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차 문학기행 시인 김소월편(서울특별시, 3/10)
왕십리(往十里)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참 재미있는 시다.
학창시절에 친구인 故(고) 이성호 君(군)하고 주고받으며 재미있게 읊조리던 시가 바로 김소월의 왕십리란 시의 초반부이다.
시인은 왕십리에서 하숙을 하며 배제학당을 다닐 때 한국문단의 유명한 문인들과 교류하며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위의 시는 왕십리의 소월의 집을 방문했던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중에 빗길에 즐비한 미나리꽝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으로 쓴 시라고 전해진다.
그는 이 시를 1923년 신천지 8월호에 발표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시 찾아오면 죽은 것 같았던 나무에도 새싹이 움트고 이파리들이 새로 돋아난다.
봄하면 진달래꽃이다.
진달래꽃하면 김소월이다.
주말이면 늘 다니는 청량산에도 어느새 진달래꽃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래서 김소월의 시비를 만나보기로 했다.
지난 금요일에 지하철을 타고 서울 왕십리역에 내려서 6-1번 출구로 나오니 역 광장 끝쪽 화단에 김소월 시비(詩碑와) 김소월 상(像)이 세워져 있다.
시비 앞에서 잠시 왕십리 시를 묵상하며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문학기행 프랭카드를 들고 인증 샷도 찍었다.
김소월 시비는 남산도서관 주차장 산책길 옆에도 있는데, 그 시비에는 산유화란 시가 새겨져 있다.
한편, 그가 쓴 시 “초혼”의 배경에는 슬픈 사연이 숨겨져 있다.
그가 오산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만났던 오순이란 여인은 소월보다 3살 많은 누나였다.
요즘 말로 연상의 여인과 사랑을 키워갔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며 14살이 되는 해에 할아버지가 소개한 사업가의 딸 홍단실과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아울러 오 순 역시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며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소월은 3년 뒤에 오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이때의 슬픔을 “초혼”이라는 시에 담아 1925년 첫 시집 “진달래꽃”에 실었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중략 -
소월은 1920년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별과 그리움에서 비롯하는 슬픔, 눈물, 정한 등을 주제로 하여 일상적이면서도 독특하고 울림이 있는 시를 창작해내어 이내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아무튼, 시인 김소월은 윤동주와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해도 전혀 틀진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게 또는 모르게 그의 시 60편이 가곡으로, 혹은 대중가요로도 작곡이 되어 듣고 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못잊어, 진달래꽃, 초혼처럼 가곡과 대중가요로서 각각 작곡된 노래도 있는데 아마도 이러한 예는 김소월의 시가 유이라지 않을까 한다.
대중가요로 작곡된 시 중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들도 있으니 예전 대학가요제 때 라스트 포인트가 부른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해변가요제 때 활주로가 부른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역시 소월의 시다.
희자매의 “실버들”, 최진희의 “먼 후일”, 정미조의 “개여울”, 나훈아의 “부모” 등도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인데 한결 같이 명곡들이다.
우리나라 가곡 중의 20%가 김소월의 시이며, 소월의 시에 노래를 부른 대중가수가 무려 300여명이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대중적인 인지도에 비해 우리가 알고 있는 김소월 시인은 너무나도 빈약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도 본명이 정식(廷湜)이라는 것과 호가 素月(소월/흰 달이라는 뜻)이라는 것이고, 북한 출신이고 사업실패로 힘든 삶을 영위하다가 32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는 정도였다.
소월은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정주시 구성군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시인 백석과도 고향이 같고, 올 해가 탄생 121주년이다.
그런데 정주에서 광산업을 하다가 일본인 폭도들한테 맞아 폐인이 된 아버지를 대신해서 그는 할아버지 밑에서 사업가로 성장해 갔다.
청소년 때는 오산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서울로 이사를 온 후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할 때까지 “개벽”에 엄마야 누나야, 봄밤, 진달래꽃, 개여울, 먼 후일과 소설로는 “함박눈” 등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그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한국 문단이 카프(1925~35년에 활동했던 진보적 문학예술운동단체의 약칭이며, KAPF :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에스페란토어에서 따온 것임)가 몰고 온 바람 앞에서 떠들썩할 때, 한쪽에서 묵묵히 우리 고유의 언어와 정서를 빚어내던 시인 김소월이 1925년 그 동안 쓴 작품들을 엮어 시집을 낸다.
그는 이 시기의 여느 작가들과 달리 서구 사조의 모방이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색채와 목소리를 낸다.
소월의 대표적인 시인 진달래꽃은 성숙한 감성과 섬세한 호소력, 그리고 파워풀한 가창력을 소유한 폭발적 에너지의 여성 록커 마야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 오리다 //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 걸음 /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소월은 192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을 다니고 있을때, 9월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짧은 유학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귀국한 뒤에는 잠시 동안 영대(靈臺)동인으로 활동하던 때인 1925년에 출판한 진달래꽃이 유일한 초판본 시집이다.
이 시집에 나오는 시들은 거의 다 그가 오산학교 시절에 쓴 것들이다
여기서 지난 2016년 한 해 동안 해남 땅끝마을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삼남대로를 걸었을 때 쓴 역사기행문 “걸어서 삼남길”이란 책에서 제23차 여행(남태령역에서 광화문까지)시 남산구간을 통과하며 소월 길을 걸은 내용을 잠시 인용해본다.
남산대림아파트를 지나 남산3호터널 옆길로 해서 소월길로 접어든다.
서울의 걷기 좋은 길 중의 하나인 남산의 남쪽 순환도로를
시인 김소월의 호를 따서 남산 소월길이라 명명했으며
아래쪽으론 해방촌이라는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아까 우면산 서리풀 공원 숲길에서 만난 가을에 핀 철모르는 진달래꽃이
복선이라도 된 듯....혼자 웃어 본다.
시집의 표제로 삼은 「진달래꽃」은 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별이 처절할 만큼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된 시다.
가는 님을 잡지 않고 고이 보내드린다거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린다는 것은 어느 서구 유행 사조도 흉내를 낼 수 없는 한국식 사랑인 것이다.
이런 이별의 표현법은 「진달래꽃」 외에도 「못 잊어」 ·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 「님의 노래」 · 「먼 후일」 · 「초혼」 · 「왕십리」 · 「산유화」 · 「엄마야 누나야」 등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작품에서 계속된다.
김소월이 남긴 시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전쟁으로 끊임없이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되는 우리 민족 역사 전반에 걸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먼 뒷날까지 많은 사람에 의해 애송된다.
그가 다닌 오산학교는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선생이 설립한 학교로 3.1운동 당시에는 전 학생들과 교직원이 참여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그는 이 학교 선생이던 시인 김억에게서 시를 배운 것으로 알려졌으나 서울로 이사를 와서는 교류한 문인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또 1924년 이후에 발표한 「나무리벌 노래」 외에 연대 미상의 작품 「봄」 · 「남의 나라 땅」 · 「전망」 · 「물마름」 · 「옷과 밥과 자유」 · 「가을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등의 시편과 유일한 소설 「함박눈」을 보면 거기에는 민족적 저항 의식이 은근히 깔려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가운데 빼앗긴 땅의 회복을 염원하는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이 눈에 띈다.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 가지런히 / 벌가의 하루일을 다 마치고 /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 즐거이, 꿈 가운데. //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 /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 새라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 동이랴, 남북이랴, /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 희망의 반가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 물결뿐 떠 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김소월의 ‘한’에는 성장 배경과 고단한 삶에서 오는 우울, 그리고 시인이 말하듯 “남의 나라 땅”에서 사는 서러움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김소월의 ‘한’은 그를 따라다니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허무 의식과 슬픔에서 연유한 바가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도 연결된다. 그가 왜 스스로 목숨을 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죽기 얼마 전 스승 김억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보면서 김소월이 마주친 허무의 깊이를 가늠할 따름이다.
제가 구성 와서 명년이면 10년이옵니다. 10년도 이럭저럭 짧은 세월이 아닌 모양입니다. 산촌 와서 10년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어 보여도 인사는 아주 글러진 듯하옵니다. 세기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앞서서 달아난 것 같사옵니다.
김소월이 김억에게 보낸 편지(1934)
그리고 그는 저항 시인은 아니었지만 식민지 상황을 파악하는 안목과 현실 인식을 갖고 나라 잃은 설움과 억압을 내면화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김소월은 ‘임’과 ‘사랑’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조국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갖고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소지식인의 풀 길 없는 울분과 희망 없음을 노래한 시인이다.
이런 뜻에서 김소월을 가리켜 “그는 옷과 밥과 자유 없는 고향 상실의 시대에 원초적인 그리움과 정서적인 합법화를 통해서 인간 회복과 민족 회복을 호소한 우리들의 귀한 터주 시인의 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원로 평로가인 유종호의 평가는 곱씹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