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이야기’는 입구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돌탑과 솟대 사이에고정한 간판, 나뭇가지를 이어 완성한 대문, 금낭화·복수초·노루귀·피나물 들이 제철이면 소담스러운 꽃망울을 터뜨리며 주위를 화사하게 꾸며줄 어른 가슴 높이의 돌담에는 감각적인 손길과 수고 로운 땀방울이 고스란히담겨 있다.
돌담 안에 펼쳐진 정경 또한 하나의 작품이다. 화전민이 살던 다 쓰러져가는흙집을 손질한 본채, 심벽집 기법으로 완성한 후 지붕에 꽃밭을 올려 멋을 낸 별채, 첨성대 모양으로 쌓아올린 돌탑, 뜰 한 쪽에 설치한 투박하면서도 정감 있는 퍼걸러, 무성한 밤나무 아래 에 자리한 평상 등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산뽕나무·산벚나무·공작단풍·자작나무·수양벚나무·복자기단풍 등을 중심으로 개구절초·솔체꽃·층꽃·까실쑥부쟁이·용담·이삭여뀌·용담·쑥부쟁이·물매화·꽃향우·좀개미취·바위솔 등 600여 종의 들꽃 들과 어우러진 공간은 구성미와 회화적인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하나하나의 배치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식물을 심을 때는 햇빛을 좋아하는지, 그늘에서 잘 자라는지 등 그 특성을 고려했고 전체적인 높낮이와 어울림도 따졌어요. 별채 위치도 앞쪽의 나무가 시선을가로막지 않도록 배려했고요.” 그가“ 우리 들꽃만 심었다”고 자랑하는 뜰과, 고즈넉한 운치를 담은 찻집은 김씨의 해박한 들꽃 지식과 미술을 전공한 감각으로 완성한 셈이다.
충남 당진 출신으로 서울에서 애니메이션 작가로 활동하던 김씨는 국문학을 전공하고 국어 교사로 일하던 곽씨와 결혼한 후 2년 만 에 이곳에 들어왔다. 큰딸 정민(15)이가 돌 무렵이었고, 작은딸 정현 (12)이는 태어나기 전이다. 25년 전 근처의 선배 작업실에서 몇달씩 체류하며 그림을 그리던 김씨는 지금의 집과 터를 발견하고는 언젠가 그곳에서 살겠다고 맘먹었다. 도지(일정한 대가를주고 빌려 쓰 는 논밭이나 집터)에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집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특별했던 것. 이후 10년만에 매물로 나오자 바로 구입하고는 이듬해 정착했다.
시골 정서와 자연을 찾아서 오다
20~30대의 젊은 부부가 안정된 직장과 보장된 직업을 버리고 시골에 들어오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의외로 부부의 대답은 명쾌하다.
“도시에 살면서도 늘 어릴 적 시골 생활을 동경했어요. 돌이켜보니 당시 농촌은 완벽한 공동체적삶이었어요. 모내기할 때도, 초가 지붕에 이엉을 올릴 때도 마을 사람들은 서로 품을 팔았고, 명절 때모여서 윷놀이도 하고 애경사에서 정도 나눴거든요. 풍요롭진 않아 도 그때처럼 마음을 나누며 살고 싶었어요. 아이들에게도 그 삶과 자연을 선물하고 싶었고요.” 대개 자녀 교육문제 때문에 시골살이를 주저하는 데 반해, 김씨는 시골에 정착한 이유 중 하나가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싶어서다. 어린 시절을 자연에서 보내면 감성도 풍부해지고 배우는 것도 많다는 것. 실제로 그의 아이들은 산과 들, 계곡을 놀이터 삼아 자란 덕에 들꽃과나무, 곤충들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인스턴트 식품보다손수 농사지은 채소와 주위에서 채취한 산나물로 만든 요리를 즐기고, 탄산음료보다 차에 익숙하다. 도시 아이들처럼 학원을 다니지 않지만 스스로 공부하는 게 몸에 배 성적도 늘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상은 했지만 초기에 무척 고생스러웠다. 집터 주인과 의 마찰, 추위와의 싸움, 경제적 곤란 등으로 부인 곽씨는 숱하게 울 었단다. 김씨가 “시골살이를 후회한 적은 없지만 낯선 시골에서 고생만 시킨것 같아 아내에게 미안하다” 고 말하자 부인 곽씨는 “무엇이든 척척 알아서 해결해주는 맥가이버 같은 남편 덕에 그 시간을 무사히 이겨낼 수 있었다”면서 “남편은 정말 심신心身이 건강한 사람” 이라는 말로 고마움과 든든한 마음을 대신한다.
수익이 없어 김씨가 서울의 지인으로부터 애니메이션 일거리를 받아다가 작업한 것으로 근근이 먹고 살면서도 김씨는 틈틈이 공사장과 빈집, 폐교, 고향에서폐자재를 가져다가 벽과 바닥을 새롭게 단장하고 집 주위와 뜰에 들꽃들을 심어 꾸몄다. 헌 대문짝에 손맛을 들여 탁자를 만들고는 조촐한 찻집을 열었다.
3년 만에 단골이 생기더니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면서 방문객이 꾸준히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 속에 파고들다
들꽃이 한창일 때면 부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자신들이 애써 가꾼 공간을 찾아주는 발걸음이 고맙고 반갑지만 때로는 개인 시간 이 없어 고민스럽기도 하다.
“가끔은 ‘적게 벌어 적게 써도 자연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겠다’ 며 시작한 시골살이인데, 그취지가 전도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곤 해요. 주위 사람들이 간혹 민박도 운영하라고 하지만 그럴 생각은전혀 없고요. 현재의 규모도 점차 줄여나가고 싶은 마음이에요. 일과돈을 좇기보다는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고 싶거든요.” 이곳의 음식과 차는 모두 주위에서 구한 것들로 만든다. 집 옆에 있는 990㎡(300평) 밭에서 재배한 감자·배추·무·고추 등과 토종 닭 40마리가 낳은달걀, 그리고 뜰에서 자라는 풀과 꽃들 모두가 식 재료로 쓰인다. 밭과토종닭은 남편 김씨가 관리하고, 김장·장류· 장아찌·효소·차 담그기 등 음식은 부인 곽씨의 차지다. 김장이나 장아찌·장을 담글 때는 물론이고, 고추와 감자, 배추를 심을 때도 마을 어르신들이 팔을 걷어 붙이며 도와준다.
“김장하는 날에 마을 어르신들이 수십 분 오세요. 배추 수백 포기 를 함께 담근 후에는술과 음식을 대접하는데, 마을 잔치가 따로 없어요.” “내인심이 좋아야 남의 인심이 좋다” 는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 김씨는 마을 사람들에 먼저 다가가 그들 속에서 어울렸다. 마을 행사에 빠지지 않고, 마을 어르신들을 부모처럼 대했다.
그런 그를 마을 사람들은 품고 보듬었다. 덕분인지2005년 마을 이장으로 선출됐다. 김씨는 “이장 일을 보던 2005년부터의 3년 동안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 라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은 기분이 좋았고,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고 말한다.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은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한글 학교’ 운영. 주변의 도움을 받아 어르신들의 평생의 한을 풀어드린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열다섯 분의 어르신들 모두 3개월만에 읽고 쓸 수 있을 정도로 열성적이셨어요. 과정을 마치고 소풍과 졸업 여행도 보내드리고 극 장에서영화도 보여드렸는데, 평생에 처음 해본 것이라며 어찌나 즐거워하시던지…. 한글 학교가 끝나는 날 마을 주민들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악산 산골음악회도 열었는데, 할머니합창단이‘ 고 향의 봄’을 부를 때엔 자녀들과 청중들 모두 감동을 받아 눈물바다 를 이뤘어요.”
자연에서 누리는 행복과 여유
김씨는“ 시골에 사는 가장 좋은 점은 늘 가족과 함께하는 것”을 꼽 는다. 온 가족이 매일 아침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대화도 자주 나주며, 중학교 2학년인 큰딸을 매일 차로 아침에 원주까지 통학시 키는 일이즐겁다. 일찍이‘들꽃 이 야기’를 상표 등록한 김씨는 한때 ‘치악산들꽃이야기’라는 카페를 운영하면서많은 사람들과 들꽃 정 보를 공유했다. 그러나 카페 관리에 신경을 쓰다보니 가족들과의 시간이 줄어들어 지금은 손을 놓은 상 태다.
“시골엔 젊어서 오는 게 유리해 요. 나이 들어서는 할 만한 일도 마땅치 않고, 도시에서의 틀을 벗기 도 어려워요. 저 역시 그때 결정하지 못했다면어땠을까 싶어요. 불 편하고 손해 보는 일도 있지만 그것들은 감수해야 하고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으니까요.” 당분간‘ 들꽃 이야기’를꾸려가면서 14년간 진행 중인 집 안팎 정리를 지속할 것이라는 김씨 부부. 올겨울엔 당장 뜰 한쪽에 무대 를 설치해 지역민들과 함께하슴 문화 체험 행사를 마련하겠다는 계 획이다. 더불어 김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목공일에, 부인 곽씨는 압 화 작업에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자연에서의 여유와 즐거움을 화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자연에서의 여유와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문의 033-762-2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