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시 모음 17편
1.가을의 유혹
박인환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리킨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물은 서울의 노대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거리며
정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차처럼 또는
낙엽보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때
목메인 소리는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고 있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회색 양복과 목관 악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목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으면
가을의 유혹은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한다
눈물 젖은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면
인간이 매몰될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나의 주변을 휘돌고
2.목마와 숙녀
박인희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밑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패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널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절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4.거리
박인환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에 씻겨 갔다
아무 말도 하지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는 매일 맥박을 닮아 갔다
베링 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떨어지는 꽃을 그리워 한다
황혼처럼 장식한 여인들은 언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거리를 순백한 식장으로 만든다
전정의 수 목같은 나의 가슴은
베고니아를 끼어안고 기류 속을 나온다
망원경으로 보던 천만의 미소를 회색 외투에
싸아
얼은 크리스마스의 밤길로 걸어 보내자
5.검은 강
박인환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종의 노정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부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과 초연이 가득찬
생과 사의 경지에 떠난다
달은 정막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히로 이룬
자유의 성채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6.고향에 가서
박인환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에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의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 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 뿐이다
비 내리는 사경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이
나에게 손짓을 해 준다
7.낙하
박인환
미끄럼판에서
나는 고독한 아킬레스처럼
불안의 깃발 날리는
땅 위에 떨어졌다
머리 위의 별을 헤아리면서
그 후 20년
나는 운명의 공원 뒷담 밑으로
영속된 죄의 그림자를 따랐다
아 영원히 반복되는
미끄럼판의 승강
친근에의 증오와 또한
불행과 비참과 굴욕에의 반항도 잊고
연기 흐르는 쪽으로 달려가면
오욕의 지난날이 나를 더욱 괴롭힐 뿐
멀리선 회색사면과
불안한 밤의 전쟁
인류의 상흔과 고뇌만이 늘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할
망각의 이 지상에서
더욱 더욱 가라앉아 간다
처음 미끄럼판에서
내리달린 쾌감도
미지의 숲 속을
나의 청춘과 도주하던 시간도
나의 낙하하는
비극의 그늘에 있다
8.남풍
박인환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일찌기 외복을 빼앗긴 토민
태양 없는 말레이
너의 사랑이 백인의 고무원에서
쟈스민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민족의 운명이
쿠멜신의 영광과 함께 사는
앙코르 와트의 나라
월남인민군
멀리 이 땅에서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가슴 부서질 듯 남풍은 온다
계절이 바뀌면 태풍은 온다
아시아 모든 위도
잠든 사람이여
귀를 기울여라
눈을 뜨면
남방의 향기가
가난한 가슴팍으로 스며든다
9.불행한 신
박인환
오늘 나는 모든 욕망과
사물에 작별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친한 죽음과 가까워집니다
과거는 무수한 내일에
잠이 들었습니다
불행한 신
어디서나 나와 함께 사는
불행한 신
당신은 나와 단둘이서
얼굴을 비벼대고 비밀을 터놓고
오해나
인간의 체험이나
고절된 의식에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우리는 결속되었습니다
황제의 신하처럼 우리는 죽음을 약속합니다
지금 저 광장의 전주처럼 우리는 존재됩니다
쉴새없이 내 귀에 울려오는 것은 불행한 신
당신이 부르시는
폭풍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천지 사이를
내가 있고 엄연히 주검이 가로놓이고
불행한 당신이 있으므로
나는 최후의 안정을 즐깁니다
첫댓글 박인환... 거리의 신사... 멋쟁이 시인...
시의 낭만은 그의 모더니즘에 숨어 있습니다...
좋은 시... 잘 감상하고 나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