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이 300호를 돌파했다. 기념 시집은 300호째인 ‘쨍한 사랑 노래’(박혜경·이광호 편). 이 시인선의 100호는 1990년에 발행된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김주연 편)였고 200호는 ‘시야, 너 아니냐’(성민엽·정과리 편)였다. 300호가 나온 지금, 시간상으로만 따진다면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이후 28년 동안 매년 10권 이상의 시집이 발행된 셈이다. 이로써 문지 시인선은 사반세기를 넘는 기간 동안 한국시단의 산 증인이 되었다. 시가 처한 정황적 여건을 가리켜 시의 위기라고 부르는 일이 당연해지다시피 한 이 때에 이는 더욱 각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현재 한국 시단과 시집 출판계는 커다란 격랑 속에서 암중모색 중이다. 시의 감각이 변하고 있으며, 이 변화는 시의 사회적 역할 변화를 동반해 왔다. 한때 시는 미래를 향한 나침반이었다. 이 역할 규정은 오랜 역사적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한국 근현대사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했지만, 시 자체의 근본적 속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시는 특유의 장르적 민첩성을 활용해 현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의 독자들은 바로 그 시를 통해서 앞으로 도래할 시간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도, 최소한 견디기 어려운 현실 속의 삶을 위로하는 일에 시는 함께 있었다. 한국 시의 저 오랜 서정적 비탄과 눈물은 현실의 비탄과 눈물 속에서 솟아오른 결정체였으며, 이 결정체들은 한국어를 다시 견디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충만한 의미로 거듭나게 했다. 이것은 그런데 현실의 질곡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시는 그 자신의 역량 속에서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그 부정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개척하는 글쓰기이다. 시의 언어는 현실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향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대상을 지시하는 척하면서 자신을 지시하는 이 의사지시성은 시 자체의 부정과 변화를 이끌어내면서 시의 영역을 확장하는 동력이었다. 시가 현실 속에 있는 한 시의 새로움은 현실의 새로움을 환기할 수 있었다. 한국시의 현재는 이 두 가지 역할 규정 속에서 전개된 결과이다.
문지 시인선 300호의 의미가 각별한 것은 한국 시의 그 현재가 언제인가부터 울증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와중의 성과이기 때문이다. 시는 삶의 비탄을 넘어 새 현실에 대한 예감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왔지만, 불현듯 돌아보니 독자들이 시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최원식은 이를 일컬어 90년대 이후 평등주의의 미학적 결과라고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 덧붙일 것은 그 평등주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시적 자기 환멸의 언어들이다. 이 자기 환멸이란, 현실적 반성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이제 어떤 것도 신생을 예감케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며 그래서 자기 부정의 공격성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마자 시의 영역 전체가 파괴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시적 자기 공격성이 시라고 일컬어져 왔던 것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고, 이 부정은 다시 시를 탄생시켰던 현실의 부정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한국시의 현재가 울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은 정확히 이런 정황의 시적 결과를 지시한다. 독자들은 떠나고 시의 영역은 파괴되고 있으며 현실은 실종된다. 가령, 성기완의 ‘유리 이야기’(2003) 시편들은 그것의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시는 현실 이외의 곳에서, 시 아닌 시로,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면서 씌어진다. 제목 대신 일련 번호가 매겨진 작품들의 맨 첫 편은 이렇다.
(자막 지나가는 동안) 초록의 고무 괴물이 시나리오를 가져왔어 나는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청록으로 빛나는 그의 머리칼을 보고 있어 / 봐 / 그는 어느 틈에 그 자리에 놓여 있어 나와 자기 그리고 유리가 등장한다고 했어 액션물은 아니지만 치정살인극이래 서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오우삼의 액션물과 비슷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를 겨누고 있는 내용이라고 했어 자기는 아버지이자 연인이라고 했어 하긴 유리의 첫 남자는 틀림없이 그였어 비 오는 거리 위로 자막이 지나가 초록의 고무괴물은 시인이야 나는 질투를 느껴
이런 시편들에서 한국시의 울증을 보는 것은 어떤 역설적 정황을 탐지하는 것과 같다. 시 아닌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의 부정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는 시가 부정되는 상태로부터 촉발되었을 감정들에 대한 무시와 그 부정 이후의 상태에 대한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기술만이 냉정하게 작동한다. 시에는 저간에 시라고 여겨져 왔던 자질들이 철저히 배제되는데, 작품의 배경은 현실 이외의 곳이고 작품의 목소리는 정서적 백지 상태를 환기한다. 계속해서 다른 작품들을 읽어가는 독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시적 의미의 단서나 원리가 시집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재의 한국시에 대한 극단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문지 시인선은 그 시적 결과물들의 언어적 총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일련의 시집들로 묶어 놓았다. 시집들은 현실적 울증에 대하는 시인들의 고통과 절망, 극단의 사유를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내면적 서정으로부터 언어적 환유의 그물망에 이르기까지 문지 시인선은 다채로운 언어의 성채를 만들어내었다.
이 다채로움이 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성과라면, 이것을 문지 시인선만의 현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비나 실천문학의 문학적 경향과 크게 달라지는 지점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그때문이다. 두루 알다시피 창비와 실천문학이 현실에 방점을 찍으면서 문학을 수행했다면 문지는 문학에 방점을 찍으면서 현실을 드러내었다. 이 문학적 경향은 이 출판사들의 시인선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최근 창비가 어떤 동요 상태에 처해있다면, 문지와 실천문학은 자신들의 문학적 영토를 강하게 고수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영역 안에서 출판사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문학적 완결성에 집중해온 것이 90년대 이후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켠에서는 이것을 문학주의로의 편향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이것은 문학의 이념적 경향 속에서는 필연적인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 이념들이 얼마나 생산적인 논쟁과 생산물들을 가져왔는가 하는 점인데, 문학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 생산적 결과물들의 부재 상태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학주의의 편향 속에서 문학은 독자들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하였다. 독자들에게 문학적 동의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문학주의는 봉착한 것이다. 이것을 한국시의 현재적 우울이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울증을 견디는 방법이 아주없을 수는 없다. 그 방법이란 무엇일까? 문지 시인선의 다채로운 목소리들을 하나로 꿰어 단수화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일 뿐더러 의미 있는 일도 아닌 지금, 한국시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시인들을 대하는 문지의 태도에 대해서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도 될 듯하다. 시를 보자. 줄리에트 비노쉬:영화배우 퐁네프의 연인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나쁜 피 폭풍의 언덕 녹색 광선 데미지 블루 소년 소녀를 만나다 지붕 위의 기병 영국인 환자 나는 그녀가 좋다 그녀의 목소리가 좋다 머릿결도 좋다 비극적인 그녀를 좋아한다 그녀는 에어컨 바람처럼 서늘하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서정학, ‘줄리에트 비노쉬’, ‘모험의 왕과 코코넛의 귀족들’ 중에서
시인들은 우울한 현실의 대중적 표상들을 직접 시 내부로 가져오기 시작하고, 대중문화의 표징들은 시쓰기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문지 시인선의 한가지 주요 경향이 바로 젊은 시인들의 대중문화적 담론체계이다. 이는 문학 자체의 프리즘을 통해 문학을 규정하는 출판 논리 속에서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런 논리 속에서는 새로운 감각의 문법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대중문화의 문학적 차용은 과거의 억압적 문학을 부정하고 그 부정으로써 문학의 동력을 확인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한다. 가령, “줄리에트 비노쉬”의 다중적 의미에 대한 시의 진술들은 바로 그런 확산적 의미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일 수도 있다. 이 확산의 과정이 문학을 더 큰 영역의 삶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까. 그런데 문학은 왜 고립된 것일까. 시뮬라크르의 현실 속에서 움직이는 대중문화란 그것 자체로 현실 부정의 자산임이 분명한데, 그렇다고 해도 그 부정성이 과거의 시적 부정성과 등치될 수는 없다. 여기에는 미래를 예감케 하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아예 없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것이 대중문화의 묘한 이중성인데, 문제는 그 문화의 대중적 역동성이 얼마나 선정주의를 극복하고 자본의 힘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인 셈이다. 문지 시인선이 300호를 돌파했다는 것은 일단 출판 시장의 자본이데올로기를 그것이 뚫고 나왔음을 의미한다.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문지 시인선이 기념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뚫고 나옴이 자족적일 때, 문학은 자기 만족적인 소모임의 우월주의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이 우월주의야말로 대중문화와 자본의 결합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은폐한다. 은폐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 결합이 압도적 현실에 대한 자발적 승인의 태도라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젊은 시인들의 자기 성찰 뿐만 아니라 그 시를 새로움과 직접 연결시키는 비평이나 출판의 자기 점검을 매번 요구함이 분명하다.
문지 시인선이 300호를 넘어선 지금 시는 스스로의 운동 속에서 시의 위기를 두 가지 의미로 확장시킨다. 우선,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는 더 이상 문화의 꽃이 아니다. 다음, 시가 대중문화적 혼합물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시의 오랜 경향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다. 문지 시인선은 그 스스로 한국 시의 한 경향으로 타올랐다. 이 힘을 지속시키면서, 또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시 독자를 잃지 않으면서 새 언어와 새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문지 측에 그 일에 대한 기대를 떨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까지의 시인선 작업이 오랜 정련을 거쳐왔다는 사실을 한사람의 독자로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박수연 충남대 교수,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