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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여호수아 6 : 1-5
제목: 여리고성 함락 이야기
일시: 2015. 5. 31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여리고는 요단강서쪽 5Mile, 사해북쪽 7Mile이 위치해 있는 도시로서 “향기로운”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종려의 성읍(신34:1)이라고도 불리운다. 또한 해수면보다 240M 아래에 있어 우물이 많이 솟아나 팔fp스타인의 오아시스 역할을 하는 기름진 곳이며 기후도 따뜻해 팔레스타인 언덕에 사는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가는 피한지이기도하다. 그만큼 살기 좋기에 그 도시는 사람들이 눈독을 많이 들였고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여리고 사람들은 성을 외벽과 내벽으로 높이 쌓았다. 외벽은 두께 2M, 내벽은 두께 4M, 높이는 10M에 달하는 철옹성 여리고였다. 물론 용사도 대단한 군인들이다.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II.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것은 “어떻게”라는 방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싸움에서 함께 하시느냐”하는 것이다.
굳게 닫힌 강한 성 여리고를 보았을 때 이스라엘은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들이 어떻게 애굽을 나섰고 어떻게 광야를 거쳐왔는지를 뒤돌아 본다면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 온 것이다. 그리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이러한 위기의 순간이 있을 때마다 알아서 하신 것이다. 약속해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제 어쩌시렵니까?”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6장 2절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라고 한다. 이미 끝난 경기 아닌가! 어떻게 싸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가 싸움의 승리의 비결이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여리고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도는데 엿새 동안을 그렇게 한다. 그리고 제사장 일곱은 언약궤 앞에서 일곱양뿔의 나팔을 잡고 행한다.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길게 분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은 소리를 지르면 되는 것이다.
뭐 이런 싸움이 다 있는가? 여리고성전투는 싸움의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싸움의 결정권자가 누군지를 보여주는 전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싸움을 테크닉이나 전략을 가르쳐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여리고성 전투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그 이유는 방법이 아니라, 싸우는 주체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의 전투에서 나의 화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심리전과 전술 전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디안과 싸우는 기드온의 용사는 수 만명이 아니라, 300명이었다.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솔로몬과 같이 결혼동맹으로 혈맹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싸움의 결정은 이미 하나님이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여리고 성과 같이 열지 않으려고 굳게 닫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강하게 방어하고 굳게 닫아놓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도 라이프찌히 음대는 시험이 있는 것으로 안다. 정말 예측할 수 없다. 어떤 때는 기대하는 것에서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기대하지 않은 것에서 좋은 결과가 있기도 하다. 미술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재미있다.
예)400-600명 정도가 쿤스트 시험을 위해서 마패를 제출한다고 한다. 15명 정도 뽑는데... 50명 중에 한명정도이다. 그것 다 보려면 얼마나 힘드냐. 그러면서 처음에 눈길을 딱 잡아야지 아니면 옆으로 밀쳐 버리고 다음 지원자의 마패로 넘어간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에 관심이 있으면 두 번째에 “오우”하고 소리가 높아져야지 뽑지 아니면 또 옆으로 제켜버린다. 그런데 그러한 평가도 내 자신의 평가지 막상 평가자는 나의 시각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마패를 내는데도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안보고 두 번째로 생각한 것에서 뽑기도 한다나?
여리고성 함락의 핵심은 전쟁의 전술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행이었다. 만일 이스라엘이 수적으로 우세하거나 신무기를 개발했거나 동맹들이 많아서 승리했다면 어떠했을까? 그런 경우 잘 되도 문제, 못되어도 문제이다. 잘 되면 자신들의 전쟁기술에 교만하게 될 것이고 못되었으면 스스로의 처지에 좌절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자아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부인하고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드러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주로 그런 식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도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실 때도 그렇게 애간장을 태우셨다. 약속의 땅을 주실 때도 그렇게 광야를 걷게 하셔서 산전수전 다 겪게 하셨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뜻이다.
예)레스토랑을 가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익숙치 않는 독일음식이나 서양음식을 시킬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아는 식당에 가면 “알아서 주세요”리고 한다. 그것은 요리사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표현이다. 아이들에게도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할 때는 너를 믿는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맡길때도 하나님 알아서 하세요는 방법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III.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물음이지 “성 함락이 쉽냐 어렵냐 가능성이 있느냐 가능성이 없느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올 때 광야를 40년 동안 유리하게 된 것이 시간낭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정도였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길을 걷는 것이 정도이다. 우리는 정도를 걸어야 한다. 약속된 그 땅은 이스라엘이 가야할 길이었다. 그 길이 “힘든길이냐 쉬운 길이냐” “지름길이냐 돌아가는 길이냐” “가시밭길이냐 아우토반이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고 약속하신 길이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길이라면 힘들다고 피해서 될 일이 아니다. 어려워도 우리는 맞닥뜨려야 한다. 그것을 멋진 말로 말하면 정면승부이다. 다른 쉬운 길을 택하거나 승부를 피해 변칙을 써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이 땅에 오셨다.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던 초기에 사탄은 3가지 시험을 하게 된다. 첫 시험은 돌덩이를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이고, 둘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하는 유치한 시험을 하고, 세 번째는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만일 네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는 시험을 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의 목적을 흔드는 시험이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찾으러 오신 것 아닌가! 그런데 사탄이 절만 꾸벅하면 주겠다는데... 하지만 주님은 그 편한 방법을 쓰지 않으셨다. 정면승부를 거셨다.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고 계셨다. 비록 쓴 잔이라 할찌라도 십자가만이 그에게 주어진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십자가로 가는 그 골고다 언덕길은 수치와 고통과 아픔의 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마취제 하나 사용하지 않고 당할 모든 것을 당하셨다. 주님은 거짓된 영과의 싸움에서 당신의 의를 위해서 정도를 걸으셨다.
정도를 걷는 것이 손해처럼 보이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지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이래서 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백성들은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어다”(5절). 인내의 끝에는 승리의 전리품들이 있게 된다. 여리고는 강한 성이었는데 이제 여리고는 “무너짐”의 대명사가 되었다. 여리고는 강한 성의 심벌이 아니요 패배와 함락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골리앗은 불레셋의 장군으로 침몰할 수 없는 강한 사람이었지만 다윗의 물매돌로 무너지는 “쓰러짐”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골고다 언덕길로 가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결말은 어떠한가? 십자가에서 사망권세와 정면승부를 펼쳤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율법을 은혜로 바꾸고 죄를 의로 변화시켰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앞에 여리고를 보게 되고, 골리앗을 보게 되고, 사망권세로 위협하는 십자가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 심벌들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정도를 걸을 때 일어난 역사이다.
예)반 고호를 아는가? 1853년에 태어난 그는 당대에 알려진 사람이 아니고 그의 사후에 유명하게 된 사람이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그림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어도 그는 자기의 그림 세계를 양보할 수 없었다. 비록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그는 미적본능에서 나오는 그의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를 끝까지 돕고 이해한 사람이 그의 동생 테오도르이다. 그는 평생에 그의 그림 한점을 팔았다. 동생이 사준 것이다. 그는 자신의 화법을 고집했다. 그는 다르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클래식이 유행했지만, 그는 모던한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고지식했던지 한번은 그가 그림을 파는 데서 일했는데 손님이 오면 곧이곧대로 말했다고 한다. “그런 그림을 그 값에 사십니까 저 그림이 훨씬 낫지요. 지금 화가의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어떤 부인이 돈뭉치를 가지고 와서 “집을 환하게 할 그림을 주세요” 하니까, 고호는 집을 환하게 하려면 커튼을 밝은 것을 사든지 해야지 그렇게 그림을 사면 안 되지요. 그것은 돼지 귀에 귀걸이를 하는 것과 같지요“라고 해서 그는 그 화랑에서 좇겨났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이후 후세에 그는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의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고 있다. 종종 천재는 이 시대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 혹시 음악을 하더라도 인정을 못 받으면, “아하 이 사람들이 아직 내 수준에 이르지 못했구나” 혹은 “아하 내가 시대를 잘못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하라. 오직 정도를 걸으라. 정면승부를 펼쳐라.
우리는 일이 어려워지면 자꾸 빠져나갈 궁리를 하게 된다. 요령을 피우려고 한다. 문제를 피하여 돌아가려고 한다. 그게 우리를 이끌어가는 원인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이 우리를 이끌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약속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이 정도를 걷는 것이요 정면승부를 펼치는 것이요 때가 되면 승리로 이끌어 가는 길이다. 걸어야 할 길이면 광야길도 걸어야 하고 싸워야 할 싸움이라면 여리고성도 공략해야 한다. 지어야 할 십자가라면 골고다 십자가도 지어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무엇인가? 승리였다.
IV. 우리 앞에 여리고 성이 있는가? 그것은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사람이 없이 완전히 잠겨져 있는가? 너무 부담스러운가? 좌절감까지 드는가? 내가 가진 것은 너무 작고 나는 너무 약하지 않는가? 오늘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리고를 함락하는지를 기억하라. 힘들어 보인다고 겁먹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이든지 알아서 하도록 맡기라. 우리의 싸움은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의 싸움이다. 우리의 싸움은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는 정도를 걷는 싸움이냐는 것이 관건이다. 시험이 있는 사람이든 사업을 하고 일을 하는 사람이든,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을 세워가고 있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내 앞에 있는 굳게 닫힌 여리고 성을 문이 안 열리면 성벽을 다 무너뜨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무너진 성벽의 돌들을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교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