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 獨笑
"홀로 웃다,,
조선 정조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丁若鏞.1762~1836)
선생께서 1804년 유배지 강진에서 쓰셨다는 시조 '독소(獨笑)'입니다.
250여 년 전의 사회풍자 내용이지만 지금의 세태를 보는 것 같군요.
♡獨笑
有粟無人食 (유속무인식):
살림이 넉넉하여 양식 많은 집엔 자식이 귀하고
多男必患飢 (다남필환기):
자식이 많은 집엔 가난하여 굶주림이 있다
達官必憃愚 (달관필창우):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才者無所施 (재자무소시):
재주 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 없다.
家室少完福 (가실소완복):
집안에 완전한 복(福)을 갖춘 집 드물고
至道常陵遲 (지도상능지):
지극한 도(道)는 항상 쇠퇴하기 마련이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등장 하지만 그러나 하늘은 조선이 행복해 지는 것을 원치 안했는지
개혁의 중요한 시기에 정조(正祖) 를 하늘로 불러 올렸다.
따라서 이제 막 날개를 달아 일생의 포부를 조선의 개혁에 펼치려던 정약용 선생의 날개도 꺾여
전남강진으로 18년 유배를 간다.
개인적인 역사관이지만
오늘날 허리가 잘린 반신불수의 한반도의 불행은
*개혁의 기치를 내건 인조의 세자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1645년)의 죽음과
*정조의 일찍 죽음
*고종의 무능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개혁 개방의 기회를 놓쳐 열강(列强)의 먹잇감이 된것이다.
그리고 남북분단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국론분열(國論分裂)”이다.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은 명치왕(明治王) 때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의 막번체제(幕藩體制)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王政復古) 를 이룩한 국가변혁이다.
결국 막번체제(幕藩體制)가 양보를 하고 명치유신(明治維新) 이 성공하여
오늘날 일본은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
일본의 명치유신이 1868년부터 1880년대에 마무리 되었으니까
정조(正祖) (1752~1800),
다산(1762~1836)의 생(生)이 끝날 때가 일본의 명치유신과 비슷한 시기다.
일본은 선진국으로 시작하는 때에
조선은 안동김씨 대원군 민비등의 권력다툼으로 패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산선생이 강진 유배 중에 쓴 책이 1000여권,
그중에서 “경세유표(經世遺表)”라는 책은 참고자료에서 기존 제도들의 모순에 대한
뼈아픈 통찰과 지적을 남기며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도록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는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
목표를 두자는 내용의 국정개혁의 중요한 책이다
. 일본은 선진국의 깃발을 달고 대륙을 넘볼 때에
조선은 권력 다툼으로 다산을 강진으로 귀양 보내 “앉은뱅이”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람은 큰 슬픔을 당하면 슬피 운다
울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더 큰 슬픔을 당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허허 혼자 웃는다.
다산초당(茶山艸堂)은 단순히 강진만 바다가 넓게 펴진 아름다운 관광 유적지라 생각하면 안된다.
한 인생의 포부를 짓밟힌 한맺힌 곳이다.
그렇다고
“구천(句踐)이 오(吳)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와신상담
(臥薪嘗膽)” 을 할 수 있는 다산초당 (茶山艸堂)도 아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향인 경기도 광주(廣州) 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여기에 다산의생가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 이라 했다.
다산 선생이 강진 귀양이 풀리고 바로 고향으로 가서 “여유당 (與猶堂)” 이라 당호를 붙이고
돌아가실 때까지 “숨도 크게 안 쉬고” 살았다고 한다
“여유당(與猶堂)” 은 노자(老子)도덕경의 한 구절로
마치 코끼리가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산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시대의 위인 (偉人)이 갔다.
아직도 당파의 싸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 세상이 미칠 지경이 아니랴 허허허~
언제나 정신 차리려나 !
犬糞食衛 (견분식위 ) 이나 먹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국민들은 보고있다.
제발 더 이상 국민 팔지 말라.
오늘도 허! 허! 허! 웃어야 하나보다. 국민은 안다.
< 받은 메일 옮김 > 編輯 : 智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