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 희망
시편 113편 1-9절(6-7절)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이 천 년 전 유대 땅은 헤롯왕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백성을 동원하여 궁을 새로 짓고, 예루살렘에 대대적인 수로 건설공사도 하고, 맛사다라는 사면이 절벽인 천연요새에 1~2년을 버틸 수 있는 물 저장소와 음식 곳간을 만드는 등 대규모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헤롯은 오직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치적을 쌓았고 거침없이 살육을 저질렀습니다.
그의 만행으로 유대 백성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듯한 삶을 살았습니다.
절망 속에 사는 유대 백성에게는 오직 오실 메시아가 소망이며 힘이었습니다.
그 기다림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한국문화는 전 세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콘텐츠가 되어 세계문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고, 한국 제품들은 선진국들과 맞붙어 경쟁할 만큼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세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공연스레 우리의 어깨도 당당해집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다른 한 편을 보면 나라의 발전과 성장이 곧장 개개인의 발전과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화려한 고층 건물들의 뒤편에는 한 평 남짓 비좁은 쪽방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래를 기대할 수 없어 삶을 놓아버린 사람들의 가슴 아픈 현실도 있습니다.
그래도 살아가려면 누구에게나 한 가닥 희망의 끈이 있어야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과 절망의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 남아있다면 분명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시편 본문은 궁극적인 희망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편 113편은 “할렐 시편”입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 가정에서, 성전에서 이 시편으로 찬송하였습니다.
오늘 시편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두 가지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존귀하신 하나님, 다른 하나는 세상의 연약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요청하며 시작됩니다.
시편 113편 1절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우리가 잘 알 듯이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1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요청이 3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부르는 이 시편은 구원의 감격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자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생명이 있는 동안”, “평생 동안”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온 땅에 해가 뜨지 않는 곳이 없고, 해가 지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온 땅에서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시편 113편 4절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우리는 패배할지 몰라도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고 그 영광이 하늘보다 높으신 하나님께서 패배하실리 없습니다.
이 희망은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월의 자리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연약한 인간의 삶을 살피시고, 개입하시며 선한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오십니다.
시편 113편 5-6절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러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비하가 성육신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탄의 신비를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땅에 내려오심으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시편 113편 7-8절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 궁핍한 자에게 관심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에는 “낮다, 약하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곧 사회적 약자를 뜻합니다.
궁핍한 사람은 억압받거나 학대당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 사람들이 사는 곳이 사람이 살 수 없는 먼지 더미이고 거름 더미입니다.
사람이어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은 인생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지도자들과 동등하게 세우십니다.
다시 말해, 사회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대우받지 못한 사람들의 인생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시편 113편 9절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당시는 여인이 임신하지 못하는 것을 저주받은 것으로 여겼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인들을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가난한고 궁핍한 자를 지도자와 동등하게 세우시듯이 임신하지 못한 여인에게 자녀를 출산하게 하시고 어머니가 되게 하심으로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대받던 사람들이 그저 살아가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인생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할렐루야’로 시편의 찬양을 끝마칩니다.
오늘 시편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라는 수사의문문을 사용합니다.
수사의문문은 질문의 형식을 빌리지만 이미 질문 속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낮고 천한 자를 높고 높으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살피시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추셔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사건이 성육신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구원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삶을 사셨고,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의 주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된 인간을 위해서 영단번의 속죄제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고, 아무리 찬양을 받으셔도 부족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낮추사’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러 ‘스스로 낮추사’ 애굽에 오셨습니다.
‘스스로 낮추사’, 자기 비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궁핍한 사람,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시고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를 살아갈 희망을 열어주시며, 지도자를 세우셔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대림절은 어려운 현실에서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을 앞당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절기입니다.
삶이 외롭고 힘들더라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막막한 현실이 눈앞에 있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미래를 소망하며 오늘도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메시아만이 우리의 진정한 희망입니다.
우리의 삶과 미래를 궁극적 희망이신 주님에게 맡기며, 인간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깨우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손길을 듣고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불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높으신 하나님, 낮고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우리를 세우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두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는 좋으신 주님만이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