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Q71afaDRGiA?si=YUWpBbDiCMIAXzA9
(Martha Argerich: Bach - Toccata in C Minor, BWV 911)
1710년경 작곡되었다. 특징적인 패시지가 수많은 음들을 한꺼번에 쏟아놓으며 시작한다. BWV 910과 마찬가지로 아다지오의 명상적인 부분이 이어진다. 짧은 모티프를 대위법적으로 섬세하게 얽으며 나간다. 작품의 핵심은 중간부에 해당하는 '푸가'. 예외적으로 다소 긴 멜로디를 주제로 택했다. '프레스토'(아주 빠르게)로 표시된 마지막 부분은 화려하다.
토카타는 이태리어로 '접촉하다(toccare)'의 수동형에서 나온 말로 연주자의 빠른 '손놀림'에 의해 다양한 미감의 효과를 얻는 악곡입니다. 초기에는 건반악기에만 쓰이지 않았으나, 17세기를 거치면서 연주자의 '터치'에 의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반 악기로 그 사용의 폭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토카타는 기교와 영감의 비중이 높다는 측면이 있어 형식의 자유가 방만하게 치달을 수 있는 악곡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엄격한 틀을 마련하여 형식과 내용의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 작곡가의 수완이 돋보이는 곡입니다.
토카타 전곡 Toccata No.1 - Toccata No.7
https://youtu.be/4_bP6vlypIM?si=F1S8nF-QLEhT-8El
Glenn Gould : All Bach Toccatas (BWV 910-917)
건반 악기를 위한 음악 중 가장 오래된 형태 중 하나인 '토카타'는 이탈리아 말 '접촉하다'(toccare)의 수동형에서 나왔다. 즉 연주자의 빠른 '손놀림'에 의해 다양한 미감의 효과를 얻는 악곡이다. 초기에는 반드시 건반 음악에만 쓰이지 않았으나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는 토카타 형식의 관현악으로 시작한다.) 17세기를 거치면서 연주자의 '터치'에 가장 민감하게 변하는 건반 악기로 그 사용의 폭이 줄어들었다.
토카타는 기교와 영감의 비중이 높다는 측면이 있으나, 특별히 환상곡, 전주곡과 구별되는 확실한 특징은 없다. 바로크 시대 토카타는 환상곡, 전주곡과 마찬가지고 거의 대부분 푸가 형식과 한데 어울려 작품을 구성했다. 토카타를 다용한 바흐의 경우도 독립적인 악곡의 형태로 다수의 토카타를 만들긴 했지만 반드시 중간 혹은 말미에 푸가 악구를 넣었다. 하프시코드를 위해 쓴 BWV 910-916의 7개의 토카타가 대표적이다.
이들 일곱 작품은 작품 번호상 서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각각 작곡 연도도 다르고, 음악의 소재와 조성에서도 관련성이 적기 때문에 연주회 혹은 음반에서 7곡이 반드시 작품 번호 순으로 연주되는 법은 없다. 각 작품은 여러 단락으로 구분되지만 음악은 계속 이어진다. 처음에 환상곡 풍으로 기교를 선보이는 빠른 토카타가 제시되고 그 뒤에 서정적인 안단테 악장이 등장하며 마지막은 푸가 혹은 활기찬 지그 형식의 무곡으로 장식된다. 자칫 형식의 자유가 방만하게 치달을 악곡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엄한 틀을 마련하여 형식과 내용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작곡가의 수완이 돋보인다.
[마르타 아르헤치 Martha Argerich 1941~]
열정적인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1941년 6월 5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처음 빈센초 스카라무차로부터 피아노 수업을 받기 시작하여, 8살 때 콜론느 극장에서 모짜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과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1번으로 데뷔했다. 1955년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유럽으로 이주한 후, 니키타 마갈로프, 리파티 부인, 프리드리히 굴다, 베네디티 미켈란젤리, 스테판 아쉬케나제 등으로부터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특히 프리드리히 굴다는 엄격한 스승으로서 그녀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슈만의 '아베크 변주곡'과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를 불과 5일만에 독파하도록 요구할 정도의 강행군이었다.그러나 그녀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이 과업을 쉽게 해냈다. 1957년 아르헤리치는 불과 3주 동안에 볼자노의 부조니 콩쿨과 제네바의 국제 피아노 콩쿨에서 연속 우승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때문에 혹사당하기 시작했다. 그후 해마다 150회나 되는 협연은 그를 신경쇠약 직전으로 몰고 갔고 급기야 일단 후퇴해서 휴식기에 들어간다.
1961년부터 그는 미켈란젤리에게 배웠다. 너무나 열정적이고 외향적인 그녀의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아니면 정말 무리한 연주로 감각을 잃은 탓일까? 미켈란젤리는 그녀에게 ‘피아노를 그만두라’는 선고를 내렸다. 어쨌든 그 처방은 들어맞아 그녀는 재차 휴식기를 거친 뒤 1965년의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배석했던 위젠 리스트는 그녀의 연주에 대해서 '화산처럼 강렬한 열정의 분출'이라고 극찬했다.
1967년 뉴욕, 링컨센터의 연주를 통해 미국에서 데뷔하고, 1968년 지휘자, 샤를르 뒤트와와 결혼했다. 1970년 샤를로 뒤트와 지휘, 마르타 아르헤리치 피아노 연주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을 녹음하여 단번에 베스트셀링 레코드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후에 그녀는 뒤트와와 이혼했다. 그리고 한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질주하던 아르헤리치는 83년에야 멈춰섰다. 그리고 그녀는 실내악으로 연주의 초점을 돌렸다.피아노 협주곡 1번 녹음은 모두 3종이 있다.
아르헤리치의 레파토리는 베토벤, 쇼팽, 슈만, 리스트, 드뷔시, 프로코피에프, 라벨, 바르톡 등을 포괄하지만, 그녀는 주로 19, 20세기의 비르투오조 피아노 작품 연주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그녀 혼자서 연주하는 경우를 만나기가 어렵다. 아르헤리치는 1978년 워싱턴 DC에서 바르톡의 소나타와 아르헨티나의 현대 작곡가 히나스테라의 '아르헨티나 무곡' 세 작품을 공연한 이후 솔로 리사이틀 무대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떠하든지, 그녀는 혼자서 연주하는 것보다 다른 연주자와 함께 하는 것을 즐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마이스키, 기돈 크레머, 그리고 마음맞는 음악친구들과의 공동작업이 역시 성공을 거두며 나타났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DG)는 그중 대표적인 명반으로 손꼽힌다. 그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녹음은 모두 3종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인 아바도 지휘의 베를린 필과의 것(DG, 1994년)이 좋으냐 키릴 콘드라신 지휘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의 것 (필립스, 1980년)이 좋으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역시 아바도와의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3번과 라벨 협주곡(DG)이나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와 ‘소나티네’(DG)도 유명하다.
아르헤리치는 94년, 기돈 크레머와의 내한 연주회에서 피아노 현을 끊어뜨리는 ‘시범 아닌 시범’으로 가공할 만한 파워와 타건의 집중력을 한국 팬들에게 확인시켜준 바 있다. 그는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명 피아니스트임에 틀림없다. 그를 특별히 ‘여류’라는 꼬리표를 달아 따로 분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연주는 남녀를 통틀어도 스케일이 크고 힘차며 역동적인 편에 속한다. 그렇다고 섬세한 시정의 표현에 약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경지에 오른 놀라운 테크닉, 남성 피아니스트를 능가하는 강렬한 타건, 풍부한 시적 서정성이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열 손가락을 통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라!...당신도 이 인상깊은 피아니즘에 반하게 될 것이다!
글출처: 하늘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