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반성
곽경효
이제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
그리운 이름 하나쯤 지워져도 좋겠다
상처를 들여다보며 아파했던 날들을
하마터면 사랑이라 부를 뻔했다
사랑의 무게가 이리 가벼운 것을
눈물 흘리며 견딘 시간이
잠시 지나가는 한 줄기 소나기 였음을
겨울처럼 차갑지만 가끔은 따뜻한 사랑이여
다시는 내게 오지 말기를
아름답고 찬란한 그 폐허,
이제는 견딜 수 없으니
봄
벚꽃이 피었다
천지사방이 환하다
내 마음에도 꽃이 피었다
마음 한쪽 시크릿 가든에 활짝 핀
당신이라는 꽃
쉿!
나는 지금 황홀을 훔치고 있는 중이다
너라는 이름은
당신 앞에 너라는 이름으로 서기 위해
나는 불면의 밤으로 숙성되어 왔다
매일매일 잠깐씩 당신을 생각했고
그리고 어김없이 저녁이 찾아왔다
당신을 너라고 부를 수 없는 밤에
내 몸에는 가시가 돋았다
당신이 가시에 찔리는 불온한 상상을 했고
잊고 싶은 기억과 잊을 수 없는 기억사이에서
갚팡질팡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불면의 밤을 견디는 동안
어느 사이 당신의 이름은 맴목(盲目)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너는 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상사화
기다란 꽃대 위에 붉게 피어난 마음 한 점
느낌표 하나로 완성한 생애라니!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는 꽃이 피지 않는다
땅속 깊숙이 초록을 품은 힘으로
마침내 찬란한 생애를 꽃 피울 수 있는 것
너는 지금 내 곁에 없고
나 또한 내 옆에 머문 적 없으니
앞으로도 오랫동안
아무 일 없이 조용하게
상사화 붉은 꽃이 피거나 말거나
제자리에서
꽁꽁 언 얼음장 밑으로 강물이 흘러가고 있다
여름 한철 뜨거웠던 마음을 잠시 가둬둔 채
조용하게 낮은 자세로 흐르고 있다
무성했던 이파리들을 떨어낸 나무들은
맨몸으로 서서 겨울을 견디고 있다
실핏줄 같은 겨울나무의 잔가지가 빈 공간에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 넣고 있다
모두 잘 견디고 있는 중이다
서늘한 제 속살을 보여주지않으려고
칼날 같은 바람 속에세 꼿꼿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겨울 새 한 마리
시린 하늘에 잔금을 긋고 날아간다
자작나무, 흰 뼈로 서다
그 숲에 들어서니
나무들 일제히 제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있다
세상의 꽃들이 꿈처럼 피었다 지고
바람은 소리 없이 밀려 왔다 또 밀려가는데
침묵으로 견뎌온 시간의 눈금이 저리 곧는가
깃발처럼 흔들이는 이파리는
곧 지워지고 말 생의 한 부분일뿐
나무에 새겨진 무늬를 바라본다
환하게 꽃피는 생애는 가지지 못했으나
꺾이지 않은 한 줄기 등뼈를 지녔으니
마을을 함부러 내보이지 않으려
제 몸의 서슬로 하얗게 빛나고 있는
마른 네 뼈마디
적막한 자리에서
홀로 깊어가는 사랑아
또 다른 고백
무반주 첼로를 듣는다
자꾸만 밀려오는 낮은 소리
누군가 나를 끌고 간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오래도록 흔들리고 있던
가슴 속 줄 하나 툭 끊어진다
한밤중 독으로 피어올라
온몸을 파랗게 물들이는
저 아득한 당신의 고백
-곽경효 시집『사랑에 대한 반성』, 시인동네 시인선 187, 2022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