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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42,1-7>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5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2,1-11>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배타니아의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은 메시아의 도유나 집주인의 환대를 나타내지만, 발에 기름을 붓는 것은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행위를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향유를 발라 드린 것은 그의 헌신적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침내 온 집안에는 그 향기가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이스카리옷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
(요한 12,5)
그 향유의 금액을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다고 하니, 이는 일 년 치 임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작은 돈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7)
유다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여겼지만,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곧 떠나시게 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그보다 더 비싼 향유가 있었더라도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랑은 본래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경제적 효율성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며, 죽기까지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사랑의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가 으뜸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물질적 가치가 사랑과 생명의 가치를 넘어서 버린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와 재물이 일종의 신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인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는 듯합니다.
참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삶의 잣대는 무엇인가?
사부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앞세우지 말라!”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앞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기에,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생각을 품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행동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처신을 할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얻고 물질을 버리는 마리아로 살 것인지, 아니면 물질을 얻고 예수님을 버리는 이스가리옷 유다로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결코 하느님과 물질을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요한 12,3)
주님!
옥함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내내토록 취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온통 배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집안에 가득 퍼진 그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마음>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두를 줄 수 없다면 아직 사랑이 무르익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어찌 되었든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공식적인 지도자임을 상징하고 일반적으로는 머리에 받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머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발에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통치가 아래에서 위로 향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리누르는 권력을 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김으로써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지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 12,5). 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더욱이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는 행동은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유다의 눈에는 돈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하면서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능력, 재물, 공간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2,11).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생색내기는 정치꾼들이 합니다.
요즘 보세요, 정치꾼들을!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양 기뻐해서야 되겠습니까?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나야 하는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적개심, 두려움, 기득권을 누리려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나보다는 너를 위한 배려를 통해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한 주간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금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때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표현되어야겠습니다>
혹시 첫사랑 때의 기억이 떠오르십니까?
그를 만나러 가기 전에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그야말로 난리났을 것입니다.
옷장을 다 뒤져 이 옷도 입어보고 저 옷도 입어보고, 도무지 방법이 없자, 언니 옷도 몰래 허락도 없이 빌려 입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가 우리 집을 찾아온다면 어떠했을까요?
먼저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겠지요.
평소 잘하지 않던 행동도 할 것입니다.
화사한 꽃을 한 다발 화병에 꽂고 식탁을 장식하겠지요.
뿐만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18번 요리를 지극 정성으로 준비할 것입니다.
이윽고 그분이 오실 시간이 되면 제일 품위 있거나 예쁜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지요.
그리고 지을 수 있는 제일 예쁜 미소를 지으며 그분을 맞이할 것입니다.
너무 아까워 진열장에 넣어두고 구경만 해온 최고급 양주나 포도주도 한 병 딸 것입니다.
오늘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는 ‘절친’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셨는데, 그 집에는 예수님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음속 깊이 흠모하고 있던 라자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수난 시기로 들어가기 전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던 가족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끔찍히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리아였기에 그녀는 이번 예수님의 방문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을 것입니다.
때로 여성들 직감이나 눈치가 남성들보다 빠르지 않습니까?
이제 더이상 보지 못하게 될 예수님을 향해 무엇을 해드릴까 엄청 골몰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 목록을 다 훑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값진 것, 가장 자신이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순 나르드 향유!
당시 여성들이 가장 지니고 싶던 소장품 No.1이었습니다.
양을 많게 하려고 물을 탄 다른 향유와는 비교가 안 될 순 나르드 향유 1리트라입니다.
너무나 값비싸고 가치 있는 것이어서 아주 조금씩 꺼내 사용하던 명품 향수였습니다.
평생을 두고 쓸 수 있는 양의 향유였는데, 마리아는 이 향유를 예수님 발에 사정없이 다 부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본 유다는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런! 저런! 저게 대체 얼마짜린데!”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긴 머리를 풀었습니다.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이는 당시 그야말로 ‘내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가장 극진한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 오해 사기 딱 좋을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개의치 않습니다.
이제 곧 떠나가실 예수님, 그리도 흠모했던 주님, 참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신 예수님의 큰 사랑 앞에 자신이 기울일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여준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니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떠나가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재산, 마음, 정신, 목숨, 에너지, 삶 전체를 다 바치는 마리아입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표현되겠지요.
정성과 진심이 담긴 행동으로 말입니다.
성주간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죄인들을 향한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이제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실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표현하는 시기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성주간 월요일의 복음은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 11,57)
말하자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공개적으로 ‘지명 수배’를 한 상황입니다.
사도들과 신자들도 그 지명 수배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1장 53절에는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는 말이 있고, 또 12장 10절에는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이 그런 상황을 제대로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든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게 되면,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남매의 집을 숙소로 삼으셨습니다(마르 11,11).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진 집은 그들의 집이 아닙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26,6; 마르 14,3).
그 잔치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을 환영하고, 시몬이 자신의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일을 축하하는 잔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요한 12,3)
마리아의 행동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새겨 준 일입니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라는 말은 참석자들이 그 일을 오랫동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더라도,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거행하려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이 장례라는 것은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께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최상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요한 12,4-6)
여기서 유다의 말은 마리아의 순수한 신앙심을 부각시키는 배경 같은 역할을 하고 있고, 또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설명하는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로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신심과 존경심은 보지 않고 오직 돈만 보았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마리아는 ‘향유 값’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마리아가 쓸데없이 돈을 낭비했다고 비난하는데, 어쩌면 그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 자체를 ‘낭비’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마리아가 부자여서 비싼 향유를 아무 거리낌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남매는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신심 깊은 사람들’입니다.
또 마리아가 예수님만 생각하고 가난한 이들을 외면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움을 받는 사람들’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 생각은 고정관념이고 편견일 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도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고, 예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오랫동안 돈을 모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7-8)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리아도 아니고, 유다도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만 바라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만 바라본 사람들이 많았고,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라는 말씀은 마리아를 비난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마리아 말고 당신을 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너희는 내 장례를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고 있었던 마리아의 신심을 기억하여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향유를 이미 모두 부어버렸기 때문에 간직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이 말씀은 정상적인 장례식을 거행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죽음이 긴박하고 비참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의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너희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특별한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을 잠시 잊어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고, 가난한 이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당신 사업이 절정에 도달하는 때라는 뜻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주님의 종이다 - 사랑의 관상가>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일 잘 산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의 지상에서 천상의 삶을,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사랑의 관상가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말하는 주님의 종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여기서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지칭하지만,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으로 이해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 주님의 종이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뿐이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역시 이런 주님의 종이니 주님의 종처럼 품위있고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성주간 월요일 복음의 주인공은 단연코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를 묵상하는 순간 떠오른 21년 전 이맘때 쯤의 '민들레꽃'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여전히 봄철되면 피고 지는 샛노란 민들레꽃들이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형제자매들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갔는지 무수히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
- 2001.4.16.
이때는 본원 숙소 건물이 신축 이전이라 숙소 창밖 뒷마당에는 봄철 되면 민들레꽃들이 땅을 덮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연수 시 영역한 이 시를 보고 격찬한 영어 교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주님의 종이며 사랑의 관상가입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가, 복음의 예수님이, 마리아가 그러합니다.
이사야가 이런 매력적인 사랑의 관상가 모습을 잘 묘사합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대로 섬세하고 자상하며 자비로운 관상적 활동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심전심, 유유상종입니다.
이런 주님을 직감적으로 알아보고 내심 따르며 흠모하고 사랑과 신뢰를 다했을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를 생각할 때 즉시 떠오르는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싶다”
- 1998.12.25.
24년 전 성탄절 수녀님으로로부터 빨간 칸나 한묶음을 선물 받았을 때 즉흥적으로 읊었던 시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직감한 마리아가 예수님께 아낌없이 사랑의 봉헌을 한 행위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었습니다.
다음 장면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이런 사랑의 봉헌에 감격하지 않을 자 누구이겠습니까?
향유의 향기는 그대로 마리아의 존재의 향기, 영혼의 향기, 사랑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참으로 이런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지요.
예수님도 마리아도, 여기 참석한 이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한 오늘 우리에게도 참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런 사랑의 추억이 살게 하는 힘입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앞두고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을 것이며, 마리아 또한 평생 이날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를 탓하는 현실적 물질주의자 유다의 반응이 참 실망스럽습니다.
일면 타당한 듯 하지만 사랑 없음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직제자이면서 예수님의 심정을 너무 몰랐습니다.
유다의 반응에 이어 마리아를 두둔하는 예수님입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 주겠는지요?
과연 내 견해는 어느쪽에 속하겠는지요?
바로 우리 마음을 들여다 보게 합니다.
회개하게 합니다.
사랑의 분별이요,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마리아와 유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주님 장례 날을 배려한 사랑이라면 마지막 사랑의 봉헌, 향유의 봉헌이 맞는 것입니다.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결정적 봉헌의 때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종만이 주님의 종을 알아봅니다.
그 많은 이들중 예수님과 깊은 일치의 사랑을 지닌 이는 마리아뿐이었습니다.
참으로 평생 한 번뿐인 봉헌의 때를 알아 향유를, 자기의 전 존재를 사랑으로 봉헌한 사랑의 관상가, 주님의 종 마리아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우리의 주님 사랑을 부끄럽게 하는 마리아의 사랑의 봉헌입니다.
봉헌의 축복,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관상가, 주님의 종 마리아처럼 우리의 전존재를 봉헌하는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합시다.
오늘 시편 화답송은 주님의 종 마리아는 물론 우리의 고백입니다.
“주님의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시편 27,1.14ㄴ)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
(요한 12,3)
유다인들에게 시달리시던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삼 남매 집에서 오랜만에 따뜻한 환대 속에 머무르시며 마음을 쉬십니다.
마르타는 한껏 솜씨를 부려 잔치 음식을 마련하고 라자로는 식탁에서 예수님을 접대하지요.
그리고 예수님을 각별히 사랑하는 마리아는 통 큰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저 사랑이 이끄는 대로 마음이 원하는 바를 실행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준비한 향유는 실리에 밝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표현을 빌자면 삼백 데나리온 정도의 값어치를 하는가 봅니다.
한 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 품삯이니 요즘 시세로 어림잡아 십만 원이라 보면, 삼백 데나리온은 삼천만 원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고급 향유를 준비한 마리아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치스런 사람도 아니고 허세와 허영에 목숨을 거는 이도 아닙니다.
그녀는 그저 주님 발치에 머물러 말씀을 듣고 사랑에 잠기는 가장 좋은 몫을 택한 여인일 뿐입니다.(루카 10,38-42)
그녀에게 이 향유의 값은 오빠의 목숨을 살려 주신 은인에게라면 오히려 하찮은 값어치일 수도 있는 데다가, 가장 귀한 분께 가장 귀한 것을, 가장 사랑하는 분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고픈 사랑의 마음일 뿐입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요한 12,7)
유다의 비난에도 예수님은 이 '낭비'를 기꺼이 받으십니다.
이 '낭비'에 머무릅니다.
그리고 곧 이보다 더한 낭비를 하신 분이 문득 제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십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정녕 당신의 향유 내음은 싱그럽고 당신의 이름은 부어놓은 향유랍니다."
(아가 1,3)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사랑을 신랑과 신부의 사랑에 빗대어 표현한 아름다운 노래, 아가(雅歌)의 한 구절입니다.
향유는 기름부음받은 이, 곧 메시아를 뜻하기에, 신약(新約)의 백성인 우리에게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가장 귀한 향유, 예수님을 세상 발치에 내주시어 그 피를 뿌리신 것입니다.
혹자는 꼭 아드님을 그리 처참하게 바치셔야 했냐고, 살아서 더 건설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일을 도모해도 되지 않았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만, 복음 속 유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랑의 충동 앞에서 논리성이나 합리성과 옥신각신 하느라 사랑이 식어버리지 않도록 그것에 눈길을 주지 않는 훈련도 때때로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향유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베타니아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마태 26,6-13; 마르 14,3-9 참조) 루카는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 그 고을의 죄인인 여인이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하는데, 다른 세 복음서와는 주제가 살짝 다릅니다(루카 7,37-50 참조).
그리고 오늘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베타니아의 마리아 역시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립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예언자나 선지자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에게 가서 직접 기름을 부어 임금이나 예언자로 세웁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은 탄생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가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라 할 때 처음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했을 뿐, 어떤 공신력 있는 인물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으시는 장면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는 신분적 약자인 여인들이 향유를 부어드리는데 이 향유의 가치 때문에 제도적 강자인 제자들의 비난이 쏟아지자, 다가올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의미라고 직접 밝히시며 낭비 논쟁을 잠재우시지요.(마태오, 마르코, 요한 복음)
그리고 돌아가신 뒤에는 제도권 인물들인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니코데모 손으로 장례 풍습에 따라 향유를 바르셨고요.
결국 예수님의 기름 부음 받으심은 장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 구약의 메시아와 다르고, 또 기름 붓는 인물 역시 일반 여인들부터 의회 의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는 것이 다릅니다.
구약의 예언자나 임금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 구원자 메시아의 역할을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심으로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기 때문일 겁니다.
또 구약에서는 대개 기름 붓는 이가 제도화된 신분의 인물이었다면, 신약에 와서는 하느님의 뜻을 감지하고 알아듣는 누구에게나로 그 역할이 확장됩니다.
그것이 비록 아무 소속도 배움도 권력도 없는 여인이더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이사 42,1)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첫 부분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이 노래에는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분께서 친히 선택하신 분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선택되신 분, 메시아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매우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곧 창조주이시고 생명과 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는 온유와 자비, 성실과 공정, 빛과 해방의 봉사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그런 분이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고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고 외치시는데, 마리아처럼 마음과 영혼을 온통 향유에 담아 그분 발 앞에 쏟아붓지 못하고 사랑을 미적거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따르는 게 우선이라고 하지도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가지신 모든 덕목을 따라하기 전에 사랑이 앞서 가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
먼저 사랑하면 따라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닮아갑니다.
명심하십시오!
사랑이 먼저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교구 사제로 있다가 지금은 수도회 사제가 된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구 사제로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주어진 직책에 성실했고,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었고, 늘 바쁘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다고 합니다.
연극이 끝나고 텅 빈 객석에 앉아 있는 배우처럼 허전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느 날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절벽 위에 있었고, 뒤로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차가 날아와서 태우고 갔습니다.
내려 보니 넓은 잔디가 있었고, 집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두 같은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라보니 성모님이 계셨습니다.”
그 뒤로 성지순례를 갔고, 그곳에서 성모님을 보았는데 꿈에서 본 그 모습이었습니다.
후원자들도 있었고, 꿈에서 본 것처럼 집을 지어서 어머니의 마을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제법 큰 땅도 마련되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분들이 계속 기도할 수 있도록, 성지순례를 가지 못한 사람들은 성모님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을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열심히 홍보를 하였고, 많은 독지가들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하듯이 어머니 마을의 꿈은 욕심에 물든 사람들에 의해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원망도 있었고, 꿈이 틀린 것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기도 중에 성모님이 원한 집은 세상에 마련되는 집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이 원하는 집은 ‘기도의 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세워다오.’라고 하셨던 것도 눈에 보이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영성과 기도의 집을 세우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교황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수도회의 인준을 받았습니다.
가난과 나눔의 영성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무너져가는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사제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제, 기도하지 않는 신자들이 세운 집은 세상의 유혹에, 마귀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예전에는 묵주기도를 거의 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서, 수도자들의 성화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매일 묵주기도 100단을 바친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혼자서 미사 준비를 하고, 혼자 미사를 할 때면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서 드리는 미사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니 천상의 모든 성인 성녀들도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어머니의 집을 마련하려고 할 때는 분란도 많고, 걱정도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기도의 집에 성모 어머니를 모시려 하니 기쁨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생각을 바꾸니 꿈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연이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연을 움직이게 하는 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줄이 끊어진 연은 곧 땅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우리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 슬픔에서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분,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맺어주는 줄입니다.
그 줄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을 향해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자신을 돌아볼 때, 하느님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삶의 중심이 되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자신의 욕심과 야망이 보이면 그는 지금 살아있지만 죽음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마리아는 순수해져서 자신을 돌아볼 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이 우선순위가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성주간 월요일입니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잊지 않고 초대했던 라자로처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마리아처럼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아는 지인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 이 집을 방문한 것이라 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집을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방 하나가 완전히 클래식 음반으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워낙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클래식 음반을 사들이는 데 돈을 아끼지 않다 보니 이렇게 음반이 많아졌다고 하십니다.
저는 “많은 음반이 있으니 매일 다른 음악을 들으시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외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음반수가 너무 많아서 늘 선택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결국 다양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음악만 듣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몇 년째 자리만 지키는 음반이 대부분이라고 하십니다.
선택지가 많으면 그만큼 다양한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몇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욕심일 따름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너무 많은 선택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용도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라고 하신 이유를 묵상합니다.
우리의 선택을 단순화시켜서 이 사랑 하나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성주간 월요일인 오늘, 사랑에만 집중하고 있는 한 여인을 봅니다.
마리아는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시체를 향유로 발라 염한 일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성령에 이끌려 주님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비 행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 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못마땅해하는 말을 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요한 12,5)
향유의 가격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할 때, 삼백일 치의 품삯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로 이 돈을 쓴 것입니다.
그에 반해 유다는 세속적인 관점으로 부정적인 말을 한 것이지요.
실제로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깁니다.
은 1냥에 4데나리온에 해당하니, 거의 120일 치의 품삯에 판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 30냥은 당시 노예를 팔 때 받는 가격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노예 취급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었으니 마리아의 행동을 옳게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에만 집중하면 세상의 기준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집중하다 보면 사랑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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