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1월이었다. 대우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구덕운동장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경기장에는 축가가 울려 퍼지고 꽃가루가 날렸다. 선수들은 샴페인을 들이부으면서 우승의 기쁨을 나눴다. 하지만 이때 단 한 명의 선수가 대우 라커룸에 혼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1년 4개월째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한 선수였다.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충무에서 부산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어머니는 여전히 아들이 뛰지 못하자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갔다. 이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뛰고 싶어요.”
“자신 없으면 종부한테 패스해.” 박종환 감독은 선수들을 불어 모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종부의 저돌적인 돌파와 몸싸움 능력은 세계 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1983년 대한민국을 축구 열풍에 휩싸이게 했던 멕시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한 김종부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청소년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4강이라는 위업을 달성했고 그 중 특히 김종부는 군계일학이었다. 고려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종부는 멕시코 신화의 주역으로 이회택과 차범근, 최순호를 잇는 대형 스트라이커의 탄생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세상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3년이 흐른 1986년 대학교 4학년이 된 김종부는 졸업과 함께 프로 입성의 꿈에 부풀었다. 이제부터가 그의 진짜 축구인생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스페인에서 영입 제의가 왔지만 군대 문제 때문에 해외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던 김종부는 프로축구 구단 스카우트 1순위로 지목받는 선수였다. 어떤 팀이 그를 잡을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김종부의 영입은 흥행과 성적의 보증수표였다. 언론에서는 연일 이 축구 천재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중 특히 가장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운 현대와 대우가 김종부 영입을 위해 팔을 걷어 올렸고 럭키금성도 이들의 뒤를 쫓았다. 당시 최고의 화두는 김종부의 행보였다.
1983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박종환호를 4강으로 이끈 김종부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작전명 ‘김종부를 사수하라’
“저는 대우로 가겠습니다.” 김종부는 항상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대학교 스승님인 이차만 감독님이 코치로 계신 대우로 가고 싶어요.” 하지만 고려대에서는 내심 김종부가 현대로 가길 바라고 있었다. 이미 고려대 측이 현대로부터 김종부를 보내기로하고 시설 투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종부가 언론을 향해 대우 행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자 고려대는 김종부가 대우로 가는 걸 방해하기 시작했다. 학교 측에서는 끈질기게 김종부를 설득했고 결국 김종부는 현대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물론 이런 말도 덧붙였다. “대우 측에는 비밀로 해주게.”
“내일은 무조건 승부를 봐야 해.” 현대는 1986년 3월 29일 고려대학교에서 김종부를 불러내 계약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이를 눈치 챈 대우 구단 관계자가 학교를 급습해 한 차례 영입 작전에 실패했다. 다음 날에는 무조건 승부를 볼 참이었다. 타이밍 역시 완벽했다. 청주에서 현대와 대우의 프로축구 경기가 열려 이날 만큼은 대우가 김종부에게서 눈을 떼고 경기에만 집중할 것으로 예상했다. 더군다나 김종부는 고려대학교에서 일주일의 휴가를 받아 행동이 자유로운 상황이었다. 현대는 1986년 3월 30일 007작전을 방불케하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일명 ‘김종부를 사수하라’였다.
김종부 영입에 나선 현대 김호곤 코치는 보안유지를 위해 집에까지 거짓말을 했다. “나는 오늘 청주에 내려 가.” 이미 하루 전 계약을 눈앞에 두고도 실패를 맛봤던 현대로서는 코치진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신경을 썼다. 현대의 작전을 눈치 채지 못한 대우는 정태현 단장과 안종복 사무국장이 경기 준비를 위해 청주로 내려가 있던 상황이었다. “김종부 선수, 어제 못 다 했던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시죠.” 현대는 휴가를 받아 고려대학교 정문을 빠져 나오던 김종부를 서울 시내 모 호텔로 모셔왔다. 김종부의 매형도 대리인 자격으로 동행했다.
파격적이었던 현대와의 계약
“원하는 걸 이야기 해 보세요. 모든 걸 들어드리겠습니다.” 현대 측은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했다. 하지만 김종부는 망설였다. “고재욱 선생님과 이차만 선생님을 이렇게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김종부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중동고 시절 그를 키워낸 이가 바로 고재욱 감독이었고 고려대에서 그를 지도한 인물이 바로 이차만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고재욱 감독은 럭키금성 코치로, 이차만 감독은 대우 코치로 가 있던 터라 그가 고민 없이 현대와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건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종부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그 분들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측에서는 고민 끝에 김종부는 호텔에 남겨두고 현대와 대우의 경기가 열리는 청주에 김호곤 코치와 김종부의 매형을 보냈다. 이 둘은 청주에 도착해 대우 이차만 코치와 안종복 사무국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종부는 현대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니, 김종부는 우리 팀에 오기로 약속했어.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대우 측은 무방비 상태에서 김종부를 빼앗겨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현대 김호곤 코치와 김종부의 매형은 이 같은 사실을 통보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결국 김종부 측은 줄다리기 협상 끝에 협상 시작 10시간 만에 현대와 계약에 합의했고 세상 물정 모르는 김종부 대신 그의 매형이 가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계약금 1억 5천만 원(공식발표로는 8천만 원), 연봉 2천 4백만 원, 졸업까지 매월 장학금 2백만 원, 별도의 경기 수당, 현대자동차 광고 모델로 별도의 수익 제공 등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파격적인 계약 조건이었다. 프로 스포츠 사상 최고의 대우였다. 김종부 측에 유리하도록 ‘가족과 타인의 강력한 제지가 있을 경우 무효’, ‘현대는 이 계약으로 법적 제기를 하지 않을 것’, ‘계약금과 계약서는 밀봉했다가 대우 측과의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후 발표할 것’이라는 조건도 내걸렸다. 계약서에 서명은 했지만 아직 정식 계약은 아닌 다소 애매한 계약이었다. 하지만 현대는 김종부가, 아니 김종부의 매형이 이 가계약서에 서명한 것만으로도 쾌재를 불렀다.
김종부가 현대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대우로 행선지를 옮겨 김주성과 함께 입단식을 치르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김종부, 12일 만에 결정을 번복하다
현대는 아예 쐐기를 박았다. 이튿날 곧바로 언론을 통해 김종부 영입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대우행 유력하던 김종부, 전격 현대행’ 이같은 보도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이전까지 대우로 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던 김종부가 돌연 현대로 가게 됐으니 놀랄 만도 했다. 하지만 대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우는 현대행 보도가 나간 이튿날 곧바로 언론 플레이에 들어갔다. 일부러 언론에 “김종부가 대우로 유턴했다”고 흘린 것이다. 하루 만에 언론은 김종부가 다시 대우를 선택했다는 소식으로 도배됐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몸은 하난데 그를 영입했다는 구단은 두 군데였다.
대우 이차만 코치와 안종복 사무국장은 김종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차만 코치는 “너는 내 밑에서 축구를 하는 게 더 성장할 수 있는 길”이라면서 고려대 시절 인연을 강조했고 김종부는 이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김종부는 4월 11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한꺼번에 뒤집는 폭탄 발언이었다. “저와 현대의 계약은 무효입니다. 학교 측의 강요가 있었고 계약 사항에 명시된 것처럼 계약 사실이 사전 발표됐기 때문에 파기합니다. 저는 원래 제가 가고 싶었던 대우로 가겠습니다. 저의 매형이 계약서에 서명했을 뿐 저는 현대와 계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대와 계약한지 12일 만에 전격적으로 이 같은 결정을 번복했다.
난리가 났다. 특히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수 싸움을 벌여 김종부와 가계약을 맺었던 현대는 법적 투쟁을 선언했고 여론도 현대 쪽으로 기울었다. “중간에 계약을 뒤흔든 대우가 욕 먹어 마땅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자 이를 지켜보던 고려대 측에서도 무언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결국 체육위원회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3시간 가까운 회의 끝에 내려진 결론은 하나였다. 고려대의 결정은 충격적이었다. “김종부를 축구부에서 제명시키겠습니다.” 회의를 마친 다음 날 곧바로 고려대는 대한축구협회에 김종부의 선수등록 말소를 통보했다. 그렇게 김종부는 협회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세계 무대를 호령하던 김종부는 졸지에 축구선수 신분을 박탈당했다.
김종부가 이뤄낸 월드컵 첫 승점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당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을 앞둔 대표팀에는 김종부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협회에 등록되지 않은 선수를 대표팀에 불러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협회는 고심 끝에 이런 공식적인 발표를 내놓았다. “김종부는 협회에 등록되지 않았다. 대표 선수 자격이 없다.” 하지만 여론은 그렇지 않았다. 32년 만에 나가는 월드컵에 전력을 100% 가동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 더군다나 3년 전 이미 멕시코에서 한 차례 신화를 달성한 주인공이 또 다시 멕시코에서 열리는 큰 대회에 나서 선전하길 바라는 염원은 대단했다. 특히 대표팀 김정남 감독이 적극적으로 고려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김정남 감독과 박창선, 조광래, 조영증, 허정무 등 고참선수들이 직접 협회를 방문해 월드컵 출국 사흘 전 전격적으로 김종부의 멕시코행을 돕기도 했다.
그러자 고려대가 제명 일주일 만에 협회에 공문을 보내왔다. “김종부의 선수등록 말소 통보를 월드컵 대회 후로 유보하겠다. 단 협회가 요청한 김종부의 제명 취소 요청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번 월드컵 출전만이 예외다.” 결국 협회는 김종부를 대표팀으로 불러들였고 그는 역사적인 월드컵 첫 출전에서 불가리아전에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 월드컵 출전 사상 첫 승점을 이끌어낸 선수가 됐다. 이미 3년 전 청소년 김종부의 놀라운 활약을 지켜봤던 멕시코 축구팬들은 훌쩍 성장한 김종부의 기량에 매료됐고 해외 언론 역시 김종부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렇게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김종부의 방황도 끝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고도 현대와 대우의 팽팽한 싸움은 계속됐다. 김종부가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고려대에서 징계를 받아 제때 졸업도 하지 못했고 현대와 대우는 1년 6개월이 지난 1987년 8월까지도 대립하고 있었다. 현대는 “김종부와 우리가 먼저 가계약을 맺었다”고 주장했고 대우는 “김종부가 우리 팀을 택했다. 우리 선수다”라면서 첨예하게 맞섰다. 축구계에서는 어떤 식으로건 김종부를 다시 그라운드에 서게 하려고 머리를 맞댔지만 이미 현대와 대우의 싸움은 자존심 대결로까지 번져 있어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월드컵에서도 영웅으로 등극한 김종부는 여전히 갈 곳 없이 방황해야 했다.
한국 축구 사상 월드컵 첫 승점은 김종부의 발끝으로 이뤄졌다. 1986 멕시코 월드컵 불가리아전에서 동점골을 뽑아내는 김종부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김종부 데뷔전, 파국의 시작
여기까지는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 사건은 이때부터였다. 1987년 8월 18일이었다. 이날 사건으로 인해 김종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당시 일본과 친선경기를 펼치기로 합의한 대우는 대놓고 김종부를 앞세워 홍보를 시작했다. 경기가 열린 부산에는 ‘김종부, 드디어 대우에서 데뷔전’이라는 플랜카드가 나부꼈다. 현대와 대우의 팽팽한 대립으로 그 어느 소속으로도 경기에 나설 수 없던 김종부를 내세워 큰일 날 일을 꾸민 것이다. 협회에서는 대우 측에 경기 승인 전부터 신신당부했었다. “김종부는 절대 출전시키면 안 됩니다. 그 조건으로 친선경기를 승인하는 겁니다.” 대우 측도 “김종부가 쉬면 안 될 것 같아 우리와 훈련은 함께 하고 있지만 절대 경기에 나서는 일은 없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미 대대적으로 김종부 데뷔전 홍보를 한 터라 부산구덕운동장은 꽉 들어찼다. “김종부! 김종부!” 관중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몸을 푸는 김종부를 바라보며 잔뜩 흥분했다. 대우 측에서는 일단 김종부를 선발 명단에서 제외한 채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후반 들어서도 김종부가 투입되지 않자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터져 나왔다. “마, 퍼뜩 종부 내보내그라!” 관중들의 재촉이 계속되자 대우 측은 눈을 질끈 감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후반 20분 김종부를 투입했다. 김종부가 공을 잡을 때마다 관중석은 터질 듯한 함성으로 가득찼다. 하지만 이차만 감독은 후반 막판 겁에 질렸는지 김종부를 다시 벤치로 불러들였다. 교체 투입돼 교체 아웃될 때까지 20분 동안 김종부는 대우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물론 파장은 엄청났다. 김종부 소유권을 주장하던 현대는 물론 축구계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이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선수를 자신들의 선수인 것처럼 경기에 출전시킨 건 심각한 사건이었다. 대우 측에서는 “관중 소요 사태를 우려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결국 프로축구연맹은 대우의 고의적인 행동에 대해 벌금 최고액인 1천만 원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돈으로 어마어마한 1천만 원의 벌금을 얻어 맞은 대우로서는 그래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찌됐건 김종부 영입 전쟁에서 우리가 한 발 더 앞서 나갔다.” 하지만 대우의 뜻과는 달리 김종부는 그렇게 또 다시 두 구단의 영입 전쟁에서 또 한 번 상처를 받아야 했다.
현대의 초강수, “해체하겠다”
시간이 흘러 1987년 겨울이 되자 이듬해 올림픽을 앞둔 축구계는 김종부 살리기에 나섰다. 고려대학교에서 졸업하지 못한 김종부는 학점을 다 채워 1987년 가을에 졸업했고 협회에서는 선수 등록 규정을 김종부의 상황에 맞게 바꿔 그의 복귀를 강행했다. 이미 추가등록 기간이 끝났지만 김종부를 위해 기간에 관계없이 선수 추가 등록을 할 수 있도록 규정을 변경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우 측은 현대보다 먼저 김종부를 자신의 소속으로 협회에 등록해 버렸고 김종부는 곧바로 대우 선수단에 합류해 훈련을 시작했다. 김종부는 이 일로 파동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현대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며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또 한 번의 폭풍이 몰아쳤다. 현대는 김종부를 현대 아마추어팀 선수로 경남축구협회를 통해 등록하는 방안을 고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전성기 때 체중이 74kg이었던 김종부는 85kg에 육박할 정도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특정 선수를 위해 규정을 변경하고 한 팀의 손을 들어준 협회의 결정에 분노한다. 앞으로 열릴 프로축구 주말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 현대의 대응은 강경했다. 실제로 강원도 삼척에서 열릴 예정이던 경기를 준비 중인 선수단을 서울로 돌려보내는 행동에도 나섰다. 이 문제에 대해 프로축구위원회(현 프로축구연맹)도 리그를 무시하는 현대의 대응 방식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현대의 징계를 논하기 위해서 급히 이사회를 열었다. 하지만 이 반응을 지켜본 현대는 초강수를 뒀다. “이런 식의 처사를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는 축구단을 해체하겠다. 팀 운영에 썼던 연간 10억 원의 예산은 장학금이나 사회복지기금으로 쓰겠다” 조중연 감독과 김호곤 코치, 주장 최강희 등은 숙소에서 이 같은 사태를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현대그룹 정세영 회장의 팀 해체 의지도 강력했다.
현대는 한국 축구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누구보다도 축구에 대한 투자가 전폭적이었던 현대가 해체되는 건 한국 축구가 몰락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회택을 비롯해 김정남, 김기복, 김재한, 김삼락 등 축구인들이 모여 최순영 회장의 퇴진과 현대 해체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는 김종부 스카우트 파동의 당사자격인 이차만 대우 감독도 함께 했다. 현대가 해체될 경우 축구인들이 현대자동차 불매운동에 나서겠다는 강력한 의지도 전했다. 체육부장관도 현대의 축구단 해체를 막기 위해 대한체육회장과 축구협회장, 현대자동차사장 등을 불러 모아 긴급 간담회를 열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포항제철과 럭키금성, 유공 등 나머지 구단들도 입을 모았다. “김종부를 제3구단으로 보내야 이 문제가 해결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이런 충돌은 또 일어난다.”
김종부는 결국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은퇴했다. (사진=대우로얄즈)
김종부의 쓸쓸한 은퇴, 우리는 무얼 얻었나
결국 최순영 대한축구협회장이 모든 책임을 떠안으며 사퇴했고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새로운 협회 수장으로 자리 잡았다. 대우의 구단주이기도 했던 김우중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프로축구의 안정화를 위해 김종부를 제3구단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현대가 팀 해체를 철회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됐다. 김종부는 이렇게 1988년 현대와 대우의 유니폼이 아닌 포항제철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김우중 대우 회장과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이 직접 만나 김종부의 이적에 협의했을 정도로 김종부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현대는 이미지 개선을 위해 코치진을 전원 경질하고 김호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현대와 대우의 자존심을 건 영입 전쟁은 결국 모두의 패배로 끝이 난 셈이었다.
하지만 김종부는 이미 예전의 김종부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축구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적 파동에 시달린 탓이었을까. 이회택 포철 감독은 “마음의 병을 먼저 고쳐야 부활할 수 있다:고 했고 그의 친형은 ”성격이 이상해졌다. 말도 잘하고 고민도 잘 이야기하던 녀석이 이제는 혼자 고민하고 혼자 방황하고 있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는 포철에서 두 시즌 동안 64경기 중 33경기에 나서 1골 7어시스트를 올리는 데 머물렀다. 33경기 중 21경기를 교체로 나설 정도로 체력적으로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 대우로 다시 돌아온 그는 세 시즌 동안 35경기에 나서 6골 1도움을 기록한 뒤 일화로 옮겨 두 시즌 동안 5경기에 교체선수로 뛰다가 다시 대우로 복귀했다, 하지만 다시 대우에 돌아와서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결국 1995년 쓸쓸히 은퇴했다. ‘축구 천재’ 김종부는 채 화려한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1987년 11월이었다. 대우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구덕운동장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경기장에는 축가가 울려 퍼지고 꽃가루가 날렸다. 선수들은 샴페인을 들이부으면서 우승의 기쁨을 나눴다. 하지만 이때 김종부는 대우 라커룸에 혼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가 1년 4개월째 기나긴 이적 파동을 겪으면서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한 시기였다.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충무에서 부산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어머니는 여전히 아들이 뛰지 못하자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갔다. 김종부는 이렇게 말했다. “뛰고 싶어요.”
최근 K리그가 시끄럽다. 이적 파문 때문이다. 구단끼리 서로 자존심을 앞세워 싸우는 동안 결국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선수다. 구단간의 경쟁 때문에 한 선수쯤 망쳐도 상관없다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축구에만 집중하며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해야 할 선수들이 그라운드가 아닌 협상 테이블에서 시간을 보내게 하는 건 무척 잔인한 일이다. 김종부 이적 파동은 벌써 25년이나 지났지만 이 문제는 지금 우리 K리그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도 않다. 선수 하나 이렇게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사라져도 그만인가. 결국 그 선수들이 모여야 클럽이 있고 리그가 있는 것 아닌가. 이적 파동은 25년 전 추억으로도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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