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km 마라톤
이 미 나
교수님이 전공 강의를 마치고 나가시자 남자 과 대표가 과 동기들에게 공지할 것이 있다며 앞에 나왔다. “우리 과가 소속된 이과 대학에서 4·19 혁명을 기념하여 10km 마라톤 대회를 한다고 해,
한 과에서 장거리 잘 뛰는 남자 두 명, 여자 두 명이 뽑아서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데 선수로 나갈 사람 손 들어 줘” 난 귀가 솔깃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단거리 달리기도 잘하고 장거리도 잘 뛰어 늘 반에서 1등을 했던 내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과 대표가 예상 밖이라는 듯 “미나 네가 10km 마라톤을 뛰겠다고! 몸도 약한 것 같은데 무리 아니겠어.” 하며 한사코 만류했다. 다른 아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딱히 다른 아이가 지원하는 것도 아니니 말릴 수는 없다는 식었다. 사실 나도 이제껏 해 본 종목은 800m의 오래달리기였는데 10km 마라톤을 뛸 수 있을까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장점인 끈기를 발휘한다면 1등으로 들어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나의 이력도 모르고 나의 왜소한 체격을 보며 과 대표와 아이들이 ‘넌 어림도 없다’라는 편견을 갖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어느덧 일주일 후 대학교 교정에서 대회를 시작했다. 각 과를 대표하는 신장이 길고 체격이 좋은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나만 유독 키도 작고 체격도 아담한 편이어서 기가 죽었다. 주최 측이 나눠 준 번호표를 등에 달고 몸을 풀고 있는데 과 여자 동기 한 명이 “미나야 너 완주는 할 수 있겠니?” 코웃음 쳤다. 난 속으로 ‘흥! 어디 두고 보자! 이따 결승선에서 내가 1등으로 들어올 때 놀라지나 말아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얼마 후 “탕”하는 총소리와 함께 각 과 대표 선수들이 뛰기 시작했다. 원래 산이었던 땅에 대학을 세워서 정문에서부터 마지막 건물까지 경사진 구조여서 달리는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초반에는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지치기 시작했다. 빨리 달려 앞에 뛰는 선수를 따라잡아야 1등을 할 수 있는데 뒤에서 달려오는 선수들에게 추월당하다가 결국 5명의 선수에게 순위를 내주게 되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있는 힘껏 달려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숨이 차올라 더 속력을 내는 건 무리였다. 고통스러웠다. 생각 같아선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내 신조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이미 예상했다는 듯 한심하게 쳐다보는 과 아이들의 표정이 그려졌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극한의 속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며 목표를 이뤄내는 강한 의지의 인물을 떠올렸다.
‘그래 1등은 못해도 어떻게 하든 끝까지 뛰자’ 더욱 날 몰아붙였다.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을 힘겹게 뛰어 올라섰다. 뛰면서 내 순위가 궁금하여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꼴찌인가 보구나’ 실망감에 마음이 괴로웠다.
‘늘 내게 불가능이라 말하는 세상에 이 대회에 1등을 하여 설욕을 하고 싶었는데….’ ‘내 목표가 수포가 되다니…. ’서러움이 북받쳤다. 세상은 항상 교육자이신 부모님과 공부 잘하는 두 동생을 나와 비교하며 학업뿐만이 아니라 어떤 것에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한심한 아이라 놀리지 않았던가.
그때 내 나이 19살, 다른 사람들은 중년기에나 찾아온다는 화병이 이미 엄습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글쓰기 상과 학업 우수상 등 여러 상을 받은 행복한 시절은 잠깐이었고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성적은 하향곡선을 그렸다. ‘넌 대체 누굴 닮은 거니?’ 아이들의 짓궂은 놀림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넌 더러운 유전자만 물려받았나 보다.’ 못된 여자아이의 비웃음이 들려온다. 모욕감에 치가 떨렸다. 항변하듯 강한 독기를 품으며 후반 지점인 대학 정문까지 죽을힘을 다해 뛰어나갔다.
얼마 후 힘겹게 정문을 통과했다. ‘완주는 할 수 있겠구나 ’ 안도했다. ‘이제 마지막 언덕만 넘으면 결승점이다’ 너무나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았다. ‘ 안 돼’ ‘이미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해’ 계속 나를 다그쳤다. 그러면서 꼴찌로 들어오는 내 신세가 서러워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군분투하며 내달리는데 갑자기 ‘와’ 하며 커다란 함성이 들려온다. 대학 정문 가장 가까운 공과대 건물 앞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나를 보더니 ‘저기 여자 1등이 들어오고 있다!’ ‘정말 대단하다! 10km를 뛰다니! 일제히 일어나 큰 박수을 치며 감탄한다.
‘뭐! 내가 1등이라고?’ 뛰면서도 난 믿기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날 앞서나갔던 5명의 선수가 모두 남자였다. 교정을 지나가던 다른 학생들의 시선도 다 내게 꽂히고 있었다. 난 그제야 벅찬 가슴으로 뛰어갔다. 결과를 기다리던 주최 측과 우리 과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우리 과 미나가 1등이야! 이게 웬일이야!’ 놀라움 속에 손뼉을 치는 학생들의 환호를 받으며 드디어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기절해 버렸다. 기쁨도 잠시, 과 선배들과 동기들은 혼절해 버린 내게 달려왔다. 과 선배가 나를 등에 업고 승용차에 태워 여러 선배들과 학교 양호실로 나를 옮겼다. 과 친구들은 “장하다! 미나야! 네가 여자 1등 했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의료진의 조치를 받은 뒤 숨을 고르고 안정을 취하자 경기 후 바로 이루어진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한 나를 배려해 과 대표가 상장과 상금을 전달해 주었다. 내가 결승선에 들어온 지 한참 후에 2등이 들어왔다며 다시 한번 나를 치켜세웠다.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한 성취감과 날 과소평가한 아이들에게 내가 의지가 강한 아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서 뿌듯했다. 이처럼 앞으로 인생에 다가오는 역경을 이겨내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면 인내를 가지고 이뤄나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농부가 봄에 씨를 뿌려 열심히 농작물을 경작하여 추수하는 날 알곡이 가득한 수확물을 얻듯 내 인생도 알찬 열매가 거두어 드리기를 기도해 보았다. 모처럼 홍성에 계시는 부모님과 할머니께 내가 10km 마라톤에서 1등을 했다고 얼른 전화를 드려 봐야겠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