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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까지 이어지는 열매
마가복음 11:12~14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저는 내년 7월이면 만 70세를 마치는 날이기에 교단 헌법에 따라 은퇴를 하게 됩니다. 지난 1986년도 5월에 농촌교회에서 전도사로 첫 목회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38년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치는 시점이 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름 성실하게 목회를 하노라고 하였지만, 세상을 향하여 내세울 것이 없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초라하게 여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진지하게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이 다름을 알았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했습니다. 자랑할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신 성령을 주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때가 이르러 천국에 이르게 되면 세상에서 이룬 업적은 하나도 기억됨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었던 자랑스러운 지위도 재산도 그리고 학벌과 가문, 이런 모든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만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결산의 때에 남겨진 열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열매를 맺는데 주력한 것이 아니라 업적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로서 화려한 말솜씨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고, 귀신을 쭟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므로 자기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자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열심으로 행하는 것은 자랑할 것이 있는 화려한 업적을 쌓은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끌고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풍성한 잎사귀 같은 공로 주의에 대하여 경계하는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성전을 둘러보시고 베다니에 가서 주무십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다니까지의 거리는 요한복음에서는 5리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였고, 영어 성경에는 2마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이 있는데,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여튼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셨다가 가난한 동네여서인지 아침을 잡수시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먹을 것이 있을까 하여 가보니 그 무화과나무에는 잎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14절에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막 11:20에서는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리고 말았다고 기록하였고, 마 21:19절에서는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는 유월절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 봄인 3월 말 내지는 4월 초순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해발 800m가 넘는 고지대입니다. 따라서 계절적으로 보면, 아직은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나지 않을 때였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힐 때가 아닌데 ‘예수님이 무화과 열매를 찾으셨다는 것은 너무 성급하셨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신론자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이라는 사람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덜된 사람’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나무가 무슨 죄가있다고, 아직 제철도 아닌 무화과나무에서 열매가 없다고 나무를 저주하였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예수님은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고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열매를 맺는 철이 아닌 것을 알고서도 이렇게 성급하게 행동한 것일까요? 아니면 무화과 열매를 맺는 시기가 언제인지를 몰라서 이렇게 열매를 찾으신 것일까요? 둘 다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첫 번째로 예수님은 열매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시기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열매를 맺어야 할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열매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등장합니다만 그런 여러 나무의 종류에서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나무는 열매 맺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열매에 관한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3:8)를 맺으라고 하셨고, 열매로 그들을 안다.(마7:16) 열매 거둘 때가 가까웠다.(마21:34)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마7:19) 씨 뿌리는 비유에서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마가복음 4:8)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나무로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가 사용되는데, 특징은 열매에 있습니다. 열 매없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말씀하시면서 열매 없는 외식적은 종교 행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11:11절에서 예수님은 전날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보셨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외식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 행위의 열심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자부심 역시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마치 무화과나무가 그 잎사귀만을 뽐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어떤 행위에 의한 업적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면 내적인 열매를 등한시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에 마음을 쓰게 되면 자신을 돌아보는 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잎사귀가 무성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멋진 모습으로 드러내므로 찬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 23: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경문이란 유대인들 성경 말씀을 적은 양피지 띠를 보관하는 가죽 상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이마에 붙이고 성경 구절이 적힌 끈을 팔에 두르고 다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스스로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온종일 이 경문을 차고 다니면서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하였습니다. 내면의 열매는 소홀하게 여기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모습에 대하여 저주가 있을 것이요, 이것이 외식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외식을 헬라어 ‘후포크리시스(ὑπόκρισις)’라고 하는데 이것은 ‘불경건한, 악한’이라는 뜻이 담겨 있씁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불경건한 마음, 두 마음을 가진 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의식하여 행하는 경건의 모습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열매를 소홀하게 여기는 것으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열매는 무엇을 말할까요?
12절에 “시장하신지라”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글자 그대로 ‘배고픔’을 말합니다. 생명과 깊이 연관된 단어 아닙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그분의 몸 안에서 하나로 일체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그 분의 몸인 교회 안으로 초청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열매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 번째는 열매 맺는 시기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기대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궁금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것은 무화과나무에 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잎이 있다는 것은 열매를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화과나무의 특징입니다. 잎이 나 있는 나무는 반드시 열매가 맺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이 우리에게 열매를 요구하실 때 열매를 드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주님이 필요로 했을 때, 그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때와 기한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열정이 있다고 하면서 정작 안에 살펴보면 아무런 내적 열매가 없다면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전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시간의 흐름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내게 요구하는 열매를 내놓으라고 할 때 언제든 내놓을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나는 내 영혼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세상에서의 화려함과 인기를 좇아 살아왔는데 주님은 내게 열매를 구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눅 12: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한 부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해 밭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엄청난 수확을 하였습니다. 그가 준비한 곳간이 부족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짜내어 기존의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싸놓고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사람이 바로 열매 없는 무화과 같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것을 향하여 그는 열심히 노력하였고, 성취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라는 열매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부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높이 추앙을 받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면 모두 말라지고 사라질 것뿐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원한 열매는 어떻게 맺을 수 있을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키’로 번역된 ‘혤리키안’은 '신장(身長)의 길이'와 '생명의 길이' 모두를 뜻할 수 있습니다. 키를 '한 자'나 더 한다는 것은, 신장의 길이를 나타낼 때는 약 8인치가량 늘인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이를 뜻할 때는 나이를 더 먹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를 해석한 신학자들은 생명의 길이, 곧 나이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즉, 누구도 더 오래 살겠다고 애를 쓴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생명의 연장(延長)을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생명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우리의 노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간섭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내 생명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 예수님 안에 있는 성령을 베풀어 주셔서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면 우리의 취향이 달라집니다.
창세가 8장에서는 홍수가 그치고 물이 감하여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고 물이 더 감하여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후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지상의 형편을 살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일을 수행함에 까마귀와 비둘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처음에 까마귀를 풀어 놓아주었습니다. 창 8: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여기 “왕래하였더라”의 원문 뜻은 ‘날아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나 방주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고 방주 주변을 배회하면서 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그다음에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창 8: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까마귀와 비둘기의 차이는 귀소본능에 있습니다. 까마귀는 귀소본능이 없지만, 비둘기는 상자에 담아 수백 km를 운반하여 풀어놓아도 어떻게 아는지 정확히 그 풀어준 지점으로 돌아 오는 귀소본능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처럼 비둘기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임한 성령은 하나님 나라를 향하도록 우리의 성향을 변화시키십니다. 골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의 취향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늘에 속한 생명체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여기에 반드시 기도가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생명체는 구하지 않아도 때에 따라 성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보내졌기에 하나님이 책임을 져 주시는 것입니다. 창 1: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하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그 말씀은 계속됩니다. 모든 만물이 살아있는 말씀에 순종하기에 사람들이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 모두를 공급할 수 있도록 합니다. 땅의 생명체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언약하셔서 기도하지 않을지라도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속한 생명체의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르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뤄지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영적전쟁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마귀는 택하신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펼칩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려내신 성령이 내 안에서 활발히 활동하시고 마귀의 진을 파괴하는 천군 천사의 긴밀한 협동이 시작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이 생깁니다. 모든 저주에서 풀려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영원한 기쁨을 얻기 위함입니다.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했습니다. 구하는 것을 받을 때 가치가 있고 기쁨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천국의 생명은 이 땅에서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천국의 생명으로 새롭게 되도록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까지 이어지는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