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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 목사 / 쳐다본즉 살더라 (21: 4-9)
스펄전(C. H. Spurgeon) 목사의 간증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850년 1월 6일 세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주일이었습니다. 스펄전은 예배에 참석하고자 나섰지만, 눈보라로 마차를 움직일 수 없어 근처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머리와 옷에 묻은 눈을 털고 들어가니 교인이 1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예배당이었습니다. 담임목사가 눈보라로 오지 못하자 집사 한 사람이 강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초라한 옷차림에 얼굴은 창백해 보였습니다. 예배를 시작한 그는 이사야서 45장 22절을 읽었습니다. "땅 끝들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이어 발음이 분명치 않는 단순한 말들로 열심히 외쳤습니다. "여러분, 간단한 말씀입니다. 주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바라보는 데 무슨 힘이 듭니까? 손발을 움직이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는데 지식을 가져야 합니까? 무식한 자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라보는데 기간이 필요합니까? 나이가 많아야 바라 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어린아이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단순하였지만 설교는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여러분은 자신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피를 흘리노라. 나를 보라.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 나를 보라. 내가 무덤에 묻혔느니라. 나를 보라. 내가 부활하였노라. 나를 보라. 하늘로 올라가노라. 나를 보라.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있노라. 죄인들아!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받으라!" 30여분 동안 외치는 말씀들은 스펄젼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스펄젼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청년이여! 힘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스펄젼은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죄인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스펄젼은 예수께서 모든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스펄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40년 광야 생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쳐버렸습니다. 남은 여정이 그리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백성들이었으나 불평의 봇물이 터져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함으로 죽은 자가 많아졌습니다. 그후 백성들이 회개하였을 때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았습니다. 불뱀에 물린 자들이 놋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본문9절은 증거합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불뱀은 불평할 때 나타나지만 놋뱀은 회개할 때 나타나는 증거입니다. 본문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세지입니다. 쳐다본즉 살아나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상한 마음이 고쳐지기에
린다(Linda)가 캐나다 북쪽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일 년 내내 눈이 덮인 산악지대를 오르려고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현지에 가보니 불편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날씨가 너무 추웠습니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잠자리도 불편했습니다. 돈도 많이 들었습니다. 음식도 달랐습니다. 사람들의 태도도 서툴렀습니다. 마음이 상해 불평을 잔뜩 늘어놓자 린다의 친구가 여행 안내책자를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라며 건네주었습니다. 첫 페이지를 여니 빨간 줄이 쳐진 문장이 눈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여행을 할 때는 내가 살던 곳과 다른 것들을 기대하시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만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신의 마음을 바꾸시오!" (And if things are not to your liking. Change your liking!) 이 말은 린다의 인생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랫동안 계획하고 원했던 여행지이기에 비록 힘들어도 여행의 목적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것들을 경험하면서 그 험한 길을 즐길 수 있어야 눈이 덮인 산악지대의 정상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이요, 목표입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방법은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행복을 찾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여기서 '상하니라'의 뜻은 히브리어 '카차르' 인데 '짧다'라는 뜻입니다. 즉 마음에 여유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니 매사에 분노가 생기고, 조그만 일에도 참지 못하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의 방해로 평탄한 왕의 대로가 있는 곳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홍해로 향하는 바란 광야로 들어가 시작된 긴 광야 생활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음이 상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상한 것처럼 현대인들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많은 상처가 있습니다. 때로는 상처 때문에 죽고, 눕고, 울고, 아파하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40년이라는 긴 광야 생활, 지름길을 방해하는 에돔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상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인생의 에돔은 무엇입니까? 에돔을 쳐다보고 싸우면 상처는 더 크고 심해집니다. 그러므로 놋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쳐다봄으로 상한 마음이 치유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원망의 입술이 변하기에
이츠하크 펄먼(Itzhak Perlman)은 양쪽 다리에 보조 장치를 하고 목발에 의존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입니다. 여러 해 전 펄먼이 뉴욕 링컨 센터의 애버리 피셔 홀(Avery Fisher Hall)에서 초청 연주회를 가졌을 때 일입니다. 그는 힘겹지만 무대 중앙 의자가 놓인 곳까지 걸어가 앉아 목발을 내려놓고 다리의 보조 장치를 푼 뒤 한 쪽 다리를 뒤로 잡아당기고 다른 쪽 다리를 앞으로 뻗어 몸의 균형을 잡았습니다. 그런 다음 바이올린을 턱에 받치고 지휘자를 향해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연주가 시작되고 불과 두세 소절밖에 진행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바이올린의 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청중들은 펄먼이 힘겹게 일어나 바이올린을 바꾸거나 줄을 고쳐 무대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던 펄먼은 지휘자에게 연주를 시작하라고 신호를 보냅니다. 이윽고 오케스트라 연주는 재개 되었고 펄먼도 바이올린 연주를 이어나갔습니다. 현 하나가 끊어진 채 청중들이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곡을 연주해 나갔습니다. 남아 있는 세 줄만으로 곡을 연주하기 위해 머릿속에서는 매 순간 편곡을 하고 변화를 시도하고 재 작곡을 해 나간 것입니다. 연주를 마치자 잠시 경이에 찬 침묵이 흘렀습니다. 이윽고 청중은 일제히 일어나 열광적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미소를 지으며 이마의 땀을 닦은 펄먼은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때로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을 갖고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예술가가 하는 일입니다.” 펄먼은 다리 보조대를 묶은 뒤 목발을 짚고 열광적인 박수갈채 속에 무대를 떠났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혹 갖지 못했다고 원망만 해서는 안됩니다. 있는 것을 감사함으로 잘 사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애굽에서 인도해 낸 사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노예를 구원하여 가나안으로 가게 해 준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자칫 원망하게 되고 원망하면 불뱀에 물려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체질화되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원망합니다. 원망하면 모든 것이 깨지고 무너집니다. 파멸과 멸망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도 빼앗겨 초라하게 됩니다. 부디 놋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봄으로 원망하는 입술이 감사하는 입술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감긴 눈이 열려지기에
리챠드 바크 (Richard Bach)가 쓴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 에서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은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는 고독한 선구자였습니다. 모든 갈매기들이 자기들이 살던 해변에서 겨우 먹이를 찾고, 먹이를 찾은 다음에 제자리에 앉아 있다 배가 고프면 또 다시 가서 먹이를 찾곤 합니다. 그것이 갈매기 생(生)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꿈을 가진 조나단은 모험을 시도하며 친구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더 높이 날 수 있어. 더 멀리 바라 볼 수 있어. 그러니 미지의 세계를 찾아 가보자" 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동료 갈매기들이 조나단이 돌았다고 그들 세계에서 추방시켜버렸습니다. 갈매기 조나단은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의 슬픔은 동료사회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높이 날 수가 있는데, 그래야 멀리 볼 수 있는데 동료들이 그 비상하는 영광을 보지 못하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거부하는 짧은 안목에 대한 슬픔이었습니다. 답답한 오늘이지만 내일을 보아야 합니다. 질병과 슬픔 건너편에서 기다리는 기쁨을 보아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상황 다음에 붙드시는 주님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눈이 열려야 일, 사람, 돈, 사명도 보입니다. 눈을 감으면 늘 어둡고 힘들게 살게 됩니다. 무엇을 탓하기 전에 눈을 뜨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감긴 눈이 열려집니다.
본문 8-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백성들이 뉘우치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쳐다보면 살게 하셨습니다. 쳐다보는 순간 불뱀의 독성이 사라지며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습니다. 불순종하며 계속 마음이 상해 입으로 원망하며 바라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며 쳐다보는 순간 눈이 열려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치유를 입게 되었습니다.
수탉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인도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저렇게 고개를 올렸다 숙였다 하니 얼마나 힘이 들까? 측은한 일이로다." 그러자 현실주의자가 이를 받아서 말했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소. 목을 쳐들지 않으면 그나마 한 방울 물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이 때 가만히 듣고 있던 크리스챤이 말했습니다. "두 분의 말씀이 맞기는 하지만 저 수탉은 한 모금 물을 마실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시각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각이 바뀌지 않기에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信仰)의 한자어는 무슨 뜻입니까? 신(信)은 '믿을 신'입니다. 앙(仰)은 '우러를 앙'입니다. 즉 신앙이란 믿음으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놋뱀을 바라보았을 때 구원의 역사가 나타난 것처럼,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치료와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십니까? 부디 상한 마음, 원망하는 입, 감긴 눈이 놋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봄으로 치료되어 살아나는 역사가 임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민돈원 목사 / 놋뱀을 보면 살리라 (민 21:4-9)
우리 속담에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로는 조선시대의 시전 중에서도 육의전[六矣廛]이 있던 곳입니다. 육의전이란 조선시대 독점적 판매권을 부여받고 국가 물품을 조달한 여섯 종류의 큰 상점입니다. 즉 공식적인 시장인 시전 중에서도 나라의 허가를 받아서 판매하는 물품인 비단, 무명, 종이, 명주, 모시, 어물 등 6가지의 점포를 말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상인이 양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육의전을 운영하는 상인은 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대단한 위세를 부렸습니다.
반면 한강은 그중 에서도 지금의 마포, 노량진, 서강 등은 물길을 이용해 전국의 물품이 서울로 들어오는 입구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비공식적인 시장(난전)이 형성되었습니다. 난전[亂廛]은 불법이지만 서민들을 위해 눈감아주기도 했습니다.동시에 중요한 물품의 암거래나 난전의 지나친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때때로 단속을 받았습니다.
즉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를 한다는 것은 종로의 시전에서 흥정 끝에 위세 높은 상인과 시비가 벌어져도 아무소리 못하다가 한강의 난전에 가서 힘없는 상인에게 화풀이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에돔땅을 지나가려고 하자 그 길을 못가도록 거절당했습니다. 거절당한 상처이후 결국 제사장인 아론은 에돔땅 근방인 호르산에서 최후를 마칩니다. 다시 백성들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를 따라 에돔땅을 우회하려다 마음이 상했습니다. 게다가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고 푸념을 모세에게 합니다. 이에 딱맞는 우리속담이 바로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입니다.
민20:1-13에서 이미 모세와 아론을 향해 그 이전에도 광야로 인도한 것 때문에 짐승도 마실물이 없어 죽게 되었고 무화과 포도 석류등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을 했습니다. 모세는 이 회막문에 엎드렸습니다. 이 반역한 자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결국 이로인해 모세는 가나안땅까지 인도하지 못하고 120세에 이곳 느보산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오늘본문에 세부류의 주어가 등장합니다. 백성이(4,5,7절), 여호와께서(6,8절), 그리고 모세가(7,9절) 먼저 백성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에돔길 쉬운 길로 가려다 뜻대로 되지않고 거부 당하자 마음이 상했다고 4절은 기록합니다. 에돔길은 호르산에서 시나이반도 광야로 가는 길로 고생을 덜하고도 곧장 가나안으로 갈 수 있는 빠르고 쉬운 길이었습니다. 그길을 지나려다 에돔왕이 많은 백성들과 함께 허락하지 않아 전에 막혔던 적이 있었습니다.(민20:20-21) 그 불똥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한 원망으로 번져갔습니다. 그 원망은 왜 광야로 인도해 죽게 했느냐? (노예로 살던 그들을 인도해주신 것을 까막히 잊어버림) 또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 없는 것은 맞는 말이예요. 사실이예요. 눈앞에 있는 사실만 보는 사람은 믿음의 주님을 못보기에 원망이 당연히 나오는 거예요. 믿음은 문제속에 계신 주님을 보는 거예요. 가는 곳마다 원망의 은사가 있다시피한 백성들입니다. 이에대해 모세는 대꾸하지 않습니다.민20:6에 보면 엎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원망하는 백성들의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모세를 원망하기전에 이들은 하나님께 반항한 것입니다.은혜가 다 고갈되었습니다. 뭐든지 쉽게 하려다 막힌 것 때문에 또 살기 힘들다고 하나님 원망하지 마세요. 여러분 뜻대로 신앙생활하려다 안된다고 목사님 원망하지 마세요. 그전부터 뭔가 원인이 이스라엘백성에게 있었던 것처럼 하루 아침에 된게 아니잖아요.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미 그전에 에돔 때문에 마음이 상했잖아요 그 이전에 문제가 있었잖아요 이에 하나님은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6절 다같이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중에 보냈습니다. 먹을 것 물,음식을 보낸것이 아닙니다. 독있는 불뱀을 보냈습니다. 불뱀이란 불이있는 뱀이란 뜻이 아니라 독이 많아 물리면 죽는 맹독성의 뱀을 말합니다. 불뱀은 전갈과 함께 광야에 있던 해로운 동물입니다. 신8:15에서도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라고 함으로써 그불뱀들이 광야에 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따라서 합니다. 원망으로 한두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원망하면 불뱀에 물립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이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를 경고하는 편지를 고전10:8-10에서 말씀합니다. 음행하지 말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 그리고 원망하지 말자. 여러분!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인데 왜 이렇습니까? 이는 하나님께 모순되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더 이상 피해가 없도록 개잊ㅂ하셨습니다, 아무리 광야에 있는 독기가득하여 사람을 죽이는 불뱀일지라도 감사하면 광야에만 있지 지금까지는 사람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망하고 불평하고 교만하다보니 덤비는 것입니다. 세상에 위험한 일, 죽을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막아주시면 됩니다. 안전합니다. 물은 바다에 있어야 안전하지 육지로 덮치고 주택지로 덮치면 쓰나미가 되어 생명을 앗아갑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앞으로는 버는 것 같은데 뒤로 다 세버리는 셈입니다. 한쪽에서는 생명걸고 기도하고 교회를 향한 희생과 가슴조이며 자나깨나 교회 염려하는데 또 다른 쪽에서는 봉사도 헌신도 없고 제 생각대로 살면서 한마디 무심코 푹푹 던지는 말 한마디가 교회 원망, 누구원망하면 이런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서야 이스라엘은 비로서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을 물고 있는 불뱀은 없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밖에서 잃어버린 것을 안에서 찾아보세요. 교회안에 원망이 불뱀입니다. 사회 곳곳에 위험수위를 넘을만큼 비등해지고 있는 원망이 불뱀들입니다. 원망도 습관이고 늘 감사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이 둘은 내 인생의 키와 같습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감사하는 말 생산적인 말을 하면 말대로 행동이 따라갑니다. 심리학자들도 말이 우리 두뇌의 98%를 좌우한다고 그럽니다. 말하는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꿈을 가진 사람은 생각부터 다스립니다. 믿음의 말을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늘 바라보며 현실화되는 그 꿈을 그립니다.모세가 원망하던 백성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자, 이런 혹독한 댓가를 치른 백성들이 그 다음 어떻게 했는지를 봅니다. 4-5절의 백성이 했던 모습과 혹독한 희생을 치르고 난 이후 나오는 7절의 백성이 반응하는 말씀이 전혀 다릅니다.어떻게해야 이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7절이후에 나타납니다.
7절 백성이 모세에게 나아왔습니다. 급기야 모세에게 나아와 요청합니다. 영적 지도자에게 삶의 문제 개인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 아뢰야 합니다.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겸손도 아니고 내성적이고 숫기가 없는 문제로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와서 말해야 합니다. 말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린 일이 없습니다. 접근명령을 내린 일이 없습니다.
그런 다음 사실대로 말해야 합니다. 문제는 덮어놓으면 안되고 펴서 보아야 합니다.고백해야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를 풀려면 풀어 놓아야 합니다. 마음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실대로 그들의 실상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모세지도자를 우리가 원망했습니다. 그런 죄를 지었습니다.’ 즉 먼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죄를 범했다고 고백합니다. 4절에서는 원인을 모세에게 에돔왕에게 돌렸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찾았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자세가 문제를 푸는 실마리입니다.
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설득시키려 하거나 이해시키려 하지말고 하나님께 사정을 말하십시오. 죄를 인정하시고 솔직하게 말하십시오. 여기서 끝내지 말고 다시 한발짝 나아가십시오.
백성들이 어떻게 했는지 7절 계속하여 중간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 떠나게 하소서...” 그들은 뱀을 스스로 떠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었으면 이런 요청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살다보면 힘으로 되지 않는 한계상황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더욱이 영적으로 살려다보면 세상과 충돌해야 할 문제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사실 성령의 소욕이 없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니까 이스라엘과 같은 원망이 나오고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는 것 같은데 마음이 상한 사람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는줄 아세요? 대체로 무언가 드러나지 않은 내재된 마음의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앞에 드러내 놓음으로써 성령의 도우심으로 수치감이나 거부감등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받을 때 동일한 상처에서 해방됩니다. 또는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생각하기 때문에 원망을 하는 것으로 자기를 보호하려 합니다, 철갑으로 무장된 자존심이 해제되게 하는 것이 다이나이트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임재에 들어가면 위대한 변화가 경험되고 대신 복음의 자존감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5절의 태도와는 달리 하나님께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문제를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문 뱀들이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 백성들의 기도요청대로 기도했습니다. 자, 그 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8절을 보면 주어가 여호와께서입니다. 백성에게가 아니라 모세에게입니다. 기도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찾아오십니다. 내일부터 3주 특별기도회 새벽과 밤으로 실시합니다. 기도하는 여러분이 있어야 교회가 삽니다. 기도요청받은 여러분이 기도해야만 세상의 불신앙과 안티기독인들에게 물린 우리가 삽니다. 모세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기도요청한 백성에게 말씀한 것 아닙니다. 기도요청을 받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8절입니다.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매달아 물린자마다 그것을 보면 산다.
모세상식으로 이해될 말씀입니까? 그대로 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생각으로 그 말씀을 요리하지 않았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불뱀에 물린자들이 놋뱀을 쳐다본즉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놋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9절 놋뱀이란 단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 앞에 나오는 놋뱀은 영어성경에 a bronze snake입니다. 그러나 그 놋뱀을 바라본자는 살게 된 것입니다 ‘그 놋뱀’ the bronze snake은 내가 쳐다봄으로써 살게 된 놋뱀입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믿음으로 고백한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앞에 나온 6절의 불뱀은 불뱀들로 복수입니다. 그러나 쳐다보면 사는 이 놋뱀은 단수입니다. 우리를 죽이는 불뱀과 같은 일들은 무수하게 찾아오지만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또뿐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크게 아멘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당했네 나를 구원하실이 예수밖에 없네.
이 세상에 일반적으로 연구하고 기독교의 성자로 여기는 예수님으로 아는 지식의 주님입니다. 학문의 주님입니다. 그러나 쳐다보면 사는 놋뱀은 나의 구원자임은 물론 내 인생의 전부이시고 주인이신 예수님입니다.그 예수님으로 지금도 살아서 내게 역사하시는 그 주님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3:14-15에서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게 된 이유를 밝혀줍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불신앙적이고 원망하다 죄의 불뱀을 만나 죽은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그 죄의 세력을 멸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사람은 다시 살리신다는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이 주님을 삶의 왕으로 모셔 들이십시오. 그리고 매순간 주임재속에 살아가십시오. ♬주임재안에서 이제 내 영혼 자유해 내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며 예배하리 어린양 찬양하리 내 평생 그 하나로 충분해요 어린양 찬양하리 내가 주의 임재안에서
왜 놋뱀이 예수님인가요? 그것은 그 독기 가득한 뱀에 물린 그 자리에 있던 우리를 죄의 독을 없애기 위해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죄 때문에 불뱀에 물려 죽었으나 이제는 예수님 십자가로 인해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날 위해 지신 그 주님 십자가를 지금도 바라보면 삽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믿음은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영생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11장에 나오는 말입니다“오늘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천국을 탐내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위로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만 그 분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분과 함께 만찬 식탁에는 나아가려고 하지만 그 분과 함께 금식하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나 다 예수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고자 하나 그 분을 위해서 그 분과 함께 고통을 참으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떡을 나누어 주는 그 분을 따르는 사람은 많으나 그 분의 고난의 잔을 마시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서 살수 있는 길이 오직 한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암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사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쳐다본 자들은 모두 살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삽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교회는 삽니다. 왕성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믿음 생명을 살리는 이 일을 하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일환 목사 /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 21:4-9)
옛날 어느 나라에 늘 불평이 많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늘 원망 불평이 많으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임금을 찾아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습니다.
왕은 잔에 포도주를 가득 부어 청년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리 오너라, 내가 주는 포도주 잔을 들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오면 성공비결을 가르쳐 주겠다. 단, 포도주를 한 방울이라도 엎지르면 네 목을 베어 버리겠다. 알겠느냐?”그 청년은 성공의 비법을 알려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청년은 땀을 뻘뻘 흘리며 시내를 한 바퀴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왕이 물었습니다.
“시내를 돌며 무엇을 보았느냐? 거리의 장사꾼들을 보았느냐? 혹시 술집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를 들었느냐?”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포도주 잔에 신경을 쓰느라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 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습니다.
“그래 바로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인생의 목표를 확고하게 세우고 일에 집중하면 주위의 유혹과 비난이 들리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일 못하는 사람은 불평이 많습니다. 반대로 분명한 인생관을 갖고 일에 집중하는 사람은 불평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원망 불평하지 말고 오직 주님에게만 집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40여년을 광야에서 방황한 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생겼던 일입니다.
그들은 에돔 땅을 통과해야 했지만 에돔 왕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에돔 땅을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물 한 모금 얻을 수 없는 삭막한 광야로 돌아가게 되자, 그만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작은 어려움이 닥치자 이제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 은혜를 다 잊고 하나님께 원망 불평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고는 진노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셔서 원망 불평하던 자들을 물어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뒤늦게 죄를 뉘우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찾아와 하나님 앞에 기도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매를 맞고서야 자신들이 잘못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는 매를 맞기 전에 돌이키기를 바랍니다.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 했고, 하나님께서는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즉시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고 그 놋뱀을 바라보는 자는 살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말대로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본 사람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원망․불평하며 땅만 쳐다본 사람은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원망과 불평은 반역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우상숭배요. 그에 못지않게 싫어하시는 것이 원망불평입니다.
민수기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는 일종의 신앙행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민수기는 오늘날 죄와 사망의 길에서 벗에나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성도들의 신앙 이야기를 미리 보여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 길은 거의 다가 불평과 반역의 이야기로 얼룩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특별히 민수기를 읽다보면 10장 이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으로 넘쳐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11장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행진 후미에 큰 불이 떨어지는 사건이 나옵니다.
12장은 미리암이 지도자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병자가 되는 이야기 입니다.
13장, 14장에는 열 정탐꾼의 원망이 나옵니다.
16장에서는 고라 일당이 반역하다가 지진을 만나 땅속으로 빠져 몰사합니다.
20장에 가면 마실 물이 모자란다고 불평합니다.
오늘 본문 21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외없이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 불평합니다.
4절을 보세요.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가나안 땅으로 지름길을 가면 좋겠지만, 에돔 족속이 길을 막으므로 갈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전쟁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에서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 불평합니다.
그런 경우 인내가 필요하고 기다리면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참지를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게는 하나님 시간표가 있습니다. 그 시간표가 나의 시간표와 맞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원망하면 안 됩니다. 그냥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의 시간표가 중요하고 급하다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 불평합니다. 참 어리석은 것입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분명이 다릅니다. 내 때와 하나님의 때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아무리 급하고 내가 보기에 지금이 하나님의 때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 시간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시간표보다야 앞 설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시간표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시간표가 있는데 그 시간표는 인내와 기다림으로 가득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세요.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면서 약속을 하신 하나님은 25년 후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또 모세를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로 고생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모세가 태어나게 하고는 바로 왕궁에 들여보내 40년 동안 자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 된 줄 알았는데 또 광야에 내보내어 40년을 지나게 하십니다. 모두 80년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급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인내, 기다림이 얼마 중요할까요?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시간표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민수기 14:34를 봅니다.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 백성이 40일 동안 정탐한 땅에 못 들어가겠다고 원망 불평하니까 1일을 1년으로 환산하여 40년을 광야에서 떠돌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원망불평이 얼마나 무서운 행위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받은 은혜가 크고 놀라운데, 그것은 다 잊고 원망불평만 가득하니 그게 배은망덕이고 반역 행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잊어버리고 순간순간 원망불평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회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원망과 불평은 무서운 심판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원망과 불평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을 보세요.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을 향해 자기들을 광야에서 죽게 한다고 원망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리고 40년간 얻어먹은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무슨 말씀입니까? 죽겠다고 원망하던 그들을 불 뱀에 물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죽겠다, 죽겠다, 하니 뱀에 물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 불뱀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던 아라바 광야 지역에 많이 서식하던 독사(毒蛇)입니다. 등에 불타는 듯한 붉은 반점이 있는 맹독성의 뱀을 불뱀이라 합니다.
또 이 뱀에 물리게 되면 그 강력한 독성으로 인해 즉시 온몸에 높은 열이 생기며 죽어가기 때문에 불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신 것입니다. 동물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에서 죽게 한다고 원망하던 그들, 그 말대로 되었습니다. 원망의 말이 씨가 되어 재앙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성도는 어떤 경우에서도 원망이 아니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원망의 말은 재앙을 가져오지만 감사의 말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힘든 상황,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믿고 감사하며 감사를 내어 놓기를 축원합니다.
왜 하나님은 원망과 불평을 이다지도 싫어하실까요? 원망불평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이고 공동체에 치명적인 해가 되며 개인의 심령을 낙담케 하는 무서운 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말’(言)인 동시에 가장 무서운 독이 또한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2절에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을 한번 잘못하면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신앙의 말을 버리고 믿음의 말을 합시다.
저주의 말을 버리고 축복의 말을 합시다. 부정적인 말을 버리고 긍정적인 말을 합시다. 절망의 말을 버리고 소망의 말을 합시다. 원망과 불평의 말을 버리고 감사의 말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살기 위해서는 놋뱀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뱀으로 인한 그 죽음의 현장,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현장일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즉시 모세에게 달려와 죄를 범하였다고 자백하고 기도를 요청했겠습니까?
7절을 보세요.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작은 어려움에 원망불평 하였지만 불뱀의 공격 앞에서는 어쩔 도리 없이 두 손 바짝 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인간적으로 보면 얄팍하고 염치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무척이나 현명한 일입니다.
우리도 이 장면을 주목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의 징계 속에 있다면 그것을 깨닫는 즉시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회개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지 결코 불뱀을 통하여 우리를 죽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멘?
그런데 그때 놋뱀을 바라보라는 모세의 소리를 들었을 때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웃기고 있네, 불뱀에 물려서 독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본다고 사는가?” 하면서 자기 고집을 부리다가 죽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믿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는 “딱히 방법이 없으니 한번 해 보기나 해 보자. 밑져봐야 본전 아닌가” 하면서 그곳까지 반신반의하며 가서 바라보고 치료함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지금까지는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대적했지만 이제는 내 생각을 버리고 말씀대로 순종해 보자”는 마음으로 겸손히 나가서 치료함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은 놋뱀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살았습니다. 왜 그러냐? 어떤 원리냐?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순종을 보기위한 요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복음 3:14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이 놋뱀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는 그림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보면 이 놋뱀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놋 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 수 있었듯이 오늘날도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죄 사함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또한 이 세상에서 어떠한 문제와 절망 가운데 빠져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살 수 있는 길을 찾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 놋뱀일까요? 제가 설교준비하다 여기서 걸렸습니다. 왜 많고 많은 짐승 중에 하필이면 백성들을 물어 죽인 불뱀을 놋으로 만든 뱀이었을까요?
여기에 중요한 은혜가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었나요? 이 불뱀은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실존을 상징하는 도구였습니다.
여기서 그 놋뱀이 달린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는 짓이 꼭 뱀 같은 짓을 한 것입니다.
혀를 낼름 낼름하면서 한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으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하고 원망불평에 사로잡히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자나 짐승 같은 무서운 짐승을 동원해 짓밟아 버린 것이 아니고 뱀같이 무서운 존재를 보내어 백성들을 물어 죽게 하신 것입니다.
범죄의 심판도 밤같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듯 하나님의 심판도 이와 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십자가는 내가 죽어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나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주님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 값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이 아니라 곧 우리 자신입니다. 아멘?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주님을 보지 말고 거기에 달린 나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모세가 매단 놋뱀은 십자가에 죽은 옛사람인 ‘나’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갈 5:24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놋뱀은 예수님을 말하기 보다는 늘 하나님 앞에 원망불평하며 하나님을 불신앙했던 사악한 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뱀의 특징을 열거 해 놓았습니다. 19가지가 있답니다. 그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면
1)뱀은 언제나 머리를 들고 다닙니다. 이처럼 사단은 교만합니다.
2)뱀은 순수한 색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뱀이든지 알록달록 합니다.
3)뱀은 차가운 냉혈동물입니다. 인정사정없습니다.
4)뱀은 음란한 동물입니다. 성욕의 심벌입니다.
5)뱀은 약한 것들을 공격하여 통째로 삼켜 배를 채웁니다.
이와 같은 속성이 다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다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그 놋뱀 장대를 쳐다보는 사람은 옛사람인 자아가 죽고 이젠 주님이 사는 사람이 되었기에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기에 우리는 ‘나’라는 존재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선포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하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아멘 ?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음으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가정의 갖가지 문제 원인은 나를 못 박지 못하였기에 생긴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도 나를 못 박지 못해 생기는 현상들입니다. 아멘? 죽여야 합니다. 꽝꽝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누가복음에 9:23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바로 나를 십자가에 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주님임을 선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정권교체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놋뱀은 나를 대신해서 죄인으로 죽으신 예수님도 상징하지만 늘 무서운 독을 내뿜고 남에게 수많은 아픔과 상처를 주었던 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옛사람, 그 못된 자아를 매달고 주님을 향해, 주의 종을 향해 다시는 원망불평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순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를 사랑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십자가가 모든 문제의 열쇠입니다.
그리고 뱀같이 사람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었던 나를, 그 옛 자아가 매달아야만 주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도 봐야 하지만 내 옛 사람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누리게 하는 열쇠입니다.
기도합시다. (통성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