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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제9기 성지순례 안내 봉사자 강의 요지문(2006년 2월 13일 월요일)
제4강 : 한국 교회의 순교자 현양 운동과 사적지 개발의 의의
차기진(루가) /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순교자현양회 시복분과장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한국 교회의 순교자 현양 운동과 사적지 개발의 의의
차기진(루가) /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순교자현양회 시복분과장
1. 순교와 순교자 현양(공경)
1) 순교의 종류와 의미
순교(殉敎, martyrium)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을 당하는 일로, 첫째 신앙과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죽음, 둘째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하고 그분께 자신을 봉헌하려는 의도(무저항, 자발적인 수용), 그리고 셋째로 후대에 첨가된 신앙을 증오하는 자에 의한 박해 등 세 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신학적으로는 신앙을 위해서 칼날 아래 목숨을 바치는 혈세(血洗, 피 흘림) 즉 “적색(赤色) 순교”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교라고 한다. 이러한 의미의 순교는 모든 종교에 해당한다.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전통은 바로 피 흘림이다. 특히 박해 시대의 신앙 선조들은 순교를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로서 ‘위주치명’(爲主致命)이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해 왔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교가 아니더라도 순교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150~215 ?),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258),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190~264) 등이 설명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충만함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버린 덕행의 신앙인, 예기치 않게 순교가 좌절된 경우, 전염병 환자를 돌보다가 감염되어 죽은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또 교부들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나 마더 데레사 수녀와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천하기 위해 자신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이들을 가리켜 “백색(白色) 순교자”로 간주하였으며, 아일랜드 수도자들은 정결을 지키면서 끊임없이 보속을 실천하는 것을 가리켜 “녹색(綠色) 순교”라고 표현하였다.
죽음은 ‘죽는다’는 육신의 의미가 아니라 “신앙 증거”에 의미가 두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물리적 죽음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한 “순교 정신”(殉敎精神)이 중요하고, 이는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새로 태어남”(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순교의 여정은 “시작 → 과정 → 완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물론 교회의 전통에 따라 순교 터, 순교자의 무덤이나 유해가 우선적으로 공경되어야 하고, 한국의 전통에 따라 순교자의 탄생지도 중요하지만, 순교자가 그리스도의 아픔에 동참하고 천상의 영광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가던 과정 또한 중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순교의 과정은 바로 육화론적(肉化論的) 영성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현재의 진실한 신앙 생활은 그들의 육화론적 영성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적 영성을 이루는 한 부분이요, 순교의 시작이며 과정이다. 현재의 신앙 후손들이 느끼는 순교의 의미는 이러한 점에서 찾아져야 한다.
2) 순교자 현양(자발적인 공경)과 그 의의
가톨릭 교회의 순교자 현양(실제는 자발적인 공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시작되었다. 그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려는 신앙 행위가 순교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2세기 중엽 소아시아의 스미르나(Smyrna) 교회에서는 주교 폴리카르포(Polycarpus)의 순교 후 그의 유해를 모셔놓고 순교 날짜에 맞추어 공경 기도를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현양 운동이 점차 전체 가톨릭 교회로 번져가게 되었다.
이후 순교자 현양에서는 순교자의 유해(무덤), 순교일(새로 태어남), 순교 장소 등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이를 수록한 교회의 공식 문헌인 순교록(殉敎錄)과 순교자들의 행적에 관한 기록인 전기(傳記)가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순교록은 그리스어로 쓰여지고 시리아어로 번역된 시리아 순교록에서 시작되어 로마 순교자 증언록, 예로니모 순교록(431~450년), 중세 16세기의 로마 순교록으로 이어졌다. 한편 순교자 전기는 일반적으로 법정 재판 기록, 수난기(목격 증언록), 전설 문학(죽음과 기적, 환시 기록) 등으로 구분된다.
순교 신심 활동 또한 이러한 공경 요소에 따라 유해 공경, 기적의 전구, 무덤․사적지 순례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순교자 무덤 위에 성당을 건립하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다(성 베드로 대성당, 절두산 순교 성지 성당).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도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첫 순교자가 탄생하면서 이를 현양하는 전통이 자연스럽게 생겨났으며, 이것이 지금의 현양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순교자 현양’이란 말은 적당한 표현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순교자 ‘현양’(顯揚, 높이 드러냄)은 이미 하느님에 의해, 그리고 그분께서 섭리로 부여해 주신 순교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의 행위는 “순교자 공경”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러한 공경 행위에는, 첫째 순교를 통해 순교자들에게 영광을 주어 높이 드러내신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둘째 순교자들을 통해 보호와 기적을 청하는 ‘전구 행위’의 의미도 들어 있다. 미천하고 미약한 우리들이기에 하느님의 영광을 얻은 순교자들을 통해 전구하는 것이다. 셋째 순교자 공경을 통해 그분들의 용덕과 모범을 ‘본받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 본받음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신심을 함양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2. 성지와 사적지(정식 용어는 순례지)
본래 “성지”(聖地, terra sancta)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서 생장하고 복음을 선포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땅인 팔레스티나(Palaestina)지방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리고 이 성지 팔레스티나 안에 속한 특정 장소나 건물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나 수난과 관련된 ‘성묘’(聖墓)나 ‘만찬 장소’ 등을 지칭할 때는 ‘성역’(聖域, loci sancti)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이 ‘성역’이라는 용어의 범위가 점차 사도 및 성모 마리아와 관련이 있는 장소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대되어 왔으며, 마침내는 전 세계의 순교자와 성인들이 관련된 곳까지 가리키는 용어로 확대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지금 ‘성지’로 표현하고 있는 곳들은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전통에 따르자면 대부분 순교 성인과 관련되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정확히는 “성역”이라고 해야만 한다. 사실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교회에서는 순교 성인들과 관련된 장소를 ‘순교 터’ 혹은 ‘치명 터’라 불러왔다. 그러다가 1956년 새남터에 순교 기념탑이 세워지면서 그곳을 “성지”(聖址)로 표현하였으며, 이러한 한자식 표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한글 표기로 변하였고, 동시에 ‘성지’라는 용어가 굳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성지라는 용어가 확대 적용되어 가면서 명동 성당과 같은 교회 ‘사적지’도 성지라 불리게 되었고, 옛 교우촌에도 성지라는 용어가 붙여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4년 103위 시성식이 있은 뒤에는 순교 성인 혹은 순교자와 관련되어 있는 탄생지나 거주지, 체포된 곳이나 순교 터, 무덤이나 관련 장소 모두가 ‘성지’로 호칭되기 시작하였다. 성지라는 용어가 남발되기 시작한 것이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이들은 정확하게 말하면 “순례지”이다. 다시 말해 교회법 제3편 제1장 ‘거룩한 장소’의 제1230조에서는 ‘성지’라는 용어 대신 ‘순례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순례지는 많은 신자들이 교구 직권자의 승인 아래 특별한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곳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 안에서 ‘교회 사적지’ 혹은 ‘성지’로 통용되고 있는 곳들은 모두 ‘순례지’로 불리어야 한다. 다만, 지금의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는 프로테스탄트나 불교 등과 마찬가지로 “성지”나 “성지 순례”라는 용어가 너무 굳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다.
3. 현양(공경) 운동과 사적지 개발 과정
1) 자발적인 순교자 현양(공경)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순교자 공경을 시작하였다는 기록은 신해박해(1791년)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을 기리고 그 신앙을 모범으로 삼았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도 잠깐 설명한 것과 같이 당시의 신자들은 순교자의 두발이나 목침, 옥중 수기 등을 보관해 오면서 신심 함양의 바탕으로 삼았으며, 순교 성인을 주보로 모시거나 성인전을 통해 신심을 함양하였고, 때로는 순교자의 유품을 영약(靈藥)으로까지 생각하였다. 또 1794년 말에 입국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아주 중요하다는 교회 전통을 신자들에게 인식시켜 주기도 하였다.
순교자 공경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순교 행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작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곧 한국 천주교회의 시복 시성 운동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1838년 말에 이루어진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Imbart, 范世亨) 주교의 순교 행적 조사에서 시작되어 박해 시기 내내 계속되었고,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 때에 와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 여기에는 신자들 사이에 널리 전파된 천주가사(天主歌辭)와 순교 성인전들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신자들의 자발적인 순교자 공경은 순교의 영광을 얻고자 하는 종말론적 영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 활동과 신심 행위가 순교자 현양 운동으로까지 승화된 것은 아니었다.
순교 행적 조사는 박해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점차 순교자 현양 운동으로 변모되어 갔다. 특히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는 이 과정에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백서>(帛書)를 비롯하여 기해일긔, 치명일기 등을 간행 반포하였고, 각처에서 순교자의 유해를 발굴하거나 순교 터를 조사하였으며, 신자들에게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들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자발적인 현양 활동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였다. 또 1918년에 교황청에서 병인박해(1866년 이후) 순교자 26위의 시복 수속이 정식으로 선포되고, 기해(1839년)․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을 눈앞에 두게 되자, 경향잡지를 통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게재하면서 각 본당별로 그 시복을 위한 자발적인 기도와 현양 운동을 전개하도록 유도하였다.
2) 순교자 현양회와 사적지 개발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적으로 순교자 현양 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은 1925년 7월 5일에 79위 순교 복자가 탄생한 뒤였다. 이때부터 순교자 현양 운동은 각 본당별로 이루어져 오다가 1939년의 기해박해 순교 100주년을 앞두고 전 교회 차원의 현양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즉 1937년 11월에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가 순교자 현양탑 건립을 주장하고, 경향잡지사에서 여기에 적극 호응하면서 현양탑 건립을 위한 기금 모금 운동이 널리 확산되어 간 것이다. 그 결과 1939년 9월 8일에는 제9대 서울교구장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명의로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기인회가 조직되었고, 9월 24일에는 서울의 계성심상소학교(현 계성학교의 전신)에서 발기식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불허로 발기식은 좌절되었고, 동시에 순교 현양탑 건립 운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게다가 일제 말기에는 교회 당국의 순교 정신에 대한 강조가 때때로 일제의 통치 체제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였다. 한편 전주 지목구에서는 1939년에 되재 본당 박문규(朴文奎, 미카엘) 신부의 집전 아래 전주의 신자들이 함께 모여 천호(다리실) 순교비 축복식을 가졌다.
일제의 불허로 창립을 보지 못한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는 광복 이후인 1946년 9월 16일 복자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기식을 갖게 되었다. 이때 위원장으로는 윤형중 신부가, 경리로는 정원진(鄭元鎭, 루가) 신부가, 서기로는 이완성(李完成, 요한)․장금구(莊金龜, 금구 요한) 신부와 조종국(趙鍾國, 마르코)․장면(張勉, 요한)․박병래(朴炳來, 요셉)․박대영(朴大永, 베르나르도) 등이 임명되었다. 이 현양회는 창립 직후부터 박해 시대의 유물들을 수집하여 경향잡지에 소개하였고, 순교 터 확보에 노력하여 1949년 5월 7일에는 새남터의 부지 1,340여 평에 대한 점용 허가를 받을 수 있었으나, 이듬해의 한국 전쟁으로 인해 그 활동이 일시 중지되고 말았다. 이와는 별개로 전주 지목구에서는 1949년 7월 17일에 치명자산의 십자가비 건립 제막식을 가졌다.
순교자 현양회의 활동은 휴전 후에 재개되었다. 이때 현양회에서는 먼저 타인에게 양도된 새남터에 대한 사용권을 다시 얻는 데 노력하여 1955년 4월 12일에 이를 확보하였고(약 2천 평), 1956년에는 이곳에 ‘가톨릭 순교 성지(聖址)’라는 기념탑을 건립함과 동시에 순교 현양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현양회에서는 양화진 순교 터 순례를 계속하는 한편 순교 행적을 조사하였고, 전국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부지 확보 운동을 전개한 결과 1956년 12월에는 그 일대의 부지 1,381평을 확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곳은 ‘절두산 성지(즉 사적지)’로 명명되었다. 다음해 9월 26일에는 서울에서 대대적인 순교자 현양을 위한 가두 행렬(성신중․고등학교~명동 대성당)이 개최되었으며, 현양회에서는 1958년 9월의 순교 복자 성월을 전후하여 기념탑 건립 운동을 시작한 결과 1962년 9월 1일에는 절두산 현지에서 ‘가톨릭 순교 성지 기념탑’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한편 대구교구에서는 1958년에 순교자 현양회 대구 지부를 결성하고 교구 차원에서의 현양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3) 지역별 현양(공경) 운동과 사적지 개발
이 무렵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6위에 대한 교황청 수속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그러므로 한국 주교단에서는 1962년 11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뒤 교황에게 26위의 시복이 1966년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청원하였다. 또 순교자 현양회에서는 1964년 3월 17일에 전국 위원회를 열고 2년 뒤에 있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 기념 사업으로, 첫째 순교자 유물과 관계 자료 수집, 둘째 순교 터 확보 운동, 셋째 전기 발간, 넷째 교구별 순교 복자 성당과 기념탑 건립 등의 계획을 수립하여 주교회의에 제출하였다. 이때 주교회의에서는 그 동안 범교구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순교자 현양회의 활동을 서울대교구만으로 한정하고, 기념 사업은 각 교구별로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각 교구별로 순회 기도회, 강론 및 사진 전시회, 사적지 참배 등 순교 신심 운동과 현양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이처럼 지역별로 현양 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서울대교구에서는 순교자 현양회의 현양 사업을 최석호(崔奭浩, 바오로) 신부에게, 자료 수집 및 연구를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에게 위임하였으며, 1965년 9월에는 김창석(金昌錫, 타대오) 신부를 위원장으로 하는 ‘병인 순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를 발족시키고 절두산의 순교 복자 성당과 기념관 건립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성당과 기념관은 1966년에 시작되어 다음해 10월 21일에 축성되었으며, 그에 앞서 8월 1일에는 최석우 신부가 초대 기념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기념관에서는 현양회에서 그 동안 수집해 온 순교 유물들과 교회사연구소의 자료들을 인수하였다. 한편 각 교구에서도 현양 사업의 일환으로 복자 성당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는데, 수원교구의 서둔동 성당(1969년), 대구대교구의 신천동 복자 성당(1970년), 마산교구의 상남동 성당(1968년), 전주교구의 복자 성당(1967년) 등이 이때 축성되었다. 또 전주교구에서는 1968년에 숲정이 순교 현양탑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1968년 2월 15일 교황청 시성성에서는 곧 시복이 예정된 순교자들의 유해를 조사하고, 이를 분배 혹은 공경할 수 있도록 절두산 기념관의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聖骸室)로 옮기는 일을 서울․수원교구장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주교에게 위촉하였고, 이 작업이 주교 대리 류영도(柳榮道, 디오니시오) 신부, 신앙 촉구관 최석우 신부, 서기 장익(張益, 요한) 신부 등에게 위임되었다. 이에 앞서 절두산 기념관에서는 1967년에 먼저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다블뤼 주교,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위앵(Huin, 閔) 신부,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남종삼(南宗三, 요한), 최형(崔炯, 베드로), 장주기(張周基, 요셉),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이호영(베드로) 등 12명의 유해와 언구비(彦九碑, 현 논현동) 묘역에 있던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이영희(李英嬉, 막달레나) 모녀의 유해 등 모두 15명의 유해를 옮겨와 성해실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전주에서 발굴하여 가져온 이명서(베드로)와 손선지(베드로)의 유해 일부,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던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의 유해 등 3명의 유해를 성해실에 안치하였다.
1968년 10월 6일에는 마침내 병인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이를 기해 각 교구에서는 순교자 현양 대회와 성체 거동 행사, 시복 경축 행사 등을 통한 현양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고, 다음해 9월 21일에 열린 주교회의 임시 총회에서는 한국 순교 복자 103위의 복자 축일을 9월 26일로 단일화하였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 현양 운동은 103위 시성 운동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1976년 4월에는 마침내 주교회의에서 시복 시성 촉진을 결의하고 그 책임 주교로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주교를 임명함으로써 전 교회 차원에서 시성 운동을 추진해 나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중심으로 순교 자료 수집과 정리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각 교구별로 사적지 개발과 현양 사업, 사적지 성역화 운동(엄밀히 말하자면 ‘사적지 조성 사업’)이 전개되었고, 순교자 유해 분배와 유해 순회 기도회도 각 본당․교구와 단체․기관별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0년 1월 14일 주교회의 임시 총회에서 구성된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준비 위원회」(위원장 : 경갑룡 요셉 주교)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순교자 현양 운동을 활성화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특히 여기에서는 한국 순교 복자들의 시성 추진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선정하고 신자들의 자발적인 현양 운동을 유도해 나갔으며, 1983년 1월부터 전국적으로 ‘한국 순교 복자 유해 순회 기도회’를 대대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특히, 수원교구에서는 미리내․천진암 등 사적지 개발에 주력하였고, 전주교구에서는 치명자산 개발에 힘쓰면서 1983년에는 복자 정문호(바르톨로메오)와 한재권(요셉)의 유해를 발굴하였으며, 대전교구에서는 다락골과 해미․솔뫼의 사적지 사업을 전개해 나갔고, 원주교구에서는 배론 사적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밖에도 대구와 마산, 청주교구 등에서 사적지 개발을 통한 현양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처럼 전국적인 순교자 현양 사업의 결과, 1984년 5월 6일에는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복자 103위가 시성되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 현양 운동은 자발적인 순례와 순교자 공경 활동으로 이어졌으며, 각 교구에 신설된 교회사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한 자료 수집과 연구 활동, 교구 차원의 사적지 개발과 기념관 설립, 교회 창설기의 순교자들과 남은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작업으로 계속되었다. 반면에 한편에서는 연구 성과의 집약과 체계적인 현양 사업, 계획적인 사적지 개발, 후원 활동 등이 순교자 현양 활동의 확대 분위기와 신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게 되었다.
4. 사적지 개발과 보존의 의의
1) 사적지 개발과 문제점
① 사적지 개발은 순례를 위한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음 : 신앙 선조들을 위한 자
발적인 기도와 현양 운동 → 현재를 사는 우리 후손들의 신심 함양 → 제삼천년
기 복음화와 북방 선교의 밑바탕
② 사적지 개발에서 드러난 문제점들 : 사적지 개발 후 조사에서 드러나는 문제점,
지역 사회와의 융화 문제 → 새로 개발되는 경우는 이러한 점에서 오히려 다행
(예 : 충청도 홍성 순교 터)
③ 국내 및 해외의 천주교 사적지에 대한 관심 고양의 문제
* 1801년의 순교자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가르침 :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 첫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의 무덤(현재 충남 금산군 진산면 장고봉으로 추정됨) 위에 성당이 건립되어야 할 것.
* 진산 순교자의 무덤,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지 마가자(馬架子),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 양관(陽關) 등
2) 사적지의 보존과 순례의 활성화
우리가 어떤 일이나 행위,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만한 가치(價値)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 가치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아주 다른 이중의 잣대로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한편에서 부여한 가치를 다른 잣대로 평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가치 있는 것을 파괴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역사적 유물이나 사적지․사적지, 더 나아가서는 정신적인 유산까지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까지 이러한 행위들이 도처에서 수도 없이 진행되어 왔다. 개발이란 이름 아래 온전히 보존되어 오던 사적지를 훼손하는 경우도 있었고, 지하에 보존되어 오던 유물을 파괴해 버리거나 남몰래 덮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교회 사적지의 경우도 결코 이와 다를 수 없었으니, 특히 위락 시설이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그와 같은 일이 자주 발생하곤 하였다(용인의 골배마실, 배알미리의 성 정하상 무덤, 순교자 황사영 묘역 등).
근래에 들어서는 마포와 용산의 재개발로 인해 유명한 사적지인 절두산(切頭山)과 당고개[堂峴]가 훼손되거나 없어질 운명에 놓인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림동(中林洞) 성당은 화재로 원형 자체가 파괴되고 말았다. 다행히 절두산은 이곳을 포함하는 양화진 일대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당고개는 지역 재개발 위원회의 보호 결정으로 일단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러나 중림동 성당 같은 경우에는 현재 복원이 완료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신앙의 흔적이나 원형 자체를 찾아보기는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교회 당국은 물론 모든 신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앞으로도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여기에는 묘책도 필요할 것 같다. 당고개 성지 같은 경우에는 재개발 이후에도 인근 주민들이나 지역 개발 위원회 등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훼손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기회에 그 동안의 자세를 반성해 보고, 교회 사적지의 보존과 올바른 개발을 위한 전국 위원회의 구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 이미 여러 번 제기된 문제이기도 하지만, 주교회의 문화 위원회 산하에 교회 사료와 유물 보존을 담당할 부서를 둠으로써 교회 유산 전반에 대해 전문적이고 항구적인 관리 체제를 유지해 나가는 방법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유산들을 관리 보존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를 널리 이해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방안도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다른 시각과 잣대로 교회 유산을 대하던 일반의 편견도 비로소 달라지게 될 것이다.
현재 전국 성지(즉 사적지) 담당 사제들의 모임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각 교구별로 교회 유산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게다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지엽적이고 한시적인 대책만 세우고 만다면, 언제든지 유사한 문제가 재발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시급하게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면서 관심을 갖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의미를 부여해 온 가치 있는 유산을 보존하는 것만큼 당면한 문제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전국의 성지(사적지)를 가꾸고 지키는 이들의 노력은, 어찌 보면 외로운 싸움 같기도 하지만, 한 마디로 말해 아름다운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이들을 사적지로 안내하는 이들, 이들의 인도를 받아 성지(사적지)를 순례하는 이들의 모습도 하느님이 보시기에 더없이 아름답지 않을까 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