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아기 때 즐겨 덮던 이불을 유치원 캠핑 갈 때도 가져가야 했다. 그 이불이 없으면 불안해했고 그 이불이 있으면 행복해했다. 자기 소유물에 대한 안정감 때문일까, 자기 만족감이 투영된 편안함이 관계형성이 되어서일까.
오래전 미니몰 라이프와 웰빙, 더 나아가 웰 다잉의 삶을 실천하려고 마음먹었다. 누구에게나 그 시작은 버리기에서 시작할 것이다. 버려야 할 것들을 찬찬히 바라보면 버리지 못하는 많은 이유를 댈 수 있다. 이 이유들이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할 거라는 기대와 동시에 족쇄임을 알면서도 정작 생활 속 실천은 매일 제자리였다. 나의 서재는 나의 존재이자 나의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어서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살자고 실천하려고 하면 추억이 묻어 있는 물건들이 마음을 약하게 하지만 생명도 태어나면 끝이 있고 물건도 마찬가지로 때가 되면 사라질 거라는 현실 앞에서 비우기 실천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버리기 가장 어려운 존재. 살아오다 보니 거실, 부엌, 아이들 방 모든 공간이 서재다. 보관중인 천 권이 넘는 책들을 도저히 보낼 수가 없었다. 며칠이면 정리할 수 있는 일을 몇 달은 그냥 흘려보냈다.
시집간 딸아이에게는 세계사 전집을 보내고 작은 딸에게는 백과사전 전집을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책을 주면 잘 읽겠다는 친지한테는 직접 와서 골라가라고도 했다. 후배에게 연락하여 마음에 드는 책을 가져가라고 하고 가까운 동사무소, 복지단체담당 수녀님에게 전화해서 필요한 책을 기부하겠다고 전했다. 이렇게 떠나보낸 책이 오백 권정도. 보내고 나니 오래된 연인과 이별을 한 것 같아서 한동안 텅 빈 마음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책마다 작가의 인생이 담겨있음을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책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자라온 세대는 책에 대한 미련이 많다. 요즘 세대는 노트북에 아이패드로 무장해 공부한다지만 우리는 아낀 돈으로 소설을 사고, 시집을 사고, 그 책들을 읽고 써가며 공부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지금의 나를 만든 책에 대한 사랑, 아니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10여 년 전 선종하신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선생님의 집에는 문학책이 얼마나 많았을까. 선생님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 가운데서 시집만 남겨두고 자신의 주 분야인 소설책은 물론 에세이, 기타 문학서적 등을 기증했다고 한다. 시집은 왜 안 버리셨냐고 물으니, 시는 문학의 정수라서 안 버렸다고 답하셨다. 소설을 쓰셨는데도 당신은 시를 그리도 사랑하여 머리맡에 늘 시집을 두시고 읽으셨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영혼의 정수를 채워갈 책은 버리지 못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책 안에 자기 인생이 오롯이 담겨 있기에 버리지 못하는 것임을. 그리하여 내 서재의 일부를 버리는 세월이 십년은 걸린 것 같다.
요즘 대학교수들도 정년 즈음이면 상당수의 책을 일부러 정리하곤 한다는 말을 들었다. 대학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한다는데 요즘은 웬만한 희귀본이 아니면 대학에도 기증을 안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버리거나 고물상에 책을 팔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도 아닌 세상이 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독서광이셨다. 다락에는 책들로 가득 차고 아버지의 머리맡에는 늘 책이 놓여 있으셨고 강의 하시는 시간외에는 식사 중에도 책 읽는 즐거움으로 인생을 사신 분이셨다. 돌아가시고 소지품과 함께 책을 태우면서 높이 올라가던 연기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나 역시도 죽기 전 애착의 물건들과 이별할 것이다. 또한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인연, 관계와도 이별이 필요하다. 진실한 관계는 온전히 남기고 가벼운 관계는 자유롭게 흘려보내고 싶다. 혼자 세상에 나왔고 혼자 살아왔고 혼자서 세상을 떠나야 하지 않는가? 외로워서 사람이라는 순리를 받아들인다. 남은 생은 나의 온전한 삶으로 멋지게 그저 나로서 살아가고 싶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언제든지 가고 싶은 여행을 수시로 떠날 것이다. 그저 순수하게 하고 싶었던 것들을 누려 볼 것이다. 이제 인생 후반기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소중한지 깨닫는데 매진 할 것이고 실천하려 한다. 비로소 실천하게 된 나의 미니몰라이프로 나의 서재도,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길, 비운 자리에는 더 단단한 자유인의 삶이 이어지길. 그리하여 이 여정을 떠날 때 후회 없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나도 나의 삶이 소풍이었다고 미소 지으면서 웰 다잉이 되길 소망해 본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삶이 소풍이었다고 그 소풍이 아름다웠더라고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