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석유회사 쉘(Shell)이 러시아 사할린-2 가스 채굴및 LNG(액화천연가스) 프로젝트에서 '악몽과 같은' 철수의 시작을 발표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가 24일 보도했다. 쉘의 러시아 철수는 사할린 프로젝트에 대한 지분 27.5%를 매각하는 것이지만, '눈물의 거래'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쉘은 중국의 3대 에너지 기업인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CNPC), 시노펙(Sinopec), 중국해양석유그룹(CNOOC) 등과 매각 협상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기업외에는 매입 의사를 가진 곳이 없으니, 쉘측은 '울며 겨자먹기'로 중국측과 거래를 해야 할 판이다. 최대 손실 추정액 50억 달러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목표다.
파이낸셜 타임스(FT), 쉘의 러시아 사할린-2 프로젝트 철수 시작 인지/얀덱스 캡처
쉘 뿐만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두달을 넘기면서 러시아 진출 다국적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떠나자니, 천문학적인 손실을 안아야 하고, 남아 있자니, 앞날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25일 진행된 1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서강현 현대자동차 기획재경본부장(부사장)은 “올해 1분기 러시아의 현대차 판매는 25% 감소했다”며 “급변하는 러시아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계획을 수립했다”고 말했다. 서 본부장은 “러시아로 수출하는 자동차 부품들을 다른 곳으로 바꿀 것"이라고도 했다.
현대차는 3월 초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현지 공장 문을 닫았다. 부품 조달에 차질이 빚어진 측면도 있지만, 국제 사회의 여론도 무시하지 못한 것으로 관련 업계는 보고 있다. 지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때와는 시장 여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서방 자동차 제조업체가 철수했지만, 현대차는 눈물을 머금고 러시아에 남아 버텼다. 그 결과, 시장 점유율 1, 2위를 다투는 입지를 구축했다.
현대자동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홈피
그러나 현재 상황은 다르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트렌드가 확산된 지금은 러시아에서 생산이나 판매를 늘렸다간 글로벌 보이콧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고민이 깊어갈 수 밖에 없다. 러시아 정부는 또 완성차와 자동차 부품들을 '병행 수입'(통관 절차 사실상 폐지) 대상 품목으로 지정했다. 현대차의 관리및 통제망에서 벗어난 차량과 부품들이 러시아 시장에 유통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일부 다국적 기업들은 러시아 시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꼼수'를 동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달 22일 글로벌 소비재 기업들이 일부 '생활 필수품'을 제외하고 러시아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생필품으로 보기 어려운 품목들을 여전히 내놓고 있다고 폭로했다. '레이'의 감자칩, '질레트'의 면도기, '에어윅'의 실내용 방향제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잘 알다시피 '레이'와 '질레트', '에어윅'은 해당 분야 세계 선두권 브랜드다.
모회사인 펩시코, P&G, 레킷벤키저 등은 지난 2월 일부 생필품을 제외하고 러시아에서 제품 생산및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생필품의 분류 기준. 여론이 악화하자 이들 글로벌 기업들은 러시아 시장 철수를 다각도로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슈퍼마켓(위)와 한국 식품 진열대/바이러 자료 사진
블라디보스토크의 편의점/바이러 자료사진
외신에 따르면 미국 예일대 최고경영자리더십연구소는 다국적 기업들의 러시아 비즈니스를 분석해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처음에는 러시아에서 사업을 철수하기로 한 기업과 잔류 기업으로 나눴다가, 이제는 실질적인 조치 내용을 바탕으로 기업들을 '5개 그룹'으로 구분해 공개한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러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으로 평가되는 업체(1그룹)는 160여 곳이다. '눈물의 지분 처분'에 나선 쉘을 비롯해 에어비앤비, 이베이, 넷플릭스, 우버, 스와로브스키 등이다. 향후 복귀 가능성을 열어둔 채 일시적으로 사업을 중단 혹은 축소한 기업(2그룹)은 매장의 문을 닫은 아디다스와 나이키, 3M, 아마존, 비자및, 마스터 카드, 마이크로소프트, 스타벅스 등 180여곳이다. 공장 가동을 사실상 중단한 현대차와 삼성, LG도 이 그룹에 속한다.
골드만삭스와 HSBC, JP모건 등 20여 기업은 일부 사업을 축소한 3그룹에, 네슬레와 던킨, 하얏트, 화이자 등 50여 기업은 사업은 계속하되 신규투자나 개발, 마케팅 등을 중단한 4그룹에 속했다. 의약품과 백신, 의료기기 업체 등은 '윤리적 책임'을 근거로 러시아에서 사업을 고수하고 있다. 아스트라제네카와 노바티스, 바이엘 등이 대표적이다.
1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은 비즈니스 측면과 국제 여론 사이에서 계속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서기도 한다. 소속 근로자와 공급업체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공장 가동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거나, 러시아 업체와의 합작 또는 프랜차이즈 협정에 묶여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는 기업들도 나왔다.
펩시콜라의 펩시코 그룹 CEO는 직원들에게 "우리는 사업의 인도주의적 측면에 충실해야 한다"며 "이는 우유와 같은 일상적인 필수품 등을 러시아에 계속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의미"라고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러시아 정부는 눈치를 살피는 외국 기업들의 등을 두들기는 입장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 안보회의 부위원장(전 대통령)은 "서방 기업들은 러시아 시장을 잃고 싶지 않고, 정말 돌아오고 싶지만, 사실 두렵다고 말한다"며 "미국 등 정부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아니라 '독재의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러시아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며 기업의 선택을 압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메드베데프 부의장, 러시아 (시장) 복귀 희망 서방 기업들의 두려움에 대해 말했다/얀덱스 캡처
실제로 러시아의 압력도 만만치 않다. 집권여당 '통합러시아'의 고위 인사는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정한 (비우호적인 국가들의) 외국 기업의 재산을 국유화할 것을 제안했고, 작업을 중단한 제조업체에 대해서는 재산권및 주식 의결권을 제한하고, 자산을 동결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급기야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는 푸틴 대통령에게 "외국 기업이 '비합리적으로' 문을 닫으면, 정부가 '외부 관리'(우리식으로는 법정관리) 도입을 추진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푸틴 대통령도 이에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공장 문을 닫으라"는 각국 정부의 압력에 "문을 닫을 경우 각오해라"는 무언의 폭력으로 맞서는 듯한 형국이다.
다국적 기업들로서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입장인데, 선택의 시간은 자꾸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