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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만민을 위해 연회를 베푸시는 하나님 말씀/ 이사야 24:1-27:13 요절/ 이사야 25:6 | 2023. 7. 2 | |
이사야 제 9 강 |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여름이면 꼭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태풍입니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두렵습니다. 강한 바람으로 땅위에 있는 많은 것들이 황폐하게 됩니다. 바다에는 큰 파도로 해안이 침수되고 바닷 속은 뒤집힙니다. 많은 비로 지면을 쓸어버리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많은 인명피해도 납니다. 태풍이 지나간 그 자리는 참으로 참혹합니다. 하지만 태풍을 통해 자연은 회복이 되고 정화가 된다고 합니다. 태풍이 지난 후 하늘은 그 언제보다도 깨끗하고 맑고 청량합니다. 황폐함 속에서 피어나는 새싹들을 볼 때면 우리의 마음에도 소망과 희망의 새싹이 돋아납니다. 오늘 말씀은 온 땅과 그 주민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종말론적인 언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판과 종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세상을 정화하시고 새 희망과 소망을 노래하게 하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연회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연회의 기쁨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가득하여 우리도 노래 할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1-12장에 걸쳐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심판을, 13-23장에서는 ‘이방 열국’에 대한 심판을 나라별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24~27장에서는 ‘온 땅과 그 주민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24:1을 보십시오.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하나님께서 온 땅을 텅 비게 하시며 초토화하십니다. 온 세상이 뒤틀리고 뒤집어 지게 됩니다. 태초의 혼돈과 공허가 이제 세상에 다시 임하게 됩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진 모습처럼 모든 주민은 흩어집니다. 이 심판에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나라와 계층과 남녀노소, 땅 위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차별 없이 임합니다.
이러한 심판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분과 맺은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 말씀을 어겼고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로 인해 저주가 땅을 삼켰습니다. 사람들은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림으로 그들이 누렸던 풍성함은 이제 사라지게 됩니다. 땅의 풍요로움을 상징했던 포도주가 떨어지게 되고 소고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끊어지고 수금 타는 기쁨이 그치게 됩니다. 포도주 대신 독주를 마시지만 쓰기만 합니다. 모든 즐거움이 사라지고 땅의 기쁨이 소멸합니다.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얻고자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가고 운동도 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 게임을 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며 쾌락에 빠져 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으로 채워지지 않아 마약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또한 기쁨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2023 춘천 여름 수양회 주제도 복음 기쁨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우리가 기뻐하길 원하고 우리 또한 원합니다. 기쁨이 사라진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 모습입니다. 그 심판의 원인은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기쁨이 없다면 참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번 2023년 복음 기쁨 희망 여름 수양회를 통해 우리가 복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과 희망이 풍성하길 기도합니다.
땅이 황폐함으로 세상은 여호와의 위엄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현실은 쇠잔하고 쇠잔합니다. 화가 임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합니다. 영광의 그날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영광은 고난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17-23절을 보면 심판의 날 사람들은 두려워 도망갑니다. 하지만 함정에 빠집니다. 함정에서 올라와도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심판의 때 땅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폭풍 속의 오두막처럼 깨어지고 흔들리고 비틀거리다 바람에 날아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 땅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피할 곳도 없습니다. 믿을만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지켜줄 왕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왕들을 벌하시고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왕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25:1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이사야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거짓됨이 많지만, 하나님은 성실함과 진실하심으로 일하십니다. 주님의 말씀과 행적은 변함없는 진실을 따라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들을 낮추십니다. 빈궁한 자,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가 되십니다. 폭풍 중의 피난처이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심판의 마지막 날 하나님은 세상 왕들을 심판하시고 왕으로 등극하십니다. 그리고 만민을 위하여 연회를 베푸십니다. 이 연회는 돌잔치가 아닙니다. 왕의 등극을 축하하는 왕의 연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풍성하겠습니까?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가 넘칩니다. 심판의 때는 포도주가 떨어져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졌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베푸심을 통해 풍성함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가 제하게 됩니다. 만민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얼굴을 가려야만 했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덮여 늘 어둠과 절망 속에서 신음해야 했습니다. 이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요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그 어떤 연회에서도 기쁨과 희망을 노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만군의 여호와께서 만민을 위하여 참 기쁨과 희망의 연회를 베푸시고자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는 그날에 궁극적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죽음은 죄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이 모든 인류를 사로잡고 왕 노릇 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사망 앞에 맞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망 앞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원인인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대가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으시고 장사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삼키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때에 사망 자체를 영원히 멸하실 것입니다. 사망은 모든 인류에게 어둠과 슬픔으로 눈물을 흐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망을 멸하신 주님은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겨주십니다. 죄로 인한 모든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여 주셨습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심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모든 수치를 없애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날은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오지는 않았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은 눈물의 삶이요, 수치의 삶이요, 고난과 힘든 삶입니다. 가족과 지인들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자녀 문제로 양들로 인해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눈물을 흘립니다. 직장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수치를 당합니다. 죄에 넘어져 수치를 당합니다. 하루하루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감당하는 것이 힘에 부치고 고단합니다. 이사야 또한 그의 현재 모습은 황폐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쇠잔하고 쇠잔하였습니다. 배신자들은 배반하고 배반하였습니다. 그의 눈물을 마를 새가 없었습니다. 옷을 벗고 다니며 수치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은 노래합니다. 찬양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현실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말입니다. 그는 그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9절입니다.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구원의 그 날을 보면 우리는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힘든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 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 날의 영광을 바라볼 때 현실의 눈물, 현실의 수치, 현실의 고통과 환난을 이겨낼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 힘들고 괴롭더라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약속하신 그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며 소망하며 기다리며 노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6:1을 보십시오.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성벽과 외벽이 견고하면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성벽과 외벽이 되십니다. 여호와께서 지키시기에 이성은 안전과 평화를 보장받습니다. 이 성에 들어올 수 있는 이는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자들입니다. 이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자기의 생각보단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위해 십자가를 집니다. 이런 자는 심지가 견고한 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평강에 평강을 더하여 주십니다.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한 반석 되심을 인정합니다.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하기에 이들은 의인의 길을 갑니다. 정직하신 하나님께서 의인을 길을 평탄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심판의 때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중심이 주님을 간절히 구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악인은 어떠합니까?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엄위하심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 심판받아도 회개치 않고 바른 길을 배우지 않습니다.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은 보지 않으며 백성을 위한 주의 열성을 볼때 부끄러워 합니다. 하지만 의인들은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고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압제 하에 있었을 때 그들은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이 멸망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대적들이 죽었고 다시 살거나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기억조차 남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는 주께서 친히 벌하시고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를 더 크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습니다. 세상에 의지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입니다. 강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수많은 정보가 넘쳐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도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부르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생명역사를 흥왕하게 이루어가십니다.
이사야는 과거 역사를 통해 심판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산고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산고 끝에는 아이를 낳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낳은 건 무엇입니까? 바람입니다. 이는 아무것도 낳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허무함과 무력감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무엇을 봅니까? 19절을 말씀합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현재 이스라엘은 심판받아 황폐해졌고 죽은 자와 같습니다. 죽은 자들에겐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와 같은 자들, 산고를 겪었지만 아무것도 낳지 못한 이들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땅에 생명을 불어넣는 생명수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빛나는 이슬은 죽음에 있는 자들을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하며 죽은자들을 살아나게 합니다.
그러하기에 환난의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런 소득이 없을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빛나는 이슬과 같은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고 밀실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봄학기 몇몇 양들을 잉태하였습니다. 여러 산고를 겪었지만 바람을 낳았습니다. 여름 수양회 초청하고자 하니 눈에 확연히 보이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허무함과 무력감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것이 절실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기도하는 가운데 여름 수양회 준비모임에서 하루 세 번 1분씩이라도 기도할 수 있게 기도 알람을 보내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이를 진행하였습니다. 점차 기도의 힘이 느껴졌습니다. 제 마음에 평안이 임하고 수양회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양들을 초청하기만 하면 거듭나고 변화될 거라는 확신과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어떻게 도와야 할지 방향이 생기고 말씀이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진용진 형제를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심방을 갔더니 먼저 수양회에 대해 말하였고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는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금요일 휴가를 내서라도 오겠다 하고 등록하였습니다.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입니다. 산고의 고통을 겪지만 바람만 낳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은 자들을 살아나게 하고 모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7장은 이스라엘 포로 귀환과 관련하여 포도원의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날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먼저 어둠의 세력을 멸하십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아름다운 포도원을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되어 포도원에 물을 주며 밤낮으로 지키고 아무도 이를 해치지 못하게 돌보아 주십니다. 찔레와 가시가 대적하면 싸워 멸하십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와 화친할 것이니라.” 하나님과 화친해야 합니다. 다른 세상 강대국을 바라보지 말고 그들과 가까이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가 땅 위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은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하나하나 모으십니다. 알밤을 하나하나 줍듯 한 사람 한사람 챙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챙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흩으신 백성을 모으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하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연회와도 같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풍성하심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죄로 인해 더러워지고 가려진 가리개와 덮개를 그의 피로 깨끗이 제거해 주십니다. 사망의 권세와 맞서 싸울 힘을 더하여 주십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주일예배를 통해 매주 하나님의 연회를 맛볼 수 있도록 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일예배는 삶의 예배의 출발점이며 마중물입니다. 주일예배를 참된 예배자의 자세로 드림을 통해 우리의 삶이 연회가 되어 날마다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