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三溪 崔慶會(1532~1593)
최경회(崔慶會, 1532 ~ 1593)는 문신이자, 임란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또는 일휴당(日休堂),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해주 최천부(崔天符)의 아들로 능주에서 태어났다. 양응정(梁應鼎)에게 배웠으며, 1561년 명종 16년 생원시에 합격,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에 이어 옥구, 장수, 무장의 현감을 역임했다.
후처인 주논개는 장수현감 때, 논개의 숙부가 민며느리로 팔아버린 것을 논개의 어머니가 되찾은 송사를 통해 알게 됐으며, 이들 모녀가 거처할 곳이 없자 관청에서 지내게 했다. 이후 무장현감으로 임명될 때 이들을 데리고 갔다. 이어 영암군수와 영해, 담양부사를 역임했다. 1590년(선조 23년) 모친상으로 낙향했다. 1592년 모친의 삼년상 기간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큰 형 경운(慶雲)과 둘째형 경장(慶長)과 함께 구국에 나섰다.
고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격문을 띄워 5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조카 최홍재로 하여금 고경명 장군의 휘하에 합류해 싸우게 했다.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이 전사하자 휘하였던 문홍헌 등의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됐다. 금산과 무주에서 전주와 남원으로 진격하는 왜병과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우지치에서 크게 격파했다. 그는 이 전공으로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 발탁됐다.
1593년 경상도병마절도사로 진주성에 주둔 중 6월 가토 기요마사 등이 다시 공격해오자, 관군측의 공성(空城) 전술을 구사하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전라도 의병인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마절도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 고종후(高從厚) 등과 분전했다. 그러나 9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결국 남강에 투신자살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됐다. 능주(화순)의 포충사(褒忠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장수 월강사(月岡祠)에 배향됐다.
18) 齎峯 高敬命(1533~1592)
본관은 장흥(長興), 호는 재봉(齎峯) 도는 이순(而順)이다.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에게 배워 1552년(명종 7) 진사, 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전적․정언․사가독서․공조좌랑을 역임했다. 1563년 교리로 재임할 때 인순(仁順)왕후 외숙인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했는데 그 결과를 알려준 사실이 발각돼 울산군수로 좌천됐다가 파직 당했다. 18년 후인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복직한 후 종계변무주청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동래(東萊)부사로 있다 기축옥사로 서인이 제거될 때 파직돼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돌려 6000여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그해 6월 1일 북상해서 13일 전주에 도착했다. 그는 아들 고인후(高因厚)으로 하여금 호남으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도록 하고, 자신은 22일 여산을 거쳐 27일 은진(恩津)에 주둔해 금산을 점령한 왜군과 싸우다 부자가 전사했다. 그는 석천 임억령 등과 식영정 4선으로 꼽힌다. 제자는 다음과 같다.
아들 고종후(高從厚)․인후(因厚)와 친척인 고경이(高敬履)․고성후(高成厚)․고순후(高循厚)․고용후(高用厚)․고유후(高由厚)를 비롯해 김응회(金應會)․김덕보(金德普)․박지효(朴之孝)․봉시중(奉時中)․송제민(宋齊閔)․심우신(沈友信)․양경신(梁景信)․송타(宋陀)․정준(鄭遵)․조홍립(曺弘立)․하대작(河大鵲)․홍천경(洪千璟)․이타녹 등이 있다. 그의 제자 가운데 홍천경(洪千璟)은 기축옥사 때 동향의 정개청(鄭介淸)을 후진과 사문을 어지럽히고, 스승을 배반했다고 상소했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 楓庵 文緯世(1534~1600)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숙장(叔章), 호는 풍암(楓庵)으로 장흥출신이다. 외삼촌 귤정(橘亭) 윤구(尹衢), 자형인 보성 박광전(朴光前), 유희춘(柳希春)등에게 배웠다. 14세 때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20년간 수학했으나 출사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과거시험에 응시하라는 강권에 못 이겨 1567년(명종 22) 진사에 급제했다. 정여립의 기축옥사가 일어나 동서파당으로 세상이 어지업자 교우관계를 끊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형 박광전 등과 의병을 모았다. 이때 스승 퇴계의 가르침에 따라 의병과 의곡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1595년 용담(龍潭)현령을 잠깐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과 의곡을 모아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등 공을 세웠다. 1600년 파주목사에 제수됐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타계했다.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병조참판의 관작을 추증 받았으며, 강성서원에 배향됐다.
안항공파 32세.전남 강진출생.서울 거주.
오늘도 여전히 원산형님께서 역사 공부를 하게 해주시네요.잘보고 갑니다.
부장공/35세/63년/김천생/일산거주
논개의 성씨가 주씨인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기구한 삶이었지만 우리 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애국자네요. 오늘 소개된 세분 모두 의병을 모아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시네요.
야운.68년. 관산용전.서울 신설동.부동산중개업
논개가 기생이다! 아니다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안주씨 문중에서도 한 때 방치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최경회의 고향 화순의 해주최씨는 현재 논개를 어떤 위치에 놓고 있느냐인데요, 해주최씨세보에는 최경회 첫부인 나주김씨, 재취부인 여흥민씨, 의암부인 신안주씨 로 기록되어 있고, 1배와 2배는 정경부인이라고 했고, 신안주씨는 부실로 수록하였습니다. 이 논개에 대하여 해주최씨 문중에서도 어떻게 처리할까를 논의하여 1975년에 족보에 수록하였다고 합니다. 신안주씨에서 낳은 후손도 고려하였으리라고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