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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54:1-3 하나님이여 : 칼빈
다윗은 이 시에다 자기가 십인들(Ziphites)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극한 위험 상황에 서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들을 기록했습니다.
곧 다윗은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예상하는 중에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면 그가 가진 굽힘이 없는 믿음에 우리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1. 본 시편의 주제는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십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교훈을 위한 다윗의 시, 지휘자에 따라 느기놋에 맞춘 노래, 십인이 ... - 칼빈)” 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십인이 살고 있는 곳에 근접된 광야에 자주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성경말씀에 기록된 역사에서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들로부터 각각 두 번 배반당하였습니다(삼상23:19, 26:1).
다윗은 이 시가 쓰여진 그 특이한 환경을 주의 깊게 말함으로서 가장 나쁜 상황 중에서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하여 결코 낙심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다윗이 원수의 군대들에 둘러싸여 멸망당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기도로 전능하신 분께 자신을 맡기면서 보여준 그의 귀하고 영웅적인 대담함을 경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그런 환경 중에서 보호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죽은 자를 무덤에서 살려내시는 일만큼 어려운 일로 보였을 것입니다.
다윗이 목숨을 걸고 숨어 있던 굴에서 도망하기란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2. 본문 1절은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입니다.
다윗은 지금 사람의 도움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장의 강조적 의미로 보든 다윗이 일반적인 구원의 수단과는 다르게 주께 의지하고 있다고 보든지 간에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과 ‘힘’에 의지하여 구원받고자 기도한다고 알아야 합니다.
모든 도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옴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보편적인 방법으로 도움을 베푸십니다.
시편 54 편
이 보편적인 방법들로는 되지 않고 이 땅에서 의지할 것이 모두 제거될 때에는 하나님은 친히 그 일을 손에 잡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이 말씀 중에서 성도가 찾아갈 마지막 피난처로 피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기적으로 구원받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반절에서 다윗은 자기 재판자이신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자기 정직함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구할 때 우리가 우리의 주장이 선하다는 확신을 갖는 것은 절대적으로 선행 조건이 된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새겨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악을 후원해 주실 것을 조금이라도 기대한다면 이는 가장 큰 불경이 됩니다.
다윗은 자기 주장이 선하고 자기 양심이 정직하기에 힘을 내 구원받기를 기도합니다.
다윗은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이 자기 변호자로 일하실 것이며 자기 원수들의 잔학과 반역을 형벌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2. 본문 2-3절은 “(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 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입니다.
이 말은 다윗의 열정을 잘 표현합니다.
지금 다윗은 극한 환경 중에 있기에 이 열렬한 간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환경은 다음 구절에 나타나는데 그 구절에서 다윗은 사납고 야만적이며 경건한 마음이란 전혀 없는 자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사실을 원통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는 사실을 알려드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두려움과 불안함에 대한 이유를 쏟아 놓음으로서 다윗은 자기 마음을 가볍게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 원수들을 ‘외인들’로 부르는 호칭은 십인들에게만 적용하는지 일반적으로 사울의 온 군대에게 적용하는지는 모르나 그들의 야만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타락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말로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방탕하거나 혹은 악하여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스스로 나왔을 때에 선지자들은 이 같은 표현으로 그들을 반복하여 비난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이 말이 다른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원수들이라도 어느 정도 친척과 관계자들 사이의 의리를 존중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시편 54 편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이 자기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혹은 자기가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외인들’같이 자기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지금 자기를 에워싸는 그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잔인함을 지적해 줍니다.
다윗은 또 그들을 어떤 사람들이 번역한 ‘힘 있는 자들’ 혹은 ‘권세 있는 자들’이 아닌 ‘강포한 자들’이라 부릅니다.
이런 말들은 그들이 모든 인정을 버리고 들짐승처럼 그에게 달려들려고 한다는 다윗이 의도한 그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 의한 두려움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보호를 받고자 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취하지 않고는 만족할 줄 모르는 잔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내 생명을 수색하며”라고 말합니다.
또 그들의 억제할 수 없는 난폭함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들 앞에 두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정에서 우리가 그들의 마음을 억제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심판자가 하늘에 계신 사실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도 감각이 없으니 그들에게서 어떤 절제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시편 54 편
시54:4-7 하나님은
시인 다윗이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신다”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도에게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주시는 의미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구체적 방법은 그의 말씀대로 그를 믿으며 성결(회개하며 깨끗이 사는 것)을 파수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를 구원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렇게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말하기를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 본문 4절은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입니다.
이 말은 다윗이 기도를 함부로 허공을 향해 내보내지 않고 그의 산 믿음으로 기도드린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지시 부사에는 많은 힘이 들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지켜주기 위하여 곁에 계신 하나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이 온갖 장애물을 이겨내고 순식간에 절망의 깊은 데에서 하나님의 보좌까지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그 힘에 대한 놀랄만한 한 실증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굴속에 숨은 도망자였고 거기서도 자기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 옆에 계신다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무덤의 어구에까지 갔는데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순식간에 죽임을 당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떨었습니다.
그렇지만 곧 하나님의 도우심이 자기에게 미쳐올 것이라는 확신한 희망을 갖고 의기양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하나님을 자기 돕는 자들 중에 일반 계급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손상시켰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복과 이익에 관심을 두었던 예를 들면 요나단과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해주셨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도 적고, 힘도 없었으며 무서워서 기가 죽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전능하신 분의 인도와 보호아래 자기원수들을 반드시 능가할 것을 믿었습니다.
시편 54 편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윗이 이 말씀 중에서 돕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을 말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은 잃었던 모든 것을 충분히 보상할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본문 5절은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입니다.
동사 בישי(야쉬브)는 ‘그가 되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동사는 형벌뿐 아니라 원수들의 악한 행위가 그들에게로 되돌아가 보응되는 형벌의 종류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동사에다 기원의 의미를 부여하여 이 구절은 소원이나 기도를 표명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사가 엄격하게 미래시제를 취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미 기도한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되리라는 확실한 기대를 넌지시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처럼 자기 믿음을 북돋기 위한 구절과 연결된 저자의 기도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이런 구절들로 다윗은 하나님이 악한 자들을 보응하는 의로우신 재판자라는 일반 진리를 선언합니다.
자기 희망을 확고히 하고자 다윗은 특별히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이 오래 늦추어지고 시험이 생길 때 하나님은 성실하시며 약속을 신성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것보다 우리를 붙들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구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는 다윗의 확신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부인할 수 없는 것같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부인할 수 없다는 입장에 근거합니다.
3. 본문 6-7절은 “(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 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7)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구원을 허락하신다면 자기가 평소에 하는 습관대로 그 구원에 대해 감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또 다윗은 자기가 그렇게 할 만한 기회를 얻기만 한다면 의식을 갖추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은 마음의 내적 감격을 기대하십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정하는 의식들을 등한히 해도 괜찮다는 구실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시편 54 편
다윗은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의 온 백성이 하는 것과 같은 방법인 제사를 드림으로 증거하려 합니다.
또 다윗은 자기가 보여주는 모범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합니다. 다윗은 ‘낙헌제’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이로서 다윗은 감사의 제사가 드리는 자들이 선택하여 드리는 제사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은 지금 당하는 위험에서 벗어나며 자기가 서원한 것을 곧 갚고 기쁨으로 드림을 말합니다.
사람은 당면한 고통의 억압 아래 있을 동안은 하나님께 많은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고통에서 풀려난 순간 사람들의 본성인 무관심에 빠져 주의 선하심을 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위선자들이 노예 근성과 억압에 의해 드리는 태도와는 다르게 기꺼이 제물을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받아주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하반절과 다음 절은 시편 기자가 구했던 구원을 받은 때를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이 시 전부는 다윗이 구원받은 이후에 쓰여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다윗이 아직 위험에 놓여 있을 때, 규칙적으로 드렸던 기도의 모습을 기록한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다윗이 근심에서 해방되고 그가 드린 감사의 생생한 표현을 덧붙입니다.
또 다윗은 생애의 다른 기간에 경험했던 그 자비로운 일들을 말하며 그 자비로운 일들은 앞에 나온 구절들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신속하게 끌어들인 한 이유로 인하여 그의 기억에 되살아났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매우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이름은 선하시며 자기는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시편 52편 6절에서 의로운 자들이 그들의 원수들이 멸망당함을 ‘보게 된다’는 말씀의 의미를 말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위로가 함께 한 사건의 광경입니다.
또 악한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되는지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즉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동기를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데 만일 조금이라도 그릇된 감정을 충족시키려는 동기에서 나온 만족감이라면 정죄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답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에 의한 심판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순전하고 온전한 기쁨도 분명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