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처음 갔을 때, 내가 제일 먼저 가고 싶었던 곳은 브로드웨이의 극장들이었다. 뮤지컬 [캣츠]와 [오 캘커타][미스 사이공] 등을 나는 브로드웨이 42번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전설적인 극장들에서 보았다. 처음에는 관람료가 제일 저렴한 수요일 마티니 공연을 찾다가, 2진보다는 특급 배우들이 출연하는 토요일 저녁 공연 표를 구입해서 다시 또 보기도 했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대명사다. 육완순 교수에 의해 국내에서 무용극으로도 만들어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의 대성공 이후, 그가 만드는 작품들은 한결같이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나는 브로드웨이에서 그의 뮤지컬 [캣츠]와 [오페라의 유령]을 보았고, 한국에서 제작된 그 뮤지컬들을 다시 보았다.
특히 [오페라의 유령]은 1911년 발표된 가스통 르루의 원작 소설이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되었고, 이미 1925년 무성영화 시절에 유니버셜에서 처음 영화화 된 이후 공포 영화 번전으로 혹은 록 음악 버전으로, 5번이 넘게 다양한 시각으로 영화화되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상표로 우리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원작소설이 발표된 시기는 산업혁명 이후 모더니즘 등 새로운 문예사조가 움트던 불안한 혼란기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제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있던 그 혼돈의 시기를 배경으로 사랑의 불협화음과 운명의 힘을 장중하게 그려낸다. 1870년대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무대로,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지만 선천적인 상처 때문에 얼굴에 가면을 쓰고 오페라 하우스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팬텀과 오페라 합창단원인 크리스틴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1988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그 아름다운 음악과 스펙타클한 구성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버전을 압도한다. 강렬한 첫 음에서 주루룩 계단을 미끄러지듯이 하강하는 장중한 서곡은, 이제 [오페라의 유령]의 대표적 이미지로 세계인들에게 각인되었다.
이번에 조엘 슈마허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된 [오페라의 유령]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직접 제작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오피라의 유령] 영화버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르네 젤위거와 캐서린 제타 존스, 리처드 기어 주연의 [시카고]처럼 최근 할리우드에서 일고 있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영화화 붐과 맞닿아 있다.
조엘 슈마허의 [오페라의 유령]은 현재-과거-현재의 구조로 되어 있다. 물론 영화의 핵심은 오페라 하우스에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과거다. 이제는 폐허가 된 오페라 하우스의 소장품들이 경매에 붙여지고, 경매가 진행 중인 폐허의 공간에 노귀족과 귀부인이 서로 경쟁적으로 물건을 구입하려는 장면에서 영화는 플래시백 된다.
오페라 [한니발]의 공연 준비가 한창인 오페라 하우스. 그곳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사고가 발생한다. 두려움에 가득 찬 여주인공 카를로타가 사고 대책이 수립되지 않자 출연을 거절하고 퇴장해 버리자, 오페라 제작진들은 합창단원의 한 명이었던 크리스틴을 대타로 기용해서 공연을 하고, 의외의 성공을 거둔다.
크리스틴에게 노래를 지도해주는 사람은 [팬텀]이라고 불리는 오페라 하우스의 신비한 존재. 그는 거대하고 복잡한 오페라 하우스에 기거하는 귀신같은 존재다. 사람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무서워한다. 하지만 크리스틴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팬텀은 한쪽 얼굴을 흰 가면으로 가리고 있다. 선천적 기형으로 괴괴한 얼굴을 갖고 태어난 팬텀의 과거가 다시 플래시백 되면서 삽입되어 있다.
[한니발]의 성공에 고무된 극단에서는 다음 작품으로 오페라 [일 무토]를 기획한다. 팬텀은 크리스틴을 주인공으로 기용하지 않으면 재앙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극장 측에서는 카를로타를 주인공으로 결정하고 공연을 강행한다. 그러나 극장 스텝이 역시 이상한 사고로 목에 밧줄을 걸고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공연은 중단된다.
팬텀의 천재적 음악재능에 끌려 그에게서 노래를 지도 받았지만 극장의 새로운 후원자로 등장한 라울이 자신의 어린시절 친구라는 것을 알고 라울에게 끌리는 크리스틴과, 그것을 알고 질투에 사로잡히는 팬텀, 영화의 후반부는 삼각관계의 갈등으로 뒤덮여 있다.
그러나 조엘 슈마허의 이 영화는 실망스럽다. 아름다운 음악과 화려한 제작 셋트로 시청각적인 만족은 충족시켜주지만 드라마 구성에는 허점이 많다. 우선 팬텀의 신비스러운 캐릭터가 감소되어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관객을 압도했던 것은 팬텀의 존재감이었다. 그러나 조엘 슈마허의 연출에서 팬텀은 단지 욕망으로 가득찬 악인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캐릭터의 입체적 구축에 실패한 것은 팬텀 역을 맡은 제라드 버틀러의 카리스마 부족한 연기에도 책임이 있다.
또 뮤지컬의 드라마투르기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팬텀의 상처 받은 유년시절이나, 오페라 극장의 젊은 후원자 라울과 크리스틴의 다정했던 유년시절이 영화에는 삽입되어 있는데, 결과적으로 작품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팬텀의 과거가 자세하게 등장할수록 그의 신비감은 약화된다. 오페라 극장의 거대한 천정과 지하 어디에 거주하는지 모르는, 아니 정말 현실 속에 존재하는지 않는지 모르는, 신비감으로 가득찬 팬텀의 존재는 영화에서는 첫 장면부터 모습을 드러내며 사실적으로 관객들에게 부각된다. 이것은 [오페라의 유령]에서 팬텀의 신비감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고려하지 않은 최악의 각색이다.
또 라울과 크리스틴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을 삽입한 것은 두 사람의 로맨스를 튼튼하게 하는 데는 기여하고 있지만, 오페라 하우스로 공간을 제한해서 거대한 폭발력을 갖는 뮤지컬 내러티브의 힘에 비하면 작품의 기본 축이 훼손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양한 공간적 분산은 주제의 힘을 약화시킨다. 물론 제한된 공간에서 전개되는 뮤지컬과, 카메라의 가변적 움직임으로 공간의 이동을 선택할 수 있는 영화가 같을 수는 없다.
조엘 슈마허는 카메라의 이동으로 공간적 다양함을 끌어냈지만 결과적으로 비장함과 장중함, 그리고 신비함이 어울리면서 감동의 상승곡선을 가져오는 뮤지컬 무대에 비해 그 단점을 확대시키고 장점을 축소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영화가 뮤지컬보다 못하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의 유령]은 영화를 위해서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특별히 작곡한 15분 분량의 음악도 추가되어 있고, 모든 노래들이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재구성되어 다시 녹음되었다. 이런 청각적 황홀함과 함께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 19세기말의 호화찬란한 오페라 하우스 무대는, 우리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오페라의 유령] 서곡이 우리들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드라마의 강렬한 흡인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시청각적 장치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