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의 수학 수준은 어땠을까. 다음 문제를 풀어보자.
“지금 소 2마리와 양 5마리를 팔아서 돼지 13마리를 사면 1000전이 남고, 소 3마리와 돼지 3마리를 팔아서 양 9마리를 사면 금액이 딱 맞아떨어지며, 양 6마리와 돼지 8마리를 팔아서 소 5마리를 사면 600전이 모자란다. 소·양·돼지의 값은 각각 얼마인가.”(今有賣牛二羊五 以買十三豕 有餘錢一千, 賣牛三豕三 以買九羊 錢適足, 賣羊六豕八 以買五牛 錢不足六百. 問牛羊豕價各幾何.)
눈에 익은 3차 방정식 문제다. 신라시대 산학자들의 교재 가운데 하나인 『구장산술(九章算術)』에 실려 전해온다. 이 문제에는 “방정식으로 풀어라. 소 값은 1200전, 양 값은 500전, 돼지 값은 300전(‘術曰:如方程, 答曰: 牛價一千二百, 羊價五百, 豕價三百’)”이라는 답이 달려 있다.
허성도(60) 서울대 중문학과 교수. 각종 CEO 포럼과 지자체 교양강좌를 통해 한국역사 재발견의 메시지를 던지는 한학자다. 허 교수의 강의에 청중은 “정말 그랬나?”라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그러면서 특강 요청도 급증하고 있다. 강의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 서울대 연구실을 찾았다.
“300년 후, 오늘날 대한민국의 역사를 쓴다고 합시다. 이렇게 쓸 수 있죠. ‘서울역을 비롯한 전국의 역에 극빈자들이 넘쳐나는데, 정부는 구휼미를 내주지 않았다. 비참했다. 청년 실업은 심각했다’. 또 어떤 사람은 딴판으로 쓸 것입니다. ‘세계 10대 경제대국 반열에 들었다. 국민은 단군 이래 최고로 풍성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둘 다 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옛 역사를 부정적인 면, 문제점 위주로 배웠습니다.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삼국시대 조상들이 방정식과 삼각함수·원주율을 터득했고, 일식 계산도 독창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중문학과 교수가 왜 한국사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허 교수는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지인 경주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분명 물리학, 수학이 발달했을 것’이라는 영감을 떠올렸다. 훗날 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일본 역사서를 보다가『구장산술』이란 중국 수학책이 삼국시대에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왔다는 내용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중국 유학길에 『구장산술』 책부터 구해서 봤죠. 서양 학문으로만 알고 있던 수학의 내용들을 이미 삼국시대 우리 선조들이 터득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문이 전공이니, 우리 사료를 번역하고 컴퓨터에 입력하는 작업에 매진하면서 역사를 천착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사의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국사학자가 아니니까, 정치사보다 문화·과학·사회제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봤습니다. 긍정의 역사 말입니다. 로마사만 화려한 게 아닙니다.”
허 교수는 조선 왕조 500년을 보는 시각부터 교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조선은 505년 만에 망했다. 망한 이유가 뭔가’를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이유는 네 가지, 즉 사색당쟁, 쇄국정책, 반상제도, 성리학의 공리공론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달달 외웠죠. 이 중에 ‘3가지를 답하라’고 하면 쇄국정책을 뺐습니다. 다른 나라의 왕조가 600년, 700년을 간 데 비해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그 원인을 연구하는 게 맞죠. 그러나 세계사 연대기를 봅시다. 조선은 500년간 이어진 유일한 나라입니다. 당연히 그 저력을 연구하고 알리는 게 맞죠.”
백제·신라, 일식 정확하게 예측
-그런 사실이 왜 교과서엔 실리지 않았을까요.
“정치사 중심으로 역사를 봤기 때문입니다. 문화사·과학사·법제사·인권사 이런 것을 연구하고 알려야 하는데, 정치 중심의 역사를 배우고 그게 다인 것처럼 여기게 된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삼국시대라고 하면 싸우는 장면만 머리에 연상되잖아요.”
-최근 인기를 끈 TV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일식을 예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삼국사기 신라 애장왕 2년(801년) 기록에 ‘壬戌朔, 日當食, 不食’이란 구절이 나옵니다. “임술 초하루에 일식이 당연히 일어나야 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솔직한 기록이죠. 일식·월식을 정확히 계산하는 ‘오폴처 표’에 따르면 그날 일식이 있었습니다. 관측을 제대로 못 했을 뿐입니다. 백제 위덕왕 19년 기록엔 “十九年 秋九月庚子朔 日有食之”(19년 9월 경자 초하루 일식이 있다)라고 돼 있는데, 오폴처 표 계산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관측되는 일식이 있었습니다. 중국에선 관측이 어려웠고, 중국의 기록에도 없습니다. 백제의 독자적인 일식 관측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죠. 축적된 지식과 경험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중국의 것을 전수받은 것이라며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있지 않나요.
“나는 ‘우리가 최초’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과학자 이순지(1406~1465)는 ‘지구는 둥글다’고 얘기합니다. 여러 문명권에서 그런 개념들이 나왔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둥글고 땅은 사각형이라는 게 보편 진리로 여겨지던 시대, 음기가 강해져 월식이 생긴다고 하던 시대에, 그는 월식을 설명하면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지는 게 월식인데, 사각형이면 그림자가 직각이어야 한다. 그림자로 볼 때 지구는 둥글다’고 주장합니다. 또 조선 국왕은 동짓날 중국에 조공 사신을 보냈는데, 달력을 얻으러 가는 게 주목적이었습니다. 이순지가 세종의 지시로 들여온 이슬람 음력 달력 ‘회회력(回回曆)’을 우리 위도에 맞게 조정합니다. 중국보다 35년 앞섰습니다. 당시 달력을 스스로 제작할 수 있는 나라는 중동 지역과 중국·조선밖에 없었습니다. 한국과학사협회에 따르면 1400년대 수학과 시간 개념에서 조선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문화는 원래 주고받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우리 것으로 소화해 발전시키고 향유했느냐입니다. 지금 우리가 선진국에서 습득한 컴퓨터기술을 발전시켜 최고 수준의 정보기술(IT)을 보유하고 전자제품을 수출하지 않습니까. 조상의 과학 DNA가 축적돼 있는 덕택이지요.”
허 교수는 이어 김석문(1658~1735)과 홍대용(1731~1783)으로 이어지는 과학적 업적을 소개했다. 김석문은 『역학도해』를 통해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하고, 태양과 수성·금성·달·화성·목성·토성의 크기를 측정했다. 홍대용의 『주해수용』에는 오늘날 중·고교 수학 문제들이 그대로 나온다. “구체(球體)의 체적이 6만2208척이다.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하루에 토성은 2분을 가고, 목성은 5분을 가며, 화성은 35분을 간다. 각 별의 1주천(周天)을 구하라”는 식이다.
합리적 시스템이 조선의 힘
조선 왕조가 500여 년간 이어진 것은 합리적인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이 구축돼 있기에 가능했다는 게 허 교수의 진단이다. 또 하나는 백성의 힘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구호는 나의 이익이 아니고, 사회의 부정 부패를 규탄하는 거죠. 민란이 일어난 뒤 국고(國庫)가 쭉 불어납니다. 부패가 줄었기 때문이죠. 그 뒤 다시 민란이 일어나는 사이클이 신기하게 돌아갑니다.”
-옛날에 보통사람의 인권은 어땠는지요.
“세계에 자랑할 인권 개념이 있었습니다. 세종은 노비가 출산하다 죽는 일이 잦자, ‘산후 100일 휴가에 더해 사전에 한 달 휴가를 줘야 한다’(『세종실록』 12년 10월 19일)고 했습니다. 4년 뒤에는 ‘노비의 남편도 아내가 출산하면, 만 30일 뒤에 일하게 하라’(『세종실록』 16년 4월 26일)며 일종의 육아휴직제를 시행했죠. 비슷한 시기에 노예를 대하는 유럽의 인권개념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가끔 사극을 보면 ‘저 여인을 하옥하라’고 한 다음, 곤장을 치는 장면이 나오죠? 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귀양 가는 장면도 있고요. 『추관지(秋官志)』엔 70세 이상 노인은 유배 보내지 않고 여자는 장형에 처하지 않는다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여성의 경우 장형 자체가 여성성을 모욕한다고 본 거죠. ‘15세 이하 청소년과 70세 넘은 노인은 사형죄가 아니면 구속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행려병자가 죽어도, 반드시 사인을 알아내고 묻었습니다. 지방에서 보고가 올라오면, 형조에서 억울한 죽음이 아니었는지 밝혀내라고 다섯 차례나 재지시해 결국 살인범을 잡은 기록이 나오죠. 물증주의를 엄격히 지켰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500년 실록을 가진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왕조실록은 왕도, 신하들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전쟁 중에도 쉬지 않았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기록했습니다. 조선이 망해도 한반도의 역사, 이 땅에서 살아가는 후손들의 역사는 유구하다는 역사관을 갖고 있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이걸 교훈 삼아 더 강한, 멋있는 나라를 만들어라’는 취지 아니겠습니까.”
-우리 사료는 어느 정도 번역됐는지요.
“조선 472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왕의 비서실 회의록인 『승정원 일기』, 역대 왕의 언행을 적은 『일성록』 등은 엄청난 국가 자산입니다. 이를 포함해 30만 건의 기록물이 있지만, 번역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우리의 진실된 문화사·수학사·과학사·법제사를 찾아내려면 각 분야의 전공자 가운데 한학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서당 한문만 하는 사람들은 전문 분야에서 막히죠. 국가와 기업이 인력풀을 양성해야 합니다. 『동의보감』 말고도 얼마나 사료가 많습니까. 연구하다 보면, 에이즈 치료제도 발명할 수 있을 겁니다. 인권·사회제도를 제대로 연구하면 우리 역사도 세계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코리아 브랜드를 올리는 첩경이죠. 이젠 그럴 만한 국력을 가졌습니다.”
허성도 교수는
1949년생.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박사) 뒤 충남대·서울대에서 가르쳤다. 국내 최초로 한국사 사료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일부를 CD롬에 담았다. 99년 『삼국사기』 번역본·원문 CD를 무료 보급했다. 자신의 중국어 입문 강좌(basicchinese.snu.ac.kr)와 어법 강좌(vod.snu.ac.kr/wbi/wbi_total/2008_2/chinese_grammar/) 동영상을 무료로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서울대 강의 일부는 국민 누구나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서울대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봉사”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