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 명망가 출신, 사회주의 운동으로 민족의식 고취- -이광수/ 몰락 집안 출신, 친일자 변신 학병 지원 등 선동-
1910년, 우리 민족은 치욕적인 한·일합방을 맞은 뒤 일제 핍박 속 에서 36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실로 고통과 설움의 시간이었다. 일부 지식인은 고난과 역경을 무릅쓰고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가열찬 투쟁에 나섰다. 물론 현실 타협에 그치지 않고 일제 앞잡이 로 활동한 지식인도 적잖았다. 최남선과 함께 당대 3대 천재로 꼽히 며 필명을 날렸던 홍명희와 이광수 역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반일과 친일 인사로 엇갈린 길을 걸었다.
벽초 홍명희와 춘원 이광수는 애초 동지로서 독립투쟁을 함께 펼쳤 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일본 동경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으로 유학을 간 그들은 자주 문일평·최남선 등과 어울려 민족의 앞날에 대해 밤새워가며 토론을 벌였다.
춘원은 1908년, 벽초는 1910년 초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명치학원을 졸업한 춘원은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던 중 한·일합방을 맞았다. 동경상업학교에 다니던 벽초가 졸업을 앞두고 돌연 귀국한 건 당시 조국의 암울한 현실 때문이다. 열강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조선은 이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 본의 독무대가 됐다.
열혈 지식인이던 춘원과 벽초는 한·일합방에 충격을 받았다. 특히 벽초에게는 민족적 비애와 개인적 슬픔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한· 일합방이 공표되자 당시 금산군수로 있던 벽초의 아버지는 비분강개 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벽초의 나이 25살 때다. 인생에 대해 회 의를 느끼고, 삶의 의미도 잃어버린 채 3년 탈상을 하자마자 곧바로 중국으로 떠났다.
춘원 역시 방황 끝에 세계 여행을 떠났다. 우선 중국에 들렀다. 우당 정인보를 한 여관에서 우연히 만난 뒤 당초 계획을 바꿔 상해로 건 너가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등과 재회했다. 춘원은 동경 유학 시절 가까이 지냈던 벽초와 같은 방에서 지내며 더욱 돈독한 우정을 쌓아 갔다.
두 사람이 독립운동에 두각을 나타낸 건 1919년 3·1 만세운동을 전 후해서다. 중국에서 생활하던 이광수는 신규식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자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 인촌 김성수의 도움으로 다시 일본 유 학길에 올랐다. 춘원은 국내에 머무르며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기도 했다. 1918년 1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이광수는 분연히 일어섰다. 1919년 2월 8 일 동경에서 유학생 중심으로 이뤄진 ‘2·8 독립선언’을 주도했 다. 이 선언은 국내 3·1 독립선언의 기폭제가 됐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건너간 그는 소장파 대표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외 무위원을 비롯해 독립신문사 사장, 임시정부 사료편찬회 주임 등의 직책을 맡았다.
하지만 춘원은 1921년 귀국한 뒤 일제 문화정치에 동조하며 민족성 개량운동과 같은 소극적 타협주의로 빠져들었다. 1922년 <동아일보 >에 〈민족개조론〉도 썼다. 조선인은 허위의식이 강할 뿐 아니라 나태하며 신의와 충성이 없다는 그의 지적은 일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시켜 패배주의에 젖게 하 려는 일본의 식민정책과 노선이 같다. 1924년엔 <동아일보> 사설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치를 요구해야 한다 는 ‘자치론’을 들고 나왔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노골적 인 친일 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됐 고, 이름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개명했다. 2차 세계대전 이 일어나자 조선의 학생들에게 학병을 지원하라는 연설을 하고 다 녔다. 실로 무섭고 가증스런 변신이다.
반면에 홍명희는 독립 전선에서 이탈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1918 년 중국에서 귀국한 홍명희는 고향인 충북 괴산에서 3·1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했고 그 대가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 신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면서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노선은 중국을 거쳐 조선에도 파급됐는데 민족 공동 체 의식이 남달랐던 벽초이기에 사회주의 노선으로 방향을 튼 건 어 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벽초는 1924년 식솔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됐다. <동아일보>가 일제의 ‘문화정치’에 순응하는 쪽으로 선회하자 민중 사이에서 불매운동이 벌어졌고 송진우의 뒤를 이어 이승훈이 사장에 취임하면서 홍명희가 영입된 것이다. 비타협 주의 노선을 견지하던 이승훈이 5개월 만에 사장에서 물러나면서 벽 초의 입지도 축소됐다. 결국 1925년 4월 <시대일보> 편집국장 겸 부사장으로 옮겼으나 경영난으로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해 좌우합작 단체인 신간회 창립에 매달렸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대립은 극심했다. 분열된 힘으로는 일 제의 강압을 헤쳐나갈 수 없었다. 그같은 현실을 직시한 지식인들이 신간회 중추세력이 됐다. 민족주의 진영에선 신석우와 안재홍, 이승 훈, 한용운 등이 참여했고, 사회주의 세력으로는 공산당 대표 한위건 등이 합류했다. 이들은 기회주의를 일절 배격한다는 강령을 내걸고 회장에 민족주의 세력인 이상재, 부회장에는 사회주의 세력인 홍명 희를 뽑았다.
하지만 신간회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 인 반일운동으로 확산시키려는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허헌 과 홍명희 등 간부 40여 명이 체포, 투옥됐다. 신간회는 와해됐고, 민족통일전선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소나기는 일단 피해 가랬다고 벽초는 출감 뒤 연재소설 〈임꺽정〉을 집필하며 민초의 계급적 민 족의식을 일깨웠다.
벽초가 춘원과 달리 지조를 지킬 수 있었던 건 개인적 경험이 작용 한 결과다. 홍명희는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홍우길은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조부인 홍승목은 중추원 참의을 지냈 다. 부친 홍범식도 금산군수 제직 중 한·일합방을 맞았다. 특히 그 의 아버지는 한·일합방이 되자 국내에서 제일 먼저 자결한 선비일 정도로 성품이 곧았다. 더구나 유서로 친일하지 말 것을 후손에게 신신당부했다.
춘원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이 괜찮은 편이었으나 조부와 부친의 방탕과 무능 때문에 몰락했다. 11세 때 부모를 여의고 다음 해에 여동생마저 잃었다. 졸지에 고아가 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동 학의 대접주였던 서병달에게 몸을 맡겼다. 민족문제에 눈을 뜨기 시 작할 무렵 춘원은 천도교에서 주선한 외국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에 간 뒤 여의사 허영숙을 만났고, 그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폐병이 깨끗이 나았다. 북경으로 사랑의 도피여행을 떠날 만큼 둘의 사랑은 뜨거웠는데 이것이 화근이 됐다. 허영숙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매 진하던 춘원을 찾아가 귀국을 종용했고 결국 춘원은 고국으로 돌아 와 본부인과 헤어지고 허영숙과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도덕성에 치 명타를 입어 춘원이 독립투사로 다시 나서는 건 불가능했다.
해방 이후 이광수는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친일분 자로 검거됐으나 끝까지 자신의 친일은 민족을 위한 행위였다고 항 변했다. 한국전쟁 중 인민군에 잡혀가 행방불명이 됐다.
홍명희는 해방공간에서 남북통일을 외치며 1947년 김구와 같이 평양 의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 회의가 끝난 뒤 평양에 남아 북한에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고 1968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과연 누구의 삶이 더 가치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