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 길을 나서
이월 초순 금요일이다. 입춘에 한파가 닥쳐 연 닷새째 추위가 맹위를 떨친다. 도서관으로 가려고 현관을 나서 아파트단지 쉼터 대숲을 지났다. “한겨울 세한삼우 푸른 솔 매화 향기 / 꿋꿋한 기상에는 한 가지 더 보태면 / 추위가 매서울수록 돋보이는 대나무 // 죽제품 사라지니 어디나 흔해 넘쳐 / 웬만한 도심까지 무성한 숲을 이뤄 / 아파트 쉼터에서도 청청하게 자란다”
아파트단지 입구 쉼터 대숲 전경을 사진에 담아 외동반림로를 따라 거르면서 휴대폰을 떠내 즉석에 문자로 남긴 ‘도심 대숲’이다. 매일 지나치는 아파트단지인데 문득 세한삼우(歲寒三友)가 떠올라 4음보 가락으로 율조를 맞춰 봤다. 요즘 와서는 플라스틱에 밀려 가정에서 쓰는 바구니를 비롯한 생활용품에서 대나무로 된 제품이 사라진 지 오래다. 비닐하우스도 철골로 대체 되었다.
원이대로를 지나 창원 스포츠파크 동문에서 폴리텍대학 캠퍼스를 지나 보도를 걸으니 벚나무 가로수가 도열했다. 나목이 된 가지들은 잎눈보다 먼저 피는 꽃눈이 몽글몽글 부푸는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주춤하지만 이번 추위가 물러가면 꽃눈이 부푸는 기색이 완연해 더욱 도톰해질 테다. 며칠 전 인터넷 검색에서 올해 우리 지역 벚꽃 만개는 삼월 하순이라는 지도를 봤다.
사서의 출근과 같은 시각에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입구 근처 눈길이 띄는 곳에 대보름 행사 알림판이 세워져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이 정월대보름인데 이날 도서관을 찾는 이들에게는 견과류 부름을 소진 시까지 나눠준다고 했다. 열람실로 오르니 이용자가 적어 호젓해 좋았다. 2층 창가 내 지정석이 되다시피 한 자리를 차지해 배낭을 벗으면서 집에서 가져간 책을 꺼냈다.
전날 대출 도서로 빌린 ‘이어령의 강의’였다. 불치 병마에도 의사 집도를 거부하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 고통 속에도 펜을 놓지 않은 석학은 삼 년 전 이월에 피안으로 떠났다. 그가 세상을 뜨고 열림원에서 대학에서 정년 이후 여러 곳에 초청되어 젊은이들에게 강연한 원고를 모은 책이었다. 책 첫 장에 ‘모든 창조는 눈물 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 줄을 소개하면서 시작했다.
선생이 학부를 다녔던 서울대에서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으로 학기를 보내고 마스크를 쓰고 진행된 졸업식 축사가 먼저 실려 있었다.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한 사람의 기침 하나가 내 일상을 뒤집어놓는 상황도 겪었다고 회고했다. 먼저 그 대학을 거쳐 간 졸업생으로 지식과 지혜를 쌓은 후배 지성인이 앞으로 이 사회에 기여하고 공동체 발전에 무한 책임을 느끼십사 호소하는 듯했다.
일제 강점기 충남 아산에서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 태어난 이어령으로 알았는데 성장기를 보낸 회고담에서 콧등이 시큰하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양곡이 없어 밀 껍질로 수제비를 매끼 만들어 먹었는데, 가족끼리 먹다가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로 남겨주곤 했다는 형제애에 내 눈앞은 눈물이 어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해방을 맞은 선생이 세종대학 젊은이들에게 한 강연 일부였다.
이어령 책을 독파하고 환경 전문 출판사 한바람이 펴낸 ‘우리가 바다에 버린 모든 것’은 스치듯 일별했다. 저자 마이클 스타코워치는 피츠버그대학과 빈에서 학위를 받아 그곳 대학 생명과학부 교수였다. 사서재가 번역한 이 책은 ‘해변을 살아 숨 쉬는 자연이다’로 시작해 심각한 문제인 해양 오염 쓰레기를 추적해 고발했다. 바다에 뜨기도 하고 가라앉은 수많은 쓰레기가 놀라웠다.
세 번째 손에 쥔 책은 ‘은퇴의 말’이었는데 속도감 있게 넘겼다. 저자 한혜경은 이화여대 불문과를 나와 여성학 학위로 보건사회연구원에서 노인복지를 연구하고 대학에 강의를 나갔다. 저자가 발품 팔아 대면 상담 사례를 분석한 부제가 ‘남자가 은퇴할 때 후회하는 25가지’였다. 이미 은퇴한 독자에게도 지난 생을 돌아보고 100세 시대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방향이 제시되었다. 25.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