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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증 홍문관 부수찬 남군 묘갈명 병서(贈弘文館副修撰南君墓碣銘 幷序)
우리 성상께서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의 봄에 효장세자(孝章世子,1719~1728)가 태학에 입학하였는데, 내가 태학사(太學士 대제학)로서 박사(博士)의 직임을 맡았다. 이때 세자의 명을 받들어 박사에게 전달하는 자를 장명(將命)이라 칭하였는데, 이 직책은 엄격한 선발을 거쳤다. 그런데 남군 유상(南君有常)이 훌륭한 문학과 행실로 당대의 추앙을 받아 마침내 장명으로 일을 집행하였다.
나는 그가 주선함이 법도에 맞고 의도(儀度)가 볼만함을 진실로 이미 눈여겨보았었다. 며칠 후에 성상이 나에게 명하여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선비를 시험하게 하였는데, 남군이 지은 글이 유독 출중하였다. 이에 그를 장원으로 발탁하고 급제를 하사하는 명령이 있었으니, 조야(朝野)에서는 훌륭한 인재를 얻었다고 서로 축하하였고, 나 또한 스스로 대단하게 여겼다.
이때 나는《숙종실록(肅宗實錄)》을 편수하는 일을 맡아 낭료(郞僚)들을 엄선하였는데, 첫 번째로 남군을 천거하여 계하(啓下)를 받았다. 군은 병을 자주 앓았으나 선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일이 중요하다 하여 매우 부지런히 봉직하였으며, 문장과 글씨가 화려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신속하여 일이 막히지 않았다.
성상이 한창 문학에 유념하여 나에게 명하여 호당(湖堂)을 선발하게 하니, 나는 ‘이 선발은 군이 아니고는 달리 적임자가 없다.’라고 생각하여, 특별히 천거하여 명령에 응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세상 일이 크게 변하여 나와 조정에 있던 여러 사람이 일제히 쫓겨나고 흉적의 괴수가 대신하여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다.
군은 즉시 병이 있다고 핑계대고 떠나갔다가 죄에 걸려 서면으로 심문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군에게 “어버이의 병환이 있다고 말하라.”라고 권하였으나 군은 분연히 말하기를, “내 본래 저들과 함께 일하고자 하지 않으니, 어찌 다른 이유로 사양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흉적들의 죄상을 낱낱이 들어 끝까지 말하였다.
성상이 노하여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할 것을 명하였는데, 얼마 후 흉당이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아뢰어 또다시 지극히 먼 변방으로 유배 보낼 것을 명하여 영암군(靈巖郡)으로 유배되었다가, 겨울에 용서받고 돌아왔다. 군은 평소 담증(痰症)을 앓았는데, 먼 길을 귀양가느라 병이 더욱 심해져서 병을 앓은 지 5일 만에 죽으니, 무신년(戊申年, 1728, 영조 4) 3월 8일이다.
이해 11월에 세자가 별세하자, 성상은 경연(經筵)에 임하여 전교하기를, “남 아무개가 동궁의 장명이 되었다가 며칠 후에 과거에 급제하니, 내 깊이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였다. 이제 동궁의 상을 당하고 또 남 아무개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몹시 서글프다.” 하였다. 이어서 경연(經筵)의 신하가 “분관(分館)하기 전에 죽었으니, 응당 추후의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아뢰어, 특명으로 홍문관 부수찬을 추증하였다.
아, 수삼 년 이래로 국가의 변고가 참으로 많았다. 영화와 치욕, 주고 빼앗는 것이 순식간에 변하여 흉적들이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잡자, 군의 어짊으로도 장독(瘴毒)이 있는 먼 시골에 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끝내 흉당이 동궁을 저주하여 해치자 군은 예(禮)로써 저위(儲闈 세자)를 도왔던 신하로서 동일한 해에 목숨을 버렸으니, 그 화복(禍福)의 운수가 우연치 않음이 있는 듯하다.
아, 슬프다. 군은 지극한 성품과 순수한 행실이 있었다. 아버지가 병환을 앓자 목욕재계하고 신명에게 기도하여 말한 뜻이 몹시 서글펐는데 병환이 마침내 나으니, 사람들은 군의 효성이 신명을 감동시켰다고 말하였다. 군은 일찍 어머니를 잃었는데, 어머니를 언급할 때마다 반드시 오열하여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기일(忌日)이 되면 슬퍼함이 옆 사람을 감동시키곤 하였다.
계모를 섬길 적에 사랑과 공경이 돈독하고 지극하였는데, 항상 “효도는 처자식에게서 쇠한다.”라는 말을 외워서 부인에게 경계하였다. 아우와 여동생들과 우애하여, 모든 일에 마음을 쓰고 애를 태워 행여 미흡할까 염려하였으며, 이것을 일가친척에게 미루어서 곡진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남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13세에 길가에서 추위에 떨며 구걸하는 아이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어찌 따뜻한 봄이 오지 않으랴마는, 네 먼저 죽어 시궁창에 버려질까 두렵구나.〔豈無陽春至 恐汝先溝壑〕”라는 구절이 있었다. 너그럽고 후중한 성품을 길러서 조급하고 태만한 습관을 통렬히 제거하여, 대인군자의 법도를 넉넉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내면에는 강직함을 간직해서, 부정한 자를 보면 그를 미워하여 마치 자기 몸을 오염시킬 것처럼 여겼다. 일찍이 상소하여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무함을 아뢰어 이윤(尼尹)의 심술을 깨뜨렸으며, 율곡(栗谷 이이(李珥))과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등 제현들이 간사한 무리들에게 추악한 모욕을 받자, 제생(諸生)들과 함께 상소하여 변론하니, 선비들의 의논이 군을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겼다.
평소 세속 사람들을 쫓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오직 문을 닫고 한묵(翰墨)으로 스스로 즐기니, 사람들이 더욱 그의 깨끗하고 소탈함에 탄복하였다. 군의 증조인 호곡공(壺谷公)은 나라를 빛내는 문장이 있었는데, 군은 이것을 전수받아 문장의 재주가 봉홧불이 치솟아 오르는 듯하였다. 시를 지으면 굳세고 아름답고 명랑하고 윤택하였으며, 문장 또한 예스러운 뜻이 있었으나 문장짓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아니하여 준례에 따라 과거 공부를 하였고, 또한 과장에서 익숙히 사용하는 말을 쓰지 않았다.
경전을 읽기 좋아하여 손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써서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살폈으니, 그 뜻이 진실로 작은 데에 있지 않았다. 군의 훌륭한 행실의 순실하고 돈독함과 지취(志趣)의 고매함과 조행의 견고하고 바름을 개괄해 보면 이미 사우(士友)들 사이에 크게 드러났고, 또 아울러 겸손하고 온화하며 자신을 겸허하게 갖고 고요함으로써 지켰으니, 문예는 다만 여사(餘事)일 뿐이었다.
아, 지금 시대에 이처럼 훌륭한 사람이 있었는데 하늘이 갑자기 빼앗아갔으니, 시운이 불행해지고 우리 도학이 더욱 고단해짐이 어찌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군이 죽자 명정(銘旌)에 ‘부사정(副司正)’이라고 썼으니, 이는 처음 직책인 섭기거주(攝起居注)에다가 준례에 따라 군함(軍銜)을 붙인 것이었다. 지난번에 여러 사람들이 서로 축하한 것과 내 스스로 대단하게 여겼던 것이 다만 여기에 그칠 뿐이란 말인가. 애통하고 애통하다.
군은 자가 길재(吉哉)이고 관향이 의령(宜寧)이다. 조부는 경상도 관찰사 정중(正重)이고, 부친은 호조 정랑 한기(漢紀)이며, 모친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통덕랑(通德郞) 한장(漢章)의 딸이다. 호곡공은 휘가 용익(龍翼)인데 이조 판서로 대제학을 지냈다. 군은 죽을 때의 나이가 겨우 33세였으며, 양주(楊州)의 동해곡(東海谷)에 장례하였다.
군은 부사 이우신(李雨臣)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공필(公弼)을 낳았다. 공필은 정언 오원(吳瑗)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이연(李演)에게 출가하였으며 둘째는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이 사람이 분앙을 초월하여 숙우하였는데 / 若有人超坌坱而淑郵兮
어찌하여 이 세상의 불행을 만났는가 / 胡値斯世之不祥
사람들은 모두 혼탁한데 홀로 깨끗하니 / 衆汶汶獨自淸兮
하늘과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여 죽게 하였도다 / 故天與人交惡而椓傷
옛날 공성께서 소매를 들어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으셨으니 / 昔孔聖反袂而漣洏兮
제때가 아닌데 나와 재앙을 부름을 서글퍼하신 것이었네 / 恫夫出非時而致殃
어쩔 수 없구나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 已乎已乎尙復何爲兮
한갓 내세의 선비들로 하여금 추모하며 슬퍼하게 할 뿐이로다 / 徒令來世之士追挹而慨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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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효장세자(孝章世子) :
1719~1728. 영조(英祖)의 큰아들로 이름은 행(緈), 자는 성경(聖敬)이다. 1724년(영조 즉위년)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영
조가 즉위한 다음 1725년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0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양자인 정조(正祖)가 즉위하면서 진종(眞宗)으로 추존
되었다.
[주02] 나와 …… 맡았다 :
1727년(영조 3) 7월에 노론(老論)의 중진인 우의정 이의현(李宜顯),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 좌참찬 김흥경(金興慶), 판윤 이병
상(李秉常), 승지 이유(李瑜)와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파직하고, 소론(少論)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를《숙종실록(肅宗實
錄)》총재관으로 삼은 일을 말한다.
[주03] 분관(分館) :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들을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에 분속시켜 배치하는 일을 이른다. 문과 급제자들을 성균관의 박사 3명이 채점하
고 이것을 다시 승문원의 도제조가 검토하여 점수를 확정해서, 3점은 승문원, 2점은 성균관, 1점은 교서관에 분속시켜 배치하고 이
를 이조에서 왕에게 보고한 뒤 각각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배우게 하였다.
이때 점수를 얻지 못해 분관하지 못한 사람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데 이들을 미분관인(未分館人)이라고 했으며, 갑과 급제자 세 명
은 권지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수석은 종6품, 차석과 삼석은 정7품으로 서용되었다.
[주04] 효도는 처자식에게서 쇠한다 :
이 말은《설원(說苑)》권10〈경신(敬慎)〉에 “벼슬하는 자는 지위가 성취되는 데에서 게을러지고, 병은 조금 낫는 데에서 심해지
며, 재앙은 게으른 데에서 생기고, 효도는 처자식에게서 쇠한다.〔官怠於宦成, 病加於小愈, 禍生於懈惰, 孝衰於妻子.〕”라고 보인
다.
[주05] 이윤(尼尹) :
윤증(尹拯)을 가리킨다. 당시 윤증은 충청도의 노성(魯城)에 거주하였는데, 여기에 이구산(尼丘山)이 있어 노성을 이산(尼山)이라
고도 칭하였다. 이 때문에 그를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06] 호곡공(壺谷公) :
남용익(南龍翼, 1628~1692)으로,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648년(인조24)에 정시 문과에 병
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고, 문신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하고 이조 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1689년(숙종 15) 숙종(肅宗)이 소의(昭儀) 장씨(張氏)가 낳은 왕자를 원자로 삼으려 하자 반대하였고, 반교문(頒敎文)을 잘못 지
었다 하여 명천(明川)으로 유배가서 3년 뒤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는《호곡집(壺谷集)》등이 있다.
[주07] 이는 …… 것이었다 :
섭기거주는 임시 사관이란 뜻으로 실록청의 낭청을 가리킨다. 조선조에서는 춘추관의 기사관과 실록청의 낭청 등의 사관직은 모두
겸직이었는데, 남유상(南有常)이 과거에 급제하고 분관되기 전에 실록청 낭청에 선발되어 본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명정에 섭기
거주에 상응하는 군함(軍銜)을 붙인 것이다.
[주08] 분앙(坌坱)을 초월하여 숙우(淑郵)하였는데 :
‘분앙’은 분애(坌埃)와 같은 말로 세속을 뜻하며, ‘숙우’는 도덕을 행하여 선조보다 더 훌륭함을 뜻한다.《초사(楚辭)》〈원유(遠
遊)〉에 “분애를 초월하여 숙우하였다.〔絶氛埃而淑尤兮.〕”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후한(後漢)의 왕일(王逸)은 《초사장구(楚
辭章句)》에서 “세속의 더러움울 초월하여 선조를 뛰어넘음이다.
숙(淑)은 아름다움이고 우(尤)는 뛰어 넘음이다. 도를 행하고 선을 닦아서 이로써 선조를 뛰어넘음을 말한 것이다.〔超越垢穢過先
祖也. 淑美也, 尤過也, 言行道修善所以過先祖也.〕”라고 풀이하였다.
[주09] 옛날 …… 닦으셨으니 :
공성(孔聖)은 공자(孔子)를 이른다. 노(魯)나라 애공(哀公) 14년 봄에 공자가 성왕(聖王)의 상서인 기린이 난세에 잘못 나와 잡혀
죽은 것을 보고 이에 몹시 상심(傷心)한 나머지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으면서 이르기를, “나의 도가 곤궁하도다.
〔吾道窮矣.〕”라고 하고, 마침내《춘추(春秋)》를 지으면서 “14년 봄에 서쪽으로 순수하여 기린을 얻다.〔十有四年春, 西狩獲
麟.〕”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春秋公羊傳 哀公 14年》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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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我聖上三年春, 孝章世子入學, 余以太學士爲博士任。 而其奉世子命傳博士者, 號稱“將命”, 甚選也。 南君有常以文行爲一時所推, 遂以將命執事。 余見其周旋中規、儀度可觀, 固已目屬之。 居數日, 上命余試士于泮宮, 南君之作獨出倫, 擢爲擧首, 有賜第命。 朝野相賀得人, 余亦自多。 時余方掌修《肅廟實錄》, 極遴郞僚, 首以南君啓下。 君固善病, 而以先朝史事之重供職甚勤, 筆翰華美而便捷, 事以不苑。 上方留意文學, 命余選湖堂。 余謂 “是選, 捨君無他”, 將擧以應命。
亡何, 時事大變, 余與在朝諸人一齊廢退, 而兇魁代掌史事。 君卽日移病去, 至於對簿。 人勸以親癠言, 君奮曰: “吾本不欲與彼同事, 寧可他辭?” 遂歷擧罪狀索言之。 上怒命削黜。 已凶黨白罰輕, 又命竄之極邊, 配靈巖郡, 冬宥還。 素患痰癖, 因行役增谻, 感疾五日卒, 戊申三月八日也。
是年十一月, 世子薨。 上臨筵敎曰: “南某爲春宮將命, 數日登第, 余甚嘉喜。 今當春宮之喪, 又聞某已死, 心甚傷感。” 筵臣仍言: “未分隷而死, 應有追典。” 特命贈弘文館副修撰。 噫! 三數年來, 國家之變故亟矣。 榮辱、與奪欻翕於俄頃之間, 而凶賊進秉樞匀, 則君之賢不得不投身瘴鄕。 卒之凶黨詛害春宮, 則君以禮贊儲闈之臣, 同一歲捐命, 其禍福機緘, 似若有非偶然者。
嗚呼欷矣! 君有至性馴行。 父病, 齋沐禱祠, 辭意悲切, 病遂瘳, 人稱感格神明。 蚤失母, 語及, 必嗚咽不自克, 諱日哀動傍人。 事後母, 愛敬篤至, 常誦孝衰妻子語, 以戒厲其婦。 友于弟妹, 事事經心, 焦然如不及, 推之族戚, 靡不曲盡。 自幼有濟物心, 十三歲, 見路傍寒乞兒, 作詩有 “豈無陽春至? 恐汝先溝壑” 之句。 寬緩養重, 痛祛躁慢習, 綽有大人君子之度。 然內蘊剛介, 見有不正者, 惡之若浼。 嘗疏白遂菴誣, 以剖破尼尹心術, 栗、沙諸賢爲奸徒醜詆, 偕諸生疏辨之, 士論倚以爲重。 雅不喜追逐俗子, 惟閉戶, 以觚墨自娛, 人尤服其淡泊淸疎也。
君曾大父壺谷公有華國文章, 君克自傳襲, 才思烽涌。 爲詩遒麗朗潤, 文亦有古意。 而不甚屑隨例治公車業, 亦不作場屋熟爛語。 好讀經傳, 手書《大學章句》, 以朝夕警省, 其志固不在小也。 槪君行誼之純篤、志趣之高邁、操履之堅貞, 蓋已表著士友間。 而又濟以謙沖, 守以虛靜, 文藝顧其餘賸也。 噫! 今時有此等人, 而天遽奪之, 世運之不幸、吾道之益孤, 乃至是耶? 君沒, 書旌以副司正, 蓋用初職攝起居注, 例付軍銜也。 鄕之衆所相賀與余所自多者, 其但至於此而已乎? 痛矣! 痛矣!
君字吉哉, 宜寧人。 祖慶尙道觀察使正重, 父戶曹正郞漢紀。 母靑松沈氏, 通德郞漢章女。 壺谷公諱龍翼, 吏曹判書、大提學。 君沒時年才三十三, 葬于楊州東海谷。 君娶府使李雨臣女, 生男公弼。 娶正言吳瑗女, 二女: 長適李演, 次幼。 銘曰:
若有人超坌坱而淑郵兮, 胡値斯世之不祥? 衆汶汶獨自淸兮, 故天與人交惡而椓傷。 昔孔聖反袂而漣洏兮, 痛夫出非時而致殃。 已乎已乎尙復何爲兮? 徒令來世之士追挹而慨慷。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