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산 여행8 - 메이루산장을 구경하고는 전참대관으로 이동해서 황룡담과 오룡담에 가다!
10월 22일 운관소에서 庐山景区(여산경구) 버스를 타고 한퍼커우에 내려 함파정 을 보고
여산박물관 과 모택동 여산시사원 을 구경한후 버스로 여산회의구지 庐山会议旧地 를
보면서 생각하니 국공내전에서 공산당 군대에 참가해 맹활약했던 조선인 들이 떠오릅니다.
국공내전 에 참가한 조선인 12만 중에 4만여명이 1949년 부터 북한으로 넘어와
인민군 이 되어 6.25 전쟁시에 남하해 미군 사단장을 포로 로 잡았는데,
만약에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승리했으면.... 조선인들은 모두 전사했을
것이니 그럼 6.25도 없었을 것이라... 지난 일이지만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습니다.
6.25 발발 닷새후인 6월 30일 트루먼이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을 지시하자 맥아더는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에게“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을 하달하니 이날
24사단 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공수되니 대대장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부대 인데
스미스 대대는 다음날인 7월 1일 아침 8시에 대전을 거쳐 평택 에 부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제34연대는 7월 2일 부산에 도착해 7월 5일 평택 및 안성에 1개 대대씩 배치하였고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죽미령 에서 인민군과 첫 교전 을 하여 큰 피해를 입게되는데
북한군 4사단과 전투에서 150명이 전사하자 스미스 중령은 7월 6일 천안으로
후퇴했는데 그후 대전 전투에서 사단장 딘 소장 마저 포로 로 잡히는 대참사가 일어납니다.
워커 중장 후임으로 1950년 미8군 사령관 에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 는 "맥아더가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 했으며 인민군 정예사단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오만" 이라 지적
했는데, 김영민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인분 냄새만이 진동하는 이 나라에 내가 왜왔는지
이해할수 없다" 고 말했던 인물로 1951년 맥아더 후임으로 극동연합군 총사령관 이 됩니다.
리지웨이 는 다음해 유럽주둔군 총사령관이 되고 그 다음해 미 육군참모총장이 되는데....
미군을 격파한 인민군 4사단 18연대는 국공내전에서 홍군에 참가해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양자강 이남까지 추격한 조선인 들이니... 그외에 1949년 7월 홍군 64사단 7천 5백명이
북한으로 넘어와 인민군 5사단을 창설했고 홍군 166사단 1만명은 인민군 6사단이 되었습니다.
6.25직전인 1950년 5월에도 홍군 15사단 1만 5천이 북한으로 넘어와 7사단에 배치되었으니
중국내전에서 국민당군대를 격파한 조선인 중 4만여명이 북한군의 핵심 이 됐는데 미군은
그 사실을 모르고 적을 얕본 결과 혹독한 댓가를 치루고 대전에서 경상도로 후퇴하게 됩니다.
조선인들이 중국 공산당 군대에 참여한건 1926년 장파쿠이(張發奎)의 북벌 부대 2천중
200여명 을 시작으로 1927년 12월 광주 봉기 때는 최용건이 조선인 학생 160명 과
함께 참가했으며 이후 김원봉 부대 400명중 100명은 광복군 에 남았으나....
김두봉, 최창익, 무정, 박일우등 300명은 연안으로 가서 공산당의 홍군에 합류 했습니다.
1946년 마침내 국공내전이 일어나자 장개석은 국민당군대를 만주로 파견하니 소련군
으로 부터 심양과 장춘등을 인계받고 린뱌오(임표)의 홍군을 격파 하자...
위기를 느낀 조선인 들은 대거 공산당 홍군에 참가하니 그 수는 정규군 6만에
지방군등 10만을 합쳐 16만명 에 달했는데 국민당 군대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해방후 만주에 거주했던 조선인 200만명중에 절반이 귀국하고 110만명이 남았는데 홍군에
참여한 이유는 일본이 만주에서 조선인들을 의도적으로 우대하고 한족을 차별한 결과
국민당군이 진주하자 한족들이 조선인 마을을 습격해 보복에 나서니... 홍군이 조선인
마을을 지켜준게 첫째이고, 또 공산당이 농지개혁으로 토지를 나누어 주었기 때문 입니다.
그 몇년전 1936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당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 개편한 동북항일연군
에 김일성, 최현, 김책, 최용건, 강건, 김일, 리홍광등 40% 가 조선인 들이었으니
이들이 중국 공산당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던 인연 이 있었기 때문인데 승승장구
하던 국민당군은 간도 자오허(교하) 에서 조선인 부대에게 일격을 당한후 기세가 꺽입니다.
이후 1945년말 중국에서 북한으로 귀국해 내무상이 된 박일우로 부터 보급을 받은 린뱌오
(임표) 의 동북민주연군(제4야전군)은 조선인들의 합세로 기력을 회복해 국민당 군대를
패퇴시키고 베이징을 함락하니 조선의용군들은 양자강을 건너 남경을 함락하고 해남도
까지 진격했던 것인데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승리했으면 6.25도 없었을 것이니 애석합니다!
여산회의구지 정류소에서 교통카드를 보이고 버스를 타고는 메이루 美麗(미려) 에 내리니
오른쪽에 붉은색 지붕을 가진 멋진 서양풍 건물이 보이기로 걸어가니 예상대로
메이루 산장 美麗別墅(미려별서) 인데, 관광객들이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웃
거리기에 불안한 예감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금 수리중 이라네요? 우째 이런 일이!
여기 산 정상에 자리잡은 루산 庐山(여산) 의 구링전(牯岭镇 고령진) 마을에는... 일찍이
19세기말 부터 20세기 초반 까지 유럽과 미국등 25개국에서 천여명의 선교사가 파견돼
여름 별장으로 천여채의 서양식 건물을 지었다는데 현재 600채 정도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메이루 산장 美麗別墅(미려별서) 이라 불리는 이 저택은 장개석과 송미령 이 살던
주택으로 1946년 미국의 마셜 원수 가 국민당 정부 여름 수도이던 여산에
8차례나 장개석을 만나러 왔으며 그전에 주은래 도 몇번이나 찾아왔었다고 합니다.
저택에 들어서면 장개석의 3번째 부인 송미령의 침실 이 나오고 왕정위의 글씨 에
손문의 부인인 송경령, 대재벌인 공상희의 부인 송애령등 송씨 3자매 가
미국에서 찍은 사진이 있으니 송가황조 라고 해서 "나라, 돈, 권력" 을
택한 자매들을 비교해 볼수 있으며..... 모택동의 유품 도 진열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주은래 기념관 은 여기 미려별서의 입장권과 공용이라는데 부인 등영초의 침실등이
볼만하며 그외에 천주교회 와 송경령 고거 에 10대 원수로 6.25때 중공군 참모장
이었던 섭영진 원수의 집 과 여산도서관이며 펄벅기념관 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고 합니다.
펄벅이 살았던 310호 주택 은 현재 기념관으로 만들어져 보존되고 있는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대지”는 3부작으로 중국 사회의 진통을 중국인 보다
더 중국을 잘 이해하는 서구인의 눈으로 그렸으니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중매혼에서 자유혼으로, 서구화와 동양화의 갈등 등을 그렸습니다.
19세기말 중국에서 10년간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시던스트라이커 는
세 아이를 잃은지라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귀국해 웨스트버지니아 힐스버러에서
딸을 낳으니 펄 인데 훗날 소설 “대지”를 써 노벨문학상 을 수상하였고
동양과 서양, 여성과 아이, 인종을 아우르는 열정적인 사회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게 됩니다.
생후 3개월 아기 펄은 선교사인 부모와 함께 중국에 와서는 18살살이 되자 미국의 랜돌프
여대에 진학해 졸업후 중국으로 돌아와 3년뒤 미국인 농학자 로싱 벅과 결혼 했으니
펄 벅이 되는데 가정을 나몰라라 하는 남편에 반감을 가진데다가 딸 캐롤은
정신지체아인데도 무관심한 남편에 절망해 죄책감과 고통을 잊기위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1927년 국민군이 북벌중에 난징을 공격했을때 펄 벅은 가족이 몰살당할뻔한 위기를 겪고
중국과 서양 사이에 메울수 없는 균열 이 있음을 깨달았으니 아무리 중국에 살면서
중국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은 어쩔수 없는 미국인 이라는 뼈아픈 자각은 그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들었고... 이것은 펄 벅 문학의 평생 테마 가 되었다고 합니다.
1930년 처녀작인 “동풍 서풍”은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소설이었으며 1931년에는
인생의 전환점인 소설“대지”는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와 부와
명성을 주었는데 빈농인 왕룽이 노비 오란을 만나 결혼하고 대지주 가 되니
그를 중심으로 왕룽의 아내 오란과 세 명의 아들들의 역사를 그린 장편 소설입니다.
“대지”는 왕룽이 죽은 후에 세 아들이 지주, 상인, 공산주의자로 각자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묘사한 “아들들 1933년”, “분열한 집 1933년”과 함께 3부작
“대지의 집”을 구성하니 많은 독자들의 탐독 속에서 퓰리처상을 받았고 영화화
되기도 하였으며 1938년 미국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을 수상하기에 이릅니다.
무심한 결혼생활에 지쳐있던 펄 벅은 작가로 얻은 명성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으니
작품을 출판해주던 월시에게 사랑을 느끼고 로싱 벅에게 결별을 선언한후 1934년
딸 캐롤과 입양한 딸 재니스 를 데리고 미국행 배에 오른 펄 벅은 로싱 벅과 중국땅에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는 인권운동 을 펼치며 7명의 피부색이 각기 다른 아이를 입양합니다.
또한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 여러나라에 주둔한뒤 생긴 미국계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1964년 펄 벅 재단 을 세웠는데 유한양행 사장 유일한의 중국계 아내 호미리와
친분이 있던 펄 벅이 소설 의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한국에 버려진 미국계 사생아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재단을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맹렬한 사회 인권운동 은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및 많은 반공주의자들의 경계대상
이 되었으며 자신이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밝힘으로써 중국 및 공산권의 미움도
샀으니, 닉슨 대통령 때 미국과 중국간 화해 무드가 조성될 시기 중국 방문을 열렬히
희망했지만 그녀의 반공산주의적 입장 표명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거부로 무산되었습니다.
펄 벅은 두번째 남편 월시를 사별하고는 외로움을 겪는중에 40살 연하의 댄스 선생 인
테드 해리스 는 펄 벅을 쥐고 흔들며 그녀의 돈을 빼내 사리사욕을 채웠고
펄 벅 재단에 들어갈 돈의 일부를 횡령 하였으며 유산을 가로챌 궁리 를 하였는데
늙은 펄 벅은 젊은 애인의 요사스러운 말에 눈이 멀어 옹호했다는데 그럼에도 한국 을
비롯 버려졌던 아이들이 펄 벅 재단의 도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庐山景区(여산경구) 버스를 타는데 여긴 동선이니 종점인 운관소에서 내려 50미터를 걸어
올라가서는 회의중심에서 서선버스 로 갈아탈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버스는 운관소로
들어가지 않고 도로를 따라 올라가 터널을 통과해서 구링전(牯岭镇) 마을 전망대를
지나 우리 호텔을 거쳐 계속 내려가서 서선의 종점인 전참대파 (电站大坝) 에서 내립니다.
원래 계획은 성룡삭도 (星龍索道 성용케이블카) 를 타고는 현수교 (懸垂橋) 로 내려가서는
매표소에서 석문간경구 (石門澗景區) 입장권을 구입해 가파른 800m 의 1,300개
돌계단을 내려가 장군하에서 계곡과 별장이 내려다 보고는 여산 소나무 를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더 내려가 용궁정(龍宮亭) 을 지나 폭포 모습이 눈이 날리고 벼락이 내리치는듯
하다 라는 뜻인 분설분뢰 噴雪奔雷 청용담(靑龍潭 ) 을 구경하고 마애석각을 지나
흑곰이 목욕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구웅세조(狗熊洗操 로 불리는 바위를 구경하는 것입니다.
석문간경구(石門澗景區) 에서 들머리 서문(西門) 으로 내려가는 길이 아름답기는 한데
그러면 여산을 벗어나는지라 되돌아 올라와서는 현수교에서 현삭교 (懸索橋) 를
건너면 용수애(龍首崖) 와 대천지(大天池) 로 이어지는 트레킹코스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울 마눌의 체력으로는 저 코스를 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차선책으로 황룡담 과
오룡담 을 보기로 하고 정류소에서 왼쪽으로 가니 작은 밤을 구어 파는 가게가
보이는데 항저우 서호에서 맛있게 먹은 기억이 떠올라 10위안 어치를 사서 잘 먹습니다.
여기 황룡담으로 가는 길 은 연못 위에 산길로 평탄한 길인데 사람들이 별로
없어 조용한게 호젓하니 산책하기 좋은지라 천천히 10여분을 걸으니
드디어 작은 폭포가 나타나니..... 이름하여 黃龍潭(황룡담) 이라고 불립니다.
오늘이 10월 하순 가을이다 보니 그동안 비가 거의 내리지 않은지라.... 폭포의
물은 예상보다 적어 조금 실망을 하는데 여기서 계속 산을
오르면 삼보수 나무를 지나 반월정 을 거쳐 여림 정차장 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린 지금 대천지(大天池) 로 가야 하는지라 저 길 대신에
왼쪽에 계곡 을 끼고 150미터를 올라 烏龍潭(오룡담) 에 이릅니다.
烏龍潭(오룡담) 은 황룡담 보다는 물이 많으니 그런대로 볼만합니다만 봄이나 여름에는
비가 내려 계곡 물이 불어날 터이니 그 위용 을 느낄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오룡담 (烏龍潭) 에서 손을 씻으면 사랑하는 애인 하고 헤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지라 바로 씻지는 못하고(?) 계곡을 내려옵니다.
하지만 저런 전설 을 믿고 그냥 가기는 그러니 도중에 냇가로 내려가서는
차갑고 맑은 깨끗한 물 에 손과 얼굴을 씼으니 상쾌합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와서는 좀 전에 버스에서 내렸던 전참대파 (电站大坝)
정류소에 도착해 庐山景区(여산경구) 버스 를 타고는 대천지(大天池) 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