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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생애(生涯)
율곡의 생애는 크게 4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제1기인 입지기(立志期 :1세부터 28세까지)는 선생이 시류와 [도학(道學)]사이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다가 어머니 사임당과의 사별을 기점으로 마침내 홀로서기를 하고 금강산에서 하산한 후 삶의 큰 뜻을 세운 시기이며,
제2기인 출사기(出仕期 : 29세부터 40세까지)는 호조좌랑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탁월한 시사의 진단과 처방으로 선조임금의 총애를 받던 시기이며,
제3기인 은거(隱居)와 후진양성기(後進養成期 : 41세부터 45세까지)는 해주 석담에 은거하여 격몽요결, 경연일기 등의 집필활동과 사계 김장생 등 후진양성에 몰두하던 시기이며,
제4기인 재출사기(再出仕期 : 46세부터 49세까지)는 다시 정계로 돌아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코자 10만 양병을 주장하였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위 사람들에게 넌지시 가르쳐주는 등 그 동안의 경륜으로 민족과 나라를 위해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시기이다.
1. 가정환경(家庭環境)
율곡의 성(姓)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珥), 자(字)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이씨(李氏)로서, 아버지는 원수(元秀),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아버지는 이 원수(李元秀)공은 수운판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은 시, 서, 화 삼절(三絶)로 이름난 여인으로 기묘 명현 평산 신명화와 용인 이씨 사이의 둘째 딸이다.
율곡은 7남매 중 다섯째(위로 형 2, 누나 2)로 외가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6세 때 서울 수진방(壽鎭坊: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의 아버지 본가로 올라와 10여년을 살다가 16세 되던 해 봄에 다시 삼청동(三淸洞)으로 이사하여 생활하게 된다.
22세 되던 해 9월 다섯 살이 아래인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따님과 결혼했다. 그런데 율곡은 불행히도 정처인 노씨(盧氏) 부인에게서는 손이 없었고, 두 측실(側室)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경림(景臨)으로 율곡의 나이 39세 때 낳았고, 둘째 아들은 경정(景鼎)으로 율곡이 44세 때 낳았다.
율곡에게 있어서 주로 생활의 근거지가 된 곳은 외가가 있는 강릉 [오죽헌], 처가가 있는 해주 석담, 그리고 친가가 있는 파주 율곡리였다. 율곡의 가정환경은 16세 이전까지 사임당의 밑에서 생활하던 시기와 40세 이후 해주시절 몇 년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좋은 편에 속하는 가정환경은 아니었다.
2. 학문수업(學問受業)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상 높이 이름을 떨친 이들 가운데는 어려서부터 보통사람과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을 흔히 본다. 율곡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출생에 얽힌 일화에서부터 특이한 점이 많이 눈에 띈다.
어려서 3세 때 그 외조모 이씨가 石榴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고 묻자,
'은행은 껍질속에 덩어리 푸른 구슬을 머금었고, 석류는 껍질안에 부스러진 붉은 구슬을 싸고 있네.(銀杏殼含團碧玉 石榴皮과碎紅珠)'
라는 고시중의 '石榴皮과碎紅珠' 一句를 들어 답하였다고 하니, 그의 天賦的인 총명이 얼마나 출중하였는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율곡의 학문적 천재성을 말해 주는 또 하나의 좋은 사례는 4세 때 「史略」을 읽다가 시골 훈장이 잘못 떼어 읽는 句讀을 지적한 일이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러하다.
"선생이「史略」 첫 권에 있는 '齊威王初不治諸侯皆來伐'이란 구절을 가르치는데, '제나라 위왕이 처음에 제후들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모두 와서 쳤다'고 齊威王不諸侯에서 구절을 떼었다. 율곡은 선생이 하는대로 따라 읽지 아니하고 '제나라 위왕이 처음에 정치를 잘 하지 못하자 제후들이 모두 와서 쳤다'고 齊威王初不治에서 구두를 떼어 새겨야 옳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율곡은 이처럼 天賦的으로 지혜로운 자질과 착한 성품을 아울러 갖추고 태어나 후일 道學者로서 經世家로서 대성할 기틀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던 데다가 또 가정적으로는 여성으로서 갖추어야할 婦德은 물론,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어느 학문 대가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는 사임당을 어머니로 모시고 있었다.
따라서 율곡의 소년시절 학문수업은 외부로 나가서 수학을 하는 기회보다는 주로 어머니 사임당의 밑에서 訓導를 받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7세에는 벌써 文理가 통하여 四書를 비롯한 여러 經典들을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어떤 한 스승의 規範的인 생활 밑에서 規則的으로 엄격한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비교적 구속이 없는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家學으로 학문을 닦아 나갔던 율곡은, 그 어머니 사임당이 작고하기 이전 16세 봄까지 儒家書는 물론 諸子百家書를 두루 博覽하였을 것이고, 그 총명성으로 보아 특히 老莊思想이나 불교사상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선비가 드러내 놓고 불교를 연구한다는 것은 실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 율곡의 가슴속에 불교가 학문적 관심사로 대두되어 있었던 것을 말해주는 내용이 후일 율곡의 불교에 대한 회고담속에 자주 보인다.
그런데 율곡의 이러한 불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어머니 사임당의 急逝로 인해 入山을 결행하는 勇斷으로 이어진 것이다.
율곡은 이 입산의 기회를 통하여 비록 1년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후일 宇宙觀 人生觀 등의 형성에 있어서 많은 새로운 시야가 정립되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본다. 바로 儒敎的지식에 바탕한 불교적 소양은 그의 학문적 세계의 폭과 깊이를 그만큼 증진시키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체험을 통해서 불교가 인생과 학문의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난 율곡은, 다시 俗家로 내려와 自警文을 지어 聖人으로 목표를 세우고 眞儒가 되기 위해 정진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율곡은 23세 되던 해 봄 자신보다 35년이 연상으로 당시 58세의 老大家였던 이퇴계선생을 禮安의 兎溪로 찾아가 뵙는다. 비록 머문 기간은 2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것이 율곡에게 있어 당시 儒林의 宗匠과 최초로 갖는 대좌였던 만큼 율곡은 여기서 평소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히기도 하고 또 의문점을 질의도 하며 상당히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집에 돌아와서도 다시 서신을 통하여 儒學工夫의 本領이라 할 수 있는 主一無適의 敬工夫나 格物·窮理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往復問辨한 내용이 수차에 달한다.
후일 율곡은 靜菴의 經世와 퇴계의 道學을 자기 一身에 折衷하여 集大成 하려고 노력하므로서 율곡의 사상체계 가운데 내포된 퇴계의 학적 요소를 부인할 수 없거니와, 특히 이때 불교에서 발길을 돌려 정신을 다시 孔孟·程朱의 學으로 정비하여 一路邁進하는데 있어서 퇴계의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율곡의 학문세계를 다듬어 나가는데 있어서, 宋龜峰·成牛溪등과의 交遊를 통한 간접적인 영향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율곡의 학문수업은 어떤 일정한 師承을 경유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사임당의 훈도에 의해서 그 토대가 마련되고, 금강산의 산사생활을 통하여 밖으로 폭넓은 시야가 형성되고, 이퇴계·송구봉·성우계등과의 문답과 交遊를 통하여 안으로 精徵한 학문의 세계가 정립되었다고 하겠다.
율곡의 성장과정
1. 남다른 총명함
율곡은 천재형의 학자이자 경세가로서 3세에 이미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외할머니 이씨가 석류를 가리키며 "저게 무엇 같게?" 하고 묻자, 어린 율곡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잠시 쳐다보더니 "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어요(石榴皮과碎紅珠)" 라고 옛 시귀절을 읊어 대답하였다.
또 일곱 살 때는 이웃에 사는 진복창이라는 인물의 사람됨이 교활하고 간악해 보여 붓을 들어 글을 지었는데, 그 능숙하고 의표를 찌르는 표현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덟살 때는 고향 파주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가 가을 풍경의 정취를 아름다운 시로 읊었으며, 열살 때는 강릉 경포대를 들러 장문의 경포대부를 지었는데 여기에는 노장사상 등에 대한 그의 폭넓은 이해를 엿볼 수 있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고, 21세에는 한성시에 급제하였으며, 23세에는 별시해에 천도책으로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가기까지 무려 아홉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급제한 분)'이라 불렸다.
2. 따뜻한 인간애
율곡은 또한 감정이 풍부한 소년이었다. 대개 남다른 재주를 지녔거나 공부에 뛰어난 어린이는 우쭐대거나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수도 있지만 율곡은 그렇지 않았다. 동네 아이 누구와도 잘 어울렸고 항상 다정하게 인정을 나눴다.
율곡이 5세 되던 해, 어느 날 큰 비가 와서 앞냇물에 홍수가 졌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내를 건너다 넘어져 위태롭게 되자 그것을 바라보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웃어대는데 율곡은 기둥을 부둥켜 안고 서서 애를 태우다가 그 사람이 위태로움을 모면하게 되자 그제서야 안심하는 기색을 띠었다.
3. 지극한 효성
율곡은 효심이 지극해 어릴 적부터 이웃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 다섯 살 때 어느 날 어머니 사임당이 몹시 아파서 온 집안이 걱정을 하였는데, 집안 사람들 몰래 외조부님 사당 앞에 가 엎드려 어머님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또 열 한 살 때는 아버지 이원수 공이 병환으로 위독하자 율곡은 어린 나이로 자신의 팔을 찔러 피를 내서 아버지에게 약으로 드리기도 했다. 옛글에서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을 때는 피를 마시면 소생한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사당으로 달려가 엎드려 울면서 조상께 기도를 드렸다. 어린 율곡의 이런 정성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아버지의 병환이 곧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16세에 어머니 사임당을 여의게 되자, 무덤옆에 묘막을 짓고 3년동안을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어 올리고 묘소를 돌보았으며, 26세에는 아버지 이원수 공마저 돌아가시자 파주 어머니 묘에 합장한 후 형제가 함께 3년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4. 방황과 홀로서기
율곡은 나이 열 셋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이때부터 문장이 날로 성취되어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그런 명성과 기대에 못지 않게 그의 학문과 현실 사이에서의 고민과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연보에는 어린 나이에 성공의 첫 관문을 통과하고도 오히려 '학문에 전념하고 과거는 좋게 여기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과거(科擧)와 도학(道學)사이의 갈등)
자신을 알아준 문장가 송인(宋寅)에게 보낸 다음 글은 그의 이러한 갈등을 단적으로 일러준다.
또 제가 성현의 글을 읽은 뒤로 대강 향방을 알고서 성리(性理)의 근원에 마음을 가라앉혀 탐색하고자 했으나 뜻이 약하고 재주도 둔한 데다 세상 일이 저해함도 많았습니다.
더구나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고 생활은 궁핍하여 사람의 뜻을 고상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과거공부에 종사한지가 몇 해가 되었습니다.
비록 학문에 전념하더라도 오히려 짐이 무거워 감당하기 어렵고 길이 멀어서 도달하기 어려울까 두려운데 하물며 과거공부까지 하여 두 가지로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러한데도 또 문장의 기예에 종사하면 이것 저것 모두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 한가지 방심(放心)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다른 것까지 생각하겠습니까? <율곡전서 3, 여송이암>
학문에 뜻을 두고도 방법을 몰라 헤매는 율곡에게 세상은 과거를 목표로 문장을 닦아 세상에 영합하라는 노숙한 충고뿐이었다. 그 흐름에 떠밀려 보낸 몇 년이 그에게는 외적 기대와 내적 고뇌가 뒤섞인 우울의 세월이었다.
그러던 중 조운의 일을 맡은 아버지 이원수공을 따라 남도를 돌아오던 그에게 어머니 사임당의 부음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부랴부랴 마포에 배를 대고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어머니 사임당을 임종도 못하고 떠나 보낸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율곡의 정신에 끼친 영향은 당대의 문장으로 떨치던 동년배 최립(崔립)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다.
내가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학문하는 방법을 몰라서 노유선생에게 찾아가서 학문을 구하였습니다. 노숙한 선비들이 권면하는 것은 과거하는 공부에 불과하고 구차하게 세상에 부합되는 것을 힘쓸뿐이었습니다.
어려서 지식이 없어 드디어 그 일에 향해 가서 세속 일에 골몰하고 문장 격식이나 익히기를 5∼6년 동안 하였습니다. 성리에 관한 학문은 다시 강구하는 바가 없고 과거 공부도 익숙하지도 못했습니다.
마침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제의 몸으로 책을 쥐지도 못하고 다만 옛 사람들의 글로 해학에 가까운 것을 취해서 수시로 열람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고, 그 문장에도 전연 접하지 않은 지 3년이 지났습니다.
하루아침에 분발해서 가슴 속을 돌이켜보니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에 가만히 탄식하기를, "사람이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은 배우고 배우지 않은 데 달려 있고, 사람이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은 행하고 행하지 않은데 달려 있다.
내가 본래 거친 자질로 또 학행의 자품도 없으며 지난날의 공부는 과거에만 골몰했을 뿐이다. 과거공부에만 골몰하는 것이 어찌 학행의 부지런함만 같겠는가?
장부가 배우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배운다면 마땅히 옛날 성현들의 성덕한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지 어찌 스스로를 한정하여 물러서겠으며, 마지막 한 삼태기를 덜한 자리에서 공이 허물어지도록 그만두겠는가?"
그렇지만 참으로 스승의 가르침이 없으면 스스로 통달하고 스스로 깨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오히려 스스을 좇아 배우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이겠습니까? <율곡전서 3, 여최립지>
율곡은 3년(만 2년) 동안 정성을 다해 어머니의 영혼을 섬겼다. 음식 만드는 일, 그릇 씻는 일도 반드시 직접 자기 손으로 했다. 그리고 틈이 있으면 책을 읽고 사색에 잠겼다. 그는 이 무렵 새삼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회의에 빠졌다. 사람은 왜 태어나며 왜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깊은 밤 적막한 산골에서 홀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해답을 구해 보았지만 도저히 풀 길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3년이 지나갔다.
열여덟살이 되던 해 가을 어느날 울적한 심회를 풀길이 없어 발길 닿는 대로 거닐던 율곡은 뚝섬 강건너 봉은사에 들렀다. 승방에 들어 스님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그는 경상 위에 놓여 있는 불교서적을 뒤적이게 되었고 그것은 이전에 볼 때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어쩌면 인생 문제를 풀어 줄 해답이 거기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듬해 열아홉 살 때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가 의암이라는 법명으로 불교 수행을 하였다. 머리를 깎고 가사 입은 스님이 되었는지 아니면 선비행색으로 절방에서 불교 공부만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율곡이 인생의 삶과 죽음에 관해 번민한 나머지 금강산 절로 들어간 것은 분명하다.
율곡은 불교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진리를 찾지 못한 채 1년 만에 금강산을 나오게 된다.
"내 가슴속에 산수가 있으니 이곳 금강산에 더 머물 필요가 없네"(胸中有山水, 不必於此留) - 등비로봉 -
오히려 유교에 성인이 되는 길이 있고 남을 위해 일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이라는 것도 삶의 연장일 뿐 달리 터득할 기이한 이치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율곡은 산에서 나오는 길로 강릉 오죽헌에 들러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그리고 '자경문(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을 지어 뜻을 세우고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율곡의 입산수도
율곡의 금강산 입산과 하산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지만 그의 일생에 크다란 전환기였다.
한 사상가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이력, 그 중에서 특히 <전환>을 둘러싼 주변을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율곡의 입산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율곡문집'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색비지설(塞悲之說)로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불교에서 인생의 고뇌를 연구하며 색비(塞悲: 슬픔을 막음)를 위해서이다.
둘째는 양기설(養氣說)로 요산요수(樂山樂水)를 통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위해서이다.
셋째는 성리학(性理學)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외에도 서모와의 가정불화설 등이 있으나 생략하기로 한다.
1. 색비지설(塞悲之說)
사임당은 율곡에게 있어 어머니이자 유일한 스승이었다.
그런 사임당의 뜻하지 않은 돌아가심은 율곡에게 슬픔과 함께 정신적으로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허무함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여묘살이를 마친 율곡은 지칠대로 지친 나머지,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19세 되던 해 3월 금강산으로 들어가 산사(山寺)를 찾게 된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학문을 하되 오로지 내실(內實)에 뜻을 두어 수심양성(收心養性)6)을 근본으로 삼았다.
모부인 상을 당했을 때는 그 망극한 효도의 마음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거의 회성(毁性: 슬픔에 잠겨 몸이 쇠약해짐)의 경지까지 이르렀었다.
우연히 석씨서(釋氏書: 불경(佛經))를 보다가 슬픔을 잊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학(禪學)7)에 물들어 그만 인간의 일을 끊고 한 번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마침내 금강산 놀이를 떠났는데 편지로써 모든 친구에게 작별하였다." <연보>
이처럼 사임당의 돌아가심을 계기로 율곡은 '인생이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등의 인생과 사후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불교쪽으로 기울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양기설(養氣說)
다음으로 양기설(養氣說)에 대해서는 율곡이 금강산으로 들어가며 친구들에게 남긴 글의 내용에 이러한 말이 있다.
"기(氣)란 사람이 다같이 타고나는 것이다.
그것을 잘 기르면 마음에 부림이 되고, 그것을 잘못 기르면 마음이 도리어 기의 부림이 되는 것이다.
이 기가 마음에 부림이 되면 한 몸에 주재하는 것이 있어 성현되는 것도 기약할 수 있지마는, 마음이 기에 부림이 되면 칠정(七情)을 통솔할 수가 없어서 어리석은 미치광이를 면하기 어렵다.
옛 사람 중에 기를 잘 기른 분이 있으니, 맹자(孟子)가 바로 그 분이다. 사람으로서 이치를 궁구하고 천성을 다하려는 데 뜻을 둔 이라면 이를 버리고 어디 가서 무엇을 구할 것인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이 산수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저 물이 흐르고 산이 솟은 그 겉모습만 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 동정의 본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기를 기르는 데 있어 산과 물을 제외하고 어디에서 찾겠는가?" <율곡연보>
즉 율곡의 입산동기는 불교에 귀의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산수 속에서 기를 기르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 불교에 대한 공부 : 선(禪)
마지막으로 불교에 대한 연구 부분을 살펴보면, 율곡은 어릴 적부터 학문하는 자세가 크게 열려 있어서, 불교나 도교와 같은 성리학 이외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성리학의 우주론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고, 성리학의 인성론은 불교사상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기 때문에, 율곡이 자기철학의 대성을 위하여 성리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불교에 대한 연구를 위해 입산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선(禪)은 실질적 체험을 중시하므로 그는 체험을 통해 그 근본에 도달하고자 했을 것이며, 실제 이것을 계기로 하여 그의 이기론은 불교적 특성을 띄게 된다.
불교와 유교의 만남.
율곡 이전에 이 만남을 의미있게 구현한 사람은 오직 주희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주희는 유교적 질서의 부흥이라는 사회윤리적 관심의 절박성으로 인해 불교의 초세간적 인문적 가치를 적극 부정하고 나섰지만, 율곡은 불교와의 만남을 자신의 철학적 이념과 방법 속에 흡수하고 통합하는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풍악산의 작은 암자에 있는 노승에게 시를 지어주다.>
내가 풍악(금강산)에 유람할 때 하루는 혼자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몇리쯤 가니 조그마한 암자가 있는데 노승이 가사(袈裟)를 입고 반듯이 앉아서 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으며 또한 말 한마디도 없었다. 암자 가운데를 두루 살펴보니 다른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부엌에는 밥 지은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다.
내가 묻기를,
“여기서 무얼 하시오?”
노승이 웃으며 대답을 아니하였다. 또 묻기를,
“여기서 무엇으로 요기하고 지내시오?”
노승은 소나무를 가르키며,
“저게 내 양식이오.”
하였다. 나는 그 변명을 시험하고자 묻기를,
“공자와 석가 중 누가 더 성인이오?”
노승이 말하기를,
“그대는 노승을 놀리지 마시오.”
내가 말하기를,
“불교는 오랑캐의 교이니 중국에는 시행할 수 없는 것이지요?”
노승이 말하기를,
“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며 문왕은 서이(西夷) 사람이니 그들도 역시 오랑캐란 말이오?”
내가 말하기를,
“불교의 오묘한 것도 우리 유교를 벗어날 것이 없는데 왜 굳이 유교를 버리고 불법을 구하시오?”
노승이 말하기를,
“유교에도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있소?”
내가 말하기를,
“맹자가 성선(性善)을 말할 때에 반드시 요순을 들어 말하는데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오? 다만 우리 유교에서는 현실에서 실제의 것을 보고 얻을 뿐이오.”
노승은 수긍하지 않고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이요?”
내가 말하기를,
“그것 또한 눈앞에 전개되는 경계지요.”
라고 하니 노승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또 말하기를,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고기가 못 속에서 뛰노는 것이 색인가요, 공인가요?”
노승이 말하기를,
“색도 아니요 공도 아닌 것이 진리의 본체이니, 어찌 그런 시 구절을 가지고 비길 수가 있겠는가?”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름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이면 그것은 벌써 현상경계(現像境界)이겠는데 어떻게 본체라고 하는 것이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유교의 오묘한 곳은 말로써 전할 수 없는 것이고 불교의 진리도 문자의 경지를 넘는 것은 못되오.”
노승이 깜짝 놀라서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속된 선비가 아니구려. 나를 위해 '솔개가 날고 고기가 뛴다’는 구절을 풀어 시를 지어 주시오.”
내가 곧 절구(絶句) 한 수를 써서 주자 노승은 그것을 받아 읽은 뒤에 옷소매 속에 집어넣고 몸을 돌이켜 벽을 향하였다.
나역시 그 골짜기를 나왔으나 어리둥절하여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그 뒤 3일이 지나 다시 가보니, 암자는 그대로 있는데 노승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물고기가 뛰놀고 소리개가 나는 것은
위와 아래위가 같은 자연현상이니,
그것은 색도 아니요 공도 아니로다.
무심히 한번 웃고 이내 몸을 돌아보니,
석양의 숲 속에 홀로 서 있네.
원시
魚躍鳶飛上下同 這般非色亦非空
等閒一笑看身世 獨立斜陽萬木中
윗글에서 주목할 점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율곡은 맹자가 성선을 말할 적마다 요순을 들어 말하는 것은 불교에서 즉심즉불(卽心卽佛)과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교의 개심견성(開心見性)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지혜의 마음을 일깨워 모든 망령된 유혹을 버리고 자기 본연의 천성을 깨달아 성불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유교의 존심양성(存心養性)하여 본성인 이즉선(理卽善)을 그대로 실천하여 깨친다는 의미와 같은데 이러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 요순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 불교에서는 진리의 본체를 말이나 문자로 표현하면 그 본체를 잃고 경계(境界: 인과응보로 각자에게 주어진 지위나 처지)에 떨어지고 현상에 사로잡혀서 그 본체를 드러낼 수 없다고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를 강조한다. 하지만 유교에서도 그와 같은 것이 있다고 율곡은 말한다. 새가 날고 고기가 뛰노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고 자연의 진리이다. 그것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이며 또한 말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 본문의 내용은 확실히 유자(儒者)인 율곡과 불자(佛者)인 노승과의 유불이론의 대화이며, 율곡이 말마다 오유(吾儒)라고 자칭하고 있으며, 또 노승은 율곡을 선비라고 호칭하고 있다. 또 율곡을 비속유(非俗儒: 속된 선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 등을 생각할 때 율곡이 외형상으로 머리 깎고 중이 된 것이 아니며 불교를 연구하는 한 유학자였다고 생각된다.
약 1년간 산중에 머물면서 유명한 선방(禪房)과 이름높은 대사(大師)를 찾아다니며 문답식으로 불도의 진리를 알아보았으나, 마침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교의 큰 교리만 못함을 깨닫고 하산하여 집으로 돌아와 성인(聖人)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에 대하여 흔히들 말하기를 율곡이 불교의 진리가 옳지 않은 것을 알고 다시 유가로 돌아와 유가의 성현을 준칙으로 하여 출사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문제이다.
제자 사계 김장생이 율곡에게 지난날 금강산에 들어갔을 때 머리를 깎았느냐고 묻자, 율곡은 웃으며 대답하되,
"이미 산에 들어가서 외양은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이미 불교에 빠졌다면 외양을 따져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라고 했다.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간 뒤에도 스스로 자기의 호를 의암(義菴)이라고 지었던 것을 보면 불교에 귀의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말대로 외형은 비록 안 바뀌었을망정 한때 불교의 학설에 심취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당시는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시대로서, 불교를 인륜에 반한 이단이라 하여 불교서적을 읽는 것조차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에서 그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하는 사람)으로 매도당하는 때였다.
장래가 촉망되는 유학자가 불교에 입문한다는 것은 출세 길을 스스로 막는 자멸행위나 다름없었으며, 실제로 이 일은 나중에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당시의 사회적 틀 속에서 상대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하지만 율곡의 이러한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입산 수도는 그의 인생의 크다란 전환점이자 성리학을 대성하는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 그 결과 그의 철학이 독창성과 통합성을 갖게 되었다.
율곡이 당시 뭇 사람들의 의심과 비난 속에서 입산하여, 불교를 연구하고 그 좋고 나쁜 점을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철학 정립에 힘을 쏟았던 그의 학문적 개방성과 참된 학문을 위한 용기 있는 태도는 오늘날 우리가 깊이 본받아야할 것이라 생각된다.
출사의 길
율곡은 29세 8월에 대과에 장원급제하면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어 첫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율곡은 남에게 보이는 학문인 과거(科擧)공부를 자기 스스로를 완성하는 도학(道學)공부에 비하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 제도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벼슬길에 나갈 수 없으므로, 수기(修己)뿐만 아니라 치인(治人)도 중시했던 율곡은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본의 아니게 아홉 번이나 과거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벼슬길에 오른 그는 정치 사회에 참여하면서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이상을 실현하기 시작하였다.
31세 5월에 동료들과 더불어 시국의 급선무라 할 '시무삼사(時務三事)'를 임금께 상소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마음을 바로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둘째 어진 이를 등용하여 조정을 맑게 할 것, 셋째 백성을 편안케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할 것 등이었다.
그 해 겨울에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이조좌랑은 인재를 선발하는 자리인데 그 당시는 벼슬길이 대단히 흐려져있는 터라, 율곡은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정신으로 부정과 비리를 제거하고 맑고 공평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임무를 다했다.
33세 가을에는 명나라로 가는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수도까지 멀고 힘든 길을 다녀오며 견문을 넓혔다. 당시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
34세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함)의 명을 받고 '동호문답' 11조를 지어 임금께 올렸는데, 그 요지는 왕도정치를 회복할 수 있는 방책과 포부를 명쾌하게 논술하고 있다.
36세에 율곡은 36세에 청주목사(淸州牧使)에 임명되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토대로 손수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어 그 고을의 자치능력을 길러 주고자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으로 그 자리를 물러나게 되어 계속적인 실시는 어려웠다.
39세 정월에 승정원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그 내용은 첫째 제도 개혁을 이루어 때에 맞는 변법을 하자는 것이고, 둘째는 일곱 가지 무실(無實)을 없애고 실사(實事)에 힘쓰자는 것이고, 셋째는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있는 방책을 말하고 있다.
선조의 비답(批答: 상소에 대한 임금의 하답)에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임금과 백성을 요순 시대처럼 만들겠다는 뜻을 짐작할 수 있다. 훌륭하다. 논술함이여... 옛 사람도 여기에 더할 수 없겠도다. 이런 신하가 있는데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하겠느냐" 하였으니, 그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0월에 황해도 관찰사를 제수받고 부임하였다. 중앙의 관직과 달리 관찰사의 지위는 한 지방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관찰사에 부임한 즉시 상소하여 황해도 민폐를 개혁할 것을 청하였다.
첫째가 서쪽 변두리의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민병)의 사는 괴로움을 알리고, 둘째는 임금께 올리는 진상이 너무 번거롭고 무거워 폐해가 있음을 알렸다. 부임 후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을 교화하며 민폐를 개혁하고 군정을 바로잡으니 백성이 좋아하고 탐관오리가 일제히 겁에 질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고 한다.
40세 9월에는 '성학집요'를 저술하여 선조 임금께 올렸다.
이것은 선조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성인의 학문을 공부하는데 필요한 사서육경을 기본으로 하고, 선유(先儒)의 학설과 역대의 사실을 참고로 하여 학문과 정사의 긴요한 요령을 모은 것이다.
선조는 "이 글은 부제학의 말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이니 매우 절묘한 것이라 심히 다스림에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불민한 사람은 시행하기가 어렵겠다"하여 율곡은 몹시 걱정하였다.
이후 선조의 우유부단으로 자신의 뜻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자 율곡은 해주 석담에 은거하여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율곡이 매번 벼슬을 사양하자 어떤 이가
"물러가려고 청해서 물러감을 얻었으니 무척 유쾌할 것이요마는, 저마다 모두 물러날 뜻을 가지면 누가 나라를 붙들 것이오."
하였다. 이에 율곡은 웃으며 대답하기를,
"만일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낮은 벼슬아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물러날 뜻을 가지기만 한다면 나라의 정세는 저절로 큰 길을 가게 될 것이라. 나라를 유지 못할까 하는 것을 걱정할 것은 없을 것이오."
라고 했으니, 이것으로써 그의 맑은 뜻을 짐작하겠다.
벼슬을 사양하던 율곡은 선조의 계속되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마침내 재출사하여 대사간을 맡게 된다.
이때 영의정 박순은 "율곡이 오랜만에 조정으로 돌아오니 나는 기뻐서 잠이 안 온다"라고 하였다.
46세 겨울에 '경연일기(經筵日記)'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율곡이 벼슬길에 오른 이후 조정에 올린 개인적인 의견 중 요점만을 정리하여 후에 법이 될 만한 것을 기록한 것인데, 1565년 명종 을축년부터 시작하여 1581년 선조 신사년에 이르기까지 17년간의 일을 손수 해서(楷書)로 기록하여 3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47세 정월에 이조판서에 오르자 오래된 폐해를 개혁하였고 7월에는 '인심도심설'을 저술하고 다시 '학교모범' 16조 및 사목(事目: 공적인 일에 관한 규칙)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쓴 것이다.
9월에 '만언소'를 올려 시폐를 극진히 하였고, 10월에는 원접사의 명을 받고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극기복례설'을 지으니 명나라 사신들이 거듭 경탄하였다.
12월에는 병조판서로 임명되어 황해도와 평안도의 민폐를 개혁할 것을 조정에 알렸다.
48세 2월에 '시무 6조계'를 개진하였는데 그 내용은,
첫째 능력있고 어진 이에게 맡길 것, 둘째 군민(軍民)을 기를 것, 셋째 재정(財政)을 풍족히 할 것, 넷째 국방을 든든히 할 것, 다섯째 전마를 준비할 것, 여섯째 교화를 선명히 할 것 등이다.
4월에 다시 상소문을 올려 사회적 폐단을 강하게 진언하고 전에 개혁할 것을 청한 적이 있던 제도 몇 가지를 다시 간청하였다.
그것은 공안(貢案: 공물의 내역을 적은 문서)과 군적(軍籍)을 개정하고, 주현(州縣)을 병합하고, 감사(監司: 관찰사)를 오래 유임시킬 것과 특히 서자손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주고 노비들 중에 재주가 있은 사람은 적절한 대가를 치르고 그 신분을 면제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10만 양병설'도 바로 이 즈음에 주장했던 일이다.
율곡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력의 쇠약함이 심한지라 10년도 가서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가 있을 것이니 10만 병졸을 미리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그들의 조세를 덜어주고 무재(武才)를 훈련시켜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변란이 있으면 10만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여 위급할 때 방비를 삼으소서."
라고 하였다.
이에 유성룡이 반대의견을 말하면서 아뢰기를 "무사할 때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사회적 혼란만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리하혀 율곡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 하여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은 물러나와 유성룡에게,
"속유(俗儒: 식견이나 행실이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야 진실로 이것의 시의 적절함을 알지 못한다해도 공이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라며, 이어 오랫동안 수심에 잠겨있었다.
49세에 율곡은 별세하기 10여일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14일 북방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떠나는 서익에게 병조판서의 경험을 전하기 위해 아들과 조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생 우를 앉혀 놓고 자신의 말을 대서하게 하였다.
이것이 '육조방략'이며 율곡의 죽기 전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 율곡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꿈속에서 말하듯 거듭하여 되뇌인 것은 오직 나라일 뿐이었다.
이와같이 과로로 병이 악화되어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뜨니, 율곡의 나이 49세 선조 17년 정월 16일 새벽의 일이었다. 율곡은 손톱을 깎고 목욕을 마치고 조용히 동쪽으로 머리를 향하여 누워 손발을 가누고 모습을 단정히 한 채 평안히 숨을 거두었다.그런데 대체 무슨 한이 그토록 많았던지 사후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몹시 어지럽고 혼란한 국가의 앞날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율곡의 초연한 죽음
1584년 정월(선조17), 49세 되는 해에 율곡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붕의 기와장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마침 이불을 덮어쓰고 앉아 있던 선생이,
"어찌 이다지도 바람이 맹렬한고?"
하니, 옆에 있던 제자 이유경이,
"우연일 뿐이니 물으실 만한 게 못 됩니다."
고 답하였다. 이에 선생은,
"나는 죽고 사는 것에 동요되는 사람이 아니니, 역시 그저 우연히 물었을 뿐이다."
하였다.
또 병의 증세가 위중하므로 항상 물건에 기대려고 하자 문인이 자신의 몸에 기대기를 청하니, 선생은 이르기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바가 아니니, 그래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하였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인 14일에는 순무어사(巡撫御史) 서익(徐益)이 임금의 명을 받고 북쪽 변방 백성들의 삶을 둘러보고 위로하기 위해 떠나면서, 먼저 병조판서를 지낸 율곡을 찾아와 변방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선생의 건강을 걱정한 가족과 제자들은,
"병이 조금 차도가 있는 중이므로 노동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만나는 것을 사양하시라"
고 당부하니 선생이 이를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내 몸은 단지 나라를 위한 것일 뿐이다.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진다 하더라도 역시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는 나라의 대사이니 이 기회를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다."
고 하면서 일어나 앉아서 여섯 조목의 방략(六條方略)을 불러 아우 우에게 받아쓰도록 하였다.
다 불러주고 나니, 기운이 극도로 쇠약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그 이튿날 작고하게 되었다.
선생은 16일 새벽에 부축을 받고 일어나서 손톱과 발톱을 자르게 하고 의건(衣巾)을 단정히 한 채, 서울 대사동(현 인사동)에서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쳤다.
대체 무슨 한이 크토록 많았던지 선생은 운명한 후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지 못하였다고 하며, 선생이 운명하기 전날 밤에는 부인 곡산 노씨가 꿈에 흑룡이 침방으로부터 나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율곡의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는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도록 애통해 하였으며 수라상에 고기를 올리지 못하게 하고,
"어진 재상이 서거하니 내 마음이 극히 아프다"
면서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을 것을 명하였다.
또한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되,
"나라를 위해 몸이 여위도록 정성을 다해 애쓴 경이야 무엇이 슬프리오? 큰 물 가운데서 노를 잃었으니 나야말로 애통하도다."
라고 비통함을 전했다.
또 각지의 선비들은 모두 친척상을 당한 듯 슬프게 울지 않는 이가 없었고 백성들도 눈물을 흘리며 애도해 마지 않았다.
동향의 친구 우계 성혼은 율곡의 도학에 대하여,
"진리의 본원을 꿰뚫었으며 사물의 본체를 통달한 그 경지는 산과 물의 기상을 얻었으니, 실로 율곡은 다시 없는 큰 인물이었다."
고 평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대제학을 지낸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율곡시장(栗谷諡狀)>에 '율곡이 운명한 뒤에 집에는 한 섬 곡식의 저축도 없고, 옷을 빌어다가 염을 하였다. 서울에 집이 없어 처자들이 의지할 데가 없이 옮겨 살며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다. 친우 및 선비들이 쌀고 포목을 내어 서울에 집 한 채를 사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율곡이 평생을 얼마나 청빈한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1. 이기론(理氣論)
가) 이기(理氣)의 개념
율곡의 철학사상을 살피는 데 있어서 먼저 그의 이기(理氣)에 대한 개념부터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주자와 마찬가지로 이기이원(理氣二元)의 존재관을 전제하였다. 즉,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이(理)와 기(氣)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理)란 어떤 것이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치요, 본래성이며, 기(氣)란 어떤 것의 이치가 실현될 수 있는 재료이자 실현될 힘이다.
이처럼 이(理)과 기(氣)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이 세계 만사만물이 있기 위해서는 이 양자가 반드시 하나로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이(理)와 기(氣)는 그 존재적 역할과 기능에 있어 대등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그는 '이(理)는 형이상자(形而上者)요, 기(氣)는 형이하자(形而下者)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개념적 구별이요, 가치적 구별이다.
"이(理)는 태극(太極)이요, 기(氣)는 음양(陰陽)이다."
"형이상(形而上)은 자연의 이(理)이고 형이하(形而下)는 자연의 기(氣)이다."
"유형 유위(有形 有爲)하여 동정(動靜)이 있는 것은 기(氣)이고, 무형 무위(無形 無爲)하여 동정(動靜)에 존재하는 것은 이(理)이다."
율곡은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은 동시적(同時的)임을 주장한다.
즉, 태극과 음양은 선후(先後), 주종(主從)관계가 아니라 그 소임(所任)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
또 이(理)는 무형 무위(無形 無爲)의 형이상(形而上)적 존재(存在)로서 순선(純善)한 것이며, 기(氣)는 유형 유위(有形 有爲)의 형이하(形而下)적 실재(實在)로서 청탁수박(淸濁粹駁)이 같지 않아 선악(善惡)이 공존하는 세계라고 보았다.
이는 우주와 인생에 대해 두루 적용이 가능한 이기(理氣)의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이기(理氣)의 관계
율곡은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요소를 갖고 있는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그것을 그는 이기지묘(理氣之妙), 기발이승(氣發理乘), 이통기국(理通氣局)이란 말로 표현한다.
(1) 이기지묘(理氣之妙)
율곡 이전에 이언적, 퇴계 이황은 이(理)를 중시하는 관점에 있었고, 또 화담 서경덕은 기(氣)를 중시하는 관점에 있었다.
이에 대해 율곡은 이(理)와 기(氣)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묘합(妙合)의 논리를 주장한다.
그것이 이른바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불리는 것으로 율곡 이기설의 중심사상이다.
그는 "천하에 이(理) 밖의 기(氣)가 있겠는가? 이기지묘는 보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理)와 기(氣)는 두 가지 물건(二物)이 아니요, 또한 한 가지 물건(一物)도 아니다.
한 가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둘이(一而二)요, 두가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둘이면서 하나(二而一)이다.
"이(理)와 기(氣)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理)와 기(氣)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어서 원래 떨어지지 않은 까닭에 두 가지 물건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자는 말하기를 '그릇은 또한 도이고, 도는 또한 그릇이다.(器亦道, 道亦器)'라고 하였다.
또한 양자는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실제로는 섞이지 않아서 한 가지 물건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理自理, 氣自氣)이기 때문에 서로 섞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두 말을 합하여 생각하면 이기지묘(理氣之妙)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에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떠나지 않는(不相離) 관계와 서로 섞이지 않는(不相離) 관계를 지속한다. 이것이 이른바 이기의 묘합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논리 체계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인 까닭에 율곡이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이름한 것이다.
중국유학에서는 기(氣)를 이(理)의 하위개념으로 보아 종속시킨 반면에, 율곡은 이(理)와 기(氣)를 똑같이 대등하게 두어서, 이 둘은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지도 않고 서로 분리되지도 않도록 한다. 그것을 묘합(妙合)이라 한다.
합이라 하지 않고 묘합(妙合)이라 하는 것은, 그냥 합이라 하면 분리됨이 없이 붙어있는 관계, 그러니까 다(多)가 없는 하나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묘합(妙合)이라고 말하는 원인은 구별(distinction)은 되어도 분리(separation)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부간에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구별은 되어야 한다. 만약 여자가 남자같고 남자가 여자같으면 부부생활이 재미가 없다. 부부유별(夫婦有別)에서 말하듯 여자는 여자답고 남자는 남자다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자이고 나는 남자이니까 우리 분리(Seperation)하자고 하면 그것은 이혼이 된다.
따라서 구별은 되어져도 분리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의미는 이(理)와 기(氣)의 오묘한 관계성 뿐 아니라,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합해 보기도 하고 나누어 보기도 하는 양쪽의 관점이 아울러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즉, 종합적 사유와 분석적 사유를 아울러 할 수 있는 입체적 사유라 할 것이다.
(2) 기발이승(氣發理乘)
그러면 율곡은 이(理)와 기(氣)가 묘합(妙合)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각기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는가?
"대저 발(發)하는 것은 기(氣)요, 발(發)하는 까닭이 이(理)이다. 기(氣)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발(發)할 까닭이 없다."
그는 이기(理氣)의 기능에 대해, 기는 발동(發動)하는 기능을 갖고 있고, 이는 기(氣)가 발동하는 원인 내지 원리로서 존재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고 간단 명료하게 규정하여, 그 역할과 기능이 구별되는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이(理)는 작위(作爲)가 없고 기(氣)는 작위(作爲)가 있기 때문에 기(氣)는 발동(發動)하고 이(理)는 타는 것이다."
율곡은 자연세계나 인간세계를 막론하고 일체 존재의 존재구조를 기발이승(氣發理乘)으로 일관되게 설명한다.
기가 발(發)함에 이가 탄다고 할 때 기발(氣發)과 이승(理乘)은 동시적인 것이다. 또 공간적으로도 이합(離合)이 없는 것이다.
본래부터 하나로 있는 묘합(妙合) 구조를 기발이승(氣發理乘)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승(理乘)의 승(乘)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그의 동정(動靜)을 주재하는 이(理)의 근저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기발이승은 존재 자체의 표현으로 이기지묘의 다른 표현이며 이통기국의 다른 표현이다.
(3) 이통기국(理通氣局)
율곡은 이(理)의 차원에서는 하나인데, 기(氣)의 세계에서는 나누어지게 되는 것은 이기(理氣)의 속성(屬性)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理)는 형체(形體)가 없고 기(氣)는 형체(形體)가 있기 때문에 이는 공통되고 기는 국한(局限)된다."
즉, 이(理)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보편성을 가졌다는 말이고, 기(氣)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국한성을 가졌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理)는 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고, 기(氣)는 언제 어디서든지 한계지워지고 국한(局限)된다는 의미이다.
그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은 이일분수(理一分殊), 기일분수(氣一分殊)의 사고를 거쳐 창출된 이론이다.
이일분수(理一分殊)는 이기지묘(理氣之妙)하에서 이(理)를 중심으로 본체와 현상을 아울러 본 것이라면, 기일분수(氣一分殊)는 이기지묘(理氣之妙)하에서 기(氣)를 중심으로 본체와 현상을 아울러 본 것이다.
따라서 이기(理氣) 중 어느 한 면으로 치우쳐보는 관점을 지양하고, 이기지묘(理氣之妙)의 관점에서 이일(理一)과 기일(氣一), 이분수(理分殊)와 기분수(氣分殊)를 아울러 본 것이 이통기국(理通氣局)이다.
율곡은 이통기국을 설명하기를,
"인생(人生)이 물성(物性)이 아닌 것, 이것이 기국(氣局)이고, 사람의 이(理)가 곧 물(物)의 이(理)인 것, 이것이 이통(理通)이다"
라고 한다.
또한 모나고 둥근 그릇이 같지 아니하나 그릇 가운데의 물은 마찬가지이며, 크고 작은 병이 같지 아니하나 병 속의 공기는 마찬가지라 비유한다.
따라서 기(氣)가 만가지로 다른데도 근본(根本)이 하나일 수 있는 것은 이(理)의 통함(通) 때문이며, 이(理)가 하나인데도 만가지로 다를 수 있는 것은 기(氣)의 국한됨(局)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율곡의 이통기국은 이무형(理無形), 기유형(氣有形)의 개념을 통해 이기지묘(理氣之妙)의 관계성 속에서 이(理)의 체용(體用)과 기(氣)의 체용(體用)을 유기적으로 통찰한 표현이다.
요컨대, 율곡의 이통기국은 "이(理)'만도 아니고 '기(氣)'만도 아니며, '이(理)'의 통함(通)과 기(氣)의 국한됨(局)이 하나로 묘융된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세계, 이기지묘(理氣之妙)의 가치를 표현한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통기국이란, 이는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통하여 어디에서나 관통하는 것이지만(理通), 기는 바름과 치우침, 맑고 흐림의 차별상을 이루어 구애됨이 많다(氣局)는 것이다.
즉 율곡은 만물의 보편성과 차별성을 이통기국의 개념으로 정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통기국의 논리는 불교 화엄철학의 논리를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2. 심성론(心性論)
율곡은 인간의 존재와 본질문제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점에서 심성론을 전개하였다.
그의 심성론을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가)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성리학에 있어서 성(性)은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구별하여 설명된다.
율곡이 인간의 성(性)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理)와 성(性)의 개념 구별에서부터 시작된다.
율곡에 의하면 성(性)은 이기(理氣)의 합(合)이다.
"대개 이(理)가 기(氣) 가운데 있은 연후에 '성(性)'이 된다. 만약 형질 가운데 있지 않으면 마땅히 이(理)라 해야지 성(性)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다. 다만 형질 가운데 나아가 단지 그 이(理)만을 가리켜서 말한다면 본연지성(本然之性)인 것이다. 본연지성은 기(氣)와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곡은 성(性)을 이기지합(理氣之合) 내지 이기지묘(理氣之妙)로 보기 때문에 형질 중에서 성(性)을 파악하는 관점에 선다. 따라서,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결코 두 개의 성(性)이 아니라, 기질상(氣質上)에 나아가 단지 그 이(理)만을 가리켜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하고 이(理)와 기질(氣質)이 묘합(妙合)된 것을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기질(氣質)을 겸해 말할 수 없으나, 기질지성(氣質之性)은 오히려 본연지성(本然之性)을 겸할 수 있다."
즉 율곡의 견해는 인간의 성(性)에 본연의 성(性)과 기질의 성(性), 두 개의 성(性)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성(性)은 단지 하나 일 뿐인데, 이(理)만을 가리켜 말하느냐 아니면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말하느냐에 따라서 그 표현상의 명칭을 달라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기질지성(氣質之性) 중심의 성론(性論)은 인간을 천지지리(天地之理)와 천지지기(天地之氣)의 묘합체로 이해하는 그의 입장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이것은 현실적인 인간을 중심으로 성(性)을 말하는 것이지 관념적인 성(性)이나 개념적인 성(性)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중국 성리학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가 한국 성리학에서는 중요한 논제로 대두되었다.
사단(四端)은 인간의 성정(性情)을 측은(惻隱) · 수오(羞惡) · 사양(辭讓) · 시비(是非) 등 네가지 단서(端緖)로 분류해 말한 것으로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편에서 처음 보이며, 칠정(七情)은 인간의 감정을 희(喜) · 노(怒) · 애(哀) · 구(懼) · 애(愛) · 오(惡) · 욕(欲)의 일곱가지 종류로 나누어 말한 것으로 「예기(禮記)」예운(禮運)편에 처음 나온다.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였으며, 사단과 칠정이 동일개념이냐 별개의 개념이냐 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었다.
율곡은 퇴계(退溪)와 고봉(高峰: 기대승)의 사단논변(四端論辯)에 대해 고봉(高峰)의 견해에 동의한다.
율곡에 의하면 사단칠정(四端七情)의 구조를 기발이승(氣發理乘)으로 본다.
"사단(四端)은 칠정(七情)의 선(善)한 일부분이고, 칠정(七情)은 사단(四端)을 종합한 것이다."
"칠정(七情)이외에 다른 정(情)이 없으며, 칠정(七情) 가운데서 인욕(人欲)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천리에서 나온 것이 사단(四端)이다."
율곡은 퇴계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비판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퇴계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두 가지로 보는데 율곡은 사단(四端)을 칠정(七情) 속에 포함시켜 본다.
둘째, 퇴계는 사단(四端)의 구조를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칠정(七情)의 구조를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고 하여 이중의 존재구조로서 설명하는데, 율곡은 사단, 칠정을 모두 '기발이승(氣發理乘)'의 존재구조로 본다.
셋째, 퇴계는 사단(四端)을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라고 표현하는데 율곡은 이발(理發)을 부정하고, 또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의 표현형식이 시간적 이선기후(理先氣後)를 면치 못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넷째, 퇴계는 사단(四端)을 주리(主理), 칠정(七情)을 주기(主氣)라고 말한다. 하지만 율곡은 사단을 주리(主理)라고 하는 것은 옳지만 칠정(七情)을 주기(主氣)라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율곡은 사단이 칠정이외에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고 칠정가운데 포용되는 칠정(七情) 중의 선(善)한 부분으로 생각하였다.
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인간의 마음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누어 이야기한 내용은 「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편에 처음 보이는데, 여기에 대한 논의도 후일 성리학계의 주요한 논란거리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율곡의 견해는 인심과 도심에 있어 두 가지 이름(二名)은 있을 수 있지만, 두 가지 마음(二心)은 있을 수 없다는 유일심적(惟一心的) 입장이었다.
율곡에 의하면,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비록 두 가지 이름이지만 그 근원은 단지 하나의 마음일 뿐이다. 그것이 발함에 있어 이의(理義: 의리)를 위한 것과, 식색(食色: 욕망)을 위한 것이 있기 때문에 발함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의(道義)를 위해 발한 마음이 도심(道心)이고, 식색(食色)을 위해 발한 마음이 인심(人心)이다."
"인심과 도심이 다 性에서 발한다. 다만 氣의 가린 바가 되면 인심이 되고 기의 가린 바가 되지 않으면 도심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 근원에 있어서는 한마음이지만, 마음이 어떠한 의지적 정향(定向)을 갖고 작용하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퇴계가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각기 내출(內出:안으로부터 표출)과 외감(外感:밖으로부터 느낌)으로 보아 이발(理發), 기발(氣發)의 이원으로 보지만, 율곡은 인심(人心)이나 도심(道心)을 모두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이 처음에는 도심(道心)이던 것이 사사로운 뜻에 의해서 인심(人心)으로 끝마치게 되기도 하고 또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고정된 게 아니라 인심(人心)의 도심화(道心化)와 도심(道心)의 인심화(人心化)가 가능하다.
그에 의하면 도심(道心)은 순전히 천리(天理)이므로 순선(純善)하지만 인심(人心)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양면을 겸하므로 선(善)할 수도 있고 악(惡)할 수도 있다. 인심(人心)은 인욕(人欲)에 흐르기 쉬우므로 반드시 정밀하게 살펴서 도심(道心)으로 절제하여 항상 인심(人心)이 도심(道心)의 명령에 쫓도록 해야 인심(人心)의 도심화(道心化)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천인일관(天人一貫)의 입장에서 인심(人心), 도심(道心)을 이기설(理氣說)과 일체화시키며 그 논리를 전개함은 물론,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나아가 의(意)에까지 연관시켜 정밀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율곡의 인생론적 심(心) · 성(性) · 정(情)에 대한 관점을 대강 요약해 본다면, 미발(未發)의 본체인 이(理)로 말하면 단지 일로(一路)일 뿐인데, 발현상의 경계에 따라 심(心) · 성(性) · 정(情)으로 나누어지고, 그것은 다시 그 발현경로와 과정에 대해 순선(純善)인 이(理)를 중심으로 하여 보느냐 아니면 선악이 공존하는 기(氣)를 위주로 하여 보느냐에 따라서 심(心)은 인심과 도심, 성(性)은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 정(情)은 사단과 칠정 등으로 나뉘어 설명된다는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이러한 그의 심성정의 일로적(心性情 一路的) 논리를 종합해서 전하고 있다.
"심(心)은 하나인데 도심(道心)이라고도 하고 인심(人心)이라고도 하는 것은 성명(性命) · 형기(形氣)의 구별이요, 정(情)은 하나인데 사단(四端)이라고도 하고 칠정(七情)이라고도 하는 것은 이(理)만을 말하느냐 기(氣)를 겸하여 말하느냐 하는 차이이다. …… 본연(本然)의 성(性)은 기질(氣質)을 겸하지 않고 말한 것이며, 기질(氣質)의 성(性)은 본연(本然)의 성(性)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후일 율곡의 친구인 우계 성혼은
"율곡은 도체(道體)에 대하여 그 근원을 환히 꿰뚫어 보았다. 그가 말한 '천지의 조화가 두 근본이 없다'는 것과, '인간의 마음이 발함이 두 근원이 없다'는 것과, '이(理)와 기(氣)는 서로 발할 수 없다'는 것 등의 논리는 참으로 나를 일깨워 준 스승이었다."
고 피력한 바 있다. 율곡 철학의 진수를 깊이 있게 평가한 내용이라 하겠다.
율곡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철학사상은 당시의 학자들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앞선 뛰어난 사상으로서, 특히 이원성(二元性)의 극복은 오늘날 우리시대에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1. 애민정신(愛民精神) : 인간 생명 중시
유학에 있어 경제는 정치의 기초가 되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율곡도 이러한 경제를 중시하는 유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구체적 실천에 힘썼다.
율곡이 당시 개혁을 주장하고 각종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했던 것도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고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애민의식 내지 인도정신에서 연유된 것이다.
즉, 유학 본래의 인도(人道: 인(仁))정신이야말로 율곡 경제사상의 본질이라 하겠다.
율곡은 그 시대에 있어서 공물, 진상, 선상, 군역 등 각종 의무제도의 모순과 난맥으로 인한 민생의 불안과 민심의 이반, 나아가 농촌경제의 파탄과 국가경제의 위기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그 시대에 준수되었던 연산군시대의 공법(貢法)을 '백성을 학대하는 법'이라고 단정한다.
'백성이 하늘 삼을 바(食)를 잃고 나라가 의지할 바 없으니, 재물을 생산하고 백성을 살리는 일이 당시의 급선무'라고 한다.
또 '성학집요'에서도 왕도 정치는 백성들의 힘을 늦추어 주고 백성들의 산업을 후하게 해 주어서 백성들이 하늘로 삼는 '먹을 것'이 풍족하여, 그 본연의 마음을 보존하게 할 뿐이라 하여 정치의 우선적 목적이 생민(生民)에 있음을 말해준다.
'백성은 먹을 것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고,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고 하여, 경제가 백성과 국가 존립의 기초임을 말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율곡은 당시대의 모순된 법제, 세제, 군제 등의 제도적 개선을 적극 주장하고 있으며, '맹자'의 이른바 왕도의 기초로서 '먹고 살고 죽는데 부족함이 없음', '서경'의 '이용후생', 백성을 편케 하는 요체로서 '세금을 가볍게 걷고 요역(요役)을 가볍게 하며 형벌을 신중히 함'등 전통유가의 경제관을 계승하고 있다.
2. 양민(養民)과 교민(敎民)의 조화 : 양민 연후 교민
그러면 양민(養民)과 교민(敎民)의 관계는 어떠한가? 인간이 본래 영혼과 육신이 함께 갖추어진 존재이듯이 인간의 삶 또한 의리(義理)와 실리(實利)의 문제로 귀결된다.
마찬가지로 정치 또한 백성들의 삶을 보장하는 양민 내지 생민의 문제와 백성의 정치적, 윤리적 가치질서를 확립하는 교민의 문제가 제기된다.
전통적으로 유학에서의 경제관이 덕(德)을 근본으로 보고, 재(財)를 말단으로 보아 경제를 경시한 듯 하지만, 이는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본말이 갖추어진 것을 이상으로 여기는 것이요, 백성을 중심으로 할 때에는 오히려 경제를 제일로 강조한다.
율곡은 '성학집요'에서 "경제를 우선으로 하고 교육을 뒤로 하는 것이 이세(理勢)이 당연함"이라 하고, 그래서 '성학집요'의 순서 또한 안민장(安民章) 뒤에 명교장(明敎章)을 둔다고 한다.
또 '만언봉사'에서도 아랫 백성들은 가난이 몸에 절박하여 본심마저 잃고, 부자형제라도 오히려 길가의 사람같이 여기는 실정과 삼강오상(三綱五常)이 유지되지 못하고 형정(刑政)이 법제화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향약이 비록 아름다운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시행이 무용함을 말하여, 향약의 시행을 보류할 것을 주장한다.
이와 같이 율곡은 경제에 있어서 생민(生民)의 문제를 근본 명제로 삼고 있으며, 경제와 윤리 양자의 구족(具足)을 이상으로 하되, 백성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양민(養民)을 교민(敎民)에 우선하는 관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윤리를 도외시한 경제는 돼지의 행복에 불과한 것이므로 정치에 있어서 양민(養民)과 교민(敎民)이 아울러 충족됨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다.
3. 생산, 분배, 소비의 원리
한편, 율곡은 '성학집요'에서 천자(天子)의 부(富)는 사해(四海)에 간수하고, 제후(諸侯)의 부는 백성에게 간수하니, 창고(倉庫)와 부고(府庫)를 두는 것은 공공의 물품을 사사롭게 축적하지 못하게 함이라 하여 국가재정의 공공성을 주장하고, 비록 왕이라 하더라도 사사로이 축적을 하면 이익을 취하는 것이므로, 이원(利源)이 한 번 열린다면 모든 신하들이 제각기 다투어 그 쪽으로 기울어져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 경계한다.
따라서 내탕사와 내수사를 호조에 부속시켜 국가 공공의 비용으로 삼고 사재(私財)로 삼지 말아서 조금의 이익도 취함이 없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공(公)과 사(私)의 엄격한 구별을 통해 경제적 윤리를 세우려는 것이고, 국가재정의 사용화(私用化)를 반대함으로써 그의 민주적인 경제관과 합리적인 재정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양민(養民)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가) 생산 장려와 국부증대
첫째, 생산의 장려와 국가재정의 확충이다.
율곡은 국가재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먼저 농민의 생산의욕 고취와 생산 여건의 조성을 주장한다.
당시의 각종 제도의 모순이 경제파탄의 근본 원인이라 하여, 개혁을 통해 농업생산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세금이 지나치게 무거워 황무지를 개간하지 못하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묵은 받을 활용케 하여 활용 되는대로 세금을 물게 함으로써 백성의 생활안정은 물로 국가재정의 확충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농업생산의 장려와 민생의 안정, 그리고 국가재정의 충실이라는 면에서 실로 유익한 대안이었다.
나) 분배의 형평원리
둘째, 형평(衡平)의 원리에 입각한 경제적 분배를 주장한다.
율곡은 '의진시폐소'에서 왕실의 예산을 줄어 백성들의 힘을 펴 주어야 한다고 하여,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태주는 '손하익상(損下益上)'의 모순을,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주는 '손상익하(損上益下)'로 전환하는 것이 당시의 시긊한 과제라 한다.
또 '만언봉사'에서도 각 읍의 산물이 있고 없음, 토지의 많고 적음, 호구(戶口)의 성하고 쇠함을 조사하여 양정(量定)에 따라 한결같이 공평하게 되면 반드시 방납(防納)의 폐단이 없어질 것이라 하여, 공안(貢案)에 있어서 균평(均平)의 정신을 말한다.
'동호문답'에서도 역사(役事)가 고르지 못한 폐단을 지적하면서, 근심과 즐거움의 같지 않음을 시정함에 있어서 긴 것을 끊어 짧은 것을 보충해 주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율곡은 생민(生民)의 입장에서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태는' 전도된 윤리를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는' 평등윤리로 시정하고자 했던 것이니, 이는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는 전통 유학사상의 계승인 것이며, 공자의 인도정신과 합일하는 바라 하겠다.
다) 절약 검소의 소비윤리
셋째, 율곡은 소비윤리로서의 절약과 검소를 강조한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풍속의 사치가 당시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하고, 식사는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을 채워 자랑삼으며, 한 상의 비용이 주린 사람 몇 달의 양식이 될 만하니, 열 사람이 밭을 갈아 한 사람을 먹이기에도 부족하거늘, 밭을 가는 자는 적고 먹는 자는 많으니 백성이 주리고 춥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의진시폐소'에서는 절약과 검소를 숭상함으로써 백성의 힘을 펴 주어야 한다 하면서, 당시의 국가재정은 거의 고갈되고 백성들의 비용이 극심하여 지출이 수입보다 많고 불요불급한 지출은 결국 횡렴(橫斂)을 초래함으로써 국가와 백성이 동시에 궁핍하게 되었다 하고, 이것을 구제하는 길은 오직 절용(節用)에 있고 절용의 방법은 숭검(崇儉)에 있다고 한다.
특히 이것은 조정에서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하여 국왕의 예산을 줄여 백성들의 힘을 펴 주어야 한다는 민본적 재정관을 보여주고 있다.
4. 사창제도 실시 : 빈민구제
5. 경제와 윤리의 조화
율곡은 오늘날 정치의 핵심이 되고 있는 경제에 있어서 의리(義理)와 실리(實利)가 조화를 이루는 경제 윤리를 제시하여 이익에만 치우치는 경제를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율곡의 경제사상은 유학 본래의 인도(人道)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 시대 국가 재정의 위기와 민생이 위기를 직시한 생민(生民)윤리의 소산이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백성에게 수혜(受惠)되어 질 방법과 실천의 문제로까지 전개되었던 것이니, 이것은 18세기 이후 실학의 발흥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율곡의 '경세론'이 [유형원]이나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