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은 한걸음씩, 革新은 반걸음씩
"새로운 게 늘 좋은 건 아니야… 10년 뒤에도 통하는 클래식 추구"
꿈을 현실로… 3박자가 맞았다
運, 기회의 땅 미국에 태어나…
타이밍, 내가 자란 60년대는 세계가 패션에 막 투자하던 때
사람, 나를 알아봐준 사람들… 열광과 격려로 성공 뒷받침
유행은 너무 짧아
제품이 時流에 맞으면서도… 시대 초월해 통용 가능해야
17세 때 패션에 눈떠
환불 처리 점원으로 일하다, 사람들의 好不好 알게 돼
당신 곁의 트렌드를 읽어라
직관은 특별한 재능 아니다… 열망 강하면 깨어 있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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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한 이민자 아들로 태어나 억만장자가 된 미국의 디자이너 겸 CEO 랄프 로렌. “꿈을 디자인한 다”며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한 그의 의상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들을 사로잡았고, 랄프 로렌 자신 역시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게 됐다. 아래 왼쪽 사진은 유방암 퇴치 지원을 위한 ‘핑크포니’라인. 수익금 일부를 관련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 랄프 로렌 제공
까치발을 한 꼬마는 잡화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파란색 스웨이드 구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상에 그보다 아름다운 물건은 없는 것 같았다. 밤마다 꿈을 꿨다. 그 신발을 신은 아이는 왕자가 됐다가 거인도 됐다가 수퍼맨도 됐다.
하지만 소년의 발엔 언제나 형이 신다 물려준 낡은 운동화가 전부였다. 옷은 물론이고, 야구 글러브 하나 제대로 된 걸 가져본 적도 없다. 뉴욕 브롱크스에서 가난한 유대계 러시아인 이민자의 넷째로 태어난 그에게 '풍족'이나 '풍요'는 요원한 단어였다.
"그래도 항상 매일이 즐거웠던 소년이었어요. 상상 속에서 언제나 난 매끈하게 멋있는 녀석이었으니까요. 매일 꿈꿀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진짜 재밌는 게 뭔지 알아요? 모든 걸 상상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그 모든 것이 현실이 될 거라곤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무일푼으로 시작해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 왕국'으로 68억달러(약 7조원·2014년 포브스 추정)의 부(富)를 쌓아 올린 랄프 로렌(Lauren·74·개명한 이름·공식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랠프 로런)의 삶은 '아메리칸 드림' 그 자체다. 그는 고등학교 앨범에 '백만장자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꿈을 완벽히 이룬 셈이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유리창으로 덮인 초현대적 마천루의 건물 외관과는 딴판이었다. 마치 19세기 런던의 비밀스러운 사교 클럽이나 18세기 프랑스 궁전 내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고급스러운 마호가니로 된 가구와 장식물들이 눈에 띄었고, 고풍스러운 유화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에나 있을 법한 거대한 문을 열고 나니 눈에 띈 건 의외로 작고 귀여운 동네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까다롭고 제왕적이며 고집 센'이라고 표현됐던 일부 책자의 설명과는 딴판이었다. 양옆으로 술(tassel)이 잔뜩 달린 카우보이 바지에 은색 징이 박힌 커다란 벨트를 매고 회색 꽈배기 니트, 흰색 셔츠를 받쳐 입은 그는 마치 파란색 스웨이드 슈즈를 바라봤던 그 눈처럼 천진한 표정으로 환영 인사를 건넸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공식으로 밝힌 바는 없지만 168㎝ 내외다),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체격이었다. "멋지다"는 말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 말 또 해줄 순 없나요? 당신이 여기 계속 머물렀으면 좋겠네요"라며 크게 웃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린 시절 진짜 꿈은 뭐였나.
"스포츠를 좋아해 농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키가 안 컸다(웃음). 영화를 좋아해 영화배우도 되고 싶었다. 조지 클루니 같은. 난 어릴 때 친구들의 패션에 대해 조언을 해주던 인기 소년이었다. 옷만 잘 입어도, 비록 그게 새 옷이나 비싼 옷은 아닐지라도, 남들과 차별되게 스타일을 잘 맞춰 입은 날이면 내 기분이 달라졌다. 옷이 날 표현해 준다고 느꼈다."
―언제부터 디자인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았나.
"초등학생 때 구제 의상을 고쳐 입었는데 사람들이 '멋지다'며 난리였다. 으쓱했다. 디자인에 대한 재능이라기보다는 패션 전체,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져 보일까, 이런 삶 전체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거 같다."
옷 이야기를 하면서 호흡이 빨라지고 행복해하는 그의 눈빛은 너무나 강렬했다. "디자이너라기보단 타고난 마케터"라고 비판한 패션 평론가들 때문에 생겼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일부 유명 디자인 스쿨 출신과 '게이'라는 정체성이 업계를 지배하는 폐쇄성 강한 패션업계에서 대학 교육도 거의 받지 않고 패션계에선 굉장히 드문 '스트레이트'라는 점이 그의 디자인을 "평범하다"고 폄하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구두는 샀나?
"가난한 화가의 아들이 무얼 많이 가졌겠는가. 때론 그런 건 영원한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바랄 수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게 있을까? 부족했기에, 결핍이 있었기에 그만큼 갈망하고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난 행복한 아이였다."
―이렇게 성공한 비결은?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일하고, 일하는 걸 즐기는 것."
―너무 평범한 답 아닌가?
"무슨 소리. 당신을 바라봐라. 사람 만나는 것 좋아하고 글 쓰는 것 좋아하고,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즐겁지 않은가? 당신은 단어로 글을 쓰지만, 난 옷을 통해 글을 쓴다. 그리고 그걸 즐긴다. 당신이 즐기는 일을 하면 그 자체로 동기부여가 되고 에너지를 얻게 된다. 그게 쌓이면 위대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 위대함을 원한다면 그 위대함 속에 시간을 담으면 된다. 위대함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고, 마법처럼 손짓 하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즐기는 일을 열심히 하면 상대방이 반응하고, 그걸 보고 만족을 느끼고, 더 책임감 있게 잘하게 된다. 위대한 것은 결국 작은 것들이 축적돼 완성되는 것이다."
―성공 비결을 물을 때마다 많은 사람이 똑같이 답한다. 열심히 일하고 네가 하는 걸 즐기고. 한국에 워커홀릭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그렇다고 다 성공하는 건….
"다 성공하는 건 아니라고? 그렇다. 그러면 뭐가 차이일까? 생각의 출발점을 바꿔야 한다. 보통 그런 이들은 '돈을 벌자'고 목표를 설정한 뒤 일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지치게 되고 '내가 지금 누굴 위해, 무얼 위해 하고 있는가' 하며 정신적 혼돈에 휩싸이기도 한다. 난 처음부터 돈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꿈을 완성하기 위해 일했다. 디자인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삶을 디자인하고 싶다'는 명확한 꿈이 있었다."
―꿈꾸긴 쉬운 거 아닌가.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게 어렵지.
"물론 운도 좋았다. 부인할 수 없다. 인생에서 성공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꼽자면 '타이밍과 운,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다. 미국이라는 기회의 땅에 태어나 운이 좋았고, 내가 자랄 시기인 1960년대는 전 세계가 이제 막 패션에 눈을 떠 투자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타이밍도 좋았다. 내가 만약 10년 일찍 태어났다면 랄프 로렌 같은 거대 기업은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를 인정해준 사람을 만난 것이 행운이자 성공의 뒷받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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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랄프 로렌이 영국 윌리엄 왕세손 초청으로 14일(현지 시각) 윈저 캐슬에서 열린 ‘로열 마스덴 자선 행사’에 참석했다. 로렌은 최근 유방암 예방과 퇴치를 위해 영국 유명 암센터인 로열 마스덴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사진 왼쪽부터 사위 폴 아루 엣(헤지 펀드 매니저), 딸인 딜런(캔디 사업가), 랄프 로렌, 아내 리키, 큰아들 앤드루(영화 제작자₩모델), 둘째 며느리 로렌 부시(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조카), 둘째 아들 데이비드(랄프 로렌 그룹 광고마케팅부 수석부사장). / 사진가 데이비드 하틀리 제공
―당신을 인정해준 사람이 누구인가?
"너무나 많다. 굳이 한 명을 꼽자면 마빈 트라웁(블루밍데일 백화점 전 CEO)이다. 내 넥타이에 대해 모두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 당시 블루밍데일 백화점 바이어였던 그는 내 작품에 열광하며 백화점 내에 숍인숍(매장 안에 작은 매장)을 두고 팔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뿐만 아니라 '랄프, 당신의 재능은 뛰어나군! 넥타이 말고 또 무얼 만들 수 있지? 뭐든지 만들어 보게'라며 격려해줬다. 난 사람을 알아봐 주고 격려한다는 게 얼마나 젊은이의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는지 그를 통해 배웠다."
―어릴 때 매장 재고 관리원으로 일하면서 패션에 눈떴다고 들었다.
"17세 때다. 재고 관리라기보다는 교환 환불 처리 같은 일이었다. 사람들이 반환한 옷을 옷걸이에 걸어 창고로 가져다 놓는 일 같은 걸 했다."
―그래도 배운 게 있을 텐데.
"환불하는 걸 보면서 '아 저런 걸 사람들이 싫어하는구나'라는 걸 알았다."
―그 경험이 도움 됐나?
"그때 진짜 느낀 건 내가 패션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다."
그는 16세 때 이름을 랄프 리프시츠에서 랄프 로렌으로 바꿨다. 유대인의 느낌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바꾼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그는 "발음이 어렵다며 어린 시절 계속됐던 놀림 때문"이라고 말했다. '로렌'은 '로렌스'라는 사촌 이름에서 따왔다('런던'도 유력했다고 한다).
"직관은 강한 열망에서 나온다"
패션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넥타이를 내놓으면서다. 야간 대학을 다니며 브룩스 브러더스의 판매원으로 일하면서 '개별적이고 고급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은 그에 맞게 지갑을 열 준비가 충분히 돼 있다는 점'을 깨달은 뒤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의 회사를 차려 기존에 유행하던 폭 좁은 넥타이 대신 그의 두 배는 되는 4인치 폭(약 11㎝)의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값도 일반 타이 가격이 3~4달러였던 1967년 당시 7.5~15달러로 높여 승부수를 걸었다.
―넥타이는 특별했지만 처음부터 환영받은 건 아니었다. 좌절을 어떻게 극복했나.
"나 자신을 믿었다. 내 직관을 믿었고, 사람들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세대'를 이끌 것이라 생각했고, 새로운 걸 추구하는 그들의 욕구를 폭발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처음부터 쉬운 건 아니었다. 무일푼 젊은이를 믿고 투자하려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가능성을 본 한 사업가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앞 작은 좌판을 내줬다. 5만달러를 대출받아 회사를 세우고 생산을 시작했다. 그의 넥타이와 이듬해 시작한 남성복은 젊고 부유한 이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곧 신분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됐다. 드라마 같은 출발이었다.
―'패밀리 브랜드(남성·여성·아동 등 가족을 모두 아우르는 브랜드)'라는 개념을 만든 것도 당신이 처음이고, 플래그십 스토어(대형 단독 매장)도 당신이 1986년 뉴욕에 선보인 라인맨더 매장이 원형이 됐다. 패션계에서 당신은 모든 걸 앞서갔다.
"아까 말했듯 내 직관을 믿었다. 직관이란 건 일부만 가진 재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흐름이란 게 나한테만 보였을까? 아니다. 분명 당신 곁도 스쳐 지나갔다. 간과했을 뿐이다. 언제나 깨어 있어라. 트렌드라는 건 당신 곁에 항상 있다."
―알아보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만큼 내 열망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난 항상 사람들이 '나은 삶'에 대해 갈구할 것이라 생각해왔다. 난 그저 옷을 디자인한 게 아니다. 삶을 디자인했고 꿈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대학 졸업장 같은 게 당신이란 사람을 결정해 주진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밀고 나가라. 내가 산 증인 아닌가."
"내가 가장 중시하는 건 일관성"
랄프 로렌 디자인 팀에서 일했고, 지금은 몽클레르 디자이너인 톰 브라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디자인은 하기 쉽다. 하지만 그걸 상업적으로 성공하게 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그런 점에서 랄프 로렌은 위대하다."
―실패란 건 해본 적 없는 것 같다.
"무슨 소리. 나도 실수 많이 했다. 초기엔 비즈니스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다.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잠 못 이뤘다. 부도 일보 직전이어서 은행에선 전화가 계속 오고. 내 평생 최악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이겨냈나.
"비밀을 알고 싶나? 위대한 팀과 함께 일하기 때문이다. 적시 적소에 딱 맞는 사람을 만나 그들의 능력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좋은 디자이너, 좋은 사업가가 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위대한 디자이너, 위대한 사업가가 되는 건 굉장히 어렵다. 그 차이가 바로 '위대한 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난 정말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열심히 한다는 것이 무조건 혼자 하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당신만의 '군대(army)'를 가져야 한다."
그는 스티브 잡스와도 자주 비교된다. 일부에선 그의 회사를 일컬어 '랄프교(敎)'라는 이도 있다. 그를 교주처럼 떠받친다는 것이다.
"직원과 한몸이라고 느끼기 때문 아닐까? 2만50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좇아 우리 회사로 모이지 않았는가. 직원이 성장하는 것이 결국 회사가 성장하는 것이다. 난 성장을 즐긴다. 난 그들이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폴 골드버거는 당신을 가리켜 루스벨트나 케네디 대통령과 비슷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희망을 준다는 것이다.
"세상에나. 그들 모두 내가 존경하는 이들이다. 제대로 된 리더, 그러니까 영감을 주는 사람이 위기에서 얼마나 필요한지, 그런 이들이 얼마나 세상을 바꿔주는지 생애를 통해 절실히 배웠다. 그들이 한 일은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여주는 세계를 통해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미국 패션계에선 당신이 대통령 아닌가. 당신만의 비전이 있다면?
"하하. 내가 가장 중시하는 건 일관성이다. 기업의 철학이나 CEO의 철학이 일관성이 없다면, 직원들이 얼마나 그 회사를 어떻게 믿고 자신을 투자하겠는가. 기업을 떠올릴 때 명확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난 내 회사를 믿었고, 사람들에게 신뢰할 만한 기업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품질에 대한 집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혁신이란 딱 반 보 앞서는 것"
―당신에게 혁신이란 무언가.
"기존보다 반 보 앞서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모이면 트렌드가 된다."
―2017년이면 50년이 된다. 자칫하면 올드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게 패션계인데. 어떻게 매일 새로워지면서 지속 가능할 수 있는가.
"새로움(newness)이 언제나 항상 좋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새로운 건 좋지만, 그저 새롭기만 해서는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 시류에 맞으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항상성 같은 걸 가져야 한다. 10년, 20년 전에 샀던 것도 현재에 통용될 수 있는 것, 클래식하면서도 구식이 되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너무나 트렌디해서 돈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뢰받는 브랜드를 만들려면?
"가장 중요한 건 장수(longevity)할 수 있느냐다. 유행이란 너무나 짧고,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는 길다. 당신이 꼭 경계할 것은 '나도 이거 할 수 있어'라는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이다. 경쟁사가 무얼 한다고 해서 따라 하는 순간 영속성은 깨진다. 또 작은 디테일도 놓치면 안 된다. 남들 눈에 안 보일 수 있어도 누군가는 그 흠을 발견할 수 있다."
―신뢰받으면서 동시에 트렌드를 주도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난 '이걸 사야 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삶도 있어'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랄프 로렌적 삶'이라는 걸 이미지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광고 투자도 필요했다. 난 시각화의 힘을 믿는다."
1970년대 '광고'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장장 20쪽에 달하는 이미지 광고를 실었다. '옷 자체보다는 옷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이 더 중요하다'는 철학을 내세웠다.
―당신에게 럭셔리란 무엇인가?
"매스(mass·대량 생산) 시대에 럭셔리는 특별한 걸 의미한다. 장인(匠人) 정신과 좀 더 나은 삶, 남과 차별화되는 것이다. 기계가 지배하는 매스 시대가 되면 될수록 질이 더 중요해진다. 처음에 매스가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양에 눌려서 구분하기 어렵다가 시간이 가서 경험이 쌓이고 좋은 걸 볼 줄 아는 눈이 떠지면 질(quality)이 있는 것을 구별하게 된다. 결국 이 게임의 최후의 승자는 품질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좋은 가정을 일궈 올해 결혼 5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게 무척 행복하다. 생각해 보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무 일도 없을 때, 단순한 평화(just peace)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난 매 순간에 감사하고 즐기려 한다. 난 언제나 상기한다. 파란색 스웨이드 슈즈를 바라봤던 그 시절 모습을. 나는 언제나 설레고 언제나 꿈꾼다."
랄프 로렌, 패션을 의상이 아닌 라이프 스타일로 설정… 광고·PPL 선구적으로 활용
패션에 지극히 무관심한 사람일지라도 말을 탄 기수가 로고로 새겨진 폴로 셔츠 정도는 한 번쯤 봤거나 최소한 들어봤음직 하다. 1990년대 '오렌지족의 교복'이라 불리며 국내에 알려진 폴로 티셔츠는 단추 두 개 달린 면 티셔츠의 고유명사처럼 느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얼마나 인기였는지 그 로고 속 말의 다리가 몇 개인지, 기수의 발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따지는 게 '짝퉁'을 구분하는 방법이라고 신문 기사에 나올 정도였다. 그 인기는 여전해서 최근 들어선 인터넷 직구(직접 구매)족이 가장 돈을 많이 쓰는 브랜드 중 하나로 꼽힌다.
랄프 로렌은 1967년 넥타이로부터 시작해 이듬해 남성복 매장을 열었고 여성복(1972년), 아동복(1976년), 향수(1978년), 침구·가정용품(1983년), 골프웨어(1990년), 스포츠웨어(1993년)로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의 업적 중 가장 위대한 점은 패션을 단지 의상이 아닌 라이프 스타일로 포지셔닝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머천테인먼트(머천트와 엔터테인먼트의 합성어·단순한 구매 행위가 아닌 고객이 보고 즐기고 느끼게 하는 것)를 실현한 선구자로 꼽힌다.
그는 파리식의 극도로 화려함이나 전위적인 스타일보다는 영국의 클래식함, 좀 더 보편적이면서도 안락한 상류층 이미지를 지향했다. 벽난로가 있는 고급 저택에 사는 이들,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즐기는 농장 주인, 나바호 인디언에서 영감을 얻은 '산타페 룩(look)' 등을 선보이며 '아메리칸 드림'을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했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에게 어필했다.
랄프 로렌이 유명해지는 데는 영화도 한몫했다. 1974년 로버트 레드퍼드가 주연한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 의상 제작을 의뢰받아 완성한 '개츠비 룩(look)'은 젊은 감각의 클래식 수트로 높은 인기를 끌었다.
그는 '올해의 남성복 디자이너상' '여성복 디자이너상' '공로상' 등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가 수여하는 다섯 개 부분 상을 모두 석권한 최초의 디자이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