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시작이다.
조수현
중국 송나라를 대표하는 성리학자 정이는 인생을 불행으로 이끄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 (소년등과), 권세 있는 부모 형제를 두는 것(석부형제지세), 재능이 뛰어나고 문장력이 탁월한 것 (유고재능문장)이 그것이다. 이 셋의 공통점은 교만함에 빠지기 쉽고, 특권의식에 젖어 오만방자하게 굴다가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임용고시를 삼수한 끝에 교사가 되었다. 어렵게 교사가 된 만큼 교직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특히 수업에 대한 열정과 흥미가 컸다. 신규 시절부터 선배들을 따라 교내 수업공동체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뜻이 맞는 선생님들과 연구회 활동도 지속해서 했다. 업무나 담임교사로 인정받는 것 보다 45분 알차게 수업하고 나왔을 때 느끼는 보람과 성취감이 더 컸다. 15년 차가 넘어가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수업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선생님들과 나누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싶다는 생각에 마침내 수석교사를 꿈꾸게 되었다.
진로를 정한 지 1년 만에 수석교사 시험에 합격했다. 교직 경력 16년 만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신규 수석교사 연수에 갔는데 수석교사 평균연령이 50대 초반이란다. 나는 평균보다 10살 이상 어렸다.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도 누가 내 나이를 물어보면 자랑스럽게 대답했고, 생각보다 젊다는 반응을 즐겼다.
교사로 근무하던 학교에 보직만 바뀌어 수석교사로 발령이 났다. 4년간 근무했던 학교라서 동료교사들과 관계 형성에 큰 어려움이 없다는 점이 유리했지만, 위치가 애매했다. 하늘 같은 부장 교사, 선배 교사였던 분들이 하루아침에 내게 ‘수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낯설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대우해 주지 않으면 속이 상했다. 내내 평교사로만 근무하다가 하루아침에 수석이 되긴 했지만, 학교를 바라보는 안목이 전혀 없으니 부장 교사들과 함께하는 회의에 들어갈 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교무부장이나 기타 부장 업무를 해온 경력이 있어서 학교 돌아가는 생황을 파악하고 관리자를 대하는 태도가 능숙한 동료 수석들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위축되기 일쑤였다.
교장선생님은 40대 초반에 장학사가 되어서 교감도 거치지 않고 10년 만에 바로 교장이 되어 우리 학교에 온 분이었다. 일 처리가 꼼꼼하고 교육청에 아는 사람도 많고 유능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지만. 내 눈에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비록 나는 승진라인은 아니지만 당신 못지않게 유능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있었다. 젊은 교장이라고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항상 무게를 잡는 것, 정신없는 학교 현실도 모르고 교육청에서 하던 방식을 주장하는 것, 농담을 못 받아들이고 꼬투리를 잡는 모습이 아주 불편했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시작하는 조언을 빙자한 비난의 요지는 말과 행동이 경솔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나이 든 수석이면 감히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부장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니 저런 말을 하지! 라며 이를 갈았다.
그럴수록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수업도 진짜 열심히 신경을 써서 더 잘하고, 편하게 학교생활 한다는 말 듣지 않으려고 온갖 연수와 모임을 만들어 운영했다. 수업이 없는 공간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죄책감이 들어서 견딜 수 없었다. 바빠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바쁜 모습,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어떤 것이라도 일을 만들어서 바쁜 척, 하는척하기 급급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주말이고 주중이고 가릴 것 없이 나를 소진해 나갔다.
그렇게 1년을 살았더니 마음에 허탈함만 남았다. 수업이 좋아서 동료 교사들과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 이 길을 선택했는데, 지나온 1년을 돌아보니 보람보다는 상처가 가득했다. 교사로 살아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수석교사로 살아가야 하는데, 수석의 삶이 이렇다면 얼마나 불행할까? 좋아하는 일을 하며 평안한 마음으로 가족에게 더 신경 쓰려고 이 일을 선택한 것인데 이게 뭔가? 싶기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번 아웃이 올 것 같아 무서웠다. 멈추고 잠시 숨고르기를 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마침 딸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게 되었다. 수석이 무슨 육아휴직이냐는 뒷말도 있었지만, 수석도 교사니까 당당하게 교사의 권리를 찾겠다고 큰소리쳤다.
학교와 거리두기를 하니 학교에서 아등바등했던 나 자신이 보였다. 그때 왜 교장선생님의 말을 이렇게도 고깝게 들었을까? 나를 대우해 주지 않는 동료를 속으로 미워했을까? 인정받지 못해서,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을까?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오만방자하게 굴지 않았는가?. 이런 미숙함을 참고 견뎌준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했고, 또 부족한 나를 계속 격려하고 지지해 준 동료들에게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복직을 한 달 앞두고 명예롭게 정년퇴임을 맞이하시는 선배 수석님이 주최하신 연수를 듣게 되었다. 연수 끝에 수석님께서 ‘남들이 나를 수석이라고 부르든 선생님, 부장님이라고 부르든 신경 쓰지 않는다. 잘 한다, 못한다는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내 할 일을 성실히 한다. 먼저 다가가고 베풀고 나눈다.’라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하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저런 마음으로 살아오셨기에 주변에 수석님을 존경하는 후배들이 많고, 퇴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고, 정년까지 하실 수 있었구나! 나도 저런 마음이 있어야 오래 활동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나는 지난주에 삼 일간 신 학년 준비기간이라 새 학교에 출근을 했다. 그동안 25학급 넘는 큰 규모 학교에서만 근무했는데 11학급이라니 저절로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가족 같은 분위기로 새로 전입한 사람들을 세심하게 챙기는 선생님들의 배려에 마음이 활짝 열린다. 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조금 더 나은 교사가 될 것 같았다. 어느덧 나도 3년 차 수석에 진입했다. 그토록 소원하던 40대 중반이 되었다. 이제 다시 교단에 서며 수석님을 비롯한 동료 교사들에게 조금은 성숙한 모습으로 이렇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육아휴직 잘 마치고 수석교사 조수현 1년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우리 학교 이름을 세게 발음하면 ‘찐’과 ‘짬’이라는 말이 되더라고요. 선생님이 가진 ‘짬’을 마음껏 발휘하실 수 있도록 ‘찐’으로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