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먼저 아우 먼저 의좋은 형제’ 라는 글씨가
돌로 세겨져 있는 여기는, 이성만 형제가 실제 살
았던 충남 예산의 대흥마을이다.
「옛날 한 마을에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좋고 부모에
게 효성이 지극한 형제가 살았는데 동생이 후에 결혼
을 하여 따로 살고 농사도 따 로 짓게 되었다.
어느덧 가을이 되어 각자 벼를 추수한 형제는 형은
아우가 새로 살림을 꾸려서 나갔으니 더 많은 벼가 필
요 할 것이 라고 생각했고 동생은 형이 조상의 제사를
모시니 벼라도 더 가져 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형에게 볏섬을 준다 해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한 동생은 밤에 형 몰래 벼 한 섬을 형의 집에 가져 다
두고 형 역시 동생이 볏섬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하여 밤 아우네 집에 벼 한 섬을 두고 온다.
분명 볏섬을 가져다 두었는데도 자신의 벼가 줄어들
지 않아 이상 해하던 형제는 매일 밤 서로의 집으로 볏
섬을 가져다 두게 된다.
그러던 어느 달 밝은 밤에 형제는 서로가 매일 다니
던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때서야 비로소
볏섬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 를 알게 되어 서로 얼싸안
고 눈물을 흘렸다.」
60년 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에 배운 ‘의좋은 형제’ 의
줄거리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 내포 땅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썼
는데, 동화 속 ‘우애 좋은 형제 이야기’ 고장인
지금의 충남 예산을 말한다.
좌측 초가집이 아우 이순 집, 오른 족 초가집이 형 이성만 집.
충남 예산 대흥에 실제로 살았던 이성만 이순 형제의 우애를 다룬 ‘의좋
은 형제’ 이야기는,조선 초기인 세종 때에 형제애가 귀감이 된다하여 초등
학교 교과서에 50년간이나 실렸었다.
「이성만은 아우 순과 더불어 부모를 잘 섬겨 마음을 다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매양 봄가을에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 부모의 아끼는 친구들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어 그 마음을 기쁘시게 하였다.
돌아가신 뒤에는 형은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고, 아우는 아버지의 무덤을 지켰다.」
「세종실록」에 전해지는 이성만 형제의 효행이란다.
조선시대의 자료인 「동국삼강행실도」에서도 잘 묘사되어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동국삼강행실도」에 묘사된 이성만 형제
교과서에서 볼 수 있었던 친숙한 이야기 ‘의좋은 형제’는「신증동국
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으며, 연산군 3년(1497)에 이성만 형제의 갸륵
한 행실에 왕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모범되게
하라는 173자를 기록한 효제비를 세웠다.
‘이성만 형제 효제비’가 1978년 예당저수지에서 발견됨으로써 의좋은
형제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964년부터 2002년까지 초등학교 국어 국정교과서에 내용이 실린 이
형제 이야기가 왜 빠져 버렸는지 의구심이 든다.
이런 형제의 우애 이야기는 학생 교육에 있어 더없이 필요한 21세기에
말이다.
첫댓글 귀감이 될만한 좋은 본보기입니다...수고하셨습니다...
어렸을적 배운적 있으시죠.
볏단을 메고 밤새 나르는 형제 이야기....
그 형제가 이순. 이성만인데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