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가루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책상앞에 떨어집니다. 잔인한 달 사 월의 황사는 가고 눈부신 신록이 바야흐로 초여름을 알립니다.
이번 <황태자비 납치사건>에 보여주신 여러분의 관심과 애정에 감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분들이 궁금해하는 435호 전문에 대해 답변을 드리는 것이 온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띄웁니다.
<435호 문서>라는 표현 자체는 소설적 장치입니다. 하지만 그 근거가 되는 문서는 존재합니다.
저는 그 문서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확인한 상태에서 소설을 썼습니다.
그 문서를 찾아 동경에 간 것은 물론 규우슈우의 일원까지 수배했지만 저는 그 문서를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서의 존재를 아는 극소수의 일본인을 통해 문서의 내용은 <민비의 시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소설을 쓰면서도 그 문서를 계속 추적했지만 결국 그 문서의 사본을 입수한 것은 소설이 세상에 나오고 나서입니다.
저를 대신해 끝까지 추적해 결국은 문서를 찾아낸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 권용석 선생의 노력의 결실입니다.
<문을 박차고 내부로 뛰어들어 왕비를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두 세군데 칼로 상처를 입힌 다음 발가벗겨 국부검사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기름을 부어 불태워 죽이는 등 차마 더 쓸 수 없습니다. 기타 궁내부 대신은 매우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시즈카 에조가 본국의 스에마쓰 장관에게 보냈던 비밀보고서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문서를 보면서 한 가지 의혹을 떠올렸습니다.
명성황후가 시간당했다는, 즉 죽은 다음에 능욕을 당했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문서는 현장의 상황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저희는 <극비>라는 도장이 찍힌 수십 종의 진귀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그 어느 자료도 이 문서처럼 현장의 상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서는 명성황후의 최후를 보고하는 단 하나의 자료입니다.
이 문서를 문서 자체의 뜻을 그대로 살려 해석하자면 명성황후는 죽지않은 상태에서 강간을 당한 것이 됩니다.
에조는 국부검사란 희한한 단어를 만들어냈지만 그 실상이 어떠했으리란건 짐작하실 것입니다.
즉 명성황후는 살아서 일본의 깡패들에게 능욕을 당한 후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문서는 자구 그대로 해석되지 못하고 시간이라는 해석을 낳았을까요?
저는 여기서 야마베 겐타로라는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를 떠올려 봅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인 겐타로는 이 문서를 최초로 찾아낸 사람입니다.
그는 이 문서를 보고 무척 고민했을 겁니다. 명성황후가 살아서 강간을 당했다고 하면 엄청난 문제가 될 터이고 문서 자체를 사장시키자니 진리탐구를 본연으로 하는 학자적 양심이 크게 저항했을 겁니다. 결국 그는 이 문서를 대대적으로 공개하는 것을 피하고 자신의 저서에 <민비는 죽은 다음 능욕을 당했다>는 정도로 문서를 덮어둔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 때에는 국어, 즉 일본어 성적이 늘 전체에서 일등이었으며 이 문서에서 채택하고 있는 고어체에 정통한 한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이 문서의 정확한 해석은 무엇이냐고.
"절대로 죽인 다음에 강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문서의 정확한 자구적 해석과 뉘앙스로는 확실히 살아있는 상태에서 강간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넘어갔으면 편할 지도 모를 무겁기 짝이 없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작가로서의 저는 소설을 써버리면 그만이고 독자들은 책을 읽어버리면 그만인 것입니까?
일본과는 이제 더 이상 과거사를 논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통령의 선언대로 입을 다물고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일단 저는 이런 사실을 대다수의 선량한 일본인들에게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해냄출판사를 통해 일본의 어느 출판사와 출판계약을 했지만 아직 책이 안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어떤 사정이나 음모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만간 일본의 총리에게 이 문서의 존재를 적시하고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답변을 요청하려 합니다.
국가적 행사로 치르는 월드컵이 있습니다.
이 월드컵 대회를 치르고 명성황후의 기일에 즈음하여 일본총리에게 서한을 보낼지, 역사의 진실을 가지고 타협하는 것은 또다른 왜곡이 될지 생각하는 중입니다.
명성황후의 능욕은 어떤 논리로도 호도될 수 없는 만행이며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인 동시에 일본의 역사왜곡을 뿌리째 잘라버릴 수 있는 중요한 증거자료입니다.
절대 다수의 일본인들은 과거의 만행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신대를 돈벌러 부대를 따라다닌 여자들이라고 호도하는 등 우익이 개발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선량한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이런 일을 알기만 하면 가슴 아파하고 그들의 역사 기술에 한없는 문제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일본인들을 무조건 매도만 해서는 안됩니다. 후쇼샤의 왜곡교과서 채택을 거부한 것도 선량한 일본인들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제대로 알리면 역사왜곡을 종결짓고 앞으로 예상되는 독도충돌도 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저의 진정한 바램은 이번에는 우리가 모두 힘을 합해 제대로 한 번 일본에 항의를 해 일본인들이 세계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의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이것이 역사왜곡의 종언으로 결말이 났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명성황후의 참혹한 죽음에 대한 역사의 풀이법이자 우리의 책무일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일본인들은 우리를 냄비라 하고 있습니다.
한 번 "와" 하고는 곧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어떤 항의에도 시간만 좀 지나면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점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만큼은 확실한 결과가 나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거망동을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은 시점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은 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의견도 참고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