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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8)
제8장 용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상상의 동물로는 봉황, 기린, 해태를 비롯하여 백호, 주작, 현무 등 신비로운 능력과 상징성을 지닌 많은 동물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용은 그 권위와 조화로운 능력에 있어서 단연 압도적이다.
인간은 용에게 다른 동물이 가지고 있는 최상의 무기를 모두 갖추게 하고, 이에 더하여 무궁무진한 조화능력을 부여하였다. 최고의 권위를 지닌 최상의 동물인 용. 이러한 용의 힘에 의탁하여 인간은 끝없는 이상과 꿈을 펼치기도 하였고 벽사기복과 무병장수를 소망하였으며 때로 권선징악의 교훈을 스스로에게 깨우쳐 주기도 하였다.
용에 대한 관념은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중국, 인도 등 문명의 발상지를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특히 동양에서는 용에 대한 숭배사상이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여, 수천 년 동안 동양인의 마음과 정신세계를 지배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용은 우리의 문화와 사상, 생활양식을 논할 때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가진 신비의 동물로서, 그 의미와 상징성은 생활전반에 걸쳐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의 꽃을 피우기에 모자람이 없는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용에 관한 수많은 신화, 설화, 전설은 용에 대한 신앙, 사상, 문학과 미술의 형태로 발전하여 왔으며, 민속과 민간신앙, 각종 지명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생활과 의식구조에 가장 밀접하고 깊이 있게 자리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은 나라를 지키는 호국룡을 탄생시켜, 우리의 사상사에서 빛나는 호국정신의 극치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처럼 용은 단순히 조화로운 능력자로서만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고 천지의 조화에 순응하는 신성한 영물로서 우리 민족의 의식과 정서 속에 독특한 상징성을 지켜 왔다.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불가사의한 동물인 용. 용은 창조된 것이기에, 그 설정 자체에서부터 의미부여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통해 옛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사고방식을 더욱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1. 용이란 무엇인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에서는 용을 기린, 봉황, 거북과 더불어 상서로운 사령의 하나로 인식하여 왔다. 용은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동물이지만, 오랜 옛날부터 상상으로 정형화된 뚜렷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용’이라 말할 때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독특한 형태적인 특성은, 구름과 함께 긴 몸을 굽이굽이 틀며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다. 관련학자들은 용의 모습 이 뇌성, 뇌운, 회오리바람, 번갯불, 폭우 등과 밀접한 관련 하에 탄생되었다고 보고 있다. 용의 이미지가 승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은나라 때 뇌운문에서 용의 형태가 도상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 등은, 용이 단순한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자연현상이 융합하여 탄생된 신비로운 창조물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문헌 「광아」 익조에 따르면, 용의 모습은 아홉 가지 다른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즉 1. 낙타의 머리에 2. 사슴의 뿔 3. 토끼의 눈과 4. 소의 귀에 5. 목덜미는 뱀과 같고 6. 배는 조개와 같으며 7. 잉어의 비늘에 8. 호랑이의 발 9. 매의 발톱을 가졌다고 하였다. 또한 비늘은 양의 수 9가 중복된 81개(9.9)로 되어 있고, 구리로 만든 쟁반을 울리는 듯한 우렁차고 힘 있는 소리를 내며, 입 주위에는 긴 수염, 턱 밑에는 구슬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용의 조화능력에 관해서는 「관자」 수지편에서, “용은 물에서 나며, 그 색깔은 오색을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조화능력이 있는 신이다. 작아지고자 하면 번데기처럼 작게 오므라들 수 있고 커지고자 하면 천지를 덮을 만큼 부품 수 있다.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위로 치솟을 수 있고 밑으로 내려가고자 하면 깊은 샘 속의 밑바닥까지 잠길 수 있는 변화유일하고 상하무시한 신이다”라 고 하였고, 「설문」에서는 “능히 어둡거나 밝을 수 있고 가늘거나 커질 수 있으며 짧거나 길어 질 수 있다. 춘분에 하늘에 오르고 추분에 연못에 잠긴다”고 하였다.
이처럼 날짐승, 들짐승, 물에 사는 짐승의 복합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기상천외한 모습과 천변만화하는 조화능력을 가진 용은 뭇 동물 중의 우두머리, 힘과 조화의 최고자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회남자」에서는 ‘만물우모린개개조어용’이라 하여 조류, 수류, 어류, 갑각류의 모든 동물은 용을 조상으로 한다고 하였고, 「본초강목」에서는 비늘을 가진 것들의 우두머리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최고자로서의 용의 위치는 권위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왕권이나 왕위의 상징물로 그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즉 임금의 얼굴을 용안, 임금의 덕을 용덕, 그 지위를 용위라 하였고, 임금이 앉는 자리를 용상, 용좌, 임금이 입는 의복을 용의, 용포, 임금이 타는 수레를 용가, 용거, 임금이 타는 배를 용가라 하였으며, 심지어 임금이 흘리는 눈물을 용루라 하였다. 특히 임금이 즉위하는 것을 용비라 하는데, 조선 세종 때 목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선조 여섯 대의 행적과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은 「용비어천가」의 제목과 내용도 이러한 맥락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처럼 임금과 관계된 것에는 예외 없이 용과 관련시켰으니, 이는 용의 경이로운 조화능력과 권위를 인정하고 이에 대한 외경심과 신비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용에게는 각기 성격이 다른 아홉 아들이 있다고 하는데, 명나라의 호승지가 쓴 「진주선」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들의 종류와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비희: 패하라고도 하며, 모양은 거북을 닮았다. 무거운 것을 지기를 좋아하며 돌비석 아래에 놓는다.
2. 이문: 조풍 또는 치미라고도 하며, 모양은 짐승을 닮았다.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해 높고 험한 곳을 좋아하며 화재를 누를 수 있어 전각의 지붕 위에 세운다.
3. 포뢰: 모양은 용을 닮았고, 울기를 좋아하며 범종의 상부 고리에 매단다. 포뢰 용은 특히 바다의 고래를 무서워하므로 종을 치는 당목은 고래 모양을 취하여, 포뢰를 겁주어 더욱 우렁차고 힘차게 울도록 한다.
4. 폐안: 헌장이라고도 하며, 모양은 호랑이를 닮았다. 위력이 있으므로 옥문에 세우거나 관아의 지붕에 장식한다.
5. 도철: 치문이라고도 하며,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므로 주로 솥의 뚜껑에 세우거나 식기, 반기에 시문한다.
6. 공하: 범공이라고도 하며, 물을 좋아하여 다리의 기둥에 세운다.
7. 애차: 살생을 좋아하므로 칼의 콧등이나 손잡이에 조각한다.
8. 산예: 금예라고도 하며 모양을 사자를 닮았다. 연기와 불을 좋아하여 향로에 새기며, 또한 앉기를 좋아하여 불좌나 용좌에 쓴다.
9. 초도: 초도라고도 하며, 모양이 나방을 닮았다. 닫기를 좋아하여 문고리에 붙인다.
이외에도 각종 문헌에는 용의 새끼를 교룡, 뿔이 없는 용을 이룡, 날개를 가진 용을 응룡, 뿔이 달린 용을 규룡, 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을 반룡, 물을 좋아하는 용을 청룡, 불을 좋아하는 용을 화룡, 울기 좋아하는 용을 명룡 등이라 하여 그 종류와 성격 및 특성이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2. 용신 신앙과 물
용은 그 신비롭고 초월자적인 능력으로 인하여 옛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뚜렷한 영적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여의주를 문 용이 우주의 운행이나 자연의 온갖 조화로움에 관여할 수 있다는 사실, 특히 구름을 박차고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이미지는 신적 존재로서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다. 용은 오랜 옛날부터 미래를 예시해 주고 자연의 조화를 몰고 다니는 신적 존재로 인식되어 왔으며, 특히 물을 지배하는 수신으로 신앙되면서 독특한 용신신앙이 형성되어 왔다.
용이 등장하는 문헌, 설화, 민속 등에서는 용의 출현이 반드시 어떠한 앞일을 예시해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개설서라 할 수 있는 「문헌비고」에는 신라 시조 원년으로부터 조선 1714년(숙종 40년) 사이에 무려 29차례나 용의 출현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 뒤에는 거의 빠짐없이 거국적인 대사가 잇따라 기록되어 있다. 즉 용이 출현하고 나서 성인이 탄생하였다던가 군주나 큰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농사의 풍흉, 변방군사의 동태, 민심의 흉흉 등의 국가적인 길흉사가 따르고 있다. 또한 「고려사」에서 서해용왕이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에게 ‘군지자손 삼건필의’라 일러준 것처럼 직접 미래를 일러주기도 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된 용과 관련되는 설화는 무려 86편에 달하고 있는데, 이에 등장하는 용 역시 대부분 예시자의 역할로 설정되어 있다.
이처럼 용은 미래를 예시해 주는 신령한 동물로 숭상되어 왔을 뿐 아니라, 건국 시조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즉 신라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은 계룡의 왼쪽 겨드랑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삼국사기 권 1), 고려의 시조 왕건의 할머니도 용녀라는 설화가 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용은 특히 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인식되었다. 용은 바다, 강, 샘, 못 등 의 물속에 살면서 물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수신의 역할을 하였다.
이익의 「성호사설」 천문부에 보면, 비는 용이 성내어 싸울 때 내리고, 벼락은 독룡이 놀라 움직일 때 생기고, 풍수해는 용이 성날 때 생기므로 임금은 이 용의 거동에 따라 정사를 근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관자」 형세해 등에서도 용은 물을 얻음으로써 무궁한 조화의 위세를 떨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용이 미래를 예시하기 위해 나타나는 장소도 바다, 못, 우물속 등으로 설정된 것을 볼 때, 옛사람들은 물과 용을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용이 왜 물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물의 신의 역할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용의 도상이 뇌운 등에서 도출되었다는 점, 용의 모습과 조화가 물의 속성과 유사하다는 점 등과 긴밀히 연결된다. 즉 용은 ‘물의 원리를 표상화한 것’, ‘물을 상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용의 모습과 유연한 움직임은 물의 흐름을 나타낸 것이며, 비와 관련된 뇌운 등에서 결정적인 도상이 유출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용의 변화무쌍한 형체는 천변만화하는 물의 능력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리고 조용한 이슬에서부터 거센 폭풍우에 이르기까지,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서부터 천지를 집어삼킬 듯한 성난 파도에 이르기까지, 때로 평화롭게 대지를 기름지게하며 때로 파괴적이기도 한 물의 성격과 특성이 그대로 용에게 반영된 것이다.
농사를 생업으로 삼아 온 옛사람들에게 비는 생명과 같은 것이었으며, 홍수, 천둥, 번개, 폭우 등은 불가항력의 두려움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에 면해 있어, 배를 타는 어민들에게 바다는 생명 그 자체일 만큼 소중하면서도 두려운 존재였다. 이러한 물과 관련된 모든 자연조건을 다스리는 신으로서 물의 모습과 성격이 닮은 용을 탄생시키게 되었고, 물과 관련된 기원과 소망이 간절한 만큼 용은 최상의 위치와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처럼 수신으로서 강력한 위치를 확보한 용은, 더 나아가 다른 모든 것에서도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로 발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50년에 용의 그림을 그려 놓고 비를 비는 화룡제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하여, 용왕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관장하는 관청인 용왕전을 두어 사해제, 사독제 등의 용신제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도 고려 현종 12년에 흙으로 용상을 만들어 놓고 비를 비는 토룡제를 지냈으며, 가뭄이 계속된 숙종 13년에는 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섯 용왕인 오해신에게 기우제를 지냈다고 기록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국가적인 의식으로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사가 그대로 전승되어 토룡제, 화룡제 등을 거행하였고, 오방토룡제로써 기우십이제차의 마지막 의식을 끝맺기도 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해로서 동해의 양양, 남해의 나주, 서해의 풍천, 동으로서 남에 웅진과 가야진, 중에 한강, 서에 덕진과 평양강, 압록강, 북에 두만강 등이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중요한 제장으로 지켜져 왔다고 한다.
민가에서도 비가 오지 않으면 특히 ‘용’자가 들어간 연못이나 강, 바다, 산, 바위 등에서 기 우제를 지내거나, 그곳의 물을 병에 넣고 솔잎으로 막아 사립문에 거꾸로 매다는 등 주술적인 방법으로 비를 빌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경기도의 용지, 용두산, 충청도의 용연, 황해도의 용정, 평안도의 구룡산, 경상도의 용수암, 전라도의 용지, 함경도의 장자지 등은 효험이 큰 기우처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처럼 조정과 민간의 구별 없이 정성스럽게 용신에게 제를 지냄으로써, 애타가 기다리는 비를 내려 주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의지하였다.
용은 또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어민들에게 가장 지극한 숭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바다 밑 용궁에 살고 있는 용왕에게 고기잡이 나간 어부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고 풍어를 비는 제 또는 굿을 용왕제, 풍어제, 용왕맞이 등이라 한다.
일반적인 용왕제는 주로 어촌에서 음력 정초나 2월초의 만조시를 택하여 해변에 제물을 차려놓고 사해용왕에게 마을주민과 가족의 안전 및 풍어를 비는 의식이다. 제가 끝나면 자려놓았던 제 물을 골고루 조금씩 떼어 네 덩이를 만드는데, 가족 중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을 때는 그의 몫으로 한 덩이를 더 만들게 된다. 그것을 백지로 싸서 한 덩이 한 덩이 바다로 멀리 던지며 용왕으로 하여금 기꺼이 그 제물을 받아 주기를 마음속으로 빈다.
특히 사면이 바다로 된 제주도에서는 ‘용왕맞이’굿이 유명하다. 큰 굿의 한 제차로 하기도 하고, 바다에서 익사한 영혼을 건져내어 저승으로 고이 보내거나 풍어를 빌기 위하여 하기도 한 다. 어느 경우이든 그 중심 제차는 용왕이 오시는 길을 치워 맞아들이고 소원을 비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대 제사상차림에는 용왕이 거느리고 있는 바닷고기를 올리지 않아야 한다.
이 외에도 식수의 고갈을 예방하고자 하는 것으로 농악대가 마을의 우물을 찾아다니며 하는 ‘ 샘굿’이 있다. 농악대는 우물 주위를 돌며 빠른 농악을 올리다가 갑자기 뚝 그친 뒤, 상쇠잡이가 우물을 향하여 “물 주소, 물 주소. 용왕님네 물 주소, 뚫려라, 뚫려라. 물구멍만 핑핑”하고 기원하게 된다. 또한 농가에서는 음력 6월 15일, 유두일이 되면 논의 물꼬에 보리개떡이나 밀개떡을 한 덩이 쪄다 놓고 마음속으로 풍년을 빌게 되는데, 이를 ‘유두제’라 한다.
이처럼 용은 물에서부터 탄생한, 물과 뗄 수 없는 초월자적 존재로서 숭배되어 왔다. 용을 물에서 살며 물을 지배하는 신으로 받들어, 나라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용신제, 용왕제 등을 올리며 용의 조화로운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제는 오늘날에도 풍작을 염원하는 농민의 마음과 안전한 항해 및 풍어를 비는 어민들의 소박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 땅의 곳곳에서 신비롭고 겸허한 의식으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3. 호국과 호법의 용
우리나라에서 용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용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용은 장엄하고 신비로운 능력으로 인해 제왕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생각은 용-임금-하늘의 관계로 맺어져 나라를 지키고 왕권을 수호하는 호국신, 호국룡의 자연스러운 탄생을 낳게 되었다. 임금은 하늘에 계시는 천제의 후손으로 받들어졌으므로, 이 천제와 임금의 밀접한 관련을 생각할 때 하늘을 자유로이 오르내리는 용의 존재가 호국의 상징성을 확보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생각하더라도, 한 개인의 일에서부터 국가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고 보는 인간의 한계능력 속에서, 하늘과 인간세계를 왕래하며 무궁무진한 조화능력을 갖춘 ‘용’의 존재는 나라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상정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우리나라의 건국시조는 용과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부인이 된 알영은 계룡의 왼쪽 갈비뼈에서 탄생되었다고 하고 혹은 용이 나타나 죽자 그 배를 갈라 얻은 동녀라고도 하였다. 또한 신라 탈해왕은 동해변에 떠내려 온 큰 궤짝 속에서 칠보, 노비와 함께 발견되었다는데, 7일 만에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28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태에서 나왔으나 나만이 알에서 태어났으므로 불길하다고 하여 궤짝에 넣어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고려의 시조 왕건의 할머니도 용녀로서, 태조가 된 왕건이 그의 선조를 용궁에 결부시키고 그 용의 혈통을 합리화하기 위해 용 비늘 하나를 조작하여 왕통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도 용을 매체로 천제와의 관련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용의 능력과 신성성으로 인하여 국가와 왕권을 수호한다는 믿음과 상징성에서, 호국사상에 따라 호국용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 것은 진흥왕 이후 통일신라를 전후하여 신라에 불교가 융성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불교는 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삼국유사」 등에 무수히 등장하는 신라의 용은 불법을 수호하고 불사를 돕는 호법의 용으로 묘사되어 있다. 불국정토를 이상으로 한 신라는 불교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호법룡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의 평안을 이루기 위해 호국의 용으로 발전시켜, 불법을 지키고 나라를 수호하는 일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나타냈다. 즉 불교를 통해 순화된 용이 나라를 지켜준다는 이상적인 경지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처럼 신라에서 융성한 불교사상은 숭불호국의 용신사상을 낳게 하였으며, 수백 년 동안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 왔다. 따라서 앞으로 살펴볼 호국과 호법의 용은 신라시대가 그 중심이 될 것이며, 호국과 호법이 함께 어우러진 신라의 독특한 용신사상이 주가 될 것이다.
불교와 용의 관련은 고대 인도의 사신숭배에서 비롯되었다. 인도에는 원래 독사의 위험이 많아 일찍부터 뱀을 숭배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중국 용의 모습에 인도 뱀을 신격화한 용의 관념이 혼합되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단순한 초능력적 존재나 악신이었던 용의 존재가 부처님의 설법 속에서 마침내 불교의 호교자로 그 위치를 굳히게 된다. 이에 따라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의 하나로 수용되었으며, 용은 불법을 옹호하고 선신으로 존경 받는 팔대용왕으로 분류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으로서 뿐만 아니라 때로 세간을 파괴하고 해를 주는 악신으로도 등장하여, 전체적으로 인간세계에 커다란 교훈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특히 신라시대의 호국과 호법의 용을 살펴보기 전에,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나타나고 있는 용의 성격 및 역할 등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용의 모습이다. 불교경전을 보면 많은 용왕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불본행집경」등에 의하면, 석존의 성불한 뒤에 가장 먼저 부처님으로부터 삼귀 오계를 받고 세간에서 최초의 우바새가 된 것이 용왕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이라발 용왕과 상거 용왕은 석가불의 출세를 기다리다가 녹야원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삼귀 오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부처님의 설법시에 용왕들이 많은 권속을 거느리고 와서 법문을 듣는다는 내용도 여러 경전에서 볼 수 있으며, 「인연승호경」과 같은 경전에서는 대해 용왕이 사람으로 변하여 부처님이 머무는 기원정사로 찾아가 비구니가 되어 수도생활을 하였다는 내용도 나타나고 있다.
둘째, 인간 세상에 정법을 펼쳐서 이로움을 베푸는 용의 모습이다. 위에서도 말하였듯이 용에는 정법대로 행하는 선룡과 법대로 행하지 않는 악룡이 있다. 이들 용은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선룡과 악룡으로 태어나는데 선룡, 즉 법행룡은 때를 맞추어 비를 내리고 세간의 오곡을 성숙시켜 백성을 평안하게 하며 불법승 삼보를 깊이 믿어 수순법행으로 불사리를 수호한다. 이에 비해 악룡은 열사의 비를 내려 세상을 태우고 두꺼비를 삼키고 사토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바람을 들이마셔 뭇 생명이 있는 것들을 파괴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악룡의 등장이 단순한 선과 악의 대치로서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인간세상의 비리나 악행을 바로잡고자 한 인과응보의 교훈으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세상 사람들이 법행에 순응하는가 역행하는가에 따라서 선룡과 악룡이 각각 그 세력을 증대하게 된다. 세간의 사람들이 법에 순응하여 부모를 효도로 공양하고 사문과 바라문을 공양하며 정법을 수행하면 곧 법행룡인 선룡이 세력을 떨치게 되고, 반대로 중생이 법을 어기고 부모에게 불효하며 사문과 바라밀을 불경하면 곧 악룡이 그 세력을 떨치게 된 다는 것이다.
셋째, 경전을 봉안하고 있는 용의 모습이다. 용왕이 바닷속의 용궁에 경전을 안치 봉장하고 있는 내용이 여러 경전에 전하며, 따라서 경전을 용장이라고도 한다. 「용수보살전」에 따르면, 「화엄경」은 오랫동안 용궁에 감추어졌던 경이라 하며, 유명한 화엄사상의 대가 용수는 대룡보상에 의해 용궁으로 인도되고, 칠보로 장엄한 보장안의 경전들을 얻어 그것을 세상에 유포시키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용왕은 대승경전의 수호자로서 간주되고 있다. 이외에도 부처님 탄생시에 ‘난다’와 ‘우파난다’라는 용왕이 한 줄기는 따뜻하고 한 줄기는 시원한 청정수를 토하여 탄생불의 몸을 씻어 주었으나, 부처님이 나무 밑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이레 동안이나 큰 비가 계속되자 용왕이 나와 부처님 주위를 일곱 번 돌고 일곱 개의 머리로써 위를 덮어 비를 맞지 않도록 하였다는 등 부처님의 주위에서 부처님을 보호하고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서의 용의, 불법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법을 수호하고 세간중생의 이익을 증대시키며 경전을 봉안 수호하고 부처님을 보호하는 등,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어떠한 불교국보다도 우리나라에는 용에 대한 신앙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불교설화를 기록한 각종 문헌에는 용이 불법을 수호하고 나라를 지키는 초월자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사찰의 법당이나 탑 등에 무수히 장식된 용도 모두 호법신으로서의 역 할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이러한 호법룡의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용이 호법신의 위치를 굳히게 된 것은 진흥왕 이후 신라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이다. 특히 사찰의 창건연기에서 호법룡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 14년(553년) 2월에 궁전을 지으려 하였는데 그 땅에 황룡이 나타났다. 이를 심상치 않게 여겨 궁전을 불사로 고쳐 짓게 되었는데, 이 절이 바로 황룡사이다. 이때의 황룡이 바로 호법룡이라는 사실은 이후 자장법사에 의해서 알려지게 된다. 즉 636년(선덕여왕 5년) 당나라로 떠난 자장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불사리를 얻은 후 중국 태화지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홀연히 용왕이 나타나 황룡사를 지키고 있음을 밝히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항복을 받고 태평국가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하였다. 이에 자장은 귀국 후 호법룡이 지키고 있는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다.
호법신의 보호를 받아 창건된 황룡사와 황룡사 9층탑은, 당시 불안한 대외관계 속에서 국민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신념을 심어 주었다. 황룡사는 그 건립기간이나 규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국가적 신앙면에서도 당대는 물론 신라 일대에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대찰이었다. 이러한 황룡사를 세울 때 나타났던 황룡이 바로 호법룡으로서, 최초로 등장하는 호법호국의 용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황룡사 9층탑은 주위 모든 나라가 신라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져 영원한 불국토를 이룩할 수 있도록 두 손 모아 부처님께 기원하는 통일탑,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자장은 문수사리의 부촉을 받고 영축산 통도사를 창건하여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곳의 신지에는 아홉 마리의 독룡이 살고 있었다. 자장은 이 악룡들을 위해 설법하고 수계하여 그들의 나쁜 마음을 조복시켰는데, 9룡 중 다섯 마리는 오룡동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으로 가고 오직 한 마리가 남아 그 절을 호지할 서원을 세우므로 작은 못을 만들어 그 용을 머물게 하였다. 이는 설법을 통해 용의 나쁜 마음을 항복받고 호법룡으로 그 역할을 바뀌게 하는 개과천선의 의미를 짙게 풍기고 있다.
이후부터 우리나라의 사찰창건에는 이러한 유형의 설화가 많이 전해지게 되었다. 즉 악룡이 살고 있는 명당을 찾은 고승이 설법을 통하여 용을 감화시킨 뒤 그 자리에 사찰을 짓고, 그 용은 사찰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변화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신라 화엄종의 초조 의상대사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그를 사모하는 여인 선묘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의상의 인격과 도심에 감복되어 세세생생 의상이 불도를 성취할 때까지 학업에 필요한 물자를 대겠다는 대원을 세웠다. 그 뒤 의상이 선묘를 만나지 못한 채 귀국의 뱃길에 오르게 되자, 뒤늦게 선창가로 뛰어나간 선묘는 멀리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서원하였다. “원컨대 이 몸이 대룡으로 되어서 저 배를 무사히 갈 수 있게 하고 스님의 홍법을 도우리라.” 선묘는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의 뱃길을 편안하게 인도하였고 신라에 돌아온 의상을 도우며 호법룡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의상이 부적사를 창건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의상은 당시 도적의 무리가 들끓던 태백산에 화엄의 중심 사찰을 만들려 하였으나 도적들의 방해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호법룡이 된 선묘가 스스로 부석이 되어, 공중에 뜬 큰 바위로 도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그들을 물리치고 사찰을 창건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찰명을 ‘부석사’라 하였으며, 지금도 부석사에서는 석룡의 모습으로 사찰을 수호하고 있는 선묘호법룡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신라의 호법룡사상은 자장과 의상에 의해 널리 제창되어, 불국정토를 이상향으로 한 신라인들에게 더욱 깊은 불심과 통일에 대한 신념을 불어 넣었다.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은, 항상 왜구를 염려하여 사후에는 용으로 화하여 왜침을 막으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죽자 유언에 따라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해를 다비하여 그 유골을 동해 가운데의 큰 바위에 수장하였다. 현재 경주 동쪽 감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바로 그곳이다. 그 뒤 과연 문무왕은 용이 되어 나타났으며 이듬해(682년)에 신문왕은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기슭에 감은사를 세우고 금당 섬돌 아래에다 동해 쪽으로 구멍을 뚫어 용으로 화현한 대왕이 들어와 쉴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해 5월 초하루,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솟아났는데, 그 산 위에는 낮에는 둘로 되었다가 밤이면 하나로 되는 대나무가 나 있었다. 신문왕이 그 산으로 들어가니 한 용이 나타나 “이 대나무를 피리로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문무왕께서 대룡이 되시고 김유신이 천신이 되어 이들 2성이 마음을 모아 호국의 큰 보물을 내리도록 하였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에는 맑아져서 국태민안을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만 가지 파도를 잠재워 평온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였다.
이처럼 문무왕이 보여준 호국정신,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대원을 이룩한 호국사상은, 문무왕에 대한 흠모와 함께 이후 역대왕에게 동해호국룡 신앙으로 계승되었다. 효성왕과 선덕왕도 그 유명에 따라 동해에 유골이 수장되었으며, 혜공왕과 경문왕은 감은사로 행행하여 멀리 바다를 망견하기도 하였다.
한편, 원성왕 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원성왕 11년(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머물다 간 일이 있는데, 그 다음날 두 여인이 내정에 나타나 왕께 아뢰기를 “저희들은 동해룡과 천지룡의 처이온데, 당나라 사신이 데리고 온 하서국인 두 사람이 저희들 두 부룡과 분황사 우물의 용 등 세용을 주술로써 작은 고기로 만들어 통 안에 넣어갔습니다. 저하께서는 호국룡인 저희 남편들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많은 사신이 뒤를 쫓아 그들을 만난 뒤 하서인에게 “너희들이 왜 우리나라의 세 용을 잡아가지고 가느냐?”하고 호통을 쳐서 고기를 돌려받아 모두 제 자리에 넣어주니 다시 용으로 화현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수십 가지의 용과 관련된 불교설화가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한 여러 문헌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들 설화는 단순한 설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상과 정신적인 내면세계가 깊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호법호국의 용은, 통일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불교와 국운의 성쇠에 따라 그 양상과 성격이 변화되고 있다. 즉 진흥왕 때의 황룡은 황룡사 창건의 동기를 제공하였을 뿐 별다른 특색이 없었음에 반하여, 선덕왕 때 자장에 의하여 인식된 용은 호법룡으로서의 적극적인 모습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호법룡이 지키는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서 삼국을 통일하고 왜적의 침해를 막도록 하였으니, 호법룡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호국룡으로서의 매우 적극적인 사상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따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해룡이 용궁에 비장된 「금강삼매경」의 산경을 신라에 주어 대안대사로 하여금 순서를 맞추게 하고 원효대사로 하여금 소를 지어 강설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때의 용신은 신라의 불교와 국가를 수호하는 용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적극적인 홍법활동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동해룡, 그의 불사를 도운 선묘룡에게서도 적극적인 활동성을 볼 수 있으며 문무왕의 대원으로 화현한 동해호국룡, 명랑을 용국으로 초청하여 설법을 듣고 황금을 시주한 서해룡 등은 모두 활기찬 호법과 호국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성왕 때의 세 호국룡은 한낱 외국인의 주술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잡혀가는 허약하고 무능한 존재로 나타나 있다. 또한 진성왕 때의 거타지 이야기에 나오는 서해룡은 사미로 변한 여 우의 주술에 맥을 못추는 비참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고 보양을 따라왔던 용자 이목도 주벌을 피하여 법사의 의자 밑에 숨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가 크게 흥하고 국운이 창성하였던 진흥왕 이후로부터 통일을 완 성한 경덕왕대에 이르기까지는 한결같이 활기차고 적극적이던 호법호국룡이, 불교가 침체되고 국정이 혼란해지기 시작한 원성왕 때부터는 무력하고 허약한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 시대의 정신력과 국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신라인들은 불국정토의 이상 아래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오면서 독특한 호법호국룡 사 상을 이룩하였다. 숭불호국의 용들이 동해와 서해에서 그리고 사찰과 연못 등에서 신통한 능력과 위엄으로 신라의 불법을 수호하고 국가를 지켰다는 점에서 신라의 불교 국가적 위치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러한 용들은 불법을 숭상하는 국토가 아니면 머물지도 않을 것이며 불법이 없는 세간에는 출현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에 있어서의 호법호국룡은 숭불호국의 신라 불교정신이 낳은 필연적인 소산이며 불국정토의 가장 믿음직한 수호자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4. 권위와 길상의 상징
용은 우리 민족, 나아가서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초능력적인 상상의 동물로 그 위치를 굳혀 왔다. 민가와 조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민간신앙과 불교 또는 유교의 구분 없이 널리 수용된 용은 시대 및 수용분야에 따라 그 역할과 조화능력 등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인 이미지는 ‘권위’와 ‘길상’을 대표하고 있다. 단순히 사된 것을 방지하고 복을 기대하는 길상적인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을 갖춘 가장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형태의 길상자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최대의 권위와 적극적인 길상의 존재로 자리 잡은 용에 대한 관념은, 다양한 분야에서 유형, 무형의 다채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권위와 길상의 상징인 용은 옛 선비들에게 있어서 성취와 최상의 것을 의미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입신출세의 관문을 등용문이라 하고, ‘미꾸라지가 용이 되었다’ 또는 ‘개천에서 용 났다’하는 말은, 갑자기 크게 성공하거나 단계를 뛰어오른 사람을 말할 때 쓴다. ‘등용문’의 고사는, 중국 황하의 잉어들이 산서성에 이르면 높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서 상류의 협곡이 있는 용문으로 다투어 뛰어오르는데, 그곳을 넘어서면 잉어가 용이 된다고 하여 입신출세의 관문을 등용문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또한 중국의 유명한 화가 장승요가 용을 그린 후 눈동자를 그려 넣자 용이 갑자기 생기를 띠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성취하는 것을 화룡점정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가 꾸는 꿈 중에서는 용꿈을 최고로 치는데, 특히 태몽으로 용꿈을 꾸면 크게 될 인물을 잉태했다고 하여 집안의 경사로 삼는다. 이러한 대길의 용꿈을 몰래 간직하기 위하여 용꿈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오죽헌에 있는 몽룡실은 선비들이 용꿈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알게 하는 한 예이다.
용꿈에 얽힌 실화를 몇 편 살펴보자. 세조 때 홍재상이 낮잠을 자다가 문득 하늘에서 뇌상병력이 진동하고 청룡이 그에게 달려드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홍재상은 급히 시비 춘성과 관계를 맺었고, 그날부터 춘성에게는 태기가 있어 출산을 한 아이가 바로 홍길동이라 한다.
전북 정읍군 칠보면에 사는 함풍 이씨 문중의 이승지 아버지는, 어느 여름 돌확(돌로 된 조그만 절구)에서 청룡 세 마리가 나와 두 마리는 하늘에 오르고 한 마리는 올라가다 떨어지고 올라가다 떨어지고 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돌확에 가보니 큰 지렁이 세 마리가 있어 그것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나서 아들 3형제를 낳았는데 모두 인물과 재주가 뛰어났으며, 한 명은 승지가 되고 한 명은 대동군수가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 문과에 장원한 사람들의 모임을 용두회라 하였고, 군자의 덕을 칭찬하여 용광이라 하였으며, 뛰어난 인물을 용과 봉황에 비유하여 용봉이라 하기도 하였다. 또한 호걸이 민간에 숨어 있는 것을 용이 서린 것에 비유하여 용반이라 하였고, 천자나 영웅의 위엄을 비유하여 용의 비늘, 즉 용린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용은 십이지신의 하나로 진시의 시작신장의 임무를 차지하였고, 사신의 첫 번째 존재로 동방의 수호신 역할을 담당하였다.
십이지신장으로서의 조형은 신라시대 왕릉병 풍호석으로서 표현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불교식 장례에 쓰여진 현화로서 인신용면의 특이한 형상을 나타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청룡도는 사신도의 최고작품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풍수지리에서 좌청룡, 우백호의 신앙에 따라 우리 일상생활을 지켜주는 존재가 되고 있다.
이러한 좌청룡 우백호의 방위수호신은 점차 가장 강력한 두 동물, 용과 호랑이를 함께 설정함으로써 더 큰 힘을 얻고자 하는 소망에 따라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새해가 되면 ‘호축삼재 용수오복’의 뜻으로 대문에 걸거나 붙이는 「용호도」에서 이러한 민심을 잘 읽을 수 있다.
이밖에도 용과 호랑이의 기세를 함께 설정한 것으로, ‘용미에 범 앉은 것 같다’라는 말은 위엄이 넘쳐 타인을 억압하는 듯한 인상을 가리키며, ‘용호상박’이라 하여 막강한 두 사람이 서로 싸운다는 뜻을 담았다. 또한 ‘용양호시’라 하여 영웅이 일세를 응시하는 태도가 용처럼 활달하고 범 같은 눈초리로 본다고 표현하였고, 웅장한 산세가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듯하다 하여 ‘용반호거’라 하기도 하였다.
미술 분야에서의 용은 궁궐의 지붕이나 임금이 임하는 곳, 사찰의 법당을 비롯한 탑 종, 부도 등과 그림, 가구, 의류, 잡기, 문구, 장신구 등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 분야에 걸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구려시대의 변화에서부터 근세의 민화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나 유형적으로 방대하게 전하고 있는 이들 자료를 통하여, 고대 용 신앙이 불교와 습합되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사상이 융합되어 새롭고 독창적인 우리 용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벽사용 그림으로 그려진 용은 호랑이, 도깨비, 해태 등과 같은 다른 벽사용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친밀감이 넘치는 한국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작품 중에는 할아버지 얼굴같은 인자한 용을 비롯하여 어리숙한 표정, 토끼처럼 귀여운 표정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용의 얼굴은 전통 귀면과 일치되며 눈, 코, 입, 이, 뿔, 눈썹, 촉각, 수염의 표현으로 용의 관상을 결정짓는데, 때로는 용두를 남근형으로 그려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해학적인 면도 있다. 신흥사 대웅전의 계호석 석룡 조각은 부드러운 우리나라 용조각의 대표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신라시대의 이수조각은 귀염성을 여지없이 드러냈고, 조선조의 용 그림은 매우 해학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용 그림은 그 종류도 다양하여, 구름을 배경으로 삼는 운룡도, 물속에서 뛰어나오는 수룡도, 아무 배경도 없이 그려지는 반룡도, 한 쌍으로 꾸며지는 쌍룡도, 호랑이와 짝을 짓는 용호도, 호랑이와 힘 다툼을 하는 용호상박도, 용궁의 용왕으로 나오는 용신도, 하늘로 올라가는 승룡도,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어변성룡도, 용꿈을 그린 몽룡도 등이 있다.
글씨에 있어서도 용(龍)자(字)를 크게 쓴 글씨는 예로부터 선비들이 다투어 쓰던 글씨였다. 이는 용 그림을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용이 움직이는 것같이 아주 활기 있는 필력을 ‘용사비등’이라 하기도 하였다.
용조각은 용이 등장하는 미술품 중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분야이다. 특히 용 조각은 일반적인 길상의 의미를 넘어서서 조각된 용도에 따라 뚜렷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많아 흥미롭다.
전각의 지붕 위에 장식된 용은 이문이라 하여 목조건축물에서 가장 우려되는 불을 누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범종의 종뉴(용을 매달기 위해 종 위쪽에 있는 부분)에 조각된 용은 바다의 고래를 무서워하여 고래 모양의 당목으로 종을 치면 우렁차고 힘차게 우는 포뢰로 되어 있다.
돌비석에 조각된 비히는 무거운 것을 지기를 좋아하고, 산예는 연기와 불을 좋아하여 향로에 새기며, 살생을 좋아하는 애차는 칼의 콧등이나 손잡이에 새긴다. 이외에도 물을 좋아하여 다리의 기둥에 세우는 공하,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솥두껑에다 식기 또는 반기에 시문하는 도철 등이 있다.
이들 용은 모두 자신이 처해 있는 장소나 용도에 맞추어, 사된 것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특성을 발휘하면서 더욱더 강력한 수호자, 길상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반 민가에서 세시풍속에 따라 행하는 여러 가지 민속에서도 용과 관련된 다채로운 내용 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경남 밀양군 무안면에서 전승되는 용호놀이는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로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마을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용마을과 범마을이 새끼를 꼬아 거대한 줄로 용과 호랑이를 만들고, 각각 대장이 진두를 지휘하는 가운데 장정들이 대진하여 대결을 벌인다. 이러한 놀이를 통하여 용과 호랑이를 한바탕 혼쾌하게 대결시킴으로서, 한 해 동안 용호의 천변만화하는 능력으로 사됨을 물리치고 능동적인 기복을 소망하였다.
전북 남원지방에서는 섣달그믐이나 정월 대보름에 사는 곳을 남과 북, 두 편으로 나누어 각각 큰 용마를 만든 뒤 오체에 용의 무늬를 그려 외바퀴수레에 싣고 거리로 나오면서 백 가지 놀음으로 대진하여 승부를 겨루는 용마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악귀를 제어하고 재앙을 쫓으며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 위한 것으로, 남쪽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북쪽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 외에도 정월 들어 첫 진일(용의 날)에 부인들이 닭이 울 때를 기다렸다가 서로 앞을 다투어 물을 길어오던 풍습으로 ‘용알뜨기’가 있다. 이것은 전날 밤에 용이 내려와 우물 속에 알을 낳는데, 그 알을 낳아 놓은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면 그해 자기 집 농사가 잘된다고 하는 속신 때문이었다. 용알을 먼저 떠 간 사람은 그것을 알리기 위해 지푸라기를 우물물 위에 띄워 놓으며, 뒤에 온 아녀자는 알이 남아 있을 다른 우물을 찾게 된다고 한다.
또한 용을 이용하여 그해의 풍흉을 알아보던 ‘용의 밭갈기’라는 것이 있다. 「동국세시기」에 전하는 전설로서, 동지 무렵 함창의 공검지, 밀양의 남지, 당진의 합덕지, 연안의 남대지 등 못에 얼음이 얼면 그것이 흡사 극젱이(쟁기와 비슷한 농구)로 밭을 갈아놓은 득산 모습을 하고 있어, 그 지방의 옛 농민들이 이를 용의 소행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모양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갈아 나갔으면 풍년이고, 서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갈아 나갔으면 흉년이며, 동서남북으로 엇갈려 있으면 평년작이 된다고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이처럼 용은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뿌리를 내리고 광범위하게 성장되어 왔다. 왕권과 권위를 타나내는 상징으로서, 천변만화하는 조화로 물을 주관하는 수신으로서,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지키는 호국호법의 존재로서, 사됨을 물리치고 길상을 불러오는 벽사기복의 강력한 주재자로서, 그리고 우리나라가 위치한 동방을 지켜주는 방위신으로서 용은 우리 민족과 역사의 흐름을 함께하여 왔던 것이다. 용은 우리의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다. 용을 통하여 다채롭게 꽃피워 온 이 땅의 얼과 문화를 올바로 인식할 때, 우리 민족이 지녀 온 꿈과 이상을 함께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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