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7. 주일예배설교
사무엘상 3장 1~21절
말씀을 더/잘 듣는 2024년
■ 새해를 어떤 느낌으로 맞이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자연스럽게 맞이하셨나요? 아니면 벅차게 맞이하셨나요? 아니면 어느새 새해? 이렇게 새해는 시작됐고, 오늘이 7일째 되는 새해입니다. 아직은 새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죠? 오늘은 새해를 맞으며 우리 교회 나름의 필요한 각오/다짐을 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에 우리 교회는 어떤 필요가 있을까요?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필요할까요? 물론 이 질문은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질문은 아닙니다. 수와 양에 관한 질문도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공동체이지 경제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질을 터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의 필요를 인정하지만, 우리는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공동체의 질문과 해답은 언제나 영적이어야 합니다.
설명을 이해하셨다면, 앞서 했던 질문을 반복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필요가 있을까요?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혹시 그동안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 말씀을 주실 때 분명히 깨달았기에 재론하지 않고 본문의 메시지를 나누겠습니다.
■ 본문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사무엘이 어린 신학생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그의 부모, 특히 그의 어머니 한나가 서러움 끝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한나는 사무엘을 주의 종으로 바치기로 했고, 약속대로 사무엘이 젖을 뗀 3~7살 즈음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에게 맡겼습니다.
이렇게 엘리에 의해 양육되던 어느 날, 사무엘은 잠을 자던 중에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인 줄 몰랐습니다. 자신의 선생인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소리로 알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였기 때문이었고, 아직 하나님에 대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때의 사무엘의 나이가 12살이었고, 본문 7절에 의하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였습니다.
성경이 설명하는 대로, 사무엘이 신학생이었긴 하지만, 12살의 아이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았겠고, 경험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소리를 스승님의 소리로 들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를 돕자고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전하게 하신 이유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강조점은 ‘말씀을 <잘> 듣는 것’과 ‘말씀을 <더> 듣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1. 하나님은 사무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말씀을 잘 듣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순종의 의미 이전에 ‘분별’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지, 사람의 말인지 잘 분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들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잠결에 듣기도 했고, 나이도 어렸고, 하나님 경험도 적었으니 그의 부족함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사실입니다. 4절과 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이러한 일이 이후 두 차례나 더 있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세 번째로 엘리에게 왔을 때, 하나님 경험이 많은 엘리는 눈치를 챘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 아이를 부르시는구나!’ 8절과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역시 영적 경험이 많은 엘리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드디어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야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의 깊은 단계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5절부터 19절을 보면, 밤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무엘이 처음에는 너무 두려워 그 말씀을 엘리 제사장에게 다 전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강력한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다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리가 여호와의 선하심으로 사무엘을 축복하였습니다.
이후 사무엘은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절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이것은 사무엘이 ‘말씀을 잘 <분별>하였다는 것’과 ‘말씀을 잘 <순종>하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순종이 바르게 되기 위해서는 엉뚱한 것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엉뚱한 것을 선택하면, 이단으로 가고, 세상으로 가는 것이기에 결국은 멸망입니다. 이를 엘리 제사장의 집안이 망하는 것을 실제의 예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바른 분별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2. 그런데 이를 위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더 듣기>입니다. 바른 분별을 통한 바른 순종에는 훈련과 습관이 필요한데, 그것은 <말씀을 더 듣기>를 통해서입니다.
인용이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들을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능력이 커지고 분명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더 듣기’에 필요한 것은 이것을 훈련해야 하고, 습관이 돼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훈련과 습관을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글자 그대로, ‘더 듣기’를 애써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짧게 읽는 것이 아니라, 종일 묵상하는 것입니다. 소가 먹은 것을 되새김질하듯, 종일 말씀을 되새김질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읽어야 합니다. 읽지도 않고 묵상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읽지 않고 묵상을 하다가는 엉뚱한 이야기를 묵상하게 되고, 그러다 이단으로, 혼란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묵상을 매일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 훈련은 습관이 되고 자연스러운 삶이 됩니다. 이렇게 묵상이 자연스러운 삶이 되면, 바른 분별과 바른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더 듣기 습관을 형성하는 데 있어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습관이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묵상을 형식적 습관에 따라 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즐거움과 기대감이 빠질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물론 읽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는 일이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서 주로 들리지만, 사람을 통해서도,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도, 그리고 자연 만물을 통해서도 들립니다. 심지어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도 들립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민감하게 듣기 위해서는 습관적 묵상이 아닌 거룩한 묵상을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묵상’이란, 말씀을 통해 말씀이 만인과 만사와 만물에서 들려오는 것입니다. 매일 새롭게 주시는 말씀을 기대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 매일같이 신선한 그리고 새로운 만나가 내렸듯, 내 삶에 매일 신선한 그리고 새로운 말씀이 만인과 만사와 만물을 통해 내림을 기대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묵상’입니다.
■ 부끄러워서 좀처럼 꺼내지 않는 말이지만, 오늘이 우리 교회가 시작된 만 23년입니다. 지난 여러 주, 가슴에 묻어두었던 지난 23년간의 족적을 추억해 보았습니다. 사람들, 사건들, 그리고 사연들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질문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했고, 무엇을 안 했나?’ ‘과연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놓쳤나?’ ‘과연 이 모든 것이 무엇 때문이었고, 누구 때문이었나?’
결론은 자명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담임목사가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잘> 듣는 것’과 ‘말씀을 <더> 듣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연결된 모든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기에 저부터 시작해서 우리 모두 ‘말씀을 <잘> 듣는 것’과 ‘말씀을 <더> 듣는 것’에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부터 비전교회의 2024년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길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