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삼경(金烏山三景) /박주병
一. 하늘
금오산은 그리 큰 산은 못되지만 단아하고 엄숙하다. 학인의 자태랄까, 현자의 풍모랄까. 검은 바위로 된 멧부리가 흰 구름을 거느리고 드높이 창공에 치솟은 모습은 자못 경이롭다.
오랜 장마 끝에 활짝 개어서 그런지, 벌써 계절이 바뀌어 가고 있었기 때문인지, 갈매 빛 산봉우리 너머로 그 빛보다 더 선연한 아청 빛 하늘이 향수처럼 멀다. 산이 없어도 하늘은 저리도 높고 푸르고 또 유정해 보일 수가 있을까?
물은 누진 데로 흐르고 불은 메마른 데로 타오른다. 구름은 용을 좇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 했다. 같은 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같은 기(氣)는 서로 구하기 때문일까. 종자기(種子期)가 죽자 지음을 잃어버린 백아(伯牙)는 두 번 다시 칠현금(七絃琴)을 뜯지 않았다는 소리는 식상하도록 들었다. 하늘과 산도 어쩌면 이러한 교감이 아닐까.
마음이 가벼울 때는 가벼워서 마음이 무거울 때는 무거워서 나는 곧장 이 산을 찾게 되었다. 산은 본래 산일뿐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공연히 소연할 뿐 내가 즐거워하거나 서러워하거나 울거나 웃거나 누굴 사랑하거나 누굴 원망하거나 산은 늘 침묵한다. 덩달아 내 마음이 가라앉고 맑아지고 편안해진다. 타이르거나 꾸짖거나 가르침이 없어도 산은 늘 벗이 되고 정인이 되고 스승이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또 가끔은 현인을 생각하게 한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다만 힘써 밭 갈고 경학에 매진하여 아래로 어버이를 봉양하고 위로 임금을 섬기기만 기약했었다.……지금은 불행하게도 망국의 한을 당하여 십년공부가 허사가 되었다. 슬프다! 하늘의 일을 탓하여 무엇 하리! 이에 슬픔 속에 방황하다가 뜻을 바꾸었으니, 송라의 덩굴에 달이 걸리듯 그렇게 갓을 걸고 청풍을 읊조리며, 천지간에 부앙(俯仰)하고 세상 밖에 소요하며…….
⎯⎯「後山家書」
야은 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이 산속에 푸른 나래를 접고 말았다지만, 세상이 달라진 지금에 와서는 두 나라를 섬기지 않겠다는 그 절개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을 만하게 되어 버렸다.
차고 기울고 나아가고 물러남이 하늘의 뜻이랬거니, 돌연 안갠지 구름인지 한바탕 요기로운 선회를 벌이는가 했더니 금오산 멧부리를 운해(雲海)는 삼켜 버린다. 망망한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이 되어 금오산 봉우리는 하염없이 가라앉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하늘이 옳은가 그른가.(天道是邪非邪)
한갓 구름에 휘말리는 산을 대하고 있을 따름인데 나는 왜 느닷없이 사마천의 이 탄식을 떠올려 보는 걸까. “주(周)나라를 섬기다니 수치로다. 의(義)로써 주나라의 좁쌀을 먹을 수는 없노라.” 이렇게 결심하고 수양산 고사리를 캐다가 굶어 죽은 백이숙제 두 형제를 두고 사마천은 길게 탄식해 말하기를, “천도는 공평무사하여 항상 선인의 편이다(天道無親常與善人)라고 한다면 백이숙제는 선인인가 악인인가. 이토록 인(仁)을 쌓고 행(行)을 삼가고서도 굶어 죽고 말았으니…”라고 했다.
패장(敗將) 이능(李陵)을 변호하다가 도리어, 폐하를 기만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극형을 당하게 된 사마천이 죽음 대신에 택할 수 있었던 길은 오직 궁형뿐이었다. 가난하여 속죄(贖罪)할 만큼의 재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기』를 찬술하라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하여 사마천은 더 살아야 했다. 스스로 남근을 잘리고 잠실에 버려지는 남자의 최대 치욕을 택해야 했던 사마천이 인간의 역사를 쓰면서 이렇게 울분을 터뜨리는 건 당연하다 할지 모르지만 사마천이 백이숙제를 두고 가슴 아파했듯, 천도가 옳은가 그른가라고 울부짖는 사마천의 가슴속을 생각하면 나는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사마천과 길야은, 그들은 하늘을 원망하고 하늘에 순응한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가 그 하늘로 해서 어쩌면 각각 자신의 하늘을 열게 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망망한 구름바다 위로 아련히 떠 있는 저 산봉우리, 금오산 꼭대기가 오늘따라 더욱 아득해 보인다.
二. 구름
산을 좀 탄다는 사람이라면 금오산을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바다 같은 호수며 대나무 숲이 서걱거리는 채미정이며 천 길 벼랑 아래 숨을 죽인 해운사며 지령이 울부짖는 명금폭포 그리고 도선이 도를 닦았다는 도선굴이 사철을 두고 보아도 모두가 볼 만하고, 천신만고 빙판길을 기어올라 눈 덮인 정상의 약사암 앞에 지팡이를 짚고 서면 잿빛 옷을 입진 않았어도 가히 속세를 떠났다 함직하다.
그러나 이것만 보고 그냥 발길을 돌린다면 그는 아직 금오산을 제대로 보았다고는 말하지 못하리라. 며칠을 두고 묵을 수가 없거든 떠나는 길에 뒷걸음질을 쳐보거나, 열차 안에서나마 잠깐 고개를 돌려 남녘을 바라볼 일이다.
안갠지 구름인지 끝없이 갈마들며 산을 온통 휘말아버린다. 망망한 구름바다 위로 아련히 떠 있는 저 섬이 정녕 산인가. 구름인가? 산과 구름과 하늘땅의 홍몽세계를 한 번쯤 바라보면, 아침저녁 통근열차에 시달리는 아무개가 어찌하여 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지 알 만하다 할 게다.
열차가 구미역에 도착할 때는 아침 여덟 시쯤, 썰렁한 플랫폼을 밟노라면 나는 이미 선계를 범했다. 아침 햇살을 이고 구름 밖 봉우리는 묵묵히 시정을 토하고 안개가 진을 치는 계곡에는 신운 또한 표묘하다.
서산대사는 지리산을 웅장하나 수려하지 못하고, 금강산을 수려하나 웅장하지 못하고, 묘향산을 웅장하고 수려하다고 했다지만 금오산은 웅장하지도 수려하지도 못하다. 다만 고고하고 단아하고 또 엄숙할 따름이다. 감히 내가 서산대사께 한마디 하노니, 산을 두고 수려하다느니 웅장하다느니 하는 것은 아직 산의 본질을 얻지 못하고 한갓되이 산의 형상에 매여 있기 때문이 아닌가?
산, 봉우리와 봉우리. 그것들은 서로 그쳐 있다. 높고 낮음이 차이가 있지만 그대로 의젓하다. 어떤 봉우리들은 마주 보고 섰고 어떤 봉우리들은 등지고 섰는가 하면 또 어떤 봉우리들은 옆옆이 섰다. 그것들은 본래의 모습을 고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가까워지지도 더 멀어지지도 않는다. 사랑도 미움도 다 넘어선 걸까. 그 시원(始原)일까. 오는 구름 마다 않고 가는 구름 잡지 않아 만고에 자재할 뿐인데 부질없이 구름만 저 홀로 바쁘다.
나는 한낱 구름이 아니었던가. 남들은 나를 한직이라서 부업하기 좋겠다고 한다. 듣기 좋은 말로 한운야학(閒雲野鶴)이라고도 한다. 깔보는 소리면 어떻고 위로하는 말이면 또 어떠리. 나의 일자리가 아무리 춥고 배고파도, 내 직책이 한갓 구실아치마냥 하찮아도 아홉 식구의 호구를 여기에 걸고 부침 표박한 세월이 참으로 구름 같구나!
구름, 구름. 젊었을 때 건성으로 흘려들었던 시 한 수가 요즘 들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
태어나매 한 조각 뜬구름이 일고
죽으매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진다
뜬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나니
생사가 오고가는 것이 또한 이와 같으이
나옹화상(懶翁和尙)의 누님이 나옹한테 염불을 배운 뒤 지었다는 「부운(浮雲)」이란 시이다. 3행과 4행은 한낱 설명이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로 생사에 대한 생각을 딱 끊어버린 자라면 이런 췌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요, 굳이 뜬구름을 들먹이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뜬구름이라고 하는 데에는 아직 미련이 남아 있다.
오늘도 하루해가 다 가는구나! 이 퇴근열차도 막차인가. 고개 들어 금오산을 살펴본다. 산마루 너머 노을이 불탄다. 무슨 미련이 저리도 가관이란 말인가.
三. 눈
눈 덮인 금오산 품안에 들어섰다. 구름을 두른 설봉에는 시취가 감돌고 앙상하던 나뭇가지는 금방 향기를 뿜으며 이름 모를 백화로 흐드러졌다.
개울을 건너 채미정에 들어섰다. 깍, 깍, 까치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앉았다. 객을 맞는 건지 쫓는 건지 모르겠으나 어쩌면 저 까치들은 고사(高士)의 시녀들일까? 슬그머니 나는 옷매무새를 다독였다. 눈에 눌려 휘어져 있는 대나무가 한결 고고해 보인다. 두 왕조를 섬기기를 마다했던 야은(冶隱)의 고절(苦節)인가? 대 수풀은 매운바람을 안고 뭔가를 거부하듯 사뭇 서걱거리고 있다. 두 왕조라 하지만 백성은 하나인데 그 충절이 백성을 위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채미정을 돌아 나오니 바람 끝이 더 차갑다. 지난 봄, 벚꽃이 눈송이처럼 펄펄 날리던 정경을 바라보며 눈이 내릴 때 꼭 여기를 다시 찾으리라 마음먹었었는데, 오늘은 눈을 밟고 서서 그날의 낙화를 연연해하는구나!
계곡으로 들어서니, 소녀 서넛이 산길을 오르고 있다. 눈을 던지며 장난을 친다. 쏴아, 하고 바람이 몰아친다. 소나무 가지 위에서 무수한 눈가루가 안개처럼 뽀얗게 시야를 가리며 내려앉는다. 목덜미를 촐싹거리며 눈가루를 털고는 외투 깃을 세우고 잠시 눈을 감아 본다.
“아아, 바람소리다.”
앞서가던 한 소녀가 탄성을 지른다.
“아니, 물소리야.”
다른 한 소녀가 급히 말을 되받는다. 이때다. 쏴아, 하고 또 한 차례 눈가루가 몰아친다.
“봐라, 바람소리지.”
“아냐, 바람소리 아냐.”
“그럼, 무슨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를 굳이 가려서 뭐 해. 그들의 대화가 곧 바람소리 물소린 것을.
얼마를 걸었을까. 갑자기 잔뜩 찌푸린 날씨가 미심쩍더라니 잿빛 하늘에 눈발이 서면서 점점 폭설로 쏟아졌다. 서둘러 허둥대며 되짚어 버스 정류소까지 내려왔다.
눈을 피할 곳이 마뜩잖은지 사람들은 남의 가겟집 처마 밑에 몰려 서성거리고 있다. 왁자하던 아까와는 달리 별로 말이 없다. 집에 돌아갈 일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눈에다가 또 눈이 쌓이니 걱정이야 되겠지만 세상이 온통 눈에 파묻혀 개체의 고유한 형상이 없어져서 도리어 좋지 않는가? 눈에 덮이는 산천초목을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득의한 듯,『장자』의「제물론」(齊物論) 한 단락을 소리 내어 외운다. 내 목소리가 문득 높아진다. 정상에는 약사암 목탁 소리도 한껏 드높아 있을까? 눈빛이 눈부신 산야를 바라보며 일체의 시비와 일체의 진위가 절대적이 아니며 천지만물과 내가 일체임을 새삼스레 느끼는 것은 아마도 치소(緇素)가 다르지 않을 터.
천지만물과 내가 일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천지만물과 같다진다는 말인가? 천지만물이 나와 같아진다는 말인가? 전자는 장자의 생각이요, 후자는 불학의 견지일 것이다. 천지만물이 나와 같아지면, 그러한 나는 곧 본래면목(本來面目)이 아닌가.
바람소리, 물소리, 눈 오는 소리, 까치 소리를 굳이 가려 뭐 해. 오랜만에 나는 마음이 편안하다. ‘눈아! 오거든 그치지를 말고, 그치거든 부디 녹지를 마라.’ 이렇게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눈을 맞고 가만히 서 있는데, 저만치서 타야 할 버스가 체인이 감긴 바퀴를 조심스레 굴리고 있다.
휘익, 한 줄기 눈보라가 인다. 채미정의 수풀에서는 까치들이 무슨 항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쪽을 보고 요란하게 짖어대고 있다. 눈보라 때문일까, 출발을 알리는 버스의 경적 때문일까? 어느 쪽도 아닐 것이다. 아마도 채미정 까치들은 은사(隱士)의 시녀가 맞는 모양이다. 까치가 영물이라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읽는가? 나는 열없이 웃으며 눈을 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