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학부모로서 마지막 교통봉사를 서고 들어온 비바람 부는 아침. 깃발을 들면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더 컸던 거 같다. 어제는 스승의 날이라 다양하게 포장한 꽃들을 들고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이었다면 오늘은 가지각색의 우산을 쓰고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유쾌함이었다고나 할까.
교통 봉사를 끝내고 교감실로 차 한잔 하러 갈 때 학부모 중 한명이 내게 다가오더니 살짝 물었다. “했어요?” 주어와 목적어가 빠진 질문은 생소했다. 궁금증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자 그제야 자초지종 말을 했다. 자기 딸은 그제 ‘했다’고 했다. 그때서야 무슨 말인지 짐작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제가 중2 때 했으니 아마 제 딸도 그럴 거 같아요. 이제야 가슴이 생기는데 그것 또한 저하고 같거든요."
요즘 세상에 딸을 키운다는 것은 남자 아이보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한다. 연일 터지는 불미스러운 사건에 휴대폰이 필수품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성교육과 함께 치안교육까지 열심히 시켜야 하는데 그것에 더해 사춘기에 접어든 딸들에게 몸의 성장 교육까지 시켜야하는 책임까지 짊어졌으니……. 그것보다 더 나는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교육에 중점을 두는데 그것은 케케묵은 사상같지만 ‘남녀평등’이라는 구호다.
은연중에 머릿속에 박히는 교육들. 엄마는 집에서 요리를 하고 아빠는 밖에서 돈을 벌어야한다는 등, 남녀 활동을 구분 짓는 역할 교육들. 여자는 수동적이어야 하며 남자는 공격적이라는 등.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동화나 소설을 보면 역할 구분을 짓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생물적인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역할까지 나눈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전부터 페미니스트 사이에 이런 불평등을 깨닫고 글을 써내는 작가들이 있었는데 바바라 G. 워커 또한 그중 한명이다.
『바다 마녀를 사랑한 남자』 는 신화를 변형 시킨 13편의 동화다. 동화라지만 신화처럼 상징적이며 상징적인 것들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가 주로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대부분 여성을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으로 그린다. 예를 들면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린 ‘판도라’, 유혹의 과일인 사과를 아담에게 먹게 한 ‘이브’ 등. 과감하게 워커는 수동적이며 부정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그린다. 결말 또한 핸피엔딩이라 마음 졸일 필요가 없다. 행복한 결말 중 「괴물 가거일의 사랑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가거일(Gagoyle)은 고딕양식 건축물에 장식한 괴물 형상의 조각품을 말하는데 이 괴물이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외양만 괴물 형상일 뿐 성전 안에 모셔 둔, 아름다운 조각상보다 더 착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가거일은 결국 자신이 사랑한 소녀를 구해주고 소녀의 사랑을 얻는다. 소녀는 '마녀 사냥'에 희생양이 될 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가거일의 진심을 안 뒤 그를 사랑하게 된다. 외양을 보고 무조건 나쁘다, 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가차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기미 왕자의 청혼」은 재미있었다. 기미(Gimme : give me)에서 기버(Giver) 왕자로 탄생하는 과정을 그렸다. '무조건 받은 자'라는 별명을 얻은 건방지고 이기적인 왕자가 '주는 자'로 거듭나는 일종의 성장동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매개체로 '가마솥'이 나온다. 가마솥은 마녀가 마법의 약을 만들 때 사용하는 커다랗고 검은 솥이다. 이런 원래의 의미에서 신화적 상징성을 더한다. 즉, 가마솥은 영적인 변형을 의미한다.
기미 왕자는 이 가마솥 안에서 재탄생하게 된다. 가마솥에 들어가 한번 죽음(상징적 의미의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죽음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삶에 대해 가장 경건한 자세를 갖게 된(125쪽)'다고 말하고 있다.
가마솥의 의미는 「가마솥의 전설을 찾아 떠난 기사」에서 한번 더 언급한다. 가마솥을 생명과 죽음의 끝없는 순환을 관장하며 영원불멸하다고 말하고 있다. 가마솥 안에서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휘저어서 만물을 되살린다고 한다. 이 가마솥은 바다를 연상시키며 이것은 곧, 어머니의 자궁과 연결시킨다.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 「신들의 최후」에서 악동 ‘루키’가 신들을 늙지 않게 하는 열매인 사과를 인간에게 먹게 한다. '아담과 이브'를 변형시킨 이 이야기는 루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브를 상징하는 여자에게는 효과가 없다. 인간인 여자는 이미 자신 안에 피의 열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자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여성의 소중함과 여성과 만물이 소생하는 자연과 동일시하면서 「아프리카 여신들의 긴급회의」에서는 자연과 잘살아가는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책 제목인「바다 마녀를 사랑한 남자」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다. 바다 마녀인 돌고래, 그 마녀를 사랑한 남자가 사람인 자신의 몸을 버리고 돌고래가 되어 바다 속으로 '같이' 떠나는 이야기이다.
신화가 그렇듯 약간의 그로테스크와 아름다운 환상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짧은 한편의 글이 환상적인 장편동화를 잉태할 수 있는 여지를 심어준다. 또한 딸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들까지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나는 한 아이의 어머니이다. 그 역할에 간혹 부담을 느낄 때면 많은 아이들의 어머니였던 나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터울이 심한 남동생 때문이었을까. 성장할 때 남녀 차별을 특별히 받지 않고 자랐다. 다른 부족함은 있었지만 부모님은 요즘 말하는 '옛날' 분인데도 불구하고 딸들에게 헌신적이며 최선껏 '교육'을 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분이었다. 그분들의 성의에 따라가지 못한 게 크면 클수록 마음이 더 아파오는 게 이제야 철이 들어서일까. 한아이의 어머니로서 나는 또 다른 어머니의 아픔을 생각한다. 같은 여자로서 짊어진 공통분모같은 거랄까. 그래서 '딸'은 엄마의 친구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딸이면서 친구같은 나의 딸. 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친구같은 딸이 된 적이 있는가 …….
저자 : 바바라 G.워커 (Babara G. Walker)
페미니즘 작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학자로서 남녀평등에 대한 그녀의 탁월한 시각은 세계인들의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 1993년 미국 휴머니즘협회에서 ‘올해의 여성 휴머니스트’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1995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부터 ‘역사를 만든 여성들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여자를 위한 신화와 거짓말 백과사전 The Woman's Encyclopedia of Myths and Secrets』, 『냉소적인 페미니스트 The Skeptical Feminist』, 『아마존 Amazon』 등 많은 저서가 있으며 현재도 저술 활동을 활발히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