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預流者, 隨法行者, 隨信行者
.
.
제25주제(S25) 들어감 상윳따 4. Okkantasaṃyuttaṃ 제25(3-4)장 들어섬의 쌍윳따
.
‘‘Cakkhuṃ, bhikkhave,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
마노[意]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mano anicco vipariṇāmī aññathābhāvī.
정신은 무상하고 변화하고 달라진다.
.
------------------------------------------------------------------
본 쌍윳따(S25)에서는 眼에서 意까지 6개의 內入,
6內-6外-6識-6觸-6受----6想-6思-6愛---그리고---6界-5蘊
총 59法에 대한 無常-變易-已變成<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에 대한
설명이 나열되어 나타납니다.
반면에 [공양받아 마땅함 품(A7:85 등)]에서는
8가지 隨觀 X 65法(혹은 66法) 이른바 66法
6內-6外-6識-6觸-6受-6想-6思-6愛-6尋-6伺-五蘊(+5蘊 = 色蘊-受蘊-想蘊-行蘊-識薀)
= 총 520/528의 경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비슷한 표현이 나타나는 경(S35:93)에서는
雙(內-外)를 緣하여 識이, 그리고 이 三事의 화합/모임/결합을 觸이라고 하고
이러한 <眼觸>에서 <意觸>까지의 觸들도 또한
無常-變易-已變成<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에 대한 설명이 나열되고 나서
.
Phuṭṭho, bhikkhave, vedeti, phuṭṭho ceteti, phuṭṭho sañjānāti.
비구들이여, 접촉하여 느끼고 접촉하여 의도하고 접촉하여 인식한다.
Itthetepi dhammā calā ceva byathā ca aniccā vipariṇāmino aññathābhāvino.
이처럼 이러한 법들 역시 움직이고 흔들리고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여기에서의 phuṭṭha [pp. of phusati]는 삼사화합인 觸(phassa)이 아니라 이 觸 이후의
身에 속하는 受를 接(phuṭṭha)했을 때의 接이거나 혹은 觸을 接,
이것을 接한 자가 心에 속하는 受,思,想한다(vedeti, ceteti, sañjānāti.)에 대한 설명 같습니다.
.
하여튼 6內 이후..... 6愛, 6界, 5蘊 까지 총 59法들이 나열됩니다.
-----------------------------------------------
.
[6愛
.
<Rūpavitakke …pe… saddavitakke… gandhavitakke…
rasavitakke… phoṭṭhabbavitakke… dhammavitakke…pe….
본경에는 나오지 않는.
6尋
Rūpavicāre…pe… saddavicāre… gandhavicāre…
rasavicāre… phoṭṭhabbavicāre… dhammavicāre…pe….
6伺
.
본경에는 나오는 6界<地水火風空識>
.
‘‘Pañcakkhandhe [( ) sī. syā. potthakesu natthi] …pe…
rūpakkhandhe… vedanākkhandhe… saññākkhandhe… saṅkhārakkhandhe… viññāṇakkhandhe
5蘊 >
aniccānupassī viharati…pe…
dukkhānupassī viharati…
anattānupassī viharati…
khayānupassī viharati…
vayānupassī viharati…
virāgānupassī viharati…
nirodhānupassī viharati…
paṭinissaggānupassī viharati…pe…
lokassā’’ti.
[오온(五蘊)에서,
색온(色蘊)에서 … 수온(受蘊)에서 … 상온(想薀)에서 … 행온(行蘊)에서 … 식온(識蘊)에서
무상(無常)을 … 고(苦)를 … 무아(無我)를 …
부서짐을 … 사라짐을 … 이탐(離貪)을 … 소멸(消滅)을 … 놓아버림을 隨觀 …
비구들이여, 이러한 일곱 부류의 사람은
공양 받아 마땅하고, 환영받아 마땅하고, 보시 받아 마땅하고, 합장 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이다.]>
.
---------------------------------------------------------------------
[一切行(sabbasaṅkhārā)에서 → 有爲]
① cakkhusmiṃ aniccānupassī viharati 眼에 대해서 無常-隨-觀하는 자가 머문다.
aniccasaññī aniccapaṭisaṃvedī 無常-想하는 자로 · 無常-체험하는 자로
satataṃ samitaṃ abbokiṇṇaṃ 한결같이 지속적으로
cetasā adhimuccamāno paññāya pariyogāhamāno. ‘心으로 깊이 몰입할 때’, ‘반야로 통찰할 때’
.
心으로 結<잡아놓고>, 般若로 꿰뚫을 때.....
adhimuccamāno: [欲-結-進-念-捨] = 作意(心所)
心으로 結한다<확정-잡아놓는다>는 것은 (心所)作意라고 이해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즉 眼쪽으로 作意하면서[= <作意 集>은 <法=眼 集>]
그 法(眼)을 般若로써 꿰뚫으면서
언제나 한결같이 지속적으로
無常하다고 想하는 자로, 無常을 경험하는 자로, 無常을 隨觀하는 자로 살아서]
---------------------------------------------------------------
6內 이후..... 6愛, 6界, 5蘊 까지 총 59法들이 나열됩니다.
---------------------------------------------------------------
.
4.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대해서 이와 같이 믿고 이와 같이 확신을 가지는 자를
Yo, bhikkhave, ime dhamme evaṃ saddahati adhimuccati –
2.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이와 같은 모든 원리에 관하여 이와 같이 믿고 신뢰하면,
.
-------------------------------------------------------------
이러한 59法들을 이와 같이<=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라고/라는 것을
<saddahati> <adhimuccati>하는 자는..... 아래 <隨信行者(saddhānusārī)라고 한다.>
<saddhā / saddahati>는 현재 우리들의 언어습관의 '믿음(信)'이라는 뜻 보다는
'信賴가 간다.'라는 뜻에 더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즉 '편하게/安心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adhimuccati>는 통상 '勝解'라고 번역되지만 <확신=결정하고 → 수지=기억>에서
<決定/結定-受持>에 가까운 의미입니다. 총괄적으로는 <믿음>으로 이해해도 대과는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아래 <okkanta : [pp. of okkamati] entered; fallen into; come on.>는
母胎(mātukucchiṃ)에 든다, 혹은 昏沈(middhaṃ)에 빠진다.라는 문구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들어간다, 입장한다.'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
.
일러 믿음을 따르는 자라고 한다.
그는 올바른 정해진 행로에 들어가고, 참된 사람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넘어섰다.
ayaṃ vuccati saddhānusārī,
okkanto sammattaniyāmaṃ, sappurisabhūmiṃ okkanto, vītivatto puthujjanabhūmiṃ;
그는 단연코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되고 참사람의 지평에 들어서고
일반사람의 지평을 뛰어넘는 믿음의 행자라고 한다.
.
그가 지옥이나 축생계나 아귀의 영역에 태어나게 되는 그러한 업을 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예류과를 실현하지 못한 채로 임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abhabbo taṃ kammaṃ kātuṃ,
yaṃ kammaṃ katvā nirayaṃ vā tiracchānayoniṃ vā pettivisayaṃ vā upapajjeyya;
abhabbo ca [abhabbova (sī. syā. kaṃ.)] tāva kālaṃ kātuṃ
yāva na sotāpattiphalaṃ sacchikaroti’’.
그는 업을 짓더라도 지옥이나 아귀의 세계에 태어나는 그러한 업을 지을 수 없으며
적어도 죽기 전 까지는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
.
----------------------------------------------------------
隨信行者(saddhānusārī)는 이미 예류果(sotāpattiphala,預流者)를 예약하신 예류道상의 수행자라는 설명입니다.
또한 아래의
隨法行者(dhammānusārī)도 또한 같은 처지라는 설명입니다.
다만 隨法行者는 이러한 <66법들>을 般若로 <아는 만큼>
<ni-j-jhānaṃ khamanti>하는 자랍니다.
<khamanti>는 [kham + a] is patient; endures; forbears; pardons.
견디어 낸다, 인내한다. 容認/허용한다.라는 의미입니다.
<ni-j-jhānaṃ>에서 <jhāna>는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禪입니다.
<담다/乘車하듯 태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ni-j-jhānaṃ khamanti: 담음이 용인된다/ 태움이 허용됨 /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짐>
.
238. ‘‘Idha, bhikkhave, ekacce moghapuris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
suttaṃ, geyyaṃ, veyyākaraṇaṃ, gāthaṃ, udānaṃ, itivuttakaṃ, jātakaṃ, abbhutadhammaṃ, vedallaṃ.
Te t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tesaṃ dhammānaṃ paññāya atthaṃ na upaparikkhanti.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anupaparikkhataṃ na nijjhānaṃ khamanti.
10.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미혹한 자들이
경‧응송‧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본생담‧미증유법‧문답 같은 법을 배우지만
그 법을 배워 통찰지로 그 법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
그 법의 뜻을 통찰지로 자세히 살피지 않을 때 그들에게 그 법들은 확립되지 못한다.
.
분류하여 주신 법들에 대해서 그 말씀하신 의미에 대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면
<ni-j-jhānaṃ khamanti>가 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
1033. [아난다] 1030.
‘‘Bahussutaṃ upāseyya, sutañca na vināsaye;
Taṃ mūlaṃ brahmacariyassa, tasmā dhammadharo siyā.
"많이 배운 사람을 섬겨야 하고, 배운 것을 파괴해서는 안 되리,
그것은 청정한 삶의 뿌리이니, 가르침을 수호하는 자가 되어야 하리."
.
1034. [아난다] 1031.
‘‘Pubbāparaññū atthaññū, niruttipadakovido;
Suggahītañca gaṇhāti, atthañcopaparikkhati.
"앞과 뒤에 오는 것을 알고 의취를 알고 말뜻과 구절에 밝아
그는 잘 파악된 것을 파악하고 그리고 의취를 탐구한다."
.
1035. [아난다] 1032.
‘‘Khantyā chandikato [khantiyā chandito (?)] hoti, ussahitvā tuleti taṃ;
Samaye so padahati, ajjhattaṃ susamāhito.
"이해를 통해 의욕이 일어나니 수행을 닦아 그것을 측정한다.
그 안으로 삼매에 잘 든 님은 올바른 때에 정진을 기울인다."
<*확신이 생겨야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
35. 그는 그를 조사해서 어리석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청정한 것을 알았으므로,
그에게 믿음이 확립되고, 믿음이 확립되면 섬기게 되고,
섬기면 존중하게 되고, 존중하면 청문하게 되고,
청문하게 되면 가르침을 배우게 되고, 배우게 되면,
가르침에 대한 새김이 생겨나고, 새김이 생겨나면,
가르침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게 되고, 의미를 고찰하게 되면,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게 되고,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게 되면, 의욕이 생겨나게 되고,
의욕이 생겨나면 노력하게 되고, 노력하면 깊이 관찰하게 되고, 깊이 관찰하면 정근하게 되고,
정근하면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깨닫게 되며, 마침내 지혜로서 꿰뚫어 보게 됩니다.”
‘‘Yato naṃ samannesamāno visuddhaṃ mohanīyehi dhammehi samanupassati;
atha tamhi saddhaṃ niveseti, saddhājāto upasaṅkamati, upasaṅkamanto payirupāsati,
payirupāsanto sotaṃ odahati, ohitasoto dhammaṃ suṇāti, sutvā dhammaṃ dhāreti,
dhatānaṃ [dhāritānaṃ (ka.)] dhammānaṃ atthaṃ upaparikkhati,
atthaṃ upaparikkhato dhammā nij jhānaṃ khamanti,
dhammanijjhānakkhantiyā sati chando jāyati,
chandajāto ussahati, ussahitvā tuleti, tulayitvā padahati,
pahitatto samāno kāyena ceva paramasaccaṃ sacchikaroti
paññāya ca naṃ ativijjha passati.
20. "그를 조사하여 어리석음의 법들로부터 청정함을 관찰한 후에 그는 그에게 믿음이 생긴다.
믿음이 생긴 자는 그를 친견한다. 친견하면서 공경한다. 공경하면서 귀를 기우린다.
귀 기우리면서 법을 배운다. 배우고 나서 법을 호지한다. 호지한 법들의 뜻을 자세히 살펴본다.
뜻을 자세히 살필 때에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인다.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에 열의가 생긴다. 열의가 생길 때에 시도한다.
시도할 때 세밀하게 조사한다. 세밀하게 조사한 뒤 노력한다.
노력할 때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그것을 꿰뚫어 본다.
-----------------------------------------------------------
.
5. “비구들이여, 통찰지로 충분히 사색하여 이러한 법들을 인정하는 자를
‘‘Yassa kho, bhikkhave, ime dhammā evaṃ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3.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이와 같은 원리에 관하여 이와 같이 지혜로 충분히 숙고해서 받아들인다면,
.
일러 법을 따르는 자라 한다.
그는 올바른 정해진 행로에 들어가고, 참된 사람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를 넘어섰다.
ayaṃ vuccati –‘dhammānusārī,
okkanto sammattaniyāmaṃ, sappurisabhūmiṃ okkanto, vītivatto puthujjanabhūmiṃ;
그는 단연코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되고 참사람의 지평에 들어서고
일반사람의 지평을 뛰어넘는 진리의 행자라고 한다.
.
그가 지옥이나 축생계나 아귀의 영역에 태어나게 되는 그러한 업을 짓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예류과를 실현하지 못한 채로 임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abhabbo taṃ kammaṃ kātuṃ,
yaṃ kammaṃ katvā nirayaṃ vā tiracchānayoniṃ vā pettivisayaṃ vā upapajjeyya;
abhabbo ca tāva kālaṃ kātuṃ yāva na sotāpattiphalaṃ sacchikaroti’.
그는 업을 짓더라도 지옥이나 아귀의 세계에 태어나는 그러한 업을 지을 수 없으며
적어도 죽기 전 까지는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
.
6.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을 이와 같이 알고 보는 자를
흐름에 든 자[預流者]라 하나니,
그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Yo, bhikkhave, ime dhamme evaṃ pajānāti evaṃ passati,
ayaṃ vuccati –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ti.
4.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이와 같은 모든 원리에 관하여 이와 같이 알고 또한 본다면,
그를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흐름에 든 님이라고 한다."
.
---------------------------------------------------------------
반면에 이러한 66法들을 이와 같이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라고
본인이 직접 <pajānāti> <passati>하는 者<diṭṭhippatto>가
드디어 [이러한 66법들의 흐름]에 들어가신 분(sotāpanno)이라고 합니다.
<= 得道 = "緣起를 보는 자는 法을 보고, 法을 보는 자는 緣起를 본다."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ti.>
.
[이러한 66법들의 흐름]은
이른바 12處-66法(5蘊) -(愛)取-變成(有) = 名色 ← 識住 = 名色 緣 識
이른바 愛支緣起.
.
여기까지가 內~ 바른삼매(색계 4종 禪)에 들어서
外~ 內入(거친 色의 名色과 意)로부터 外入(거친 色들로부터 法들) - 이 한 雙을 緣하여 생겨나는
66법들(줄여서 5蘊)의 無常등을 外~ 隨觀하거나
혹은 바른삼매(색계 4종 禪)등<=9次第 定>에 들어가서<=그 處에서>
그 處處...의 상태<담고 있는=禪 즉,
處處에서의 心이 담아 있는 法들을 하나하나
[잡아 놓고서, 즉] <떼어 놓고서 보는 것>이 위빳사나라는 의미 같습니다.
Vavatthita [pp. of vi+ava+sthā, cp. vavatthapeti &late Sk. vyavasthita "determination"]
1. entered on, arranged, fixed, determined, settled -- 2. separated (opp. sambhinna)
.
이러한 상태들이 자각적으로 그에게 일어났으며, 자각적으로 유지되다가 자각적으로 사라졌다.
Tyāssa dhammā vidit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그에게 이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일어나고,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머물고,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사라진다.
.
그는 이와 같이 ‘과연 이러한 상태들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생겨났고, 존재했지만 사라졌다.’라고 관찰했다.
So evaṃ pajānāti – ‘evaṃ kirame dhammā ahutvā sambhonti, hutvā paṭiventī’ti.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이 법들은 없었는데 생겨나고, 있다가는 사라진다.'라고.
.
*隨觀(見)과 대비되는 分觀(見-vipassana)은
外觀이 아닌 어떤 의미에서는 內觀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隨觀 후 分觀 순서인 것 같습니다.
隨觀에 의해서는 다시 慾界로 한 번 혹은 최대 일곱 번까지 돌아 올 수도 있지만,
分觀(vipassana)에 의해서는 최소한 불환자(慾界에는 돌아오지 않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阿羅漢의 최단코스는 身隨觀(4념처/호흡념)에 의한 初禪(4禪定)에서 <外~ 身隨觀: 無常등>
혹은 <內~ 初禪을 分觀> - 慧解脫
.
So tesu dhammesu
anupāyo anapāyo anissito appaṭibaddho [appaṭibandho (ka.)]
vippamutto visaṃyutto vimariyādīkatena cetasā viharati.
그는 그<*初禪> 법들<*心에 담아/擔持한 것들>에 대해
홀리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매이지 않고 벗어나고 자유롭고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
부기 2018.02.13. 12:30
法隨法(Dhammānudhamma)
.
.
앞의 대문자 法은 세존께서 [세존께서 직접 擔持(법)하셨던 것을, 언어로써 나누어 분류하여 담아 놓은]
<Dhamma구부법(九部法), 구분교(九分敎)>를 지칭하고
뒤의 소문자 法은 수행자 각자가 직접 擔持(법)한 것을 지칭합니다.
즉 後學인 수행자들은 先學이신 스승께서 경험하신 것을 시행착오를 최소화 하는 방법으로
흉내내는 것을 Dhammānudhamma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흉내내기의 최종 지점은 解脫-涅槃입니다.
이러한 涅槃으로 가는 途上을 따라하기가 anudhamma입니다.
.
A7:64
‘‘Kathañca, bhikkhave, bhikkhu Dhammaññū ho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법을 아는 자가 되는가?"
.
Idha, bhikkhave, bhikkhu Dhammaṃ jānāti –
suttaṃ geyyaṃ veyyākaraṇaṃ gāthaṃ udānaṃ itivuttakaṃ jātakaṃ abbhutadhammaṃ vedallaṃ.
3.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경(經), 응송(應頌),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方等)이라는 [아홉 가지] 법을 안다.
.
‘‘Atthaññū ca kathaṃ hoti?
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의미를 아는 자가 되는가?"
Idha, bhikkhave, bhikkhu
tassa tasseva bhāsitassa atthaṃ jānāti –
‘ayaṃ imassa bhāsitassa attho, ayaṃ imassa bhāsitassa attho’ti.
4.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은 이 말의 의미고, 이것은 이 말의 의미다.'라고
각각의 말의 의미를 안다.
.
“비구여, 나는 많은 법을 설하였나니
그것은 경(經), 응송(應頌),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方等]이다.
Catuppadāya cepi bhikkhu gāthāya
atthamaññāya Dhammamaññāya
Dhammānudhammapaṭipanno hoti,
bahussuto Dhammadharoti alaṃ vacanāyāti.
만일 비구가 네 구절로 된 게송[四句偈]이라도
그 뜻을 완전하게 알고 법을 완전하게 알아서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다면
그는 많이 배우고 법(경장)을 호지한 자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
.
appakā te sattā ye atthamaññāya Dhammamaññāya Dhammānudhammaṃ paṭipajjanti.
그런데 실상은 세존께서 직접 경험하신 擔持, 세세하게 분류하여 언어로써 표현하신 담마.
그 담마를 알고 그 말귀를 알아 들어서 그대로 따라 擔持하는 중생들은 아주 적습니다.
|
첫댓글 위빳사나를 內觀이라고 했지만
아직 확신하고서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참고하십시오. _()_
흐름에 드신 분...에서 흐름은 (8정)道라고 경에 나옵니다.
즉 得道하신 분들입니다.
기준점은 바른삼매(正定)이며, 또한 初禪.
初禪에 대한 정형구와 설명은 경전에 많이 소개되어 있으므로
세존의 말씀을 신뢰하신다면 스스로 점검하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法隨法(Dhammānudhamma)를 별도로 올리지 않고 부기로 올렸습니다.
본문과도 관련이 될 것 같아서.... 관련되지 않는 경문이 있겠습니까만...^^
_()_
일곱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
아직 아라한 과를 얻지 못했지만 흐름에는 드신 분들, 서열상으로는
身內證者(kāyasakkhī), 見得者(diṭṭhippatto)와, 信解脫者(saddhāvimutto)가 있습니다.
즉 이분들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이미 預流者들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는 것은 根基차이입니다.
즉 身內證者는 定根이, 見得者는 慧根이, 信解脫者는 信根이 상대적으로 더 수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