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세 번 꼬박꼬박
슬픔의 밥덩이와
눈물의 국물을 넘긴다
쿡쿡거리며
슬픔을 눈물에 말아 억지로 삼킨다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모래알 같은 삶을
성긴 잇몸으로 씹어야 한다
매일 아침 어머님 손맛 나는
된장국이 아니었다면
차마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된장냄새를 따라
철창을 열고 들어오시는 노모님
굽은 등 뒤편으론
창살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난해한 성경을 읽듯
어머님 주름살에서
고뇌에 찬 기도문을 읽는다.
* 김석태 시인 프로필
1950년 문경 마성 신현 출생
1995년 문예사조 수필, 1997년 문예사조 시 데뷔
전)문경문협지부장
전)문경시민신문 발행인
현)한국문협, 문경문협 회원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경북본부 회원
민추협 위원
시집
독백, 화해와 상생, 아듀 독선행정이여! 등 다수
산문집
아름다운 이별과 만남을 위하여,
에밀졸라이고 싶었다(옥중 육필 수상록)
어느 법학도의 고뇌 등 다수
편저
새재왕건
연락처
메일 mk01003@hanmail.net
전화 010-6485-9187
주소 우편번호 36961
경북 문경시 갈밭길 8-6(흥덕동)
* 김석태의 가시밭길 인생, 그래도 후회는 없다.
아내와 98살 노모와 가족들에게는 참회
밝은 민주사회인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하나님과 예수님 섬기며
공동화·황폐화 되어가는 농촌, 송화고버섯 맞춤형 귀농·귀촌·귀향 운동으로 여생을 보내겠다.
저 김석태(음력 1950년 10월 3일 생)는 대구교육대학생 480명 중 차석으로 졸업하여 발령받기 어려운 서울 왕십리 소재 서울무학초등학교에 지난 1971년 3월 1일부터 지난 1975년 2월 28일까지 재직하고, 지난 1975년 3월 1일부터 1978년 2월 13일까지 서울천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습니다.
위 초등교사 재직을 하면서 지난 1974년 3월 1일 서대문에 있는 국제대학(현 서경대학교) 법학과 야간부에 입학하여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대학생으로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지난 1974년부터 1978년까지 밤에는 위 대학에서 개최된 유신반대 집회에 참가하고, 낮에는 교사의 직책으로 유신이념 홍보와 유신교육에 불만을 품어오다 위 대학 졸업과 동시(1978년 2월 13일)에 원하지 않은 면직을 했습니다.
호구지책으로 삼성 등 여러 곳에 입사필기시험에 합격했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낙방하고 어렵게 대한통운 포항지점에 발령을 받고(1978년 3월 1일) 경북에서 초등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아내와 결혼한 지, 3년 만에 구룡포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열심히 대한통운회사 일선에서 근무했으나 역시 현장 책임자들은 거의 다 군부 출신들이 장악하여 회사가 병영화 되어가고 있어 공채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고, 또한 일방적으로 타지 근무로 권유를 받는 등 군사독재에 염증을 느껴 사퇴를 하고(1980년 초) 자신의 시위 전력 이력도 모른 채 순진하게도 사법시험에 도전했습니다.
포항 영일만 호미곶에서 셋방을 얻어 대보초등학교로 발령 받은 아내의 도움으로 열심히 도전했습니다. 간간이 경찰에서 탐문하여 동정을 파악하기도 했으나,그때만 해도 일상적 일이라 무시했습니다. 당시 간첩이 나타나 예비군 소집이 있었는데, 어쩐지 저에게는 실탄을 지급치 않았습니다. 되돌아보니 동정파악 대상이었습니다.
아내의 근무지가 상주군 중동면 회상리 중동초등학교로 전보되어 이곳에서 사법시험 도전 3년 만에 그 어렵던 제24회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 고향인 문경으로 아내의 근무지를 옮기고 저도 고향 집에서 2차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그간에 사법시험 도전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지난 1981년 11월 1일 경상북도교육위원회에서 시행한 중등교사임용후보자선정경쟁시험 일반사회과에 우수하게 합격하고도 합격자 명부의 유효기간(82년 3월 1일부터 84년 3월 10까지)이 만료될 때까지 임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시위전력자의 당연한 결과인데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이런 고초를 겪으며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과연 이런 국가사회의 존재가치가 있는가, 국법을 공부하여 사법시험 1차의 관문을 통과했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여 출세하는 것이 저와 가족과 지방과 조국을 위한 길인가, 광주사태가 발발하여 무고한 시민들이 군화 발에 짓밟히고 있는데, 저만의 안일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가, 조국과 후세대를 위해서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는 민주화 인사들과 합류해야 하지 않겠는가, 건강도 나빠지고 있는 터에 공부도 한계에 도달했고, 설사 합격한다 해도 어떻게 현실을 견딜 것인가? 2차까지 합격한 민주화 투쟁 고시생들이 3차에는 탈락하는 현실에서 차라리 이 한 몸 던져 민주화를 이룬다면 그게 진정한 지성인의 삶이 아닐까? 라는 고심 끝에 그만 책상을 박차고 문경지역 민주진영 지역 책임자로 계시던 모 씨의 휘하로 들어가 지난 1985년부터 몇 년 전까지 삶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민추협과 민주산악회 지역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광주 사태 비디오 배포, 민추협 기관지 ‘민주통신’과 민주산악회 기관지 ‘자유의 종’을 가능한 한 많이 배포하고, 대통령직선제관철 및 민주헌법쟁취 관련 각종 집회 및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러한데도 공직 외의 경쟁시험은 공정한 줄 알고 호구지책을 위해 발령 숫자와 합격자가 같아 필히 발령 받게 돼 있는 사단법인 한국사학재단연합회 시행의 서울지역 1987학년도 사립중등학교교원신규임용후보자전형(일반사회)에 합격했지만,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이미 다른 비합격자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런 국가사회 모순을 겪었기에 사심 없이 더욱 민주화에 불을 태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민주화 인사 보상심의위 제1105호로 명예회복을 신청했으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지난 2009년 11월 기각되었습니다. 그땐 김대중 정부 하인데 담당자는 “유신체제 반대에 대한 것만으로는 인정을 해주겠습니다”했지만, 저는 “5공 군사독재 반대투쟁이 포함되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결국은 기각이 되고 저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있기에 재심의를 포기했습니다.
그 이후 공직의 길을 포기하고 지역에서 제왕적 군주인 자치시장의 독선, 환경파괴, 문화유적 훼손, 한반도 대운화 등 반대집회를 주도하고 의사자 발굴, 농산물 팔아주기, 선거구 모순 헌법소원, 폐광지역 차별 반대 헌법소원 등 시민운동을 주도했으며, 지역신문을 창간하여 독선시장과 싸우다 필화사건으로 93일간 구속되기도 했고, 두 번의 피선거권 규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언 72세란 나이가 돼 노인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현재는 투쟁 보다는 지역공동체의 공동이익을 위해 송화고버섯 시범포를 성공시켜 이를 맞춤형으로 하여 귀농·귀촌·귀향 마을 조성에 여생을 걸고 있으며, 문경문인협회 회장(전직)과 펜클럽한국본부 회원(현직) 등으로 활동하며 시를 짓고 있습니다. 제가 퇴직하여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 곳이 제가 창간해 13년을 발간하고 있는 문경시민신문(www.mgnews.kr)입니다.
대구교대 동창인 아내는 평교사로 정년퇴임하여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가시밭길 제 인생에서 너무 어려운 날을 보내고 있었던 아내와 제 가족들과 98살 노모님께 저는 참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사회운동을 할 때 사랑하는 제 아내가 키운 아들은 서강대 법대를 졸업하고, 모 대기업 법무팀에, 제 딸은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중대 약학과 졸업의 남편을 만나 서울에서 두 아들의 어머니로 약국을 각각 경영하고 있습니다. 너무 아내의 힘겨운 노고에 감사, 감사를 드리며, 다시금 인생 70 노년을 아름답게 살아가렵니다.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었던 모든 죄를 참회하고 있으며, 예수님 만나 용서받고 나름대로 노년을 건강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 만나고 부터입니다. 최고의 든든한 후원자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시니 이제는 걱정 없이 이웃 사랑의 실천에 관심을 두고자 합니다.
그동안 사랑하는 아내의 지극한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고, 98세 노모님의 가족 사랑과 인내와 건강 챙기기, 하나님 사랑에 감화를 받아 이후로 내 삶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에게서로다"는 말씀에 의지하고 신령과 진심으로 기도하며 살아가렵니다.
첫댓글 힘들게 걸어오신 집사님의 발자취에 감동하며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