처: ‘크리스마스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맥컬리 컬킨의 인생’, 달빛 부부의 영화와 미드, 유튜브]
물론 좀 심한 부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조금은 자녀들이 나의 테두리에 있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면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명확히 대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부모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 아무리 커도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 어디까지 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부모를 위해서라도 부모가 준 정체성을 넘어서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자주 되뇌고 다닙니다. 저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저의 머리로 사시기 때문에 저는 그분의 몸만 되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제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부모님도 저의 이 정체성 안에서 보게 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 때문에 변화된 정체성은 지상의 부모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만듭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하고 자신 또한 자녀를 통해 영광을 받고 싶다면 자녀에게 인간으로서 주는 정체성이 아닌 하느님을 부모로 둔 정체성을 가지도록 이끌 필요가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곳 미국에서 저를 나타내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 보장 번호(社會保障番號, Social Security number)입니다. 저는 이를 근거로 세금을 납부하였고, 작년에 재난지원금으로 1,200불을 받았습니다. 이 번호는 한국의 주민 등록증과 같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장기 체류하거나, 취업을 하는 사람은 사회 보장 번호를 받아야 합니다. 미국 생활에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번호입니다. 두 번째는 운전 면허증입니다. 운전 면허증은 신분증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도 운전 면허증이 있으면 됩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서는 한국의 면허증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운전을 하려는 사람은 필기와 실기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성사 허가증(The Faculties of the Diocese of Brooklyn)입니다. 한국에서는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전국 공용으로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받지만 외국에서는 지역 교구장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에서 교구장님이 공문을 보냈고, 부르클린 교구장님이 제게 5년 동안 성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작년에 나타난 코로나19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코로나19는 무엇이기에 세계의 경제를 멈추게 하였고, 미사를 중단하게 하였고, 우리에게서 일상의 소중함을 빼앗았을까요? 답답한 마스크를 써야 했고, 이웃과도 거리두기를 하게 했습니다. 확진된 많은 사람이 병원엘 가야했고,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코로나19는 도대체 무엇이고, 왜 우리에게 나타났을까요? 코로나19는 사스, 메르스, 신종플루와 같은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폐에까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합니다. 전염력이 높으면 사망률이 적은데 코로나19는 전염력도 높고 사망률도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다른 바이러스는 증상이 나타나면 비로소 바이러스가 전파되는데 코로나19는 무증상인 상태에서도 높은 감염력을 보인다고 합니다. 기존의 바이러스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기에 방역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바이러스를 우습게보고 초기 대응을 소홀히 한 면도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시기에 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왔지만 초기에 대응을 소홀히 하였기에 바이러스가 광범위하게 퍼졌고, 희생자도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코로나19처럼 새로운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새로운 질서를 이야기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권력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에게 혁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질서를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보았습니다. 신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가야할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식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 할 때는 식별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 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없는 활동은 공허하고, 활동 없는 기도는 관념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2021년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어디에서 와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물어야 하는 물음
나는 누구인가
지금여기에
내가 있어야 하는 까닭을
깨닫기 위해서
물어야 하는 물음
나는 누구인가
나를 노리는
나 아닌 것에서 해방되어
진정 내가 되기 위하여
물어야 하는 물음
나는 누구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되는 물음
참으로 물음이 답이 되는 물음
물음을 던지는 이가
참나가 되게 하는 물음
물음을 던지는 이가
소명을 깨닫게 하는 물음
물음을 던지는 이가
삶의 길을 알게 하는 물음
그러니 다만
쉼 없이 묻고 물어야 하는
단 하나의 물음
나는 누구인가
요한을 더 합당한 인물로 여기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유대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일종의 인간적 호감을느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보여 준 많은 위대한 점 때문에 그를 그리스도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엇보다 그는 좋은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대사제의 아들이었으니까요(루카 1,5.13 참조). 그는 혹독한 수련을 거쳤고 세상을 경멸했습니다(루카 1,80 참조) .... 하지만 그리스도의 경우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분은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무시하며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하고 물었습니다. 그라고 나타나엘이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하고 말했듯이, 그분의 고향은 나쁜 평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평범한 생활을 했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 요한이 계속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보내고 있을 때 … 그들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며 치렛말로 그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도록 유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그에게 보내지 않았습니다. … 그들이 그리스도께는 종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보냈지만 요한에게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레위인들], 곧 지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들을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게 하였습니다 ... 그들이 이들을 보낸 이유는 요한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 하여금 내가 앞에서 말한 바를 고백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들의 의도에 답하였습니다 ...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여기서 복음사가의 지혜에 주목하십시오. 그는 세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요한의 덕과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사악함과 어리석음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음은 물론 많은 사람이 영광을 바치고자 할 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정직한 종의 특성인 것입니다. 사실 많은 이가 무지 때문에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악의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으로 요한에게 질문을 던져 치렛말로 그를 자기네 의도에 끌어들이려 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질문과 무관한 답을 하는 데 대해서 요한에게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의도가 들통 나자 그들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는 당시 사람들에게 위대한 예언자로서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혹시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언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겸손했고, 진정 메시아가 누구이신지를 예언자의 권위로서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늘상 자신의 권위만을 추구하면서 다른 이의 권위를 존중할 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곧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서 참된 권위에 순종할 줄 모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결국 자신이 소유한 권위마저도 사라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우화에서 나오듯이 위대한 인물이 나귀를 타고 가는 데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절을 하자 우매한 나귀가 느끼기에 사람들이 자기한테 절을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나귀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사도직을 수행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이시지 결코 자기 자신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참된 겸손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세상에 주님을 증언하는 참된 예언자 직무를 수행해 나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당신은 누구요?”(요한1,19)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나, 참나무요, 나, 소나무요, 나, 아카시아 나무요, 각기 다른 다양한 나무들이 자기 몫을 다하며 산에서 서로를 지지하며 살아가지요. 산이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나, 이런 사람이요, 나, 이런 일 하는 사람이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자기 몫을 다하며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서로 내로라 뽑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기 몫에 충실하며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살아갑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이런 세상이고 싶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요? 엘리야요? 예언자요? 당신이 누구신지 알아야 하오’ 세례자 요한은 ‘나는 당신이 말했던 그 누구도 아니요. 나는 있을 자리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며,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일 뿐이요. 그분께서 오시면 그 자리는 그분께 내 드리고 퇴장해야 하오.’
산이 아름다운 것은 교목과 관목이고 드러내지 않고 서로 기대고 어우러져 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사는 세상도 아름다울 수 있는데 저기를 뽑내며 교만을 살고 사람을 획일화시켜 교만한 사람이 독보적인 존재가 되려 하지요. 코로나가 힘든 것은 제멋대로 자기를 드러내며 살려는 교만한 사람들 때문이지요.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6-27).
새례자 요한처럼 겸손의 사람들이 모여 자기 몫을 충실히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 아침 산책길에서 평화로이 아침식사 중인 비둘기를 보며 생각했다. 아름답다. 우리도 아름다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한 해가 되길 기도해 본다.
테스 형에게 물어 봐
철학은 종합이다. 살다보면 알게 된다.
인생이 무엇인지? 유소년 시절은 부분이라 모른다. 불혹, 이순의 나이를 살면 의문이 생겨난다. 뭐지? 뭐지? 자꾸 물음표가 붙는다. 나이들면 알게되, 종합이 생겨나니까. 인생철학한다고 말하는거야.
나훈아의 테스형한테 물어 봐,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소크라테스의 명언이다. 살면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놓쳤다. 나훈아의 ‘공’이란 노래를 들으면 철학이 담겨있다. 풍운아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하여 노래에 담아 읊는다. 동료와 TV프로를 보다 대형가수 누구의 광고물을 보았다. 좀 듣기가 불편한 부위의 병을 치료하는 약 선전이다. 이를 보다가 식상했다. 많이 비교가 된다.
당신은 누구요? 그 질문에 나는 누구인가? 껍데기 ‘나’ 말고 본질적인 ‘나’는 누구인가? 남이 잘 보여 남 이야기만 하다가 나이들며 껍데기가 자기인줄 알았다는 무지에서 출발해 고민한 ‘테스형’을 작사, 작곡, 슬픔을 속에 품고 기쁨을 노래하는 나훈아 가수가 돋보인다. 그의 노래는 철학이 담겨 있다.
새해엔 나에게 물어보라, 현실태가 쭉정이면 어떠냐? 무지에서 출발해 앎으로 진지할 때, “당신은 누구요” “나는 누구인가?” 답을 찾을 수 있다. 트롯은 인생을 담았다. 살게되면 알게 돼, 많이 늦었다. 똑똑한 척 나서지만 겉 똑똑이가 된 것을 알 때 너무 늦었다. 철학을 하게 되면 신학을 만난다. 상식, 과학, 철학, 신학
무지함을 자각할 때 앎이 시작되는데, 상식선도 안 되는데 신학이 되겠는가? 교만은 상식에서 드러낸 만행이다. ‘예수 형’ 한테 물어 보기 시작할 때, 하느님께서 보인다. “당신은 누구요?”, 이는 “나는 누구인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례자 요한이 된다’(요한1,19-28참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요.’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유다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묻습니다. 아버지 즈카르야가 사제였고 어머니 엘리사벳도 아론의 후손인 까닭에 세례자 요한은 계보적으로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기는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요한이 서슴지 않고 고백합니다. 그는 찰나의 순간이라도 타인의 정체성으로 자신을 치장할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그의 소명이니까요.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요한은 백성을 준비시키려고 자기가 베푸는 물의 세례와, 주님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요한 1,33 참조)를 구분합니다. 백성 가운데로 오셨으나 아직은 백성이 알아보지 못한 분, 그분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임을 알려 줍니다.
"모르는 분"
예수님은 백성의 눈에 아직 베일에 싸여 계십니다. 그분이 나타나셔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 해도,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풍요를 구원이라 여기고 기대하는 이들 눈에는 영영 감춰져 계실 것입니다. 슬프게도 인류에게 예수님은 여전히 "모르는 분"으로 남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신도들이 늘어가면서 그들이 어떻게 그분과의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지 조언합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1요한 2,24)
요한 서간은 예수님과의 실제적 접촉이 매우 짧거나 거의 없었던 이들이 신도가 되어 세대를 거듭하는 시기(기원후 80-90년경)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지요. 아마도 예수님과의 직접적 추억보다, 사도나 그들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에 의지해 그리스도를 믿기로 전향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기존 유다교의 반박과 이단의 교설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각자가 기억하는 부르심의 순간과 방식은 다 다르니, 박해 시대의 풍랑 속에서 때때로 불확실과 의심의 순간도 맞닥뜨렸을 테구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누군가를 믿고 사랑하는 일은 현상적 영역 밖의 일이라 그렇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사랑에 빠진 첫 순간을 기억하고, 그 뜨거웠던 첫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7)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의 물로 정화되고, 성령의 도유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불은,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꺼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곤곤하고 버거운 세상살이 파도 안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입니다.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에 머무르고, 자비 가득한 그분 마음에 머무르며, 우리를 부르신 그분 뜻에 머무르고, 우리와 일치하고 싶어하시는 그분 사랑에 머무르는 것이지요. 이 머무름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나날이 더욱 친밀하고 두텁게 만들어 줍니다.
기름부음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께서 성부 하느님을 부르시고, 성자 예수님을 끌어당기십니다. 성삼위 하느님의 속성이 일치이기 때문이지요. 성령께 마음을 열고 말씀에 머물러 아버지의 심장 안에 자신을 감추는 이는 성삼위 하느님의 일치적 사랑에 함께하게 됩니다. 머무름이 죄스럽고 부족한 우리에게 일으키는 기적입니다.
이 머무름을 통해 주님은 "모르는 분"에서 차츰 "아는 분"이 되어가실 겁니다. 새해에는 주님께 머무르고 말씀에 머물러 그분과 더 깊이 사랑을 나누는 여정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좀 더 고결하고 선량한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갖추어 갈수록 세상도 좀 더 나아지고 밝아질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체사레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 영광스러운 가문의 출신입니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셨습니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습니다. 379년 무렵 선종하셨습니다.
그레고리오 성인 또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셨습니다. 그레고리오 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이 뛰어나셨으며,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390년 무렵 선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신원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우리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늘 역사의 조연입니다. 그런데 가끔 주연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주 하느님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주연으로 선택되고 십자가를 지고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저절로 주연이 됩니다. 그런데 스스로 주연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조연들에게 부담을 주고, 주연이 될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우를 범하여 인류의 역사를 뒤로 돌아가게 합니다.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한 자신의 희생을 통해 영광스러이 주연이 되신 주님을 기억하여,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겸손하게 다 하며, 주님께서 이끄시고 채워주시기를 간구하며 주님의 은총을 구합시다.
말씀과 소리
김효준 레오 신부님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했고,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요한에게 그것을 묻습니다. 당신은 메시아요? 아니면 당신은 엘리야요?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예언자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그들은 진심으로 요한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했지만 안타깝게도 잘못된 질문만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누구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했습니다. 요한이 누구인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하는 일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광야에 울려 퍼진 소리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말씀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소리는 이내 광야의 침묵 속으로 사라집니다. 소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찰나적입니다. 하지만 소리는 거기에 만족합니다. 소리는 소멸하지만 말씀은 영원합니다.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품고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함승수 신부님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보면, 비리를 저지른 공무원 최익현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도중 담당형사가 자신이 범죄자라고 무시하며 때리자 이에 격분하여 이렇게 고함을 칩니다.
“니.. 내 누군지 아나? 으이?! 내가 인마 느그 서장이랑 인마! 어저께도! 같이 밥 묵고 으이! 싸우나도 같이 가고 으이! 마 다했어!”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며 당당한 태도를 보이자 형사들은 그가 대단한 사람인 줄로 착각하여 더 이상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쩔쩔 매는 모습을 보이지요. 이와 비슷한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갑질과 막말을 일삼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너 내가 누군지 알아?”입니다. 자신이 높은 지위에 있는 누구, 큰 권력을 가진 어떤 사람과 아주 친밀한 관계임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와의 얄팍한 친분관계가 자신에게도 동등한 지위와 권한을 부여한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한은 그와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그리스도’, ‘엘리야’, 모세가 예고한 ‘대 예언자’를 거론하며 ‘당신이 그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드높이고 싶은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명예욕’인데, 그래서 유명한 사람들과 억지로라도 연관성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오히려 그 반대의 행보를 보이니 묻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법도 합니다. 게다가 자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알쏭달쏭한 말을 하니 더 답답했겠지요.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어디서 찾아야할지,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그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기 전에 사람들에게 그분의 오심을 미리 알리고 준비시키는 그분의 ‘목소리’와 같은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 존재의 본질은 자신을 드러내어 부각시키지 않고 최대한 겸손하게 낮춤으로써 사람들이 해를 가리키는 자기 손가락을 보지 않고 해 자체를 보게 만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은 그저 ‘목소리’일 뿐이라고, 자기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을 정도로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일 뿐이라고 자신을 낮춘 것이지요.
“내가 누군지 알아”라며 하느님보다 자신을 먼저 내세우는 교만은 나라는 존재의 근원과 본질을 찾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뒤’에 서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내 머리가 땅바닥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신 주님의 모습이, 그분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또한 내가 누리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리스도와의 우정, 너와 나의 우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건강하게 나이 든다는 것’ 책 소개에 나오는 내용 일부입니다. 꼭 경청해야할 내용입니다.
“운동 역시 20-30%까지 사망률을 낮출수 있다. 그런데 가족 및 친구와 튼튼한 지원망을 형성하면 사망위험도가 45%까지 낮아진다고 한다. 혼자서 샐러드를 먹고 이어폰을 꽂은 채 러닝머신을 한시간씩 뛰는 것보다 친구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면서 적당히 기름진 한끼를 먹는 게 장수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무슨 일인가를 더하기보다 덜해야 한다는 뜻이다. 운동기구, 유기농 음식을 줄이고 물건을 덜 사고, 걱정을 줄이는 것 말이다. 이러한 것들을 덜어낸 공간에는 가족이나 친구들, 웃음과 여유를 채워 넣어라.”
답은 그리스도와의 우정 그리고 너와 나의 우정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부러울 것, 걱정할 것, 불안할 것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우정과 함께 가는 너와 나의 우정입니다. 바로 이 우정의 지원망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또 조화와 균형의 건강한 영육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무병無病하다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균형과 조화중에 잘 관리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오늘은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두분 다 4세기 오늘날의 터키 중부 카파도키아 출신으로 같은 해 전자는 49세, 후자는 60세 선종하셨습니다. 두분 다 성 아타나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더불어 동방의 4대 교부에 속하며 우정이 아주 돈독하였다는 것과 수도생활에 남다른 애정을 지녔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주교직에 있으면서도 늘 수도승답게 사신 분들입니다.
새삼 확인되는 바 이 두 성인들 우정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두분간 우정의 기초가 됨을 봅니다. 바로 너와 나의 우정의 참된 원리를 보여줍니다. 수도자든 부부간이든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우정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우선순위가 공동체의 중심이자 우리 삶의 중심인 그리스도와 우정의 관계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두 수도승 주교를 비롯한 모든 성인들이며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그리스도 예수님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제로(0)일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만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 사도 바오로 모두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빼면 제로일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 경우 역시 예외 없이 제로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무관無關한 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무지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참 나의 실현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우정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인 모두의 운명이자 사랑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과 깊어가는 우정과 더불어 참 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은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지는 평생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누가 묻는 다면 과연 여러분은 무어라 대답하겠는지요. 세례자 요한을 통해 계시되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나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너희 가운데에는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바로 우리 삶의 중심에 영원히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섬기듯 형제들을 섬길 때 그리스도와 더불어 형제들과 깊어지는 우정입니다.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치 않다는 요한 세례자의 그리스도께 대한 겸양謙讓과 경애敬愛의 우정이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와의 깊은 우정이 이단에 빠지지 않는 결정적 비결입니다. 사도 요한은 제1독서에서 처음부터 들어온 진리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깊이 뿌리내릴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이래야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음은 물론 그리스도의 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적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며,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매일, 바로 오늘 주님 재림의 날처럼 ‘그분 안에 머무르면서’, 그분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들과의 우정을 깊이하면서 하루하루 깨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과는 물론 형제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나는 스스로 누구라 말할 수 있나?<요한1/19-28>1/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세례자 요한에게 “ 당신은 누구요? 당신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 ” 이 물음에 “ 내가 주는 세례는 물로만 주고 뒤에 오시는분은 성령으로 세를 주시는 분이라 하십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들리기에도 합당치 않다. 하시며 앞에 있으나 뒤에 오시는 분이 참 구세주이심을 알려주는 선구자 이라 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그저 수도자란 무엇하는 사람인지를 전하는 사람으로 수도원의 운영에 아무런 역할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오시는 사람들의 길잡이입니다. 이같이 일생을 주 그리스도의 소개소를 차리고 만나는 사람에게 주님은 누구시고 우리의 참 구원자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전해주는 선구자 하느님을 알려주고 하느님에게 인계하는 사람입니다.
사제가 그리스도가 되어 대접을 받으면 월권행위입니다. 저는 주님을 찬미 찬송하며 그 앞에 무릅을 끊고 감사와 찬미 들이는 사람뿐입니다.
이렇게 전하는 사람으로 밤낮 주님의 뜻을 해아리고 묵상하며 주님을 만나 대화하며 확신을 얻고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이끌기를 바라는 소와 같이 무가운 짐을 싫고 목적지 가지 가는 소입니다. 마침 금년은 소의 해입니다. 나는 농장의 소역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끌려 나오고 끌려가는 소 쟁기를 달아주면서 땅을 비옥하게 가꾸려고 갈고 뒤집고 평평하게 만드는 새날 새해가 되어 모두 평화를 누리도록 만든는 일꾼입니다.
사제의 은퇴 나이는 7ㅇ 인데 저는 그 나이부터 수도원 안팎에서 사람을 만나고 거칠어진 마음을 편하게 하고 고통을함께 하고 받아주고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어 주면서 보내는 시간 참으로 행복하고 보암을 느낍니다.
돈받고 하거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가 땅을 비옥하게 하듯이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주님이 오시는 길이 고속도로 모양 찾아오시고 찾아가는 길이 되기를 기도하며 길을 만드는 일꾼 일 다릅입니다.
요사이 지나간 축구 시합을 TV로 보는데 꼴 하나들어 가면 꼴 하나 들어보낸 선수가 십자가를 급히 넣으며 손까락을 하늘로 향하는 모습에서 내 덕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 하듯이 저는 상담후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성령의 밀인 것을 뜻하는 표시로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합니다. “이 사람위에 성령이 머무러 주소서 “아멘.” 합니다.
나는 주님의 오시는 길에 길잡이 이고 주님 대신의 입과 손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을 닯은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영광은 주님에게 평화는 저에게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모두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1,19)
이근상 시몬 신부님
요한에게 한 사람들의 질문이다. 요한은 이에 대해서 알듯 모를듯 대답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1,23)’라 정의한다. 오해하기 쉬운 것은 우리말 소리에는 의미가 담긴다. 이를테면 ‘너 그 소리 들었어?’라 말할 때, 우리는 ‘소리’가 어떤 의미가 담긴 말이란 뜻을 가진다. 그런데 복음에서 사용되는 ‘소리(포네)’란 말을 담는 도구다. 그러니까 어떤 소리에 말이 담겨야 의미가 생기는 것처럼. 이를테면 물건을 담는 상자와 같이.
요한은 자신을 그런 전달체로 정의했다. 소리가 의미를 가질 때는 오직 말씀이 깃들일 때 뿐이다. 그렇지 않은 소리는 그저 의미없는 아우성이나 번개와 같다. 요한은 소리라고 했다. 그리고 말씀이 깃들이기를 기다렸다.
주님을 전하는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우리 역시 그처럼 소리일 뿐, 말이 아니다. 말은 오직 한분 주님뿐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없는 소리는 소음이거나 거짓.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 일기장에
새 날을
기록했다.
다시 태어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부딪히고
맞닥뜨리며
깨닫게 되는
삶의
나날들이다.
그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진짜 우리들
소리이다.
어김없이
만나게되는
광야의
시간이다.
삶 속의
광야이다.
같은 것
하나 없는
힘겨운
우리들 광야의
삶이다.
광야에도
사람이 있다.
광야에도
사랑이 있다.
광야에도
햇살이 비친다.
광야는 늘
간절하다.
광야에서
삶의 목적지가
하느님이심을
깨닫게된다.
추운 광야가
우리를
성장시킨다.
괴로운 시간도
필요한 은총의
시간이 된다.
광야에서
우리를 살릴
유일한 말씀을
듣게된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광야도 길을
드러낸다.
이쪽 광야가
끝나면 저쪽
광야가 우리를
기다린다.
광야에서
하느님을
뜨겁게
만난다.
추운 광야에서
깨닫게되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은총으로
지나가는
순간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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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교구 역촌동 성당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pea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