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서산. 뭉게구름과 새떼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푸른 가을하늘을 바라보니 진정 가을 느낌이 물씬하다. 어느덧 출출한 시간이다. 서산에 왔으니 당연히 짭짜름한 간장게장이나 우럭젓국, 어리굴젓 등을 먹어줘야겠지만 오늘은 그런 별미의 유혹을 뿌리치고 산속에 있는 고풍스런 느낌의 한옥에서 전통의 맛을 살리며 소박하게 밥을 짓고 있다는 식당을 찾았다.
서산에서 부석으로 가는 길, 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 송곡사 조금 못가서 소박한 밥상이란 푯말이 자그맣게 있는데, 아마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것 같다. 입구만 잘 찾는다면 길의 맨 끝에 있으니 햇갈리지는 않겠다. 잘 모르겠다면 마을 입구에서 기와집 식당이나 강현성씨밥집이 어디냐 물어보면 될것이다. 시골인심은 살아 있으니까.
2차선 도로에서 시골길을 따라 500여m 정도 들어가면 주변의 모습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세련되고 잘 꾸며놓은 한옥집이 보인다. 이곳의 주인장은 개량 한복을 입고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넘겨 묶은 인자한 모습이다. 왠지 궁중요리나 전통찻집의 주인같아 보였다. 지금은 딸과 함께 운영하는데, 조금은 앳돼보이는 이쁜 딸이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해 우리네 전통음식에 대한 연구도 하고 강의도 한다고. 그렇지만 이집 음식들의 내공은 대부분 사장님이게서 나온것이고 딸은 그 내공을 이어 현대에 맞게 퓨전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한다. 어머님이 일군 가업을 따님이 대를 이어가는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훈훈했다.
식당의 이름은 소박한밥상. 상호와는 달리 겉에서 보면 절대로 소박해 보이지 않는다. 고급 한정식집 분위기다.
입구에 들어서면 마당에 돌로 만든 세숫대와 수도꼭지가 세개 있다. 먼저 이곳에서 깨끗하게 손을 씻고 마음을 비우고 들어오란 말인가. 물론 마음은 벌써 비워졌고 뱃속도 어디 마실 갔는지 텅 빈 상태이다.
소박한밥상의 소박한 마당(?)이라 보기엔 꽤 넓은 주차장과 연못, 장독대가 있다.
식당이라기보다는 한복을 입고 서예를 쓰며 분재를 할것같은 모양좋은 고졸한 멋의 기와집이 보인다. 입구에는 선명하고 좋은 향기를 내뿜는 들꽃들이 있고 식당 뒷편으로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열맞춰 놓여있다.
뒷편 장독대들은 식당의 인테리어이고 아래에 있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진짜 이집의 음식맛을 살려주는 장들이 들어있는 보물단지이다.
만든지 오래된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작은 연못에는 샘물약수도 있고 거북이, 자라 모양의 조각도 있다. 음식을 즐기고 난 후 이곳 돌위에 앉아 연못에 비치는 구름도 감상하고 연못안을 노니는 물고기들을 보면서 식후 포만감을 조금은 없앨 수 있다.
식당 앞에는 커다란 볼록한 허리선을 가진 사람하나쯤은 쉽게 들어갈 듯한 장독이 줄지어 있는데, 호기심에 뚜껑을 열어보니 안에 보이는 것은 먼지 뿐이었다. 어릴적 잘못해서 도망치다가 이런 항아리에 숨은적도 있었는데. 그리고 누룩으로 담근 술을 이런 큰 항아리에 보관해서 방안에 술냄새가 진동했었다. 할머님은 손수 담근 술을 채에 걸러 맑게 올라온 술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대접도 하고. 진한 향의 곡주를 지금은 맛볼 수 없음이 참 아쉽다.
소박한 밥상의 외부 모습. 소박한 외관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조용하고 여유있는 분위기이다.
식당 앞에는 이런 커다란 나무들이 우뚝 솟아있는데, 나무에 그네를 매달아놓아 식사 후에 한번 타보면 괜찮다. 이런 앞마당이 있음 좋겠다. 하지만 땅이 있어야지.
소박한 밥상의 한상. 이 집은 한정식을 내오는데, 1인분에 12,000원으로 깔끔하고 정갈한 상차림을 봐서는 저렴한 편이다. 가끔 보는 한정식집의 럭셔리하고 상다리 부러지는 음식들은 아니지만 서산의 고향맛과 소박하게 자연을 담은 음식들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텃밭에서 직접 기르거나 좋은 재료만을 구입하여 천연조미료로 양념을 하여 정성스럽게 요리를 해서인지 담백하고 개운한 맛이 난다. 평소 고기나 기름진 음식들을 자주 먹었다면 이런 웰빙식사로 부담스러워진 속을 다스릴 수 있겠다. 하지만 평소에 풀만 드신 분들은 괴기요리 좀 구경하겠다 싶어 찾았다면 조금 서운하겠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김이 모락모락나는 가마솥에서 지은 밥과 손수 만든 반찬과 같이 정해진 메뉴는 없고 철에 따라 장에 나오는 재료들을 선별해 만들기에 언제 가느냐에 따라 맛볼 수 있는 음식이 다르다. 하지만 어머니의 손맛과 따듯한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연뿌리와 신선한 야채로 만든 샐러드는 음식을 먹기 전에 맛본다면 식욕을 돋우어 준다. 아삭아삭거리는 야채들의 맛도 괜찮지만 샐러드에 넣은 소스가 한결 맛있다.
서산 시골집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것들이 한자리에 놓여있다. 게국지와 깻잎찐것, 시래기와 부추. 모두 먹어보면 할머니들의 손맛을 느낄 수 있다.
직접 콩을 갈아 만들었다는 손두부는 고소한데, 잘 익은 가을김치에 싸먹으면 좋다. 올이 성긴 손두부는 큼직하게 썰어 한입 가득 두부의 향이 전해진다. 평소에 된장찌개나 두부김치로 먹던 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약간은 짭짜름한 느낌이다. 손맛이라 그런가 아님 천일염을 넣어서 그런가.
예쁘고 청순하게 생긴 딸이 역시 개량한복을 입고 곁에 와서 음식을 상에 놓으며 하나 하나 설명해준다. 이건 뭐고 저건 뭔데 어쩌구. 물론 밥먹느라 귀에 잘 들어오지 않지만 어머니와 딸이 붕어빵처럼 닮아있다. 이런 음식점을 하려면 돈도 꽤 많이 들것인데, 먹고 살기에 부족함도 없고 큰 욕심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에게 맛있고 영양 만점인 음식을 대접하는것이 보람이라고 하니 참 부럽다. 이집에서는 일반적인 당면으로 만든 잡채가 아닌 우엉으로 만든 잡채를 내놓는다. 우엉을 잘 말려 간이 잘된 간장과 민들레 조청으로 조려서 호박과 고추, 느타리 버섯과 함께 볶아 잡채를 만든다. 우엉은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잘게 면발처럼 만들어 볶은 스타일은 입맛에 잘 맞는듯했다. 하긴 뭐든 안가리고 먹는 편이니 맛이 없는게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밥상에서 조금은 특이했던 것들. 오른쪽의 감태야 많이 먹어봤지만 왼쪽의 것은 처음 먹어봤다. 감태는 밥에 올려먹거나 게장과 함께 먹으면 그 향과 부드러움으로 입맛 없을때 먹으면 좋다. 잘 부스러지기에 김처럼 싸먹기는 안좋지만 감태와 바지락이나 굴을 넣고 감태국을 끓이면 밥한그릇 뚝딱이다. 왼쪽의 음식은 고운 김을 간장소스에 넣고 잰 김짱아찌라는데, 파래맛도 나는것 같고 특이했다. 얇은 지라 떼어 먹기가 조금은 힘든편.
머리와 꼬리는 따로 떼어내고 조기의 살만 먹기좋게 놓여있다. 조기의 비릿한 향은 없고 잘 말려서인지 짭짜름한 맛의 조기향이 썩 괜찮다. 가마솥에 사발을 넣고 그 안에 조기를 올려 부뚜막에서 쪄서 올리던 시골에서 맛볼 수 있는 조기맛이다.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하는 조기반찬은 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맘을 담은 반찬중 하나. 그 옆에는 역시나 가마솥에서 새벽녘에 낳은 싱싱한 계란으로 젓국을 넣고 찐 계란찜도 한사발 뚝.
마늘과 매실짱아찌, 마늘쫑 등이 하얀 그릇에 담아져 온다.
서산하면 어리굴젓. 예전 지금의 천수만방조제를 막기 전에는 서해안의 외딴 섬이었던 간월도에서는 어리굴젓을 많이 담갔다. 싱싱한 굴이 지천이지만 사철 내내 밥상에 올리기 위해서는 짭짜름하게 젓갈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반찬이 없어도 이 어리굴젓 하나면 밥 한사발 비우고 한공기를 더 부탁했던. 요즘 서해안고속도로 서산휴게소에서는 어리굴젓과 굴밥을 팔고 있으니 여행길에 들려 잠시 서산의 맛을 봐도 되겠다.
된장에 넣어 만든 고추와 멸치.
한정식에 빠질 수 없는 구수한 청국장. 겨우내 처마에 걸어두었던 잘 마른 메주로 만든 청국장에 서산의 육쪽마늘과 고추가루, 묵은지를 넣고 끌인 된장맛은 진하면서도 깊은 향기가 난다. 조금 짰지만 그래도 자꾸 숟가락질하게 만들었다.
식사중에 나온 더덕구이. 하루 손님에게 제공할 만큼만 만들기에 언제나 그 맛은 신선하다.
소박하지 않은 소박한 밥상의 재활용 휴지. 두장 가져와서 책상 한켠에 걸어 두었다.
후식으로 나온 쑥개떡. 봄쑥과 서산의 뜸부기쌀로 만든 쑥떡은 여느 떡이나 빵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다. 떡에는 검은 콩이 함께 해서 고소함도 느낄 수 있다. 솔잎을 깔고 감잎으로 떡을 싸서 쪄낸다고 한다.
쑥개떡의 맛을 한층 감미롭게 만들어주는 걸쭉한 조청과 함께 먹어야 한다.
조청을 떡에 발라 한입 베어물면 가을과 초봄의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마지막은 생강을 넣은 식혜가 나오는데, 생강이 향이 강해서인지 쌉싸름하지만 뒷맛은 깔끔하다.
손님을 가족처럼 편안하게 맞이해주고 언제나 몸에 좋고 먹기 편한 보약같은 따듯한 밥상을 내주는 곳.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묻어나는 소박한 밥상에서 잘 먹으니 몸도 마음도 한결 건강해진것 같다. 배부르게 먹기보다는 몸에 좋은 보물을 먹고 나온듯하다. 서산분들은 외지에서 중요한 손님이나 친척들이 찾아올때 이집을 들리곤 하는데 같이 온 사람들 모두 좋다고 한단다. 소박하지만 소박함 속에 정성과 사랑, 웰빙이 함께하는 밥상이다.
이곳에는 직접 담근 청국장과 깻잎짱아찌, 쑥개떡과 조청도 판매하니 식사 후에 포장해서 가져오면 두고 두고 맛있는 밥상을 대할 수 있을것이다.
소박한 밥상의 밥맛을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 안주인님과 넷째딸 중 막내인 요리전문가 따님의 모습. 어머니는 올해 환갑이라는데, 단정하고 고운 모습이 한복과 잘 어울린다. 아직 미스라고 하는데, 어떤 남자분이 데려갈지 평생 맛난 음식도 먹고 참 복도 많은 사람일 듯 하다.
어릴적에는 주로 이런 가마솥에 쌀을 안치고 모닥불과 솔걸로 불을 때면서 밥을 했는데, 할머님의 손길이 그리워진다. 가마솥에 눌린 누룽지를 박박 긁어서 먹는 재미 또한 끝내주는데, 가마솥 옆에서는 소여물이 팔팔 끓어가고.
야무지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근 초등학교 학생이나 모임등에서도 이곳에 방문해 전통음식체험을 하기도 한단다. 전통한복을 입고 논길을 조카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다정해 보인다.
여름철에는 연잎밥 정식을 내지만 요즘에는 소박한 청국장찌개를 준비해준다. 예약하지 않으면 못먹을 수 있으니 출발하기 전에 미리 예약하는 센스를.. 서산별미인 낙지요리나 게장 등을 함께 내면 더 좋을것 같은데, 소박한 밥상과 어울리는 농주나 동동주가 함께 한다면 금상첨화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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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비와 깨구락지..여행을 떠나다! 원문보기 글쓴이: 포비와 깨구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