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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山齊) 조병세(趙秉世)의 일생
"지사가 피를 뿌리고 열사가 울음을 삼킬 때"
강직한 성품으로 주요 관직을 역임하다
이와 같은 가정환경은 선생에게 일찍부터 관계진출의 뜻을 갖게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26세 때인 1852년 음직으로 관계에 나아간 후 사간원(司諫院) 정언, 헌납, 홍문관 교리 등 조선시대 관계에서 흔히 대쪽같은 선비들이 거치는 삼사(三司)(사간원, 홍문관, 사헌부로서 관리의 부정부패를 규찰하거나 임금에게 직언을 하는 직책)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감사원이나 언론계통의 직책이다.
철종이 승하한 뒤 고종이 등극하고 대원군이 집권하는 정권교체기에도 선생은 여전히 사헌부의 장령, 집의, 부교리, 사간원 사감, 집의, 응교, 홍문관 부응교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1865년(고종 2년)부터는 왕의 측근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우부승지에 오르는 등 권력의 중심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866년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대원군의 섭정이 강화되면서는 이천부사, 영광군수 등 외직으로 물러나 중앙관계에서 멀어지기도 하였다. 지방의 수령으로 재직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부정부패를 없애고 서민들의 생활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선생이었지만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는 다시 중앙의 정계로 복귀하여 애민위국(愛民爲國)의 큰 뜻을 펴게된다.
동년 9월 승정원 승지로 임금의 최측근에서 활동하였고,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 1875년 이조참의, 1877년 공조참판, 의금부사를 맡아 언로(言路)를 통한 국정에의 간접 참여에서 한 걸음 나아가, 중앙행정부서의 관리자로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국제정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센 물결이 조선에까지 뻗쳐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 서구의 파상적인 개항요구를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막아내기는 하였으나, 이미 대세는 물리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정도를 넘고 있었다.
이제 조선은 제국주의의 침략 속에서 자신을 지켜가기 위해 현명한 길을 찾아야 할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개항요구를 국민들의 일치된 힘으로 막아내던 조선정부는 어이없게도 일본이 이미 제국주의적 야심을 갖고 조선을 침략하려는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원군의 실각과 고종의 친정 이후 개국의 필요성이 조정 내에서 공론화되어 가던 차에 일본이 의도적으로 운양호사건을 일으키자 미처 국제공법에 대한 이해조차 부족한 상태에서 개국을 서둘렀다.
1876년 개국 당시 선생은 50세로서 병조참지로 있었으며, 이듬해 공조참판, 지춘추관사를 역임하였고, 성균관 대사성과 동지경연사(임금에게 학문과 經世의 道를 강의하는 직책)를 맡아 조정의 문한(文翰)으로서 고종의 측근에서 활동하였다.
개국은 이제 시작되었고, 이권다툼의 국제정세 속에서 조국의 갈길을 멀기만 하였다. 그러면 선생은 개국과 함께 급속히 추진되던 개화에 대해 어떠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을까? 선생이 당시의 개화를 역사의 필연적인 추세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물질세계를 열어 힘써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개화' 라 인식하였고,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이미 기자조선 당시에 개화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사람과 짐승의 다른 점과 화(華)(성리학적 세계)와 이(夷)(오랑캐)의 구별되는 점은 오직 강상(綱常)과 예의(禮義)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나라와 외국의 차이점도 역시 강상예의(綱常禮義)에 있다고 하여 외국을 강상과 예의가 없는 오랑캐로 여겼다. 이러한 전통적인 주자학적 사고양식은 당시 유교국가의 정맥을 잇고 있다고 자부하던 조선 지식인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더욱이 선생의 경우, 성균관 대사성 등 당시 유교교육의 최고위직을 지냈고, 백부인 조두순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관직에 천거한 바 있었으므로 화서학파의 세계관, 시국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일설에는 선생을 동도서기(東道西器)적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시국인식은 화서학파의 재야유생들에게는 위정척사 사상으로 이어져 일제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키려는 의병항쟁으로 나타났다.
◯ 부국강병을 통한 자주적 국권 수호에 힘쓰다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기까지의 10여 년간 선생은 이조․예조․공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며 점증하는 외세의 간섭에 맞서 부국강병을 통한 자주적 국권수호에 힘썼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권력은 민영준(閔泳駿), 민영소(閔泳韶), 민영달(閔泳達) 등 민씨 척족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이들 권신들이 자행한 매관매직과 가렴주구의 영향은 삼정(三政)의 문란을 더욱 촉진하여 민중들의 생활은 말할수 없이 궁핍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선생은 이러한 척신(戚臣)들의 폐단으로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어려움을 지적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기인론(其人論)을 주장, 인재선발과정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힘썼다. 이를 위해 특별히 헌책과(獻策科)를 신설하자고 주청하여 국왕의 윤허까지 받은바 있었으나, 척족세력의 반대로 실시하지 못하였다.
1894년 민중들의 불만이 동학농민운동으로 폭발하자 대책마련을 위한 어전회의에서 선생은 대경장(大更張)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청하였다. "오늘의 민정(民情)을 살펴보면 매우 가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령 4칸의 초가집은 1년의 납세가 백여 금이고, 5~6두락의 토지에는 1년 납세액이 너무 많아 호구조차 잇지 못할 정도로 빈궁이 극심합니다. 만약 대경장(大更張)을 크게 시행하지 않으면 실효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의 병력을 끌어들이자는 소위 '차병(借兵)' 논의에 대해 "병력으로 이를 제압하여도 그 근원을 다스리지 못한 즉 국민들 모두가 적이 될 것" 이라고 우려를 표시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정범조(鄭範朝) 등 개혁파 인사들은 청렴한 인사의 등용, 탐관오리의 징계 등을 논민운동의 근본적인 치유책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반일, 점진개혁의 분위기에 힘입어 고종은 마침내 외세의 개입없이 독자적으로 내정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고, 농민운동의 수습책과 정부기구 혁신을 통해 일본의 압박을 막을 목적으로 교정청(校正廳)을 신설하였으며, 선생도 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선생을 비롯한 정범조 등은 각종 실권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국왕의 자문역할에 그치고 있었고 때문에 정책입안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였고, 결국 일본을 등에 입은 소장개혁파들이 갑오개혁을 추진하자 정계 1선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폐정개혁을 위한 시무 19개조 건의
그러나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을 거치면서 일본의 국권침탈이 더욱 심화되고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선생은 이를 좌시할 수 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1896년 19개조의 차자(箚子)(상소의 일종)를 올려 폐정개혁을 건의하였다. 그 내용은 언로(言路)를 크게 열어 중책(衆策)을 모을 것, 형명한 인재를 널리 구할 것, 재정을 충실히 한 연후에 군대를 양성할 것, 각지의 의병을 효유하되 토벌하지 말 것 등으로 특히 난국을 헤쳐 갈 인재의 등용과 재정안정에 역점을 두었다. 또한, 러시아공사관으로 이거한 고종(아관파천)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신중할 것을 청원하여 정치외교의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국은 외세의 간섭 속에서 자주적 외교노선과 부국강병책을 강구하지 못하였고, 일본과 러시아에 각종 이권을 내어주는 등 혼미를 거듭하였다. 급기야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강압으로 1904년 한일협정이 늑결되어 일제가 추천하는 재정, 외교 고문관이 한국의 재무, 외무관계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게 되고 이듬해 2월에는 재외국 공사들이 소환되어 한국의 외교활동이 중단되는 등 국권은 더욱 기울어 갔다.
조국이 백척간두의 어려움에 처하자 선생은 다시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시폐 5조(時弊 5條)의 상소를 올려 광무황제(고종)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간곡히 아뢰었다.
1. 재상을 신중히 선택하여 정강(政綱)을 세울 것.
2. 황제 주변의 간신배를 숙청하여 아첨을 막을 것.
3. 간관(諫官)을 두어 언로(言路)를 넓힐 것.
4. 외부대신(外部大臣)을 잘 가려 임명하여 대외교섭에 신중을 기할 것.
5. 탐관오리를 징치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
그러나 선생의 이러한 노력도 헛되어 1905년 11월 17일 일제의 강권으로 황제의 윤허도 없이 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임권조(林權助) 사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그 내용은 일본이 동경에 있는 외무성을 통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고, 일본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의 한국신민을 보호하며, 한국에는 통감을 두어 서울에 주재하면서 한국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기타 필요한 곳에 일본인 이사관을 대한제국은 자주적 외교권을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내정에 있어서 조차 일본통감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통탄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조병세가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도록 청하다
원임 의정(原任議政) 조병세(趙秉世)를 소견하였다.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이 일전에 궐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하여 듣고 죽음을 무릅쓰고 올라 왔으나 정신이 흐려서 말로는 다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삼가 간단한 차자를 지어 아룁니다. 신이 병으로 시골집에 누워서 목숨이 거의 끊어지던 와중에 중 갑자기 듣자니, 일본 공사가 다섯 가지의 조건을 가지고 조약을 맺기를 요청하였다는데 이른바 그 다섯 가지 조목은 모두가 나라의 존망과 관련되는 관건이기 때문에 아무리 위협하고 협박하더라도 폐하의 뜻은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신하들이 감히 사사로이 서로 가타부타하였으며 심지어 외부(外部)에서 조인(調印)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고금천하에 전에 없는 이런 변이 있습니까?
천하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의 천하이지 한 개인이나 한 집안의 사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중대한 일이 생기면 존엄한 임금도 위에서 독단(獨斷)하지 못하고 반드시 시임 및 원임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원들, 지방에 있는 유현(儒賢)들과 의논한 다음에 결안(決案)하는 것이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변함없는 법이었습니다. 이번 일본 공사가 청한 5가지 조목은 관계되는 것이 어떠하며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한두 신하들이 폐하의 뜻을 받들지도 않고, 옛 법을 따르지도 않고 어찌 제 마음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면서 나라를 남에게 넘겨준단 말입니까?
임금과 법을 멸시한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주관하고 의견을 제시한 박제순(朴齊純)을 빨리 정형(正刑)으로 다스려서 세상에 사죄하며 그 때 회의에 참석하였던 각 부의 대신들을 모두 우선 본래의 관직에서 파면시키고 법부(法部)에 구류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죄목으로 조율할 것입니다. 그러니 즉시 조칙을 내려 해당 의안(議案)을 무효화시키고 반드시 강직한 신하를 외부의 장관(長官)에 임용하여 그 의안은 시행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각 국 공사관(公使館), 영사관(領事館)에 분명히 밝히도록 하소서.
조칙(詔勅)을 써서 내리기전에 신은 물러갈 수 없으며 처분을 받지 못하면 차라리 대궐 섬돌에다 머리를 찧어서 죽을지언정 의리상 차마 살아서 대궐문 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서 500년 동안 조종(祖宗)이 지켜온 기업(基業)을 보존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에게 충성스럽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한 경으로서 어찌 이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번의 일은 과연 졸지에 일어난 일이지만 어찌 조용히 좋은 방법이 없겠는가? 밤공기가 몹시 차서 실로 염려스러운데, 바라노니 경은 즉시 물러가서 나의 마음을 안심시키라.” 하였다.
조약늑결의 소식에 접한 선생은 "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니 내 세신(世臣)으로서 따라 죽음이 마땅하다" 는 비장한 각오로 신병을 무릅쓴 채 상경하여 광무황제에게 을사5적(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의 처단과 조약의 무효임을 각국에 밝힐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선생은 계속해서 민영환, 이상설 등 백관을 이끌고 입궐, 소수(疎首)로 연명 상소하였다. 조약에 참여한 박제순을 참형에 처하고 각 대신을 파면한 후 다시 총량한 신하를 가려 외부대신에 임명하여 각국 공사들과의 담판을 통해 협약을 파기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에 눌린 황제의 비답은 미온적일 뿐이었다.
선생은 이튿날에도 다시 대신들을 이끌고 의분에 찬 상소를 올리는 한편,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로 조약을 체결한 사실의 부당성을 꾸짖고 조약의 폐기를 요구하였다. 또한,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 이태리 등 5개국의 공사들에게 공한(公翰)을 보내어 국제공법에 의거하여 합동회의를 열어 늑약을 부인하는 성명을 낼 것을 호소하였으나 아무런 회답도 받지 못하였다.
사태가 위급하자 일본공사 임권조는 황제를 협박하여 이들을 궁궐에서 내쫒게 하였으나 선생은 대안문(대한문) 밖에서 석고대죄하며 상소항쟁을 계속하였다. 일제헌병대는 선생을 체포하여 일본 헌병주재소에 구속했다가 노령이므로 이튿날 석방하였다.
12월 1딜 선생은 석방되자 마자 표훈원(表勳院)에서 다시 상소운동을 전개코자 하였으나 일본헌병들이 달려와 억지로 교자에 태워 족질인 조민희의 집으로 끌고 갔다.
목숨을 바쳐 국가존망의 위급함을 알림
국난을 바로 잡을 수 없음을 통분히 여긴 선생은 교자속에서 미리 준비한 극약을 마셔 자신의 목숨으로서 광무황제를 비롯한 국민 모두의 자각과 국가존망의 위급함을 알렸다. 선생의 위독한 용태를 보자 일 헌병들이 당황하여 일인 의사를 불러 진료코자 하였으나 선생의 사위 이용직(李容稙)이 "우리 대한대신이 나라를 위하여 자결코자 하는 데 너희 무리들이 무슨 일로 간여하려 하며, 또 돌아가는 분을 욕보이느냐" 며 크게 꾸짖자 모두 도망쳐 버렸다.
선생은 자결하기 전에 써놓은 유언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서한 그리고 국민에게 당부하는 피끓는 유서를 남기고 이 날 오후 6시쯤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9세였다. 선생의 순국소식을 접한 조야의 수많은 인사들이 국가의 장래와 더불어 선생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 장의는 이 달 8일 종로 네거리에서 거행되었는데 일제의 방해로 족질 조민희의 집으로 식장을 옮겼으며,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선생의 우국충정의 정신을 기렸다.
선생의 장례식에는 일본에 있던 한국유학생들이 만사를 보내왔을 뿐 아니라 서민들에서부터 심지어 기생들 조차 참여하여 국민 모두의 애도 속에 거행되었다.(당시의 애국적 기생들은 "조국의 살 길이 교육이냐, 무력이냐" 라는 논제로 격렬한 토론을 벌일만큼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였었다.)
선생의 유서는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고, 동신문은 '독(讀) 조병세 유서'라는 제목의 논설을 실어 "一言一字가 사람들로 하여금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선생의 죽음을 아쉬워 하였다. 광무황제는 선생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생은 평소 주위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이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끝까지 절개를 지키는 일이다. 끝까지 절개를 지켰던 분은 포은 정몽주였다(人之最難者 晩節也 終守晩節者鄭圃隱是也)." 라고 하였으니 선생 역시 그러하였다.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氣)가 함께 약해 진다면 그것은 혈기(血氣)일 뿐이다. 지기(志氣)는 그렇지 아니하니 나이가 비록 늙어가더라도 지기(志氣)는 약해지지 않는다" 는 소신을 몸소 실천한 분이었다.
평소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었던 선생은 "만약 내가 비단 등속을 사용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사치하여 그 근본을 잃는 것이다" 고 하여 명절 때 조차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임금이 하사하는 가마 등의 상전(賞典)조차 일체 받지 않았다고 하니 선생의 청렴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또, 만년에 들어서는 하인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은퇴하였으니 너희들의 할 일도 없다.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되 재상가에 있었음을 빙자하며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라. 이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라고 하며 시중드는 하인 1명만을 남기고는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하루는 문인 김달린과 대화중에 부친 조유순이 즐겨보던 책을 발견하자 부친 생각에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김달린이 물러나와 주위 사람들에게 "옛적에 순(舜) 임금은 나이 50에도 부모를 사모하였다 하나 이제 80세에 부모를 그렇게도 사모하는 분을 내 이제 산재공(山齋公)을 통해 알았노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선생이 충의효제(忠義孝悌)의 도덕성을 갖춘 진정한 선비요 애국자였음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이 마지막 남긴 애끓는 유서는 이러하였다.
황제에게 올리는 유소(遺疏)-고종에게 올리는 유서
신은 죄가 많고 충성이 옅어서 성상의 뜻을 감동하시게 못하여 역신을 제거하지 못하고 겁약(劫約)을 취소하지 못하게 되니, 한번 죽음으로 국은(國恩)에 보답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에 감히 폐하께 영결하는 것입니다.
신이 죽은 후에는 큰 결단을 내리시어 제순(齊純), 지용(址鎔), 근택(根澤), 완용(完用), 중현(重顯)의 5적을 대역부도(大逆不道)로 논하시어 섬멸하여 천지신인(天地申人)에게 사례하시고, 곧 각국 공사에게 교섭하여 위약(僞約)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국가의 명맥을 회복하신다면 신의 죽는 날이 사는 해가 되겠습니다. 만일 신의 말이 망령된 것이라면 곧 신의 몸둥이를 젓담아서 여러 적에게 하사하십시오.
신이 정신이 혼미하고 산란하여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니 원통한 마음 하늘에 사무쳐서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궁궐을 우러러 보오니 눈물이 샘솟듯 할 뿐입니다. 성상께서는 슬프게 여기시고 생각하시어 죽을 때의 하는 말을 채납해 주신다면 종사(宗社)의 다행이요, 천하의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피눈물 흐르고 목이 메이는 충심을 참지못하와 감히 자결하며 아뢰나이다.(후략)
결고(訣告) 전국 인민서-국민에게 남긴 유서
병세(秉世)는 죽으면서 국내 인민에게 경고합니다. 아아! 강한 이웃 나라가 맹약(盟約)을 어기고 적신(賊臣)이 나라를 팔아 5백 년 종묘사직이 위태롭기가 깃발에 매달린 실끈 같고 2천만 생령이 앞으로 노예가 되고 말것입니다.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죽을지언정 차마 오늘의 이런 수욕(羞辱)이야 당하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지사(志士)가 피를 뿌리고 열사(烈士)가 울음을 삼킬 때 입니다.
병세는 충분(忠憤)히 격동하여 역량도 생각지 못하고 글을 봉하여 궐문을 두드리고 대궐문에 거적자리를 펴고서 국권을 옮겨진 후에 회복하고 생령을 막바지에서 구원하려 하였는데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대세가 다틀리고 마니 오직 한 번 죽음으로써 위로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 여러 사람에게 사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도 여한(餘恨)이 있는 것은 나라 형세가 회복되지 못하고 임금의 근심이 풀리지 않은 것입니다. 바라건대 우리 전국 동포는 내가 죽었다고 하여 슬퍼하지 말고 각자 분발하며 더욱 충의를 면려하여 나라를 도와서 우리 독립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회계(會稽)의 수치를 씻는다면 병세는 지하에서도 춤추며 기뻐하겠소, 각기들 힘쓰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