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삼여(三餘), 석야 신웅순
1. 시조는 12개의 돌로 승부를 보아야한다.
12마디이다. 이를 음보라 하기도 하고 소절이라 하기도 한다.
12마디는 다시 6마디로 나누어진다.
이를 구라고 하는데 현대문법에서의 절과 구 개념과는 구별이 된다.
시조에서의 구는 현대문법에서의 구일수도 있고 절일 수도 있다.
뭉뚱그려 말하면 하나의 의미 내용이 일단락 되는 토막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6구는 다시 3개의 문장이 완결되는 초ㆍ중ㆍ종장의 3장으로 나누어진다.
이 3장이 결합되어 하나의 시조라는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조의 원형이다.
시조는 12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주춧돌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면 작품의 질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한 개의 돌이라도 삐끗하면 기우뚱거릴 수 밖에 없다.
12개의 돌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12개의 돌로 바람도 구름도, 나그네도 쉬었다가는 정자 한 채를 지어야한다.
어떻게 해야 그런 정자를 세울 수 있을까.
2. 흔히들 시조는 판소리, 민요, 잡가의 속가와는 달리
가곡, 가사와 함께 정가라고 한다.
속가는 서민층이 향유하던 음악이었고
정가는 선비들이 향유하던 음악이라고 한다.
선비들은 시조를 지으며 시조창을 했다.
여가 시간엔 쓰다 남은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지금의 문인화이다.
시조창을 했으니 여유가 있는 문화요
그림도 그렸으니 여백이 있는 문화요
시조를 지었으니 여운이 있는 문화이다.
이것이 선비문화였다.
시조에는 소리가 있고 시조에는 그림이 있고 시조에는 의미가 있다.
시중유성이요, 시중유화요, 시중유의이다.
시조가 갖추어야할 요소들이다.
소리가 있으니 여유가 있고, 그림이 있으니 여백이 있고,
의미가 있으니 여운이 있다.
말하자면 시조창은 여유(餘裕)요,
그림(이미지)은 여백(餘白)이요,
시는 여운(餘韻)이다.
필자는 이를 시조 3여라 부르고 싶다.
경치에도 팔경이 있고 음식에도 삼합이 있듯 시조에도 삼여가 있다.
시조 3여로 시조를 바라보면 시조가 시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시조를 어떻게 써야하는지가 보인다.
시조의 자유시화의 제동장치일 수도 있다.
필자가 시조비평의 시조이론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시조는 시조의 눈으로 보아야지
시의 눈으로 보아서는 제대로 된 평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조 삼여 = 여유, 여백, 여운
3. 시조는 여유이다.
초ㆍ중ㆍ종을 각과 박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초ㆍ중장은 각각 5각 5ㆍ8ㆍ8ㆍ5ㆍ8박이요,
종장은 4각 5ㆍ8ㆍ5ㆍ8박이다.
그리고 종장의 넷째 소절은 부르지 않기 때문에 보가 생략되어 있다.
1각: 동창이 (5박) 2각: 밝았느냐 (8박) 3각: 노고지리 (8박) 4각: 우지진 (5박) 5각: 다 (8박) | 1각: 소치는 (5박) 2각: 아희놈은 (8박) 3각: 상기아니 (8박) 4각: 일었느 (5박) 5각: 냐 (8박) | 1각: 재넘어 (5박) 2각: 사래긴밭을 (8박) 3각: 언제갈 (5박) 4각: 려(허느니) (8박) |
초장 5각은 6박이 실박, 2박이 여박이고,
중장 5각은 4박이 실박, 4박이 여박이고,
종장 4각은 1박이 실박 7박이 여박이다.
이렇게 시조창은 장마다 여박이 있다.
초장끝에는 2박을 쉬고 중장끝에는 4박을 쉬고 종장의 끝에는 7박을 쉰다.
시조에는 장마다 여유가 있는 음악이다.
시조가 창을 떠났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창에서 자유스러운 것은 아니다.
뿌리가 창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조의 숙명이다.
장과 장 사이에는 여박이 있다.
여박은 일단의 의미가 종결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요
잠시 쉬었다감을 뜻하는 것이다.
거문고를 뜯다 잠시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것이요
잠시 바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유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일단의 준비이기도 하지만
일단의 의미가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유가 있어야 시조가 시조다운 맛을 낼 수 있다.
그 누가 나를 보고 꽃 한 폭을 치시라면
선지보다 더 하얀 바람 한 필 끊어다가
저 핏빛
내 가슴을 적시는
당신만을 치리라.
- 김옥중의 「홍매화 그늘 아래에서」
초ㆍ중ㆍ종장이 각각 일 단의 의미들이 종결되어 있다.
한 문장을 이루고 있다는 얘기이다.
초장은 ‘그 누가 나를 보고 꽃 한 폭 치라 하다.’
중장은 ‘선지보다 더 하얀 바람 한 필을 끊다.’
종장은 저 핏빛 내 가슴을 적시는 당신만을 치다.‘
이리 세 문장들이 종결되어 있으면서
유기적으로 결합,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박 없이는 맛을 낼 수 없고 멋을 느낄 수가 없다.
현대시조를 보면
장과 장사이의 의미들이 얽혀있어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작품들이 있다.
자유시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과 장 사이에 여유가 없다.
여박이 없는 그것은 일단 시조로서는 실격이다.
3. 시조는 여백이다.
김홍도의(1745-1806)의「주상관매도」이다.
멀리 높은 산언덕에 매화가 피어있다.
노인은 작은 배에 비스듬이 앉아 종자와 함께 멀리 매화를 바라보고 있다.
노인은 주황색 옷을 입고 있으며 배 위에는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져있다.
높은 언덕에 피어있는 매화는 상단 위쪽에,
노인과 종자가 탄 배는 하단 아래쪽에 치우쳐 있다.
그리고 중앙 상단 오른쪽에는 화제가 써 있다.
나머지는 전부가 텅 빈 여백뿐이다.
여백이 하도 넓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老年花似霧中看(노년화사무중간)
노년에 보는 꽃은 안개 속인 듯 희뿌옇게 보이누나
이 화제는
두보의 7언율시「소한식주중작(小寒食舟中作)」‘소한식날 배 위에서 짓다.’ 중
4행의 구절이다.
두보가 59세의 나이로 죽던 바로 그 해에 쓴 시이다.
당시 만년의 고독하고 쓸쓸한 심경을 표현한 시이다.
김홍도 역시 정조의 총애를 받아 예술가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으나
정조가 승하한 후 만년을 고독과 빈곤과 병고 속에서 지냈다.
겨우 회갑을 넘긴 나이었지만 만년의 적적하고 쓸쓸한 자신의 심경을
두보의 시를 빌려 시의도「주상관매도」를 그렸다.
흥취가 남았는지 이 시를 모티프로 해서 시조 한 수도 남겨놓았다.
단원이 남긴 시조이다.
춘수(春水)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에 물이로다.
차중(此中)에 노안(老眼)에 뵈는 곳은 무중(霧中)인가 하노라.
-단원 김홍도의 시조
봄이 왔다.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풀려 강물이 많이도 불었다.
강물에 배를 띄워놓고 가는대로 맡겼다.
배 위에서 강물을 바라보니 물 아래는 하늘이요 하늘 위에는 물이다.
요즈음 늙은 눈에 뵈는 꽃은 안개 속인가 하노라.
두보의 7언 율시「小寒食舟中作(한식 다음날 배 안에서 짓다)」의
3,4행의 구절‘ 봄물에 뜬 배 하늘 위에 앉은 듯하고,
노년에 보는 꽃은 안개 속인 듯 희뿌옇게 보이네’의 구절을 따서
자신의 만년 심경을 시조 한 수로 노래했다.
시조는 형상 없는 그림이요, 그림은 형상 있는 시조이다.
시의도, 화의시 이것이 시조이다.
여백이 없으면 어디 시조라 말할 수 있으랴.
현대시조가 자유시화 되어가고 의미가 빨라지고 여백이 사라져가고 있다.
창에서는 여박이,
그림에서는 여백이 시조를 잡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시조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
4. 시조는 여운이다.
붓자국도 희미한 밀서 같은 길을 가다
눈부신 기척 있어 되돌아본 그 자리에
한지 빛 하늘을 이고 번져오는 묵매향기
- 유재영의 「어느날의 진경산수 」
누군가가 붓자국도 희미한 밀서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눈부신 기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