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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사용 설명서
- 융합의 건축물, 의미의 마중물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수필창작에 절대적인 공식이나 왕도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명작들은 어떤 보편적인 수필시학원리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런 원리와 기법들이 새로운 명작을 생성하고 장르의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문학성은 형식이나 구조에서 나온다. 구조란 긴밀한 관계를 가진 부분들로 이루어진 전체다. 다른 부분과 구별되는 독립성을 가진 부분을 단위라 한다. 수필은 이러한 단위들로 이루어진다. 수필의 일차적 기본 단위는 셋이다. 첫째 단위는 발단이고, 둘째 단위는 전개이고, 셋째 단위는 결말이다. 발단 부분은 주제를 포함하고, 전개 부분은 종속주제를 포함하고, 결말 부분은 발단 부분과 마찬가지로 주제를 포함한다. 또 수필 텍스트는 심층과 표층, 그리고 담론층이 유기적으로 생성하는 입체구조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 수필은 중층구조의 한 축과 발단, 전개, 결말이라는 표준단위의 한 축, 이렇게 양축을 방법론적으로 적용해서 이야기가 조직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수필을 건축물로 보면, 건축미를 구현해 내는 게 중요할 것이다. 건축물은 외적 측면에서 특정 공간에 위치하는 객관적 구조물이다. 반면 내적 측면에서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념적 요소를 품고 있다. 하나의 구조물로서 건축물에는 인간생활과 관련된 목적성이나 삶의 무의식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건축물은 단지 물리적 구조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과 의미를 표상한다. 그런데 수필은 건축물이란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의 미적 특성을 규명하는 논리적인 글쓰기가 아니다. 건축물에서 촉발되는 다양한 정서와 의미를 구체화하는 것이 수필이다. 건축물은 외적 조형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았던 사람의 삶의 터다. 집의 주인은 사람이다. 집에는 주인의 의식이나 철학이 배어 있다. 수필가의 심미안은 드러나지 않은 여기까지 미쳐야 한다. 의미의 마중물이 필요한 이유다. 마중물은 단 한 바가지 물에 불과하지만 땅속 깊은 깊에 있는 지하수를 끌어올려서 많은 물을 얻게 하는 물이다. 의미의 두레박질은 건축물 안에 살았던 사람의 삶의 태도 사이를 오가는 행보나 다름없을 것이다.
II. 클릭
수필 쓰기의 일반 형식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기’의 적절한 배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활동 중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하는 전략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길이다. 그런데 대상을 언어로 담아내는 데에는 ‘보기’나 ‘한 일’이 중심이 되기 쉽다. 이는 객체의 객관적 실체가 주체의 느낌과 생각보다 앞서는 글쓰기다. 오늘날 수준 높은 독자들, 거의 모든 영역에 도통한 교양인, 인문학 공부가 잘된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매체의 융합이다. 다른 말로 하면 텍스트의 채굴학이 필요하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권위있는 텍스트의 다양한 인용이다.
수필은 수기와 다르다. 다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시선, 꼭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는 저항성이 필요하다. 가장 쉬운 예로 “아버지”에 관해서 글을 쓴다고 한다면, 아버지란 소재는 쓸 게 많다. 성장하면서 오랫동안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재를 “아버지의 정원”이라고 했다면, 그 정원에 관련된 이야기만 쓰는 것이 좋다. 수필의 주제 중심의 문학이고, 주제 중심으로 전개되는 논리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정원’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의 일생을 다 넣으려고 한다면 대책 없이 길어지고 한 편의 소설이 되고 만다. 그럴 때는 아버지의 일생에 관한 무엇이 주제가 되어야 한다.
다만 아버지가 그 정원을 만들게 된 계기, 아니면 젊은 날엔 삶이 고달파서 꽃을 모르고 사시다가 연세가 드시니 식물의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일화는 넣어도 괜찮겠다. 하지만 아버지가 유년 시절에 힘들었던 이야기, 결혼해서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고생했고, 가난해서 굶기를 밥 먹듯 했다는 이야기. 자상하고 강직한 성품 이야기 등등, 물론 소개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재와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를 쓰면 주제가 희석되어 잡문으로 글의 성격이 바꿔버린다. 정원을 가꾸실 만큼 여유와 마음이 고운 분이라는 정도는 피력은 할 수 있으나, 제재나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가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독자들은 주제가 뭔지 헷갈린다.
아버지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아버지” 라는 주제로 여러 편의 글을 쓰면 된다. 소주제는 하나씩. 제재를 달리하면 된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강, 아버지의 가방, 아버지의 나무, 아버지의 선물, 아버지의 눈물, 아버지의 시계, 아버지의 훈장, 아버지와 베란다 등등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면, 더 독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디지털시대의 현대인을 인류학적으로 호모 나랜스라고 부른다. 호모 나랜스는 이야기 욕망을 가진 디지털시대의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써 그들은 원시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기록한 ‘입과 말로 표현한 이야기’를 말하고 듣고 싶어한다. 문학은 진화한다. 수필도 전통주의라는 구심력과 현대성이라는 원심력 사이에서 왕복을 되풀이하면서 변하고 있다. 그것은 유기체로써 진화에 해당한다. 수필이 생존하려면 상호텍스트성이 필요하다. 상호텍스트성이란 크리스테바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작품은 작가의 특수한 능력으로 창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문화와 관습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성과 시장성 사이의 경계선을 넘나든다는 사고의 전환은 장르 차원의 생존전략인 셈이다.
-. 발단 전개 결말을 생각해 보고난 뒤 펜을 잡아야
수필의 구조는 12가지 정도 된다. 수필은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써야 한다. 시작하는 말, 하고 싶은 말, 맺는말이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독자에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적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물론 전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수필은 표달해야 한다. 처음 발단부에서는 내가 지금 무엇을 쓸 것인지에 대해 암시를 주어야 한다.
<발단>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제다. 수필은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이지만, 주제는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게 원칙이다. 발단은 주제 외에 배경, 전개 부분 예고, 접근단계를 포함할 수 있다. ‘배경’은 작품 전체의 특성을 명시하거나 암시한다. 배경은 제재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하고, 작가나 독자와 제재와의 관계를 말하기도 한다. ‘전개예고’는 전개 부분에서 다룰 종속제재나 종속주제를 미리 알리거나 미리 암시하는 것이다. ‘접근단계’는 독자의 관심을 끄는 비유나 일화를 다룬다. 접근단계는 발단 부분에서 가장 덜 중요한 요소이지만, 맨 앞에 배치되는 경향이 있다.
“긴 회색의 계절 이후 모처럼 화창하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희망의 빛으로 다가선 삼월이다. 꽃에서 전해지는 싱그런 생기가 내게도 선혈의 맥을 새로이 뛰게 한다. 순일한 정감의 파장을 일구는 저 꽃들은 빛깔부터가 초봄에 어울리게 은은하다. 게다가 순하디 순한 꽃잎에 풀내음 같기도 한 여린 향이 아버지의 정원을 불러온다. 아직도 봄의 들머리에 서성이는 바람결의 차기만 하다. 오래간만에 고향에 내려갔다. 집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아버지의 정원이 보인다.”-발단
수필은 발단의 예술이다. 첫 세 문장이 중요하다. 이 세 문장으로 더 많은 서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 문장만으로도 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발단부 기능은 전개 예고이다. 아버지의 정원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것이 제재가 되니까 주제는 정원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펼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개부에 들어가면 하고 싶은 말을 쓴다. <전개> 부분은 수필의 세 단위 중에서 가장 긴 부분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부분은 예화와 삽화가 들어가는 부분이다. 전개부분은 종속제재나 종속주제로 이루어진다. 전개부분은 종속주제 하나를 중심으로 하여 단위를 이룬다. 전개부분의 종속주제들은 발단부분의 주제에 지배되지만 주제와의 관계로부터 분리하여 고찰하면, 종속주제 자체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는 하위 단계에서는 주제가 된다. 그리하여 그 자체의 단위 안에서 여러 생각을 지배하거나 대표한다. 주로 주제를 구체화하는 전략을 쓴다.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된다. 삽화, 예화 형식으로 전개하되, 반드시 체험을 구체적으로 적는 게 좋다.
“젊은 날에 아버지는 꽃이 아름다운지조차도 모르고 사셨다. 그만큼 삶이 고달팠다. 평생 남에게 베풀기만 하면서 선하게 사셨는데, 늘그막에 조그만 사업이 부도로 살림이 거덜이 나고 한동안 가정의 평안마저 잃었으니, 얼마나 한이 많으실까. 노년에 와서는 꽃이 예뻐 보였을까. 작지만 앙증맞은 식물에 눈을 떼지 못한다. 정원을 가꾸면서부터 우연히 마주치는 사물에 무심하지 않다. 풀꽃이거나 민들레 씨앗일지라도 그 생명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듯하다. 이 작고 초라한 정원에서 꽃피우는 생명이 신기하고, 아름답다며 늘 웃는다.”
-전개
대충 이런 내용이 들어가면 하고자 하는 말이 된다. 마지막이 결말부다. 가장 중요하다. 글 쓴 목적이 확실하게 밝혀지는 곳이다. 결말부는 주제의식이 의미화되는 부분으로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 의미화란 사상을 비유나 상상을 통하여 문예적으로 나타내는 작가의 개성적인 시각이요, 마음이다. 사상의 의미화는 수필의 문예화를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표현 형식 중의 하나다.(오창익)
■ 문학은 사건을 의미화하는 특정의 방식을 전제로 성립된다. 수필에서 의미화란 메시지의 숨겨진 뜻이나 가치가 문학적으로 밝혀지거나 읽혀지도록 주제를 간접화하는 방식을 말한다,(권대근)
<결말> 부분은 발단 부분에 있던 주제를 반복함으로써 강조된다. 문학수필의 경우, 결말 부분은 지배적 정황이 제시된다. 묘사수필에서는 지배적 심상이, 서사수필의 경우에는 지배적 인상이 놓인다. 주제 메시지를 자기만의 문장으로 비유적으로 개성적으로 기술하면 된다. 결말은 주제 반복 외에 전개 부분 요약과 논평을 포함하고 있다. 요약과 논평도 깨달음이나 발견으로 의미의 재해석이 가능하도록 ‘이것’을 ‘저것’으로 치환하는 것이 좋다. 논평은 발단부분이나 전개부분에서 다루지 않았으나, 작품의 제재나 주제와 관련된 재료나 생각을 다루는 것이다. 가능하면 지배적 정황으로 주제를 의미화, 즉 형상화하는 것이 좋다. 그런 자신이 없으면 의미 발견이나 부여, 깨달음을 자신만의 표현으로 문학적으로 간접화하면 된다.
“아버지도 이제 하늘로 돌아가는 날을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엿보인다. 하지만 사는 날까지 끝까지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결말
대충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 만약 지배적 정황을 삽입하려면, 아버지에 정원은 ~~이다. 등으로 A는 B다는 식으로 의미화를 해주면 된다. 만약, A에서 I까지 이렇게 하면, 글 쓴 목적이 달라지면서 주제가 달라져버린다.
“아버지는 정원에 서 계실 때 가장 멋있어 보였다. 젊은 날 생각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의 가치를 이제야 찾으시는 것 같다. 정원에 꽃씨를 심으며 행복해하시는 모습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아버지의 정원은 아버지를 닮았다.”A
“자라나는 생명에 손을 빌려주는 사람을 하느님은 항상 웃으면서 바라보신다. 정말 그렇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연의 그 무엇이 되었던 간에 자라나는 생명을 위해 자신의 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하느님이 외면할 리가 없다. 아버지의 정원은 우리 형제들에게 그렇게 믿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무언의 학교였다.”B
“오월의 하늘은 시리도록 맑고 푸른데 비 오는 날 우산은 쓰고 왔냐며 걱정하신다. 정원에 핀 꽃은 한없이 곱기만 한데 자식 오는 길목 미끄럽다며 싸리비를 찾아 나선다. 바람 잘 날 없는 긴긴 세월 아버지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셨기에 당신의 가슴은 영혼까지 젖어 있다. 당신의 뜨락에 오월의 따뜻한 햇살을 들여 뽀송뽀송하게 말려드리고 빨간 카네이션 가득히 심어 아버지의 정원은 늘 맑은 봄날이었으면 좋겠다.”C
“여름이면 꼭 기억나는 건 아버지의 정원이다. 수국꽃 석류나무 무화과 수세미수액을 받아 놓으시던 기억과 봉숭아꽃과 잎백반을 찧어 손톱에 물들여 주셨던 기억이 생각난다. 수국꽃은 나에겐 아버지의 향기와도 같다. 여름에 평상에 도란이 않아서 아버지의 기타소리를 듣고 우리 자매들은 합창을 했던 아련한 추억이 나를 춤추게 한다.”D
“아버지는 이른 아침 빗방울이 맺혀 떨어지기 전부터 부지런이다. 이 작은 텃밭에 사과나무도, 감나무도, 포도나무도 다 폼을 내며 서있다. 주인장 손길에 하나씩 봄단장을 맞추며 새싹도 틔우고 꽃도 피운다. 아버지의 정원은 올해도 변함없이 아름답다. 그 정성만큼 초록빛을 더해가고 무지개색을 짙게 드리운다. 봄비가 단잠을 깨우고 봄바람이 머리칼을 살랑거리는 때가 오면 김밥 싸들고 아버지 정원으로 봄소풍 나가봐야겠다. 햇님 좋은 날 가면 우리도 햇님 받고 알록달록 무지개빛 물이 들라나 모르겠다.” E
“가장 비싼 값으로 내어 놓으시려고 아침부터 아버지는 나무를 다듬고 계신다.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를 하는 것처럼 농부의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과 똑 같으리라. 오늘도 내 안에 있는 가지가 아버지의 가위손에 잘려져 나간다. 아버지의 마음에 들 때까지, 아버지의 정원에서 아름답게 꽃 필 때까지, 열매 맺을 때까지 나는 아버지의 정원에 놓일 분재다.”F
“참으로 오랜만이다. 아버지의 정원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이다. 적당히 따스한 햇볕도, 또한 적당히 시원한 가을바람도 하늘 끝에 달린 듯 팔이 닿지도 않는 그곳에는 열매 또한 가득하다. 아버지의 정원은 늘 풍성하다. 계절이 변하고, 변하여도 아버지 마음처럼 풍요롭다.” G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그러나 올봄은 너무나 특별한 봄이었다. 아버지께서 봄의 시작과 함께 홀연히 나의 곁을 떠나셨다. 아버지께서 늘 가꾸시던 화단과 뜨락에도 변함없이 봄이 찾아왔다. 꽃들도 아름답게 피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었던 잔디, 넉넉히 물 먹고 자랐던 화분들도 아버지의 손길을 기다릴 것 같다. 요즘 틈 나는 대로 화단정리, 잡초뽑기를 해보지만 아버지손길만 못하다.”H
“연두빛 바람이 기억을 몰고 온다. 고향집 툇마루로 달려간 나는 실눈사이로 들어오는 햇살과 흔쾌히 조우한다. 늘 바쁘기만 하던 어머니와 정원수를 다듬는 아버지가 보인다. 여린 나무들은 양지쪽으로 고개를 돌려 햇살 꼭지를 빨고 있다. 수줍은 작약은 모란과 손을 맞잡고 바람의 장난을 견뎌내고 있다. 아버지의 가위질 소리에 새들도 장단을 맞추고 나는 툇마루에 거꾸로 누워 오월의 노래들을 부르곤 했다. 나의 결혼과 함께 아버지의 정원은 사라져버렸다. 이사를 하던 날, 내 눈에는 피빛 영산홍이 피었고, 아버지의 정원을 몽땅 내 안으로 옮겨 심어야 했다.”I
이렇듯 결말에서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의 글이 될 수도 있다. 발단부, 전개부보다 결말부가 가장 중요한 까닭이다. 마지막의 의미화가 수필의 생명이다. 본격수필로 완성되려면 반드시 체험과 해석을 종합하여 형상적 체험으로의 변용을 시도해야 하는데, 그것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에 가장 중요한 역할인 지배적 심상 또는 인상심기라 하겠다. 결국 이러한 작업은 제재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구조화하여 예술적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근배는 수필은 시의 대지라 하였고, 이길원은 수필도 시를 쓰듯 써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서정의 기법으로 쉽게 쓰고, 화룡점정의 시학으로 이끌어야 한다.
옛말에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라 하였다. 수필시학을 <한시미학>에서 가져와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한시는 경물의 묘사를 통한 정의의 포착을 중시하는데, 이는 마치 화가가 화폭 위에 경물을 그리면서 그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것과 같다. 경물을 통해 ‘뜻을 묘사하고 정신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시나 수필도 마찬가지다. 시는 객관적 상관물로, 수필은 제재를 통해 주제를 말하는 법이다. 그 구체적 방법은 입상진의이니, 상세한 설명 대신 형상을 세워 이를 통해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림과 시의 관계를 통해 수필창작의 과제, 어제의 수필이 아닌 오늘의 수필을 창작하는 방법, 수필시학을 찾을 수 있으리라.
-. 제목은 곧 제재가 되기도 한다.
제목을 정하는 방법은 먼저 정하고 내용을 쓰기도 하고, 내용을 쓴 뒤에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제목을 정해 놓고 쓰는 것이 내용이 흐트러지지 않고 주제에 맞게 쓰는 데 도움이 된다. 제목은 곧 주제의 재료, 즉 주제의 함축 또는 압축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글을 쓰고 있는 목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의 정원’에 대해 쓰고 있으면서 제목을 단순히 “고향”이라고 한다면 ‘정원’을 고향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전혀 다른 느낌으로 글을 읽게 된다. 그리고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러므로 연상이나 상상이 가능하도록 구체적인 것을 명사형으로 정하는 게 좋다.
III. 로그아웃
레슬리 피들러는 일찍이 “다른 매개체나 다른 형태로 전환되는 것을 거부하는 문학은 죽는다.”고 하였다. 문학의 변화는 인공적인 조작이 아니라 시대적 진화라는 것으로 앞으로의 수필도 호모 나랜스의 이야기 욕망을 충족시키고 현대인의 실존성을 확장하는 산문으로 발전하리라는 기대감을 시사한다. 이러한 유형을 현실적 대안이라고 말하든 진보적 클릭이라고 부르든, 수필은 문학의 위기 시대에 적자생존하기 위한 주체적 변신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전략적 글쓰기다. 생각이나 삶의 모습도 문학적 전략에 의해서 이야기되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이 될 수 있다. 독자와 함께 하는 문학작품 속에서 특수성과 보편성이 함께 숨 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적 물음은 개인을 확장한 공동체적 물음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나’를 향한 물음이면서, 그 메아리는 ‘우리’들을 향한 울림이어야 할 것이다.
전략 중에서도 제목을 정하는 전략에 가장 신중해야 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제목은 주제의 재료이기 때문에, 제재로 표현하는 게 가장 좋다. 문학 자체가 간접화의 방법으로 기술되는 글인 만큼 최대한 주제에 대한 정보가 노출되지 않는 게 좋다. 글자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뜻이다. 문장보다는 어구, 어구보다는 단어가 더 제목으로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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