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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스리시는 하나님(행5:1~16) 우리는 사도행전 1~4장까지를 통해서 너무도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의 시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모이기를 힘쓰며 모일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며 떡을 떼고,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각각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고집하지 않고, 다른 성도들의 필요를 먼저 돌아보며,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소유까지라도 팔아 나누고 섬겼던 교회였습니다. 또한 외적으로도 교회는 너무도 짧은 시간동안에 급속도로 성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거의 완벽해 보일정도로 이 땅에 있으나 마치 천국에 있는 것 같은 공동체가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가던 교회에 마치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큰 시험이 될 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이 본문을 읽으면서 참 이해하기 힘들고 당황스럽게 느껴진 분이 틀림없이 계실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렇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을 만큼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일까요? 분명히 이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소유를 팔아 그것을 드렸습니다. 어쩌면 소유를 팔았는데 그 금액이 생각보다 더 커서 욕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다 드리려고 생각했다가 노후를 생각해서 얼마정도는 저축해 두려 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들은 꽤 많은 액수의 헌금을 드렸을 것 같습니다. 헌금을 드리지 않았던 사람도 분명 있었을 텐데 이정도 했으면 잘한 것 아닐까요? 칭찬은 고사지하고 이게 그 자리에서 죽을 만큼 그렇게 엄청난 죄였을까요? 그리고 설령 그들의 죄가 아무리 중하다 할지라도 죄 짓는 즉시 죽는다고 한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실제로 오늘 이 본문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므로 생겨난 많은 피해와 오류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과거 어떤 부흥사 목사님은 이 본문을 인용해가면서 “하나님께 작정했으면 반드시 그 작정한 것 드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될 것입니다!” 협박하듯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려는 본문이 절대로 아니지요.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작정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그렇게 못할 때가 너무도 많이 있지요. 또 청소년기나 대학생 때 수련회 가면 꼭 마지막날 저녁집회 때 선교사나 목사로 헌신할 사람 작정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그때 어린마음에 무심코 작정했다가, 그렇게 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벌 받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과 짐으로 살아가는 분도 보았습니다. 이런 것에 절대로 얽매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고,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인도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너 그때 작정했는데 왜 그것 안지켜!” 하면서 회초리를 들고 매의 눈으로 지켜보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주의깊게 보려고 하는 것은 과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와 그 부부의 죽음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첫째 이들의 죄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분명 헌금을 적게 했기 때문에, 혹은 작정한 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범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구약시대처럼 십일조를 의무조항에 둔 것도 아니었고, 강제로 소유를 팔아서 헌금하도록 한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아나니아 삽비라의 경우에도 소유를 팔지 않았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4절 상반절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것을 봅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즉 전혀 강제성을 띄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3절-“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절-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9절-“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즉 “성령을 속인죄, 하나님께 거짓말한 죄, 성령을 시험한죄”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렇게 행동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본문 전에 나온 바나바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 설교를 통해 보았던 것처럼 바나바는 중심의 진실함으로 모든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자원하여 성도를 섬기기 위한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틀림없이 그 일을 통해 공동체 속에서 많은 존경과 칭찬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이런 자리에 속히 이르고 싶은 탐심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심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고 싶은 욕심이 동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혀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는 거짓과 위선의 방법으로 자신을 과대 포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한 행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틀림없이 아름답고, 본이 될 만한 행동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이들의 이런 행위를 보면서 감사와 칭찬을 아낌없이 쏟아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사람들과 똑같은 눈으로 이들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조롱받거나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평가되었는지 와는 아무 관계없이, 지금 이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기만함으로 오는 거짓말한 죄이며, 성령님을 속인 죄였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문제를 그냥 덮고 넘어갔다면 오고 오는 모든 교회에 하나님도 속아 넘어갈 수 있는 분인 것처럼 인식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들의 거짓과 위선에 속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거짓과 위선으로 행하는 죄를 성경에서는 외식이라고 지적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외식의 죄에 대해서 얼마나 실랄하게 비판하셨는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마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하면서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든지, 주님앞에 나아오는 자들을 용납하시고 그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문둥병환자, 간음한 여인, 도적질한 세리....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서 온전한 치료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께서 용납하지 않았던 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구제,기도,금식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3대 경건행위라 구분할 만큼 경건의 척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 같은 역할을 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할수만 있으면 좀 더 경건하게 보이기 위해 갖은 노력들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6:1절“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외식의 심각한 문제점은 자신의 외식을 인식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종교적 행위, 경건의 행위 때문에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예배에 대한 사모함으로 나아왔는지, 아니면 대충 체면치레 때문에 허둥지둥 달려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경을 몇장 읽고 기도를 얼마나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금 헌금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행위들이 단순히 종교적 행위에 머물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심각한 외식의 죄에 빠져 있을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중심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자주 큐티를 하고, 성경을 몇 번 읽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 말씀이 오늘 나의 실질적인 삶속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예배의 자리에 나왔기 때문에 당연히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착각할 것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말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얼마나 무서운 경고의 말씀인지요. 이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서도 그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적인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는데 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시고, 너희들이 헛되이 나를 예배하고,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예배하니 차라리 교회문 닫아버렸으면 좋겠다! 경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저를 비롯해서 교회 일에 앞장서서 섬기는 분들은 항상 성령충만함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은연중에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경건한 척, 열심히 하는 척, 성령충만한 척....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러한 죄의 유혹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립얀시는 그의 책에서 외식에 대한 해결책은 두 가지인데 첫째, 완벽하든지, 둘째 정직하여 회개하고 주님앞에 나아가든지.. 두가지 방법 외에는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완벽할 수 없기에, 주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때, 찬송을 드릴때, 헌금을 드릴때...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의도하지 않게 자꾸 사람을 의식하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저는 예배 때 입구에 헌금함을 비치하는 것보다 헌금 주머니를 돌리는 것이 보다 더 많은 성경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본질인 나를 드리는 것을 헌금을 통해서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혹시 여러분이 옆 사람의 시선 때문에 할 수 없어서 부랴부랴 호주머니 뒤지며 헌금을 하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중에 여러분의 신앙고백을 함께 담아 드리는 것! 그 중심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박자에 잘 맞춰 감미롭게 찬양하는 것보다, 우리의 중심을 드려 찬송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음정이 좀 맞지 않고, 박자가 엉망이어도 그 찬양의 가사들이 여러분 중심의 고백으로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특별히 앞에서 찬양으로 섬기는 분들, 혹은 부서에서 특송으로 이 앞에 서게 될 때에, 사람들에게 시선이 집중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찬양인지가 선명하지 않으면 자칫 외식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점심식사준비를 하시는 가정들께도 조심스럽게 당부드립니다. 여러분의 섬김과 수고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혹여나 여러분의 섬김이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의식해서 예배에 지장을 줄 정도로 영향 받아서는 안됩니다. 예를들면 전날 너무 늦게까지 준비해서 정작 예배때는 졸고 있다든지, 혹은 예배 중에 홀에 가서 혼자 준비하고 있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가장 우선순위는 예배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정 준비시간이 부족했다면 그냥 맨밥에 고추장 비벼서 먹어도 괜찮습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본질이 어디에 있을까요?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그게 교회인가요? 혹은 좋은 학벌,경력을 가진 목회자, 섬김위원들이 구성되어서 일을 잘 처리해 나가면 그게 교회인가요? 교회는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맨파워가 지배하는 곳이 절대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세상에서 보잘것 없어 보이는 갈리리 출신의 어부들이 사역했고, 구성원의 대부분도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힘은 여전히 불꽃같은 눈으로 교회와 성도를 지키시며, 감찰하시며,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에 성령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의 눈만 피하면 얼마든지 안전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미 교회의 본질 전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보기에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이미 교회일 수 없습니다.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주시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시대에 이런 외식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벌을 내리신다면 아마 저를 비롯해서 살아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신약의 교회를 출발하는 선상에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경고하는 중요한 메시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급속도로 성장을 하고, 성도들의 교제와 나눔이 아무리 멋지고 좋아도, 거기에 성령님의 다스리심을 무시하고, 성령님도 적당히 속일 수 있을 것처럼 취급한다면 그것은 교회일 수 없다고 하는 중요한 한 모델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구약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아간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부분 유사한 점을 보기 때문입니다. 아간의 사건은 출애굽한 백성들이 본격적으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차지하는 서두에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는 이스라엘의 전략이나 용맹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부터 오는 참된 순종에 달려 있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여리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종할 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이라는 조그마한 성 앞에 이스라엘은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패배의 원인은 아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간이 노략한 물건 중 일부를 취하였다고 할 때의 단어와 아나니아가 땅값 얼마를 감추었다고 할때의 단어가 동일한 단어가 씌여졌다는 것입니다. 즉 두 경우다 하나님을 온전히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의 눈만 피하면 하나님의 눈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데서 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속이고 그처럼 거짓과 위선으로 행동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간의 죄가 처리되자 이스라엘은 다시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가는 곳곳마다 승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상교회는 결코 영적인 낙원이 아닙니다. 그저 모든 것이 기쁘고 감사하고, 언제나 찬양과 감격만 넘치는 공동체는 아닙니다. 이땅의 교회는 여전히 치열한 영적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과거 아간을 꾀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유혹했던 사탄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시시탐탐 공격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끝없이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거룩하고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서가 아니라, 오늘도 교회를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시고 다스리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보고 두려워하고, 사람 때문에 모이는 곳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때문에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교회를 모으시고 하나되게 하시고 거룩하고 정결하게 지키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성도들은 이 사실을 다시한번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무엇입니까? 5절 하반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11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주목할 것은 사도행전에 본격적으로 교회라는 단어(에클레시아)가 사용된 것은 오늘 본문 11절에서부터 라는 사실입니다. 즉 성도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할 줄 알 때 바로 그곳이 교회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있고나서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4절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우리생각에 교회에서 “누가 죽었다”라고 하는 소문이 퍼지면 그 교회는 이제 끝장났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거룩함을 회복할 때 교회는 놀랍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록햄턴 한인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도들 개개인 안에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경외함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나아가는 온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록햄턴 한인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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