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16:32]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념물을 간직하게 하거나, 혹은 기념 의식을 준수토록 명령하셨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기념물과 기념 의식을 보고 지킬 때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항상 기억케 하기 위함이다. (2) 당대 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게까지도 같은 은혜를 체험시켜 그들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 6절부터 시작된 동일한 주제가 점차 발전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주실 능력이 있는데 이는 착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의미는 간단하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중요한 주제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복주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복을 주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
이것은 많은 선행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는 필연적인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불행에 처한 형제들을 위하여 구제금을 내는 것은 선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선행은 그가 그토록 반대하는 바 율법의 요구에 복종하여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율법주의에 대한 반대와 모순된다고 볼 수 있는가 ?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에게 있어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단 율법주의와 다른 것은 선한 행위를 하되 의롭게 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 결과로 한다는 것이다. 셋째, '넉넉하여'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타르케이안'은 스토아 철학의 견유학파에서 '자족', 또는 '충족'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자족' 또는 '충족'의 스토아적 개념은 인간 자신의 내재적 잠재력 안에서 완전히 만족하는 존재, 즉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만으로서 완전한, 독립적인 인격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스토아적인 '넉넉함'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적 '넉넉함'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 은혜의 결과이다. 바울은 이 스토아적 단어를 사용하되 스토아적 개념이 아닌 기독교적 의미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