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30일
본문 : 요 1:12-13
제목 : 성경은 모태신앙을 지지하는가
중심내용 : 교회 현장에서 모태신앙이란 표현은 낯설지 않다. 교회 속에서 일반적으로 회자(膾炙)되는 것이 현실이다. 모태신앙은 부모와의 혈통적/신앙적 연대 속에서 자신의 신앙의 뿌리를 찾는다. 그런 의미에서 모태신앙의 소유자가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고 있다면 이는 금상첨화로서 교인들 사이에서 부러움과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성경은 모태신앙에 회의적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찾기 때문이다(요 1:12-13). 신앙의 근본은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명제 : 하나님의 자녀 됨은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존된다.
설교목적 : 모태신앙이란 표현은 자칫 특정 사람과 특정 가문을 차별적으로 추앙하기 쉽다. 교계에서 저명한 인물이 배출된 집안은 더욱 그렇다. 모 교단의 모 목사님 가정은 3대째 내려오는 기독교 집안으로 최근까지도 세 형제가 각각 대형 교회당을 건축하고 수천의 교인들이 모이는 성공적(?)인 목회자로 유명하다. 이들 세 목회자는 범 기독교계에서 모범적인 모태신앙의 대명사로 정평이 나 있다. 반면에 성경은 신앙의 뿌리를 부모나 조상 등 사람에게 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세 전 선택에 뿌리의 기원을 둔다. 믿음의 출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일환으로 주신 선물이다(엡 1:4, 2:8, 약 2:1, 살후 1:10). 물론 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께 속한다. 바른 지식(교리)의 체계는 바른 신앙관과 바른 교회관 정립의 척도다(막 7:6-8).
Ⅰ. 도입 : 모태신앙은 인위적/전통적인 표현
모태신앙이란 용어는 한 개인의 신앙의 뿌리와 정체성을 하나님의 계명(말씀)이 아닌 사람의 전통과 유전에서 찾을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막 7:6-9). 성경은 모태신앙이란 용어를 문자적으로 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사람의 혈통이나 육정 등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존된다’(요 1:12-13)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회의적인 입장이다. 결국 성경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모태신앙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계명이라기보다 사람의 전통과 유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Ⅱ. 전개 : 하나님의 계명(말씀)인가 사람의 유전과 전통인가
21세기 현대교회는 이미 종교개혁 이후 500(505)주년을 넘었다. 본 강설에서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덧입혀진 사람의 유전과 전통의 옷을 벗고 하나님의 계시(말씀)의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심정(막 7:6-9)으로 교회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 되어 있는 모태신앙이란 표현을 '신앙의 혈통적 연대성과 계승이 성경적인가'라는 관점에서 진단해 보고자 한다.
모태신앙이란 통상 부모와 자녀 간에 신앙의 혈통적 계승과 연대를 전제로 하는 표현이다.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부모의 신앙을 자녀들이 태속에서부터 유전적이고 혈통적으로 물려받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주장과 관련해 흔히 사 44:1-2과 24절 및 행 16:31과 창 17:7이 증거 본문으로 제시되곤 한다.
1. 첫째로 사 44:1-2과 24절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회복을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언약,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 근거해 미래지향적으로 약속하고 있는 이중 구조적인 언약의 내용이다. 이런 결과로 이스라엘은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친 후 1차, 2차, 3차에 걸쳐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회복된 역사적 이스라엘이 언약 성취의 실체가 아니다. 회복된 역사적 이스라엘은 때가 찰 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이스라엘인 교회공동체의 출현을 통해 갱신되고 마침내 성취된다(갈 3:29). 이런 사실로 인해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언약 및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 속에 내포되었던 회복될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표면적(혈통적/육신적) 유대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이삭의 후손인 언약의 자손에 국한돼 그리스도께 속한 이면적 유대인을 처음부터 지향하고 있었을 뿐이다(갈 3:29, 롬 2:28-29, 9:6-8). 물론 최종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서 본문은 이스라엘의 미래적인 회복을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인 표면적 이스라엘에게서 찾지 않는다. 이면적 이스라엘 곧 언약의 자손들인 남은 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적용시킨다(사 10:22).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서 본문에서 언급한 ‘모태에서의 조성’은 사람의 혈통과 인위적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주권적 사역을 의미한다.
2. 둘째로 행 16:31의 말씀 또한 본질상 믿음의 혈통적 계승이나 신앙의 혈통적 연대성을 보증하는 말씀이 아니다. 간수와 죄수의 신분으로 만나게 된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집 곧 온 가족들이 바울의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성령의 역사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세례를 받은 사실(32-34)을 복음의 점진적인 확장이라는 맥락(행 1:8) 속에서 증거해 주는 사건이다. 여기서 복음의 점진적인 확장이란 표현은 행 1:8에 언급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성취를 가리킨다. 따라서 빌립보 간수와 그의 가족들의 구원은 행 10장에 기술된 고넬료와 그의 권속들의 구원사건과 더불어(행 10:44-48) '복음의 점진적인 확장'이란 문맥 속에서 '땅끝' 곧 이방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역사에 해당된다. 이처럼 한 영혼의 구원 여부는 부모로 말미암는 구원의 혈통적 연대성이나 계승의 문제가 아니다.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베푸시는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의 결과일 뿐이다(엡 1:4-5, 요 1:12-13).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 앞에서 인위적인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3. 셋째로 창 17:7도 본질상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아브라함 후손들의 정체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경륜 속에서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집중된다. 만일의 경우 이들 후손이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로 설명될 수 있다면 언약의 혈통적 연대성이란 원리 속에서 신앙의 계승이란 주제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자손언약의 구체적 성취는 표면적(혈통적) 유대인이 아닌 이면적(영적) 유대인들 곧 이삭으로 말미암는 약속의 자녀들로 국한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다(롬 2:28-29, 9:6-8). 바울은 이들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복음의 빛 안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로 해석했다(갈 3:7, 29절). 이처럼 신적 언약이 혈통적 연대성에 의해 계승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엡 1:4-5, 롬 9:7-8), 신앙과 믿음 또한 인위적인 혈통이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는다(요 1:13).
Ⅲ. 결론 : 성경은 모태신앙을 지지하는가
이상 모태신앙과 관련해 세 가지 증거 본문으로 제시된 성경 구절을 주해하는 방식으로 모태신앙의 성경적 타당성 여부에 관해 진단해 봤다. 결과는 부적절하다는 결론이다. 증거 본문으로 제시된 성경 구절들은 한결같이 언약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결코 혈통적 연대성의 가능성을 허락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은혜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성령의 인침과 내주의 역사를 통해서만 믿음으로 회개와 거듭남과 구원의 신앙에 비로소 바르게 접촉될 수 있다(행 16:14-15). 그러므로 신앙은 혈통적 계승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기초한다(요 1: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