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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신학”을 외친 “위르겐 몰트만”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7세 때, 독일군으로 징집되었다가,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당한 좌절과 모욕과 고통으로,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또, 자신의 고향인 함부르크가 폭격으로 망하고, 가족들도 폭격으로 다 죽었다는 말을 소식을 듣고는, 완전히 절망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을 삶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때, 수용소의 포로들을 돌보던 영국군 군목이 포켓용 신약성경을 건네주었습니다. 몰트만을 군목이 자신을 대하는 것을 보고, 그가 건넨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을 통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죽은 지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사건은, 절망에 빠진 청년 몰트만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습니다. 몰트만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자신도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함부르크가 다시 부활할 수 있고, 패망한 독일이 부활할 수 있고, 자신이 새로운 가족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희망과 믿음 속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몰트만은 어둡고 캄캄한 절망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인해, 광명한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절대 절망의 자리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본문 역시, 몰트만과 같이 절망에 빠진 시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자신의 유일한 희망으로 삼았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이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인도하시되,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권능으로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문제든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막을 자는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 16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갈 때 부르던 찬양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오는 순례길에서나 그들의 삶 속에서나 참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본문 1 - 2절에서의 고백처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이 고백이 이제는 성도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성도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지켜주실까요? 성도된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된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심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본문은 구약이지만, 구약이 전하는 것은, 신약에서 전하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권능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키고,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 - 2절을 보시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합니다. 여기서, “도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에제르”이며, 그 뜻은 “지원하다, 구조하다, 구원하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시인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 빠졌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도움이 어디서, 어떻게 올 것인지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그의 눈이 주변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산을 향해 있다는 겁니다. 곧, 우리가 절실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있을 때, 우리는 주변을 살피며, 자신을 도울 자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주변을 살피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는 겁니다. 일반 사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의 “산”은, “백두산, 한라산, 태백산, 지리산”과 같은 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산은 영원성과 불변성, 전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종종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거룩한 산 “시온”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시인이 바라본 산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홍해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던 모세와도 같았던 겁니다. 여러분, 아무리 작은 단체라도 그 속에서 도움이 필요하면, 그 단체에서 권세를 행하는 자를 찾고 의지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줄을 잘 서야 한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어려움과 위기 앞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구해줄 존재를 찾기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참된 도움이 될, 힘과 도움은 골짜기와 같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힘, 곧 권력과 재력과 권세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릴 수 있는 안개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것을 찾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발견하는 것은, “절망과 슬픔”뿐입니다. 그래서, 시 146: 3 - 4을 보시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제는 우리를 사랑한다고 했다가 오늘은 미워한다거나, 큰 실수를 했으니 이제는 자녀가 아니라고 했다가 이번에는 잘했으니 다시 자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조변석개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신뢰할 수도 없고, 신뢰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히 13: 8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며, 약 1: 17을 보시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영원하신 사랑과 긍휼로, 불쌍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시공간을 떠나 영원토록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라도, 심지어 우리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패역한 잘못과 실수로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겁니다. 한치의 변함도 없이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 - 6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도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본문 5절에서 “오른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미네카”의 뜻은 “오른손”으로, 성경에서 종종 “탁월한 힘과 능력, 권세”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오른쪽”은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늘”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영원하신 권세로서 보호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기후가 열대인지라 낮의 해는 너무 뜨겁고, 밤은 너무 추워서 역시 두려운 기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해 주십니다. 그 예로,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할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를 해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언제나 범사와 영육 간에 완전히 지켜 주심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평안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겨야 합니다. 사 41: 10을 보시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있는 우리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하는 순종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에 밀려 믿음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방파제와 같기 때문입니다. 방파제가 튼튼하면 파도가 쳐도 두려움이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 많은 문제와 환난이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 23: 4절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의 해가 상치 아니하고, 밤의 달도 해치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주 안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 - 8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보면, “면하게 하다”라는 말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을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모든 환난으로부터 너를 지키시고 그는 너의 영혼을 지키실 것이다”입니다. 결국, 시인은 본 구절에서, “지키다”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함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심을 철저하게 강조하였던 겁니다. 시인은 시 121편 전체에서, “지키다”라는 단어를 모두 여섯 번 반복함으로,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완전성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인이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완전성을 강조하는 것은, 성도된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지켜주고 보호하심을 모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10년, 20년 교회 다닌 것을 앞세워 성도라고 하는 사람 역시,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현실적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는, 태도와 선택이 달라집니다. 그것은, 애굽에서와 홍해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호하셨는지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하던 이스라엘과도 같습니다. 또, 모세 당시, 여리고 성을 정탐한 정탐군들의 보고를 받았을 때, 이스라엘이 선택한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지켜주심, 그리고 인도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였다고 해서, 고난과 환난을 면제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이기에, 고난과 환난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어떠한 환난이나 곤경 속에서도, 우리를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 어디서나 지키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가장 최선의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은, 어둡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가 됩니다. 또, 세상이 변하고, 북한을 비롯하여, 미국, 러시아, 중국등 일부 강대국들이 앞세우는 핵폭탄이나 수소폭탄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되지 않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며,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된 우리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어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심으로, 세상의 그 무엇도,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빼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품은 우리의 피난처요, 보호처요, 힘이요, 방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항시, 본문의 시인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지키심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