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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1) 도미니크 파페티의 ‘1291년, 아크레를 방어하는 기욤 드 클레르몽’
최후의 전투, 성벽과 함께 완전히 무너져내린 십자군
- 도미니크 파페티, ‘1291년 아크레를 방어하는 기욤 드 클레르몽’, 1845년, 캔버스 유화, 베르사유 궁전 컬렉션, 프랑스.
십자군 전쟁은 서구 교회사 입장에서 본다면, 동방 교회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성지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에 대한 서구 세계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을 되돌려, 앞서 살펴보았던 곳으로 가보자. 안티오키아 공성전에서 승리한 십자군은 곧이어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힘든 공성전 끝에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인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탈환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인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탈환 후 대부분 십자군은 귀국하고 성지에는 예루살렘 왕국이 건설되었다.
이슬람의 반격과 전세 역전
그러나 끊임없는 이슬람 측의 반격으로 12세기 이후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1187년 십자군은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 군대에 패해 예루살렘을 빼앗겼다. 이에 유럽의 3대 군주(독일 황제, 프랑스 왕, 영국 왕)가 최대 규모의 십자군을 이끌고 성지로 향했으나 고령의 독일 황제는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고, 프랑스 왕은 중간에 귀국해 버리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제3차 십자군 원정)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서쪽에 있는 항구도시 아크레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했다. 1200년대 중반부터 카이사리아, 하이파, 아르수프, 종국에는 갈릴리까지 이스라엘 영토 대부분이 술탄에게 함락되고, 지난번에 차지했던 안티오키아도 1268년에 도로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영토들이 계속해서 함락되자, 유럽의 국가들은 십자군을 돕기 위해 다시 군대를 징집하고자 했다. 1270년 프랑스의 루이 9세는 군대를 이끌고 튀니지로 갔고, 1271~1272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공작(후에 에드워드 1세)은 제9차 십자군을 이끌었으나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슬람 군대와 맞서기에는 전세가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었다. 1278년 라타키아가 함락되고, 1289년 트리폴리 함락된 것이 그 예다. 술탄은 이제 아크레 정복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대규모 십자군을 결성하기 위해 몇몇 장수들에게 군사적 열정을 독려했으나 허사였다. 교황 주변에서는 유럽 제후들의 탐욕과 불성실과 성직자들의 타락이 십자군 결성의 장애요인이라는 불만 섞인 말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이런 요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장애요인이라고 하기에는 십자군의 이상이 스스로에 의해 타락한 점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아무튼, 교황과 일부 제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099~1291년까지 십자군 원정 동안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그리스도교 국가 ‘예루살렘 왕국’은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하며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그 사이, 몽골 민족까지 서진하는 바람에 전쟁은 삼파전으로 전개되었다. 1285년부터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있던 앙리 2세는 거주지를 키프로스 섬으로 옮기고 집사를 유럽에 보내 유럽의 군주들에게 동지중해(Levant)의 위험을 알렸다. 니콜라오 4세 교황과 함께 유럽의 제후들에게 성지회복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도 보냈다.
하지만 각국은 자기네 이익을 챙기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아라곤 왕조는 시칠리아를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은 대공위 시대(Interregnum, 1254/1256~1273)를 맞고 있었으며, 20년 전 십자군을 이끌었던 영국 왕 에드워드 1세는 집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성지 회복에 대한 열정이 예전 같지 않았다.
1289년, 술탄 콸라운은 이슬람 군대를 이끌고 아크레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크레 공격을 목전에 두고 사망했고, 군대는 그의 아들 알 아시라프 칼릴이 지휘봉을 잡았다. 1291년, 드디어 무슬림은 십자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도시 아크레(Acre)를 공격했다. 몽골 민족과 ‘이집트의 무슬림(맘루크)+셀주크 투르크’와 십자군이 뒤엉켜 지난 200여 년간의 십자군 전쟁을 (거의) 종식하는 최후의 전투를 시작했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도미니크 루이 페레올 파페티(Dominique Louis Ferrol Papety, 1815~1849)가 그린 1845년 작품 ‘1291년 아크레를 방어하는 기욤 드 클레르몽’이다. 베르사유 궁전 내 프랑스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미니크 파페티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나고 죽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화가다. 부친은 비누 제작자였지만, 아들이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오귀스탱 오베르(1781~1847)에게 보내 그림을 배우게 했다. 1835년 그는 파리의 에콜데보자르(국립미술학교)에 등록하여 레옹 코니에(1794~1880)와 함께 공부했다. 1837~1842년에는 로마의 빌라 메디치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의 스승 앵그르(1780~1867)는 “그가 붓을 잡았을 때, 그는 이미 마에스터였다”고 했다. 그의 첫 번째 살롱 전시회는 1843년에 있었다.
1846년 4~8월, 골동품 감정가며 수집가인 사바띠에와 그리스를 여행하며 아토스 산의 23개 수도원을 방문했다. 여행 중에 작성한 수백 개의 그림과 메모와 수집한 자료들은 그리스의 관습, 풍경, 지역의 문화재와 풍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파페티로 하여금 기자, 민족학자 및 고고학 분야의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만들었다. 그 자료들은 또 일종의 보고서 형태로 재편집되어 「비잔틴 회화와 아토스 수도원(Les peintures byzantines et les couvents de l‘Athos)」(1847년)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것은 정기 간행물 「르뷔데되몽드(Revue des Deux Mondes)」의 토대가 되었고, 파리의 판테온 장식에도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849년, 다시 찾은 모레아(필로폰네소스)에서 콜레라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34세였다.
이 작품은 1842년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 1세 국왕(재위 1830~1848)이 베르사유 역사박물관에 소장하기 위해 파페티에게 의뢰해 완성한 작품이다.
아크레 함락, 역사의 오점
다시 전투로 돌아가서 당시 아크레에는 4만 5000여 명의 주민이 있었고, 십자군과 십자군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 왕 앙리 2세가 보낸 군대까지 모두 1만 6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을 상대로 3만~7만 명 규모의 무슬림 병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십자군 측 주력 병력은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 템플기사단, 성 토머스기사단, 튜튼기사단, 성 요한기사단 등 기사단 병력 1000명 정도였다.
초반에는 기사단의 적극적인 저항과 응전으로 전투를 주도하는 듯했다. 기사단에 의해 성벽은 잘 방어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점차 성탑들이 하나씩 무너지며 기사단장들이 중상을 입거나 사망 혹은 도망가는 바람에 전투 시작 6주 만인 5월 18일, 결국 아크레는 함락되고 말았다.
아크레가 함락됨에 따라 십자군에 참가한 많은 군인은 해로를 통해 키프로스로 도망가거나 붙잡혀 살해되거나 노예가 되었다. 십자군에 참가한 국가들은 이후 중동에 발을 디디지 못했고, 성지의 어느 곳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십자군의 이름으로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으나 누구도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이루지는 못했다. 결국, 십자군 전쟁은 아무런 실익 없이 숱한 인명만 희생시킨 채 역사에 오점만 남기고 종식되었다.
그림 속으로
십자군은 아크레 성벽에서 이슬람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다. 흔히 ‘몰타 기사단’으로 알려진 성 요한기사단의 원수 기욤 드 클레르몽이 선두에 서서 성을 방어하고 있다. 허물어지고 있는 성벽 아래는 무슬림 병사들의 시신이 켜켜이 쌓여있다. 십자군의 승리를 바라는 듯 그들이 방어하고 있는 성벽도 뒤로 겹겹이 튼튼하게 서 있다. 밝은색 톤의 뒤에 포개진 성벽들은 마치 현실의 성벽이 아닌 것 같다. 앞에 무너지고 있는 성벽만이 현실처럼 다가온다. 화창한 날씨는 역설적이게도 이 전투가 십자군의 마지막 싸움을 예고하는 듯하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2) 주세페 사르디의 ‘1122년 보름스 협약과 서임권 투쟁의 종식’
성직자 임명권 갈등의 극적인 타협, 교회 우위를 재천명하다
- 주세페 사르디, ‘1122년 보름스 협약과 서임권 투쟁의 종식’, 프레스코 제단화, 연도 불분명(1747년 복원), 교황청립 로마 대신학교 피두챠 소성당.
유럽 밖에서 십자군 전쟁이 한창일 때, 유럽 안에서는 십자군 전쟁에 못지않은 격렬한 권력 다툼이 있었다. 오토 황제 시절부터 예견된 교황과 황제 간의 다툼이 그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 1세는 ‘오토의 특권’을 통해 교황을 황제의 보호 아래 두었다. 성 베드로에서부터 시작된 교회의 사명과 권위는 오토 황제를 거치면서 힘을 잃고, 봉건주의 체제 속에서 황제는 교회 권력에 깊이 개입했다.
교황권과 황제권의 다툼
그 중, 오랫동안 교회를 가장 괴롭힌 것은 ‘서임권 문제’였다. 성직자 임명은 교회의 고유 권한이었다. 하지만 오토 황제 이후 주교와 대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와 수도자를 황제가 임명하여 토지를 주고 교회 직무와 세속 직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황을 임명하는데도 깊이 개입하여,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교황으로 임명하고, 교황은 그런 황제에게 대관식을 치러주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성직자 임명은 황제의 중요한 권한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다 보니 황제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주교로 임명하여 세속 영지를 주고 지역의 제후로 삼았다. 주교는 공식적으로 자식이 없으므로 결국 죽을 때가 되면 그 영지는 황제에게 귀속하기에, 황제 입장에서 이 방식은 세속 제후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꾀하는데 좋은 방편이었다. 그렇게 임명된 주교들을 주교후(主敎侯), 독일어로 퓌르스트비쇼프(Frstbischof)라고 했다. 주교후의 영지를 ‘주교후국’이라 했으며, 주교가 대주교일 경우에는 대주교후라고 했다. 수도원장후, 사제장후도 있었다. 쾰른, 마인츠, 트리어 3개 교구 대주교후의 경우는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를 겸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하지만 주교후가 아무리 영향력이 커도 황제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때가 되면 모두 자기에게 돌아올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로마교황 입장에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돈을 주고 산 성직자들에게서 성직에 대한 거룩한 행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1085)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세속 권력이 가지던 성직 임명권(서임권)을 되찾아오려고 했다. 교회 개혁을 부르짖던 개혁론자들도 교회의 권한은 황제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1056년 하인리히 4세가 6살의 어린 나이로 독일의 왕이 되자 교회는 호기라고 생각했고, 1059년 교황 선출과 추기경 임명에 세속 권력이 관여하지 못하도록 법령을 만들어 공표했다. 동시에 다른 성직 임명권도 교회의 권력으로 가져오려고 했다.
1075년, 하인리히의 나이가 25세에 이르자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안은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하인리히가 더 이상 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교황은 평신도 황제의 고위 성직자 임명을 엄격히 규제하고, 교구의 모든 권리를 세속 군주로부터 되찾아 오려고 했다. 하인리히 4세는 즉각 반발하며 새로운 교황을 뽑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면서 자기 가신을 밀라노의 주교로 임명했다. 1076년 사순절,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모든 권한을 금지하며 신하들에게는 황제에 대한 충성 의무를 면제시켜 주었다. 교황의 명령에 반대하고 황제를 옹호했던 주교들도 모두 파문하거나 성무를 정지시켰다.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었고, 새 황제를 옹립할 움직임까지 보였다.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뜻을 굽히고 소수의 수행원만을 데리고 로마로 갔다. 하지만 성탄을 지낸 교황은 토스카나의 마틸데 영지에 있는 카노사 성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유독 눈이 많이 온 해로 기록되는 1077년 1월 25일, 하인리히 4세는 참회자의 옷을 입고 교황을 만나기 위해 성문 밖에서 3일간 엎드려 선처를 구했다. 이 사건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이다.
황제 입장에서는 ‘굴욕’이겠지만, 교황 입장에서는 ‘봉기’였다. 이 사건으로 교회 권력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후에(1084년) 로마를 점령해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을 폐위시키고 자기를 지지하는 교황으로 연이어 두 사람을 교체함으로써 복수했다. 서임권 투쟁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약 50년간 계속되었다.
1106년 하인리히 4세가 죽고 그의 아들 하인리히 5세가 황제가 되었어도, 신성로마제국은 성직 임명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교황이 새로운 성직자를 임명할 때마다 반발했다. 그 사이, 잉글랜드에서도 비슷한 분쟁이 있었다. 하지만 교황 입장에서 독일과 마찰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잉글랜드까지 가세하게 되면 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 주교 임명 때 군주의 의견을 깊이 고려하겠다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던 성직 임명권 분쟁은 1122년, 보름스에서 하인리히 5세와 갈리스토 2세 교황이 극적인 타협을 보았다. 영국이 좋은 사례가 되어 주었다. 임명은 원칙적으로 교회가 하되, 성직자를 선출할 때 황제 혹은 그가 보낸 대리인이 입회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로써 오랫동안 지속된 서임권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소성당 제단화를 새로 손보고 정리
소개하는 작품은 로마교구 대신학교 내 피두챠(‘신뢰’라는 뜻) 소성당에 있는 제단화다. ‘1122년 보름스 협약과 서임권 투쟁의 종식’이라는 제목으로 주세페 사르디(Giuseppe Sardi, 1680~1753/1771)가 그렸다. 동시대에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스위스인 주세페 사르디(1624~1699)와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작품과 연관하여, 전자 주세페 사르디는 건축가며 벽돌공으로 로마에서 활동했다. 그는 현장 감독관으로, 로마의 마리아 막달레나 성당 정면을 설계했고, 1716~1718년에는 코스메딘의 성모 마리아 성당의 정면을 로마네스크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사망하자, 1894~1899년 다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되돌아갔는데, 그 흔적을 주세페 바시(Giuseppe Vasi)의 판화로 알 수 있다. 그는 그 외에도 로마 시내 곳곳에 크고 작은 성당과 경당들을 설계했고, 1700점이 넘는 예술품 수집가로 예술품 매매도 했다고 한다. 저자에 관한 정보는 겨우 여기까지다.
이 작품과 관련하여 1747년 3월 4일자, 「로마 일지(Diario di Roma)」에는 이런 말이 있다. “소성당에는 오래전부터 공경받아 오던 여러 그림이 있었는데, 모두 교회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사료들이다. 교회는… 훼손된 그림을 고치고, 잘 재현하여 보존하고자 했다. …때마침 리베리우스대성당(성모 마리아 대성당) 보수공사에 참여하고 있던 주세페 사르디 선생이 직접 벽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마리아와 성인 교황들과 성 니콜로 주교, 천사들 및 오래전부터 있던 그림들을 모두 손보고 정리해 주었다.”
그러니까 1747년 베네딕토 14세(재위 1740~1758) 교황 시절에, 이전부터 있던 벽화를 주세페 사르디가 손을 보았고, 그중 하나가 중세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서임권 투쟁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림 속으로
그림은 위에 마리아가 아기를 안고 있고, 그 아래 교회 개혁을 위해 노력한 두 교황, 칼리스토 2세(1119~1124)와 아나스타시오 4세(1153~1154)가 협약서를 들고 있다. 칼리스도 2세 교황은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 이어 교회의 영적 기원으로 돌아가서 권위를 회복하려고 애썼다. 아나스타시오 4세 교황은 재위기간은 짧았지만, 평화 조정자로서 역할을 잘했다.
눈에 띄는 것은 심판관으로 있는 마리아다.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하인리히 4세 황제를 파문하는 칙령(1076)에서 자신을 하느님과 마리아께 의탁한다고 말하며, 처음으로 마리아를 하늘과 땅에서 찬미 받으시는 “천상의 모후(Regina del Cielo)”라고 불렀다. 문서에서도 그는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Mater Ecclesia)”라고 칭하며, “교회 모성성의 모델은 마리아이고, 그 영향력은 동ㆍ서방 모든 신자에게 미치는 ‘보편적(가톨릭)’인 것”이라고 했다. 보편적 권한은 지상에서 최고 우위에 있고 자유로워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최고 우위는 바로 ‘로마 교회’라고 천명했다.
그러므로 칼리스토 2세 교황이 주도한 보름스 협약은 단순히 교황권과 황제권 투쟁의 종식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 벗어난 이래 교회가 다시 한 번 세속의 모든 권력으로부터 해방된 사건임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이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3) ‘교단에서 가르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스콜라 철학 신학자의 토론식 수업, 인문주의를 키운 토양이 되다
- 작가 미상, ‘교단에서 가르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프레스코화, 산타 마리아노벨라성당, 피렌체, 이탈리아.
유럽 밖에서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때, 교회 권력은 서임권 문제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지난한 힘겨루기를 하고, 수도회 중심의 학교에서는 새로운 철학 사상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 사상은 사실 9세기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샤를마뉴가 유럽 각지에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고, 도시의 교육과 문화가 그곳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시작되었다. 진리의 보관소로서 성경을 가르침에 있어 고대 그리스 철학을 활용하여 길게는 16세기까지 이어진 사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에 중심을 둔 철학적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성당 혹은 수도원의 부속 학문기관인 스콜라(Schla)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스콜라주의’ 혹은 ‘스콜라 철학’이라고 했다.
철학, 신앙을 해석하는 도구
스콜라 철학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뿌리에는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노스와 플라톤의 영향을 크게 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있고, 11세기에 안셀무스가 등장한다.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에서 태어났지만, 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기 때문에 흔히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로 알려졌다. 그는 “하느님이 왜 인간이 되어야만 했는가?”라는 물음에서부터 진리, 자유의지, 악(죄), 삼위일체, 하느님의 속성 등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하느님의 실존에 관한 본체론적(本體論的) 증명-이것을 ‘안셀무스의 신존재 증명’이라고 함-은 이후 많은 철학자에 영향을 미쳤다. 스콜라 철학의 핵심은 신앙을 해석하는 도구로서 철학을 활용한 데 있었다.
11세기 도시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또 안셀무스의 활동에 힘입어 12~13세기에는 볼로냐, 옥스퍼드, 파리와 같은 수도원이 아닌 교사와 학생의 길드와 같은 형태의 대학이 새로운 교육체계로 자리를 잡아갔다. 대학들에서는 강의와 토론식 교수 방법이 채택되고, 교수 자격도 규정되었다. 13세기 탁발수도회로 탄생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이런 대학 조직을 운영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럽 밖에서는 십자군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이슬람의 자극을 받아 방대한 그리스 사상가들의 작품이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중세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소개되었고, 신학자들은 크게 동요했다. 이전까지의 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신앙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정점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와 맞는 것만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뿐,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무시했다. 이상주의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을 인정하는 데 크게 무게를 둔 것이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 보에티우스와 같은 그리스와 로마 철학자들의 저작들을 주해하고,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안셀무스까지 모든 연구를 검토한 후,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의 신학, 철학의 주제들을 논쟁 형식의 방대한 논문으로 집필했다. 「신학대전」은 그렇게 탄생했다.
같은 시기에 또 다른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도 학문적으로 교회 안팎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라비아 및 유다 철학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중요한 신학 이론에 있어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보수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회의 성 보나벤투라는 경험적 자연인식을 바탕으로 신적 조명설을 통해 신과의 직접적 일치를 말하는 신비주의를 주장했고, 옥스퍼드의 로저 베이컨(Roger Bacon) 등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아라비아 자연과학자들의 광학사상(光學思想)을 받아들이는 급진적 경향을 보였다. 그런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전통을 지킨 중도파였다고 할 수 있다.
도미니코회 출신으로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알베르토 마뉴(Albertus Magnus, 1193~1280)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다. 그는 독일의 신학자, 철학자, 자연과학자로, 파리와 쾰른에서 가르쳤고,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 있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아라비아와 유다, 신플라톤주의, 교부들의 저술로부터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당시의 철학 전반은 물론, 사변적인 신학과 성경해석 및 자연과학 등 방대한 저술 활동을 했다. 그를 두고 마뉴, ‘대(大) 알베르토’라고 부른 것은 그의 학문이 그만큼 폭넓고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스콜라 학문이 유럽의 특정 지역에서만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지역마다 다른 스콜라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처한 현실이 달랐고, 필요성과 목적, 생각과 방법이 다른 특징들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장 활발한 스콜라일수록 가장 보수적인 지식인과 가장 혁신적인 예술 분야 장인들과 과학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는데, 그것은 그만큼 학문이 역동적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하겠다.
시성 후 그린 제단화
소개하는 그림은 작가 미상의 ‘교단에서 가르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인으로 시성된 후 6개월 남짓 되었을 무렵에 그린 제단화로 추정된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의 중앙 복도 좌측 세 번째 경당의 제단화다. 이 대성당은 도미니코 수도회가 설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볼로냐에서 진출한 이래 지금까지 도미니코회가 자리를 잡고 있어 수도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20년 9월 7일은 도미니코회가 이 대성당에 자리를 잡고 재건하여 축성한 지 600년이 되는 해다. 그러다 보니 평소 공개되지 않던 많은 오래된 벽화(대부분 훼손됨)와 유물들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 벽화도 그중의 하나로 2018년에 발견되었다.
그림 속으로
작품 속에서 아퀴나스는 파리대학의 한 교단을 연상시키듯 있고, 학생들이 그 아래 있다. 이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오래전에 바티칸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때가 생각났다. 바티칸 도서관의 열람실에 앉으면 중앙 연단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 동상이 있다. 나는 물론, 많은 저명한 학자들까지 그분과 마주한 학생으로 책을 대하게 된다. 바로 이 그림과 같이.
그림은 매우 단순하지만 시성된 직후에 그린 최초의 토마스 아퀴나스 초상화이고, 천사들이 들고 있는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 성인의 방대한 신학적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신학적 권위를 의미하듯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성경에 올려놓고 있는 점도 특징적이다. 학생들의 태도는 작가 미상의 이 작품이 대략 어느 화풍이고 작가가 어떤 성향인지를 짐작케 해준다. 학생들이 일관된 자세로 조용히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역동적인 토론식 수업의 한 장면이라는 것과 여러 면에서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가의 작품임을 추정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
스콜라 철학은 흔히 그리스도교의 교의 연구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끊임없는 질문과 토론식 학문 활동으로 인해 이후 과학 발전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특히 사상적으로 두 개 학파가 거리를 두고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학문의 길을 닦았는데, 하나는 알베르토 마뉴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한 파리학파로 이후 다양한 인문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다른 하나는 로저 베이컨을 중심으로 한 옥스퍼드학파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충실하면서도 현상을 통해 자연철학에 천착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현실에 대한 인식과 결부시켜 재구성했고, 그의 형이상학적 기초 위에 천지만물, 곧 만유(萬有)를 포괄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동자(第一動者)’, 즉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를 만유의 창조 원인인 ‘신’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자연과 은총(Gratia)을 구별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대립시키지 않고,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고 생각했다.
요컨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이 함께 깊이 접합되어 있으며, 이후 학문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었다고 하겠다. 인문주의의 발전은 이런 토양 위에서 시대의 흐름을 타면서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4) 라파엘로의 ‘볼세나의 기적’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기적의 순간을 담다
- 라파엘로, ‘볼세나의 기적’, 1512?, 엘리오도로의 방, 바티칸 박물관, 로마.
유럽 밖에선 여전히 십자군 전쟁이 진행 중일 때, 유럽 안에서 아니 더 정확하게는 교회 안에서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이단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십자군 전쟁의 실패도 한몫했다.
처음 전쟁을 시작할 때 “하느님의 뜻”이라며 깃발을 높이 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실패할 수 있는가!’ 하는 분위기가 교회 안팎에서 터져 나왔고, 교회 쇄신을 부르짖는 급진적인 이단의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재위 1198~1216) 재임 시에 최고조에 달했다.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 수도회와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이 교황 재임시에 탄생했는데, 공식 인준까지 교황은 매우 신중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 11월 11일~12월 14일)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집되었다. 당시 교회는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근절되지 않던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의 문란한 생활이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그리스도교 국가 간의 분쟁과 제4차 십자군 전쟁(1204년) 이후 이스라엘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의 효과적인 추진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이런 과제를 의식한 듯, 공의회 소집 동기에서 “교회 안의 모든 허물을 제거하고 성덕을 심으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윤리를 쇄신하며, 이단을 제거하고 신앙을 공고히 하며, 불화를 없애고 평화를 정착시키고 압제를 없애고 자유를 신장하며, 제후들과 신자들이 성지를 돕도록 촉구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밝혔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트렌토 공의회 이전에 개최되었던 공의회 중 규모가 가장 컸고, 개최 2년 전인 1213년 4월 19일에 공의회 개최를 선언해 준비에도 만전을 기했다. 특히 보편 공의회가 되도록 동ㆍ서방의 모든 주교와 대수도원의 원장 및 그리스도교 국가의 제왕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그리고 400명 이상의 주교들과 대수도원장 및 각국 사절 등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라테란 대성전에서 개최되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이 공의회에 참석하여 서방의 황제로 승인받기도 했다.
실체 변화 교리
공의회 결과는 7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공식 문헌으로 채택되었다. 주요 내용은 유다인들과의 관계, 교황직 우선권, 성직자들의 생활 규정, 가톨릭 신자는 1년에 1번 고해성사와 부활절 기간 성찬례 참여를 의무화했다. 1년 6개월 후(1217년 6월 1일)에 제5차 십자군 파병도 결정했다. 공의회에서 채택한 교회 개혁과 조직에 관한 교령들은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성찬례와 관련하여, 성체성사에서 ‘실체 변화(transsubstantiatio)’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대부분의 결정 사항들은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건대 적합해 보이지만, ‘실체 변화’는 다소 생소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여기에는 드러나지 않은 많은 역사가 담겨 있다. 탁발 수도회들의 탄생에서 교황의 고심이 깊었다는 것, 이원론과 영지주의를 토대로 하느님의 전지전능함과 선함을 부정하고 육체를 갖춘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완전성을 부정했던 카타리파와 발도파 같은 이단의 문제, 신성 모독죄와 성직 모독죄에 해당되는 독성죄(Simony)의 대두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이 개념과 연관된다. ‘교황직 우선권’과 ‘성직자 생활규정’을 공고히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성체성사는 모든 교회 생활의 중심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교리도 확고히 해야 했다. 즉, 가톨릭 신앙은 영원하고 전능하신 하느님은 한 분이고, 성부, 성자, 성령의 동일실체(同一實體)를 지니며, 성부는 창조주이시고, 성자는 오직 성부로부터 오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성체 신비를 가리키고 정의하는 ‘실체 변화(實體變化)’라는 표현이 나왔다. 빵과 포도주를 축성함으로써 성자 예수의 몸과 피가 된다는 것이 상징이 아니라, 실체 변화라는 변화지례, 혹은 성변화(transubstantiation, 화체설)라는 것이다. ‘성직자 임명권(서임권)’ 문제에 직면하여 교회가 양보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교회 생활의 중심이 되는 성체성사를 중요 교리로 받아들이는 교회에서 그것을 집전하는 성직자 임명은 세속 권력이 개입해선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직자의 생활 규정도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르네상스 삼총사 중 한 사람 라파엘로
소개하는 작품은 너무도 유명한 라파엘로의 ‘볼세나의 기적’(1512?)이다. 바티칸 박물관 라파엘로의 4개 방 중에서 ‘엘리오도로의 방’에 있는 프레스코화다. 유명한 성체 기적 일화를 담고 있다. 이야기는 12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헤미아의 한 사제가 순례단을 이끌고 로마로 순례를 가다가 오르비에토 남쪽 작은 마을 볼세나에 있는 성녀 크리스티나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사제는 자신이 축성한 성체(빵)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지, 즉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현존한다는 것에 대해 의심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사를 봉헌하던 중, 빵을 축성하고 그것을 자르자 거기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빵과 포도주가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 것이다. 놀란 사제는 피에 젖은 성체보를 제대 밑으로 감추고 미사를 마쳤다. 소문은 금세 인근 마을에까지 번졌고, 마침 볼세나에서 가까운 오르비에토에 체류 중이던 우르바노 4세 교황에게 보고되었다. 교황은 즉시 진상조사단을 보내 조사하도록 했고, 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라 ‘성체 기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성체 찬미가’를 의뢰했고, 이듬해인 1264년에 ‘성체 성혈 대축일 제정’ 교서를 발표했다. 1290년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이 성체보를 보관하고, 성체 신심을 확산하기 위해 지어졌다.
라파엘로의 이 그림은 바로 옆 방인 ‘서명의 방’에서 ‘성사에 관한 토론’을 그리고, 바로 이어서 같은 ‘성체’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진ㆍ선ㆍ미의 주제 안에서 바라본 ‘성사에 관한 토론’과는 달리, ‘볼세나의 기적’은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오 2세의 정치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결정한 바 있는 ‘교황직 우선권’에 대해, 1500년대 신성로마제국 샤를 5세 황제는 여러 면에서 율리오 2세 교황을 자극했다. 사실 교회사에서 율리오 2세는 괴팍한 교황으로 손꼽히는 분이지만, 샤를 5세는 그런 교황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고 위협한 황제였다. 그런 황제에게 교황은 ‘하느님께서 개입하고 계시다’는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인 라파엘로(1483~1520)는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삼총사 중 한 사람으로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활동하고, 그를 지원하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공작으로 있으며 인문주의의 꽃을 피우던 우르비노에서 화가 조반니 산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밑에서 일찍 붓을 잡았고, 아버지가 사망하자 페루지아로 가서 페루지노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18세 무렵, 피렌체에서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작품들을 접하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품있는 르네상스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기 시작했다. 1508년 율리오 2세 교황의 부름을 받고 바티칸으로 와서 라파엘로의 방들을 그렸다. 이후 37살의 이른 나이에 열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로마에서 공방을 열어 제자들과 함께 로마 예술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변경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설계도를 그대로 인정했고, 그것이 현재 성 베드로 대성전의 모습이다. 그가 르네상스 미술에 남긴 업적은 이후 계속해서 라파엘로 학파-학풍으로 많은 예술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림 속으로
제단의 오른쪽에는 이 사건과 무관한 율리오 2세 교황이 있다. 성체 교리는 1200년대나 현재 시점인 1500년대나 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제단의 양쪽에는 가마꾼과 수도자 및 단순한 목격자 그룹이 있다. 당황하고 있는 사제와 그 뒤에서 술렁이고 있는 목격자들과는 달리 오른쪽의 율리오 2세 교황과 사제, 부제단 및 아래의 경호원들은 매우 침착하다. 사제 뒤에서 흔들리는 촛불처럼 신앙에 대한 의심과 반대편의 확신이 대조를 이룬다.
그림 속에서 라파엘로는 노랑, 빨강, 회색에 이르는 방대한 색조와 건물의 기둥과 벽에 비친 얇은 역광까지 눈부신 색채주의를 잘 드러내고 있다. 거기에 원근법과 명암법, 인물 하나하나에서 드러나는 표정들은 “역시 라파엘로!”라는 감탄을 자아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