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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어린이 날,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며칠 전부터 벼르던 고향 봉화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수 주일 전 어느 신문사에서 내 고향이 봉화인 줄 알고, 요즈음 화제가 되고 있는 <워낭소리>라는 영화와 결부하여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하였다. 이 영화의 배경이 바로 경북 봉화이다.
그래서 나는 봉화군청에 전화를 하고, 컴퓨터를 검색하고, 민속사전등을 찾고 하여, <워낭소리와 봉화사람들>이라는 글을 써서 신문에 활자화 되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내 고향 봉화를 찾지 않은지 45년이나 되는 완전 탈향인이다.
그래서 말은 못하고 조금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내가 고향을 찾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나의 피붙이들이 완전히 고향을 다들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이래로 고향 봉화군 상운면 하눌1리(산정리)와 하눌 2리(개밑)에 세거하던 영일정씨들이 완전히 탈향하여 버렸기 때문에 귀향을 하더라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물며 하룻밤 묵어갈 친척 하나 없었다.
게다가 노모와 동생들이 살고 있는 곳은 대구이고, 내가 사는 곳은 서울이니 대구와 서울만을 오르내릴 뿐, 원고향인 봉화는 자연 나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내 바로 아래 동생이 대구에 살면서, 부산에 주로 흩어져 사는 사촌들과 고향에 묻혀 있는 어른들의 묘에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을 가끔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향 봉화에의 그리움을 언제나 가슴에 지니고 살았다.
증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전혀 기억에 없고, 조부 조모와 백부님 내외 그리고 세분의 숙부님 내외분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작은 할아버지 내외분과 5촌 당숙 내외분도 묻혀 있다.
내가 이들 조상들의 성묘행렬에 끼지 못했던 이유는, 아버님 묘소가 대구 근교에 있어서, 명절날 대구로 내려가면 인파를 헤치고 아버님 묘소를 찾는 것도 힘들어, 고향 봉화까지 올라갈 시간적인 이유가 없었다.
변명같지만 나의 서울 생활은 그만큼 빡빡하게 돌아갔고 도무지 시간적인 여유같은 것이 없었다.
나는 타향에서 태어났고, 젊은 시절 탈향하여 공무원 생활을 하신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나의 고향 체험이란, 가끔 아버지를 따라 명절날이거나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큰아버지 집을 찾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의 본격적인 고향 체험은 내 나이 20세 되던 해였다. 그러니까 1963년도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소설공부를 하고 있었다.
대구의 명문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서울 S모 대학 법대에 진학하여 고시에 합격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매진하고 있었으며, 집안 사람들 누구나, 고교 은사님 어느분이나 나는 충분히 그것을 성공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3 때 인간존재에 대한 청년다운 심각한 좌절감을 맛보았다.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가치는 무엇인지 하는 따위에 수많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었다.
나는 극도의 허무감에 빠졌고,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자니 나는 갈 데가 없었고, 그래서 고향 봉화로 내려갔다.
그래서 아버님 바로 밑 동생, 나의 큰 숙부님 댁에서 한 6개월 가량 체류하면서 소설을 습작했다.
나의 본격적인 시골 체험이었다.
이듬해 나는 결국 대학진학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서울대 불문학과에 입학하여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고향을 한번도 찾지 않았으니, 이번 방문은 꼭 45년 만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이번 방문이 45년만의 유일방문은 아닌 것같다.
한 20년 전쯤에, <월간 조선>에서 기자 한 사람과 사진 기자 한 사람을 나에게 딸려 보내면서 나의 고향를 취재하게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그 글 재목이 아마도 <내고장 탈향인사들 봉화편>인 것 같다. 일정이 바빠 차를 세워놓고 잠시 잠시 사진 촬영만 한 것 같다. 어른들을 찾아뵌 것도 아니고 고향사람들에게 무슨 인사같은 것을 차린 것도 전혀 아니다.그러니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귀향은 아니다. 체류시간이 불과 한 시간 정도였었던 것같다. 이 때만 하더라도 고향은 내가 습작하던 시절과는 별로 바뀐 것이 없었다.
너무 급작스레 잠시 다녀가서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번 귀향은 대학을 정년하고 조금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2007년도에 <한국소설>에 발표한 중편소설 <장마>나, 이번 여름 <시에> 여름호에 발표할 중편소설 <불>같은 소설들은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나의 이런 고향 체험이 큰 자산이 되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7시 40분 발 봉화행 고속우등 뻐스에 몸을 실었다.
꿈같은 일이었다.
옛날 같으면, 뻐스같은 것은 물론 없었고, 중앙선을 타고 영주까지 가서, 봉화행 뻐스로 갈아타고, 봉화읍내까지 가서, 다시금 재를 넘어 고향으로 가야만 했다. 그럴려면 최소한 열 시간은 걸렸다.
그러나 안내판에는 소요시간 2시간 40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45년 전의 고향 봉화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눈 앞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소읍의 이름부터 바뀌어 버렸다. 당시는 봉화군 내성면으로 불리웠다. 그래서 지금의 봉화읍은 내성이었다. 그러나 내성이라는 이름은 구역이름으로 변질되어 버렸고, 읍내는 봉화읍으로만 불리웠다.
뻐스가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서자 말자 나는 잠으로 떨어졌고, 눈을 떴을 때는 나는 벌써 어느 낯선 도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거대한 뻐스는 어느듯 봉화에 이른 것이다.
꾀죄죄하고 고색이 창연했던 내 머릿속의 산간 소읍의 모습은 없었고, 여기 저기 꽤 높은 건물들이 들어선 번쩍거리는 소읍이 널려 있었다.
분명 봉화라는 것이었다. 허참 이럴 수가 있나.
터미널 앞에는 택시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나는 더 둘러볼 것도 없이, 우선 고향마을부터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산정리로 가 주세요." 했다.
그 멀고 먼 산골 마을로 갈려면 서둘러야 했다. 나의 귀경 예정은 오늘이었다. 하룻밤 고향의 여관에서 묵을 작정을 했으나 동행한 아내의 내일 강의 일정 때문에 당일로 귀경해야만 했다.
기사와 몇 마디 말을 나누어 보았다. 나의 6촌 동생들과 국민학교 중 고등학교 동기생이었다.
마구 달리던 택시가 잠시 주춤거리더니 멈추었다.
"다 왔십니더. 산정립니더-"
했다. 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당숙 댁까지 택시가 올라갈 수 있습니더. 올라갈나이껴? 그 바로 뒷집이 워낭소리 최씨 할아버지집입니더. 알고 계시니껴?"
"네 네 알고 있습니다. 올라갑시다."
그래서 택시는 내가 소설공부하던 집 앞, 즉 큰숙부님댁 앞을 지나서 작은할아버지 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차 안에서 보니, 숙부님댁은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밭으로 바뀌었다.
그 위에 있는 작은 할아버지댁은 버려져 폐가가 되어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회고에 젖었다가 몇 컷 사진을 찍었다.
45년 세월의 무서움을 알만했다. 그 사이 변하지 않은 것이 뭣이 있겠는가.
그 바로 뒷집이 워낭소리 주인공 최씨할아버지 집인데, 내가 거기에 온 관광객인 줄 알고 자꾸만 무슨 안내원 완장을 찬 사람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최씨할아비지 댁으로 올라가 몇 컷 사진을 찍고 방명록에 싸인하였다. 군청에서 나온 자원봉사자들은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나의 신문 기사를 보았다는 것이다.
나는 차를 몰아, 산정2리로 갔다. 속칭 개밑이라고 불리는 동네인데, 60년도 더 전에 타계하신 할아버지가 사시던 마을이다.
그러니까 아버님이 태어나 자라서 장가를 드신 집이다.
언제나 어머님께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추억하시며 몸을 떠시던 집이 바로 이집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회갑날 이곳을 찾은 기억이 있다. 아마도 국민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나이였을 것으로 기억된다.
집을 찾지 못해 터밭에서 일하는 촌노에게 물었더니, 저기 저 폐가가 그 집이라는 것이었다.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폐가가 되어 있었다. 집이라기보다도 헛간이었다.
그 집과 함께 그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전부 이 세상에서 사라져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분들은 나의 피붙이이고, 할아버지 내외분은 지금의 나의 존재을 가능케 했던 분들이다.
택시를 몰아 옆동네 구동으로 갔다.
구동은 할아버지 타계 후 좀더 넓은 곳으로 나오신다고 큰아버님께서 이사를 가신 동네이다.
나의 습작시절 구동 백부님댁은 적어도 60칸을 될만한 큰 집이었다. 동네 들머리에 있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묵어가는 집이었다.
그러나 집은 안채를 제외하고는 전부 헐려버리고 밭으로 변했다.
그 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월간 조선 기자와 왔을 때, 집이 너무 웅장하고 양반가의 전형이라면서 수많은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이어서 거촌으로 갔다.
거촌은 이름그대로 거대한 마을이다.
변씨 집성촌인데, 여기 출신 인사가 공영토건이라는 회사를 건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종택과 기념관을 크게 지워놓았다.
몰락한 영일정씨들의 버려져 폐가가된 집들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었다.
일정이 바빠, 차를 유명한 권벌의 닭실 마을로 몰았다.
충재 권벌은, 사실 퇴계 이황이나 회재 이언적 혹은 율곡 이이 정도의 성가를 가지지는 못한지도 모르겠다.
사실 충재의 학문은 위의 분들에게는 못 미친다.
하지만 충재 권벌은, 어쩌면 조선 500년 사에서 가장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신하의 상을 확립한지도 모르겠다.
권벌은 성종-명종 조의 인물로, 진사에 합격한 후 중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정계에 등장했다.
충재는 친구의 모반 쵝책을을 알고도 변고하지 않는 정막개를 상소하여 파직을 지킨 공으로 이조 정랑이 되었다. 조선 충신의 전형의 모습을 띄워갔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었으나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며 삭탈관직되어 귀향하여 15년간 초야에 묻혀 지냈다. 다시 등용되어 삼척부사 밀양부사 영천군수를 지냈고, 한성판윤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을사사화시 몰락하는 대윤(윤임)파를 옹호하다가 파직되어 함경도로 귀양가서 죽었다.
사후 복권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권벌은 학문은 짧으나, 안동 권씨의 후손으로 안동을 대표하는 강직한 조선 신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는 인물이다. 그의 < 충재 일기>는 귀한 서적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얼마나 충직한 신하였던가 하면 송 나라 시절 주자가 지은 수신서 <근사록>을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니면서 자신을 돌아보곤 했다고 한다. <충재일기>와 <근사록)이 충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충재가 태어나고 살았던 마을이 <닭실마을>이다. 그의 유품을 모은 박물관과 정자인 청암정이 있고, 그의 탄생집과 종가 등 건물들이 있으며, 마을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정부에서 보수 관리하고 있다.
닭실 마을 건너편에 있는 송이버섯 전문집에서 점심을 들었다.
15000원짜리 송이버섯 찌개가 일품이었다. 요리전문가인 집사람은 나물들이 아무리 보아도 타 지역에서 가지고 온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여기 소백산 산록에서 직접 캔 것이라고 식당주인은 말했다.
정갈한 소반에 차려진 취나물, 돋나물, 두릅나물, 밀가루묻힌 무청찜, 당귀나물, 참나물, 산나물, 우엉 등의 나물반찬이 고향의 입맛을 회상시켜 주었다.
점심을 먹은 후, 봉화군 물야면으로 가서, 이몽룡 생가집을 방문하였다.
이몽룡이 소설 속의 인물이니 생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춘향전>은 여기 봉화군 물야면 소재의 계서당(중요미속자료 171호)의 주인인 성이성 남원 부사의 아들을 그린 것이라는 것이다. 성이성은 조선 인물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사람이지만, 실존인물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남원부사를 비롯한 6개고을의 수령을 지낸 인물로 사서에 기록되고 있다.
성이성이 여기 봉화군 물야면 사람이다. 그가 은퇴 후 지은 집이 계서당인데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가 남원부사로 발령되어 임지에 갔을 때, 춘향전 속의 이몽룡과 비슷한 나이의 아들이 있었으며, 춘향전과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믿을 수 없는 학계의 여러가지 학설의 하나에 불과하다. 춘향전의 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고, 그것의 탄생 배경에 여러가지 학설이 난무하고 있어서 이 지방 사람들의 주장을 백 퍼센트 믿을 수는 없지만, 성이성이 과거에 급제하여 남원 부사로 갈 때 이몽룡같은 나이의 아들이 있었고, 기생 출신 처녀와 염문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봉화사람들은 흔히들 <이몽룡 생가집>이라고 계서당을 지칭한다.
동행한 집사람이 여기 물야사람이다. 풍산 김씨 집성촌이 잘 조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내 역시 전혀 고향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방문은 생략하였다. 장인 어른이 9살 때 탈향하여 서울에서만 살으셨다고 하니 무슨 기억같은 것이 편린이나마 있을 턱이 없었다.
집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 전남대학교에서인데, 그 멀고 먼 호남에서 봉화 사람 끼리 만났다니 조금은 운명적인 것같다.
당시만 하더라도 교통이 아주 불편하여 호남에서 경상도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귀경 시간에 쫓긴 우리들은 봉화읍으로 돌아왔다. 봉화로 돌아오는 길에 아마도 봉화에서는 가장 귀한 보물인 물야만 복지리 마애여래좌상을 보았다. 이 마애좌상은 신라시대의 것인데, 경주의 그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경주 마애상들은 큰 바위에 새긴 것이지만, 여기 봉화 마애상은 바위에 새긴 부조상이긴 하지만 부처의 몸체가 독립되어 있어서 특이하다. 그래서 한결 귀한 마애상이다. 국보 201호이다.
봉화에 돌아왔다. 시내 구경을 했으나 전혀 45년전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옛날을 더듬어 시내를 돌아다녔으나 전혀 내 기억 속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았다.
알고 보았더니, 옛날 시내로 들어가던 다리 건너편에 새로 생긴 거리였다.
45년 전으로 시간 여행은 끝이 난 것이다.
열시 반에 봉화에 도착하여, 두시 반에 영주행 뻐스에 올랐으니 정확하게 네 시간 봉화를 택시로 돌아본 셈이다. 그것도 한 시간 점심을 먹었으니 세 시간 동안 조상들의 긴 삶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이곳 봉화를 돌아본 것이다.
영일정씨 일파가 언제쯤 여기 봉화 땅으로 흘러들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 같다. 그들 중 3대에 걸쳐 있는 우리 집안이 여기 봉화 땅을 완전히 떠나 버렸다.
그러나 나는 봉화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할아버지 할머니, 백부님 내외분, 세분 숙부님 내외분들이 잠든 곳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대구 교외에 모셔져 있는 아버님도 이곳으로 이장하여 선영을 이룩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3시간으로 압축된 45년 세월, 어쩐지 죄스러운 마음 뿐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금새 판단이 서지 않는다.
어쩌면 오늘 내가 만난 내고향 봉화의 모습은, 우리 집안 3대가 여기 봉화에서 떠나버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45년 세월이 이들을 전부 죽음의 망각으로 몰아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멀잖아 티끌로 돌아갈 희미한 그들 삶의 흔적만이 쓸쓸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내 고향 봉화의 모습이었다.
동서울 터미널에 내린 나는 근처 주점에 들러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추겼다. 알 수 없는 감격 탓으로 가슴이 계속 울렁거렸다.
대학을 은퇴한 지금 나의 여생도 알 수 없는 시점이라서 그런지 가슴을 후비고 드는 무상감을 달랠 길이 없다. 내가 아는 고향 어른들은 전부 돌아가셨고, 내 주변인들도 다들 노인이 되어 버렸다. 앞으로의 새로운 45년, 그때 나는 물론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삶의 흔적을 찾아 혹시 여기 봉화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