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일본이 쳐들어왔다. 이 전쟁을 우리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말한다. 임진년에 일어난 왜의 난리란 뜻이다. 그런데 다른 이름도 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에서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에서 임진전쟁(壬辰戰爭), 7년간의 전쟁이라 하여 7년 전쟁(七年戰爭) 등으로 불린다.
나라에 따라서도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분로쿠 전쟁, 도자기공들을 납치하여 도자기 문화를 일으켰다고 하여 도자기 전쟁(陶瓷器戰爭)이라 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서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조선을 도와 왜와 싸웠다 하여 항왜원조(抗倭援朝)라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는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영향을 받아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말한다.
조선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준 이 전쟁 중에 어떤 전투가 있었을까? 그 전투를 정리한다. 당시에는 음력을 사용하였기에 음력 날짜를 기준으로 정리하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 안에 양력 날짜를 병기한다.
임진왜란의 첫 번째 전투는 1592년 4월 13일(5월 23일)에 벌어진 다대포 전투(多大浦戰鬪)이다. 다대포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으며, 부산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8㎞ 정도 떨어진 낙동강 하구로 바닷물과 만나는 곳이다.
일본군으로서는 상륙작전이다. 그날 새벽 미명에 일본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동래부 영도에 상륙했다. 병선 700척에 분승한 병력 1만 8,700명이었다. 그중 일부가 다대포성을 공격했다.
벌떼같이 몰려오는 왜군을 본 경상 좌수사 박홍은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쳤다. 경상 우수사 원균도 부하에게 우수영을 맡겨 놓고 도망쳤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이런 자가 더 많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은 달랐다.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죽었고, 다대포성도 함락되었다.
그런데 좌수사와 우수사 그리고 첨사는 어떤 벼슬일까? 좌수사는 ‘좌 수군절도사’, 우수사는 ‘우 수군절도사’를 말한다. 해당 지역의 수군을 통제하는 정3품 벼슬로 당상관이다. 반면 첨사는 ‘첨절제사’로 수군절도사 예하의 진에서 수군을 다스리는 종3품 무관 벼슬이다. 윤흥신은 첨사로 박홍이나 원균보다 벼슬은 낮다. 그렇지만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애국자다. 자기 책임을 완수한 진정한 지도자이다
임진왜란의 두 번째 전투는 4월 14일(5월 24일)에 벌어진 부산진 전투이다. 부산진 첨사 정발이 왜군을 맞아 싸운 전투이다. 오전 5시부터 벌어진 제1 전투에서는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잘 버티었으나. 10시부터 벌어진 제2 전투에서는 견디지 못하였다. 부산진 첨사 정발은 총탄을 맞아 전사했으며, 성안의 주민들 3,000명도 끝까지 저항하다 죽거나 학살되었다. 부산진성도 함락되었다.
부산진 첨사 정발에 관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발령을 받아 부산진 첨사로 나아갈 때 늙은 어머니에게 허락을 요청했다. 어머니 남궁 씨(南宮氏)는 아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충(忠) 속에 효(孝)가 있다.’라고 하면서 ‘내 걱정은 말고 나라를 위해 싸우라.’ 하며 독려했다고 한다. 충성하는 그 어머니에 효도하는 그 아들이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부하들이 피하라고 권했으나, 정발은 그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남아(男兒)로 태어나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할 뿐, 도망하여 구차하게 목숨을 건지겠느냐?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당시 39세였던 그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의 투구와 갑옷은 애마(愛馬)인 용상(龍嘗)이 물고 생가에까지 달려왔다고 전한다.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었는데, 일각에서는 그가 송상현과 함께 일본군에 투항하여 일본군 장수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누가 이런 말을 했을까? 참 몹쓸 인간이다.
임진왜란 세 번째 전투는 4월 15일(5월 25일)에 벌어진 동래성 전투(東萊城戰鬪)이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미리 대비했다.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심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지도자였다.
전투는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다. 동래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무리한 전투를 피한다는 핑계로 송상현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전칙전의 부전측가도(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
송상현의 회답은 이렇게 간단했다. 이 전투에 동래성 백성들까지 가담하여 왜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듯했으나, 결국 방어선이 뚫리고 말았다.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을 향하여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이상 세 번의 전투는 임진왜란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 부산진 첨사 정발, 동래 부사 송상현 등 세 분은 박홍이나 원균에 비해 벼슬은 낮았지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려고 끝까지 저항한 애국자요 의인이다.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분들의 죽음이 숭고한 교훈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어떤 징조가 없었을까?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