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택: 별일 없능교? 지야 걱정 마이소. 네 네 호텔서 다 해줍니더.
씬 50. 만택의 집 마루/새벽.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잠결에 내복 차림으로 나와 전화를 받
수화기를 든 어머니 곁에서 할아버지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
어머니: 별일사 있겠나? 비가 안 와가 수로에 물이 말라뿐 거 말고 전번에 고장 난 양수기 니가 안 고쳐 놨다 아이가.
할아버지: 그런 말은 와 하노! 밥은 어떻게 한 데노?
어머니: (수화기를 떼고) 호텔서 다 해줍답니더.
할아버지: 호텔? 돈은? 돈은 부족하지 않대나?
어머니: 그래 돈은 부족하지 않나? 응, 그래 벽장 속에 있던 농협 이자 돈 니가 갖고 갔나?
할아버지: 야가, 와 이라노!
할아버지가 얼른 수화기를 뺏어 든다.
씬 51. 호텔 로비/저녁.
만택: 안녕하신교? 네, 그람요. 아입니더 여자요? 오늘도 서이나 만났심더. 다들 착해 보입니더 얼굴도 곱지요. 그람요 걱정마이소. 제일 괜찮은 아로다 뎃고 갈깁니더.
듣고 있던 라라, 비상계단으로 발길을 옮긴다.
만택: 할 일 인써도 그냥 두이소. 지가 가 금방 다 할깁니더 네 네, 건강하이소.
수화기를 내려놓는 만택, 눈가가 촉촉하다.
만택: (조금 목이 메인 ) 얼만교?
전화요금을 치르는 만택,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한다.
막 도착한 외국인들이 짐을 잔뜩 내려놓고 기다리
계단으로 돌아서는 만택.
씬 52. 호텔 비상계단/저녁.
사장: 딱하다고 사정만 봐주다가 장사는 언제 하고? 내가 무슨 자선 사업가냐! 내가 뭐 이 짓이 좋아서 하는 줄 알아!
라라: 이제 겨우 이틀 지났 아직 반도 안 지났고요.
사장: 이틀이 아니라 여섯 명이 퇴짜를 놓은 거야. 봤잖아. 한 시간도 안 되서 고개 획 돌리고 나가는 거. 이게 어디 흔한 경우냐! 싹 수가 안 보이잖아, 싹수가.
만택이 계단을 오르다, 사장의 들리자 걸음을 멈춘다.
라라: 아직 긴장도 덜 풀리고 오늘은 몸이 안 좋았잖습니까!
사장: (짧은 한숨) 한 달을 붙들고 있어 봐라. 성사금 챙길 수나 있을 거 같애! 너,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거다. 여기 애들이 바보냐! 아무리 한국이라고 누가 마흔 줄 다 된 농사꾼한테 시집갈라구 그래. 서른여덟이 아니라 열여덟 살짜릴 뎃고 와 봐라! 요즘 세상에 누가 땅 파먹고 살라구 그러냐!
잠시, 두 사람 말이
기분이 상한 만택이 문짝을 걷어차고 나간다.
‘쾅’하는 깜짝 놀란 두 사람,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무도
씬 53. 호텔 방/저녁.
침대에 드러누운 만택. TV를 켜본다. 온통 러시아 말뿐인 방송.
방청객들이 왁자지껄 웃어대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동물 다큐가 나오자 채널을 고정시킨다.
하지만 금세 눈이 감기고 마는 만택.
CUT TO.
물갈이로 붉어진 얼굴에 코까지 쌔근대며 자고 있는 만택.
희철이 들어오며 한심한 바라본다.
희철: 꼬라지하고는, 이 궁상은 우째 바다를 건너도 이래 똑같노! (침대를 발로 차며) 일나라마!
만택: (붉어진 눈을 반쯤 뜨고는) 뭐꼬?
희철: 문화체험이다. 여까정 왔는데 몸 좀 풀어야 할 거 아이가!
만택: (도로 눈을 감아버리며) 됐다.
희철: 어여 일나라마! 두식이 헹님 기다리신다.
만택이 다시 눈을 뜨면, 빨간 남방의 두식이 방으로 들어선다.
씬 54. 나이트클럽/밤.
음악이 귀청을 울리고, 현란한 조명아래 스테이지가 펼쳐진다.
팔등신의 늘씬한 미녀들이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신나게 흔들
넋이 나간 네 사람.
웨이터의 안내를 받고 으로 가는 동안에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희철: 헹님은 우예 이런 별천지를 알았능교?
두식: 워메 ! 나도 이 정돈지 몰랐제.
희철: 물 반, 고기 반이라 카는 게 딱 이짝이네.
CUT TO.
웨이트리스가 술과 안주를 내려놓는 동안에도, 넋을 놓고 무대만 바라보는 일행들.
순간, 희철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포착된다.
비행기에서 만났던 옥산나가 친구와 함께 요염하게 허리를 흔들어 대
희철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반갑게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 보인다.
희철: 헹님, 입질이 오는 게 보이능교?
씬 55. 가라오케 룸/밤.
현지인 사내가 사장의 잔에 술을 따르고, 라라가 건너편에 앉아 있다.
문 앞에는 짧은 스커트 차림의 두 여자가 나란히 서 있다.
사내: (능숙한 한국말로) 왼쪽에 있는 은 이태원에서 일하다 작년 겨울에 들어왔어요. 웬만한 한국말은 다 알아 듣죠.
사장: (라라를 보며) 어때, 괜찮지? 둘 다 한국 가고 싶어서 안달이랜다.
라라: 결혼이 하고 싶은 사람들은 아닌 거 같은데요.
사장: 여기까지 와서 왜 또 이래! 숨어 사는 게 이젠 좀 익숙해진 거야? 여권도 필요 없나 보지?
라라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자, 사장이 술을 따른다.
사장: 고향이 함경도 청진이랬지. 두만강 건넌 게 언제라고?
라라: 2001년 12월입
사장: 목숨 걸고 나왔구나. 한참 추웠을 텐데, 고생 많았겠네. 이제 끝이 뻔히 보이는데, 고민할 필요 없잖아. 둘 다 엮어지기만 하면, 부족한 3천불 내 받았다고 치지. (사내 쪽을 돌아보며) 너는 얼마씩 받고 이 짓 하냐!
사내: 에이, 들이 뭐 돈이 있겠습니까! 형님 떼어주고 나면 차 기름 값이나 하는 거지.
사장: 자식, 능구렁이 기어 다니는 게 다 보인다. 임마!
라라,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씬 56. 나이트클럽/밤.
어설프지만 열심히 흔들어 대는 일행들.
희철의 몸이 옥산나에게 점점 밀착돼 간다.
어느새 그녀의 친구도 두식이 차지가 되어 버린다.
점점 일행들에게서 소외되어 가는 만택, 혼자서 자리로 돌아간다.
CUT TO.
술잔에 보드카가 가득 채워진다.
모두들 잔을 들어 건배 하려는 찰나, 술이 얼큰해진 만택의 큰.
만택: 다 자빠뜨려!
영문을 모르고 놀라는 희철과 두식.
만택: (재미있다는 듯 다시 큰 ) 다 자빠뜨려!
희철: 일마가 미칬나? 와 산통을 깨고 지랄이고 지랄이. 야 한국서 일하다 온 아다. 말조심 하거래이.
만택은 잔을 비우고 나서도, 계속해서 여자들을 향해 다 자빠뜨려를 외친다.
웃음으로 화답하는 여자들.
두식이 손짓으로 웨이터를 부르더니, 팁을 두둑하게 찔러준다.
만택을 가리키며 웨이터의 귀에 대고 뭔가 속삭이는 두식.
씬 57. 택시 안/밤.
술이 취한 채 삐딱하니 뒷자리에 앉아 흥얼거리는 만택.
차창 밖으로 순찰차 한 대가 신호를 받아 나란히 멈춰 선다.
자세히 보면 한국산 티코다.
만택: 티코네. (취해서 나오는 큰 저래가 도둑이나 잡겠나!
갑자기 안에 타고 있던 경찰이 고개를 돌려, 만택 쪽을 뚫어지게 노려본다.
만택: 뭘 보노!
계속 노려보는 경찰의 서슬에 눌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만택.
신호가 바뀌며 다시 출발을 하는 택시.
만택이 다시 창밖을 보면, 좌회전하며 멀어져 가는 순찰차.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지른다.
만택: 째려보면 우짤긴데! 해 보잔 라! 따라와 봐라마!
경찰은 가면서도 계속 고개를 돌려 택시 쪽을 주시한다.
씬 58. 라라 아파트/밤.
거실과 방의 구분이 없는 허름한 원룸형 아파트.
창에는 틈새 없이 커튼이 쳐져 있고, 불빛은 매우 침침하다.
모포를 덮은 야전 침대 위에 멍한 얼굴의 라라가 비스듬히 몸을 눕힌 채 앉아 있다.
차를 끓여 낸 경실은 식탁 위 찻잔에 차를 따르
경실: 독립기념일이 가까워진다고, 테러에 대비해서 검색이 강화될 거래. 여권 못 구한 사람들 중엔 벌써부터 경비가 허술한 대사관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어.
라라: 무모한 짓이야. 실패바로 송환되고 말거야. 어떡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경실: 실패하든 성공하든 검색만 강화되겠지 뭐.
라라: 여권만 마련되면, 안전하게 떠날 수 있어. 딴 생각하지 말자.
괴로운 마음에 두 눈을 감는 라라. 그 너머로 차를 마시다 돌아보는 경실.
씬 59. 호텔 방/밤.
문이 살며시 열리며 희철이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스탠드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
만취한 만택이 트렁크 팬티에 까만 양말을 신은 채 자
혼자인 줄 알았던 희철의 뒤에 옥산나가 따라 들어온다.
만택이 누워있는 것을 보고 그녀가 놀라자, 온 몸을 동원해 안심시키는 희철.
희철: (큰 동작과 함께) 디스 맨, 매니 매니 드링크. 보드카 드링크. 돈트 워리. 돈트 워리.
옥산나가 안심하는 기색을 보이자 키스를 퍼붓는 희철.
마침내 침대로 쓰러져서는 서로를 격정 애무하는 두 사람.
순간, 만택의 눈이 슬며시 떠진다.
자는 척 하며 희철의 침대 쪽으로 몸을 돌린다.
실눈을 뜨고 훔쳐보는 만택.
희철이 옥산나의 상의를 벗기고, 다리 쪽으로 손이 내려간다.
두 사람이 점점 격정적이 되어 가는 순간,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는 만택.
깜짝 놀라는 두 남녀. 재빨리 몸을 가린다.
잠이 안 깬 척, 뜨는 둥 마는 둥한 잠시 두 사람을 내려 보는 만택.
볼록한 배를 쓸어가며 화장실로 털레털레 걸어간다.
문도 안 닫고 갈기는 오줌발 요란하게 들린다.
놀란 옥산나가 급히 옷을 챙겨 입으며 나가버린다.
희철이 잡아보지만 소용
희철: (화장실 입구에 서서) 야이 씨바- 손으로 쥐어틀어서라도 참아야 할 거 아이가! 이런 일이 또 있을 줄 아나, 어? 어이구우!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려도 유분수지. 옆에서 바람은 지가 다 잡아놓고 자빠뜨리라매! 니가 다 자빠뜨리라 안캤나!
부스스한 얼굴로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도
술이 덜 깬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마무리 하는 만택.
침대로 돌아가 고꾸라진다.
그동안에도 희철의 씨부렁대는 화풀이는 계속된다.
분통이 터지는 듯 베개로 죄 없는 침대만 내리치는 희철.
아무런 반응이 없는 만택. 돌아누우며 ‘씨이익’하고 웃음 짓는다.
씬 60. 호텔 방/아침.
팬티에 와이셔츠만 걸친 만택이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
역시 팬티 차림의 희철이 욕실에서 금방 씻고 나와 거울 다가온다.
만택: 니는 한국서 젤로 비싼 작물이 뭔 거 같노?
희철: (만택을 한번 힐끗 보고는 스킨을 바르며) 금추.
며) 야가 뭔 소릴 하노! 젤로 비싼 반찬이 금치, 젤로 비싼 작물은 금추.
만택: (말문이 막히자) 안 웃기다.
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라라가 들이닥친다.
몸을 가리랴 옷을 찾느라 허둥대는 두 남자.
급하게 의자를 당겨 아래쪽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론 가슴을 가리는 희철.
만택은 바지에 다리를 잘못 넣어 뒤대다 넘어지고 만다.
놀라서 얼른 고개를 돌리는 라라, 한 손에는 다려진 와이셔츠를 들
라라: 죄송합세탁실에 만택 씨가 맡겨 둔 옷이 있길래
희철: 통역이라캤죠? 지들 옷은 지들이 입을게요. 내려가 계이소. (조롱하듯) 한국선 말만한 처자가 이래 사내 방에 불쑥불쑥 들어오면, 딴 생각이 있는 줄 알거덩요. 오해할 뻔 했십니더.
라라: (분을 가라앉히며) 죄송합여기서 홍만택씨 일은 모두 제 일이고 제 책임입(문고리에 옷걸이를 걸며) 어쨌든 실례 많
희철: 성사금 받으면 거 짝에도 떡고물 좀 떨어지나 보지요?
라라: (나가려다 걸음을 멈추고) 그런 떡고물도 없으면 제가 왜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어제 드신 술이 안 깨셨으면, 냉수 한잔 하십시오.
희철: 거 짝도 나중엔 한국 가고 싶은 거 아인교? 한국선 가시나가 거래 꼬박꼬박 말대꾸 하단 큰 일 납니더. 칠거지악이라꼬 가시나가
라라: (말을 끊으며 러시아 말로) 야! 이 자식아! (돌아서 희철에게 다가가며) 그럼, 한국서 결혼하지. 여긴 왜 왔어. 그 나이 먹도록 결혼 못한 이유를 알겠다. 이 자식아! 미친 놈!
라라가 다가오자, 기에 눌린 희철은 몸을 가린 채 점점 웅크려든다.
돌아서 문을 ‘쾅’하고 닫고 가버리는 라라.
희철: (어이없는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뭐라캐샀노. 지금 욕한 거 맞제? 씨발거리고 새끼라 칸 거 맞제? 그치맞제?
라라의 행동에 만택도 놀랐는지 아무 대답을 못한다.
희철: 맞다. 몬 알아 먹는다꼬 욕한 거 맞다. 우-와 뭐 저런 기 다 있노? 저래가 결혼 하겠나. 했어도 여럿 잡아먹었을 기다.
만택: (잠자코 있다가 문 쪽을 바라보며) 울 엄니 같네.
씬 61. 행사장/낮.
사장이 라라와 두식의 통역을 붙잡고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 곁에는 가라오케에서 봤던 두 여자가 서 있다.
사장이 라라의 등을 ‘톡톡’ 두드려 주고는 나간다.
두식이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여자를 맞는다.
CUT TO.
맞선녀(마샤): 농사일 힘들지 않으세요?
만택: 혼자선 힘들어 몬 하지예. 일꾼들이 좀 있어가 할 만 합니더.
분할된 화면엔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모습.
잠시 허리를 펴 땀을 닦는 모습은 할아버지, 어머니, 만택 세 사람이다.
CUT TO.
만택: 시골이라캐도 시내나 마찬가지라예. 걸어댕이긴 그래도 차로야 담배 한 대 피면 닿십니더.
마을 입구로 걸어 나가던 만택,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열심히 달린다.
질러 보지만 흙먼지만 날리며 무심히 떠나는 버스.
정류장 푯말에 한 시간 간격의 시간표 보인다.
만택, 담배를 꺼내 문다.
CUT TO.
만택: 차는 일 할 때 쓰는 거 말고 한 대가 더 있십니더.
집 앞에서 고물트럭의 시동을 걸어보는 만택.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갑자기 대문 안에서 엔진 린다.
오토바이 엔진을 단 자전거를 타고 나오는 만택.
놀란 얼굴로 만택을 바라보는 라라.
씬 62. 브로드웨이 거리/낮.
날씬하고 세련된 차림의 마샤에 비해, 마치 남의 양복을 빌려 입은 듯한 모습의 만택.
보기에 만택의 외모에서 더욱 촌스러움이 느껴진다.
만택은 여자보다는 이국적인 풍광이 더 재밌는 눈치다.
마샤가 슬며시 만택의 팔을 끌어안으며 몸을 붙인다.
팔뚝으로 여자의 가슴이 와 닿자 뜨끔해지는 만택, 슬쩍 라라의 눈치를 살핀다.
CUT TO.
한쪽에서 한국 음악이 흘러나온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DDR 위에 만택과 마샤가 올라서 있다.
귀에 익은 한국 음악에 맞춰 능숙하게 리듬을 타는 마샤.
오히려 감을 못 잡고 허둥대기만 하는 만택.
열심히 따라해 보는 모습이 가상하지만, 첫 번째 곡을 넘기지 못한다.
머쓱하게 혼자 내려와 마샤의 춤을 지켜보는 만택.
라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거리 저편에 라라가 책을 파는 경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얘기를 나누며 간혹 웃음을 보이는 두 사람.
씬 63. 백화점/낮.
팔짱을 낀 채 여성복 코너를 돌고 있는 희철과 알로나.
희철은 오가는 여자들의 몸을 빠짐없이 훑어 내리며 돌
알로나가 한 매장에서 걸음을 멈춘다.
통역과 함께 옷을 둘러보는 알로나.
희철은 옷을 고르는 척 하며 백인 여자들의 주변을 맴돈다.
백인 여자들이 다른 코너로 옮겨간다.
희철: 우째, 좀 고급시럽지가 몬 하네.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로) 여자들은 고급시러분데
그때, 데이트를 나온 두식의 모습이 보인다.
통역을 대동하고, 선을 봤던 젊은 여자 이리나와 함께 나와 있다.
그녀와 두식의 손에는 이미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다.
희철: (두식의 앞을 막아서며) 이야! 헹님, 봉 잡으셨네.
두식: 어, 희철이 왔냐?
희철: (곁눈질로 이리나를 훑어보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인교? 영계도 아이고 완전히 햇삥아리네.
두식: 나야 오늘 첨이제, 느는 알로나 부모 만나기로 했담서? 인자 다 된 밥 뜸만 들이면 되는 거잖여?
희철: 밥 다 지놓고도 더 맛난 게 인쓰면, 바뀌는 게 사람 맘 아인교! 헹님 보이까이 샘나는데요. 우예 땡깡을 부렸능교?
두식: 땡깡이 뭔 다냐?
희철: 사장한테 우예 땡깡을 부리몬 이런 영계를 대주능교?
두식: 뭔 쉰 했쌌냐?
희철: 에이, 그라지 마이소. 우예 보면 다 한 배 탄 사람.
두식: 큰 일 날 헌다. (희철의 배를 톡톡 치며) 배는 가려 타야제. 저녁에 보자.
보란 이리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버리는 두식.
희철의 곁으로 알로나가 연노란 블라우스를 입고 다가온다.
희철: (힐끔 보고는) 택시 유니폼 같네.
매정하게 고개를 돌려 가버리는 희철.
씬 64. 옷가게/낮.
제법 모양새를 갖춘 가게, 마샤가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다.
라라가 스카프 하나를 골라 마샤의 어깨 위로 얹어 준다.
마샤, 고개를 끄덕이며 맘에 드는 얼굴이다.
만택이 라라가 골라 준 것과 똑같은 한 장을 더 집는다.
값을 치르는 만택.
원피스와 스카프를 맞선녀에게 건넨 만택.
똑같은 나머지 한 장을 라라에게 선물한다.
만택: 지 땜에 고생 많으신데 이걸로 될랑가 모르겠십니더.
토라진 듯 쓴웃음을 지으며 가게를 나가는 마샤.
난감한 표정의 라라.
만택: 뭐가 또 잘못 됐능교?
씬 65. 광장/낮.
옆에서 걸으며 마샤를 이래저래 구슬려 보는 라라.
만택은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 걷고만 있다.
광장에는 대형 걸개그림이 걸려 있고,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휘장도 늘어져 있다.
지휘자의 구령에 맞춰 기수와 의장대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2인 1조가 된 경찰들이 주위를 돌며 경계하는 모습도 보인다.
만택: 무신 일이 있능교?
라라: 며칠 있으면 독립기념일여서, 행사 준빌 하나 봅다른 데로 가시죠.
만택: (고개를 끄덕이며) 쪼매만 보고 가입시더.
앞서가는 마샤를 따라, 만택이 점점 행사장 가까이로 다가간다.
몹시 불안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뒤따르는 라라.
맞은 편 경찰이 두리번거리는 만택을 수상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사람들 틈을 비집으며 점점 행사장으로 다가가는 만택.
경찰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라라와 눈이 마주친다.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뭔가 무전을 보내는 경찰.
라라: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의 백을 만택에게 쥐어주며) 만택 씨, 뛰십시오! 이유는 묻지 마시고 무조건 뛰십시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만택,
라라: 어서요! 만택씨! 앞만 보고 뛰십시오! 뛰라구요! 잡히시면 안 됩절대 잡히시면 안 됩니다! 어서요!
라라의 다급한 표정을 바라보는 만택. 다가오는 경찰과 눈이 마주친다.
마샤를 보고 주변을 살피더니, 냅다 달리기 시작하는 만택.
놀라는 마샤. 러시아 말로 도둑이야를 외치는 라라.
다가오던 경찰이 달리기 시작한다.
뒤쫓는 경찰과 일부러 몸을 부딪치는 라라.
쓰러지는 라라. 다시 몸을 일으켜 만택을 뒤쫓는 경찰.
주변의 모든 시선이 만택에게로 쏠린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는 만택.
호각리며 경찰들이 만택을 뒤쫓고, 라라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골목으로 몸을 숨긴다. 이 모습을 황당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마샤.
씬 66. 골목 안/낮.
라라, 온몸이 후들후들 떨린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고 꼭 잡는다.
사색이 돼버린 라라의 얼굴.
씬 67. 거리/낮.
앞만 보고 열심히 뛰는 만택.
경찰들도 열심히 뛰지만 점점 거리가 벌어진다.
씬 68. 도로변/석양.
끊임없이 뛰고 있는 만택의 모습이 부감으로 보인다.
도로변을 열심히 달리다 골목으로 뛰어들고, 그러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경찰을 거의 따돌렸다가 길을 잘못 들어, 다시 쫓기는 모습 등이 부감에서 보인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지만, 왔던 길을 달리고 또 달리며 우직하게 뛰기만 한다.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만택의 모습이 석양으로 멀어져 간다.
씬 69. 호텔 앞 거리/ 밤.
해가 져 캄캄하다.
불안한 마음으로 만택을 기다리는 라라.
초조한 마음에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다.
그때 멀리서 만택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만택에게로 달려가 멈춰서는 라라.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다.
뛰는데 불편했는지 바지 단을 양말에 구겨 넣은 만택, 숨이 턱까지 차 있다.
만택: (숨을 몰아쉬며) 괘안십니꺼? 걱정 마이 했는데 (가방을 건네주며) 가방 땜에 마이 기다리셨지요.
라라: (울음을 꾹 참으며) 거기서 여기까지 뛰어 오신 겁니까?
만택: 무조건 뛰라캐서요. 뛰는 거는 잘하거덩요. 학교 댕일 때도 공분 몰라도 뛰는 거맨킴은 지 따라오는 아가 없었십니더. 울 아부지 돌아가실 때도 지가 업고 뛰었는데요, 읍내 병원까정 지가 열일곱 살 때요.
울음을 참고 만택을 향해 애써 웃음을 보이는 라라.
라라: 어떻게 된 일인지 안 물어보십니까?
만택: 말하기 곤란한 거 아인교? 사람마다 그란 거 하나씩은 다 있잖아요. 지도 와 여지껏 결혼 몬 했냐카면, 대답하기 곤란하거81. 호텔 방/아침.
숙취로 괴로운 만택, 뒤척거리긴 하지만 눈이 떠지질 않는다.
문이 열리고 작은 대접이 놓인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희철.
창가 쪽으로 다가가 쟁반을 내려놓고, 커튼을 열어젖히는 희철.
햇살이 방 쏟아진다.
눈이 부신 만택이 힘겨운 표정으로 눈을 뜬다.
희철: 늦겠다. 일나라마!
시계를 보는 만택. 시간은 이미 9시를 넘어서 있다.
몸을 일으켜, 침대 옆으로 발을 내려놓는 만택, 머리에는 까치집을 짓
희철이 쟁반을 들고 와 옆으로 앉는다.
희철: (숟가락을 건네며) 무라.
만택, 숟가락을 받아들고 보면 그릇 안에 흰죽이 담겨져 있다.
놀란 얼굴로 희철을 바라보는 만택.
쳐다보지도 않고, 뜨거운 김을 ‘호호’ 불어가며 죽을 떠먹는 희철.
만택: 웬 거고?
희철: 죽 첨 보나? 싫으면 둬라. 내 먹게.
만택도 죽을 떠먹는다.
만택: (너무 뜨거워 괴로운 얼굴) 뜨겁다꼬 말을 해얄 거 아이가!
대꾸도 없이 계속 죽만 먹는 희철.
만택: 간장 없나?
희철이 ‘이게 정말’ 하는 표정으로 숟가락을 놓는다.
호호 불어가며 얼른 다시 죽을 뜨는 만택.
만택: 맛있다.
희철: 니 엄니 아시면 좋아라하겠다. 이젠 망신도 국제 당한다꼬.
만택: (아주 태연자약하게) 와? 어제 무신 일 나?
희철: 됐다마. 죽이나 쳐무라. 맨날 지가 불리기억 몬 한다카고 나중 보면 다 기억하드만 (계속 중얼중얼)
아무 대꾸 없이 죽만 떠먹는 만택.
햇살이 비춰드는 방안에 두 사람의 숟가락 만 딸각거린다.
씬 82. 노천 카페/낮.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아래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은 카페.
마샤가 굳은 표정으로 혼자 자리를 차지하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마샤.
웨이트리스가 빈 잔에 물을 따르려 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씬 83. 전차 안/오전.
덜컹이는 전차 안, 요금을 받는 차장이 지나면 만택과 라라의 모습이 보인다.
라라는 손등으로 비춰드는 햇살을 가리
만택: 거래 말 돌릴 필요 없십니더. 지가 어디 이런 일 한두 번 겪겠십니꺼?
라라: 정말로 몸이 아파서 못 나온답
만택: 아플만도 하지요. 하루는 경찰한테 쫓기고, 하루는 남의 잔칫날에 초치고 결혼할 맘이 나겠능교. 차라리 잘 됐십니더. 아무도 없는 한국까정 내 하나 믿고 올라카는 사람, 거짓말하고 데려갈 순 없는 거 아인교? 라라씨도 지 땜에 거짓말 하실 필요 없십니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라라.
만택의 구두코가 헤어져 입을 벌리
들고 있던 손등을 내리고 하늘을 올려보는 라라.
햇살에 눈이 부셔 온다.
씬 84. 전차 선로/오전.
선로 가운데로 길게 늘어선 전주. 굽이진 선로 끝으로 전차가 멀어지
만택: (O. S) 근데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능교?
씬 85. 호텔 행사장/낮.
희철이 새로운 여자와 선을 보고 있는 자리.
갑자기 문이 열리며 사장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들어온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마샤, 만택이 사 준 원피스를 입
사장: 박희철이! 홍만택이 어디 간 거야?
희철: 가가 내 마누란교! 와 내한테 와 씩씩거리요! 내는 내 마누라 구하러 온 사람입니더. 사장님이 붙여준 여자가 더 잘 알겠지요.
사장: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이 년이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씬 86. 한국인 식당/낮.
개량 한복을 입은 금발의 아가씨가 위로 설렁탕과 비빔밥을 내려놓는다.
파와 뻘건 다데기를 듬뿍 쳐서 밥공기를 통째로 털어놓는 만택.
몇 끼를 굶은 사람 마냥 허겁지겁 먹어댄다.
이마로 흐르는 땀을 닦다 라라와 눈이 마주치자, ‘쩝쩝’대던 기어든다.
라라: (웃으며) 괜찮 편하게 드십시오.
만택, 오물거리던 입을 조금씩 크고 빠르게 움직인다.
만택: (밥을 먹다 생각난 듯) 한국서 젤로 비싼 작물이 뭔지 아능교?
라라: 뭔데요?
만택: 금추.
라라: 네?
만택: (고추를 집어 들며) 고추가 아이고요. (젓가락으로 김치를 가리키며) 젤로 비싼 반찬이 금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젤로 비싼 작물은 금추.
얘기해놓고 혼자서 킥킥대며 웃는 만택.
라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똥거리며) 개량종입니까?
만택: 네? 아입니더. 기냥 실없이 해 본 소립니더.
싱겁다는 듯 웃어넘기는 라라, 깍두기를 집어 먹는다.
만택: 젓가락질 잘 하시네요. 맵지 않십니꺼?
라라: (서툰 경상도 억양으로) 맛있습니더.
만택: (웃음) 따라 해보이소. 맛있대이.
라라: 맛있대이.
만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엔 둘이 동시에.
라라, 만택: 맛있대이.
재밌다 는 듯 웃는 두 사람.
만택: 처음이네요. 남한테 뭘 가르치긴.
라라: 앞으론 많이 가르치셔야죠.
만택: ?
라라: 한국에 같이 가실 분 말입말부터 해서 예절, 풍습 다 가르치셔야죠.
만택: 라라씨 같은 사람이면 좋겠네요.
라라: !
만택: 말을 지보다 잘 하잖아요.
씬 87. 타슈켄트 시장/오전.
각종 좌판과 인파로 북적대는 시장.
그 한 구석에 만택과 라라가 나란히 앉아서, 함께 포도를 먹
뭔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만택의 한쪽 발은 신발이 벗겨진 채로, 다른 쪽 발 위에 얹어져 있다.
주름이 깊게 패인 노인이 떨어진 만택의 구두를 수선하
CUT TO.
라라가 속옷 상 앞에서 멈춰서더니, 브라를 만져보고 가슴에 대보기도 한다.
라라의 대담한 모습에 당황하는 만택,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찾는 시늉을 하며, 옷을 펼쳐 사람들의 시선을 가린다.
순간, 가리고 있는 만택의 손을 ‘확’ 제끼는 또 다른 손. 희철이다.
서너 걸음 떨어져서는 새로운 파트너와 통역이 서 있다.
희철: 홍만택이! 라라씨 속옷 사줄라꼬? 이젠 선도 안 보기로 했는갑제?
만택: 아가씨가 아프다꼬 몬 나왔다. 호텔서 뭐 하겠노?
희철: 아프다꼬? (라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사장이 아를 빼돌맀다꼬 난리던데요.
라라: (희철의 시선을 외면하며) 들어가야겠 만택씨.
희철의 통역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고 앞장 서 걸어가는 라라.
만택: (희철을 흘기며) 뭘 빼돌맀다카노! 니나 잘 해 봐라.
희철: (만택을 붙잡으며 속삭이듯) 전에 아랑 누가 낫노?
만택: 잔 머리 좀 고만 굴리라. 장고 끝에 악수 두는 법이대이.
빠른 걸음으로 라라의 뒤를 따르는 만택.
희철: (혼잣말) 그래가 누가 낫단 고? (갑자기 멀어지는 만택 쪽을 돌아보며) 수상테이, 홍만택이
씬 88. 정보회사 사무실/낮.
사장과 직원들이 앉아 있고, 맞은편에 고려인 여자들과 그 가족들이 앉아 있다.
회원1: (러시아어) 시내에서 식당 한다더니 길거리 포장마차잖아요. 집은 아파트라더니 빛도 안 드는 지하방이고
회원2: 저는 남들 매달 집으로 100달러씩 보내주는 거 200달러씩 보내준다고 했어요. 근데 단 10달러도 보낸 적이 없어요.
사장: (러시아어) 저희도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일일이 확인을 할 수가 없 집이 있다면 있는 줄 알고, 가게가 있다면 그런 줄 알지, 가서 일일이 조사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회원1: 아니 그런 무책임한 얘기가 어딨어요? 그럼 아무 확인절차도 없이 우릴 그 먼 나라까지 보냈단 말예요.
회원2: 저희들은 속은 게 분한 거예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평생 같이 살 수 있겠어요?
무거운 대화가 오가는 도중에 문이 살며시 열리며, 라라가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라라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른 사장이 그녀를 향해 물 컵을 던진다.
미처 피하지 못한 라라의 한 쪽 이마를 맞고, 벽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물 컵.
시선만 떨군 채 미동도 않고 서 있는 라라, 이마 위로 피 줄기가 흘러내린다.
씬 89. 호텔방/밤.
뜨거운 김이 모락거리는 사발면을 개봉하는 희철.
만택은 자신의 구두를 보며 괜히 실실거리고 웃
희철: 쥐약을 쳐 묵었나? 와 헤헤거리고 지랄이고
웃음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젓가락을 집어 드는 만택.
희철: (라면을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집에서는 그래 먹기 싫던데 니 엄닌 외국도 안 와 본 양반이 우째 이런 생각을 다 했노.
만택: 꼭 해 봐야 아는 기가. 니는 결혼도 살아보고 할 기가!
희철: 니 가끔 보면 서른여덟이 아이라, 쉰여덟 같은 소릴 지껄이. 살아보고 하는 게 뭐가 나쁘노! (갑자기 작아지는 ) 그게 아이면 같이 자 보기라도 해야제.
만택: 그래가 알로날 찬 기가? 와 같이 안 잔데드나?
희철: (젓가락을 팽개치며) 아이, 씨이! 와 또 그 가시나 얘기고! 영옥이랑 알로나 얘긴 하지 말라캤지!
다시 젓가락을 들어 고개를 쳐 박고 라면만 열심히 먹는 희철.
만택: (중얼거리) 지도 찔리는 게 있는갑네.
희철: 찔리긴 뭐가 찔리노!
갑작스런 희철의 언성에 기가 죽은 만택, 사발을 들어 국물을 들이마신다.
만택: (트림까지 해가며) 역시 라면은 군대랑 외국서 먹는 게 최고다.
희철: 면사무소가 군대가!
씬 90. 이리나의 집 앞/오전.
다음날 타슈켄트의 어느 아파트촌 앞.
페인트가 벗겨지고 벽이 갈라진, 보기에도 매우 오래되고 허름한 아파트다.
동네 꼬마들이 낡은 축구공을 가지고 열심히 뛰어 다니
그들을 가르고 벤츠 한대가 흙먼지를 날리며 다가와 멈춰 선다.
꽃바구니와 선물꾸러미를 든 두식이 통역과 함께 차에서 내린다.
두식을 기다리던 이리나와 그녀의 어머니가 반갑게 맞는다.
이리나에게 꽃바구니를 안기며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두식.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어머니가 다가와 가벼운 포옹을 한다.
씬 91. 호텔 행사장 안/오전.
평소처럼 만택과 희철이 자리에서 기다리
잠시 후 사장과 라라, 그리고 희철의 통역이 차례로 들어온다.
라라의 한 쪽 이마에는 피 멍이 가시지 않은 상처가 나 있다.
만택의 자리가 아닌 희철의 으로 가 앉는 라라.
영문을 모르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는 만택과 희철.
사장: 그 동안 서로 지겨웠지? 새 파트너와 새로운 맘으로 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서, 오늘부로 교체한 거야.
희철: 지는 싫은 데요. 와 하필 이 여잔교? 딴 사람을 붙여주던지, 원래대로 해 주이소.
사장: 이건 내 권한이야. 시간 없어. 있는 기회나 잘 잡아.
그리고 만택인 따라 나와. 어제부터 마샤가 기다린다.
라라를 바라보는 만택, 라라는 만택의 시선을 외면한 채 말없이 앉아 있다.
희철이 만택의 무거운 얼굴을 불안하게 바라본다.
사장: 뭐 하고 있어! 얼른 나오지 않고.
만택: 라라씨, 이마가 와 그란교?
대답 없는 라라.
계속 라라만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만택.
만택: 지는 여기서 관두겠십니더.
사장: 무슨 야! 이제 와서.
만택: (사장 다가가서) 이건 지 권한입니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리는 만택.
모두들 당황스런 얼굴로 잠시 말을 잃는다.
사장: (라라를 노려보며) 이대로 끝나면 나도 너한테 줄 게 없어!
괴로운 표정으로 두 눈을 감고 마는 라라.
희철은 모든 상황이 황당하기만 하다.
씬 92. 호텔 방/낮.
만택이 방에서 짐을 싸고 있고, 밖에선 문을 두드리는 희철의 들린다.
희철: (O. S) 만택아! 이라지 말고 문 좀 열어 보래이. 라라씨가 할 말이 있댄다. 만택아! 홍만택이!
말없이 계속 짐만 챙겨 넣는 만택.
씬 93. 노천 카페/낮.
희철: 와 아직도 훈계할 게 남았능교?
라라: 도와주십시오.
희철: 지 같은 게 도울 일도 있능교?
라라: 만택씨랑 어울리는 사람으로 제가 다시 데려오겠 부탁입만택씨만 다시
희철: 글마 일이라면 지가 돕고 싶어도 도울 일이 업실 거 같네요. 가 맨날 팔푼이 마냥 웃고 댕여도, 아이다 싶으면 입 다물고 뭉쓰는 압니더. 어릴 때부터 지가 꼬붕처럼 달고 댕이던 아지만, 지가 뭐 시킨 적 업십니더.
라라: 쉽게 결정하시고 온 게 아니잖습니까! 아직 시간도
희철: 가도 여 올 땐 남들하고 똑같은 생각이었을 깁착하고, 보기 안 흉하고, 내 좋단 여자라면 된다. 근데 말입니더, 지금 쟈가 저러는 거 보면 뭐에 단단히 홀린 거 아인가 싶습니더.
라라: 홀리다니요?
씬 101. 공원/저녁.
공원 한쪽에 세워진 동상 앞 계단.
희철이 물에 적신 손수건을 짜내며, 만택에게 다가와 앉는다.
두 사내의 눈가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부어올랐다.
희철: (손수건을 건네며) 많이 아프나?
아무 대답이 없이 손수건을 받아들고, 눈가에 갖다 대는 만택.
희철: 미안테이.
만택: 뭐가?
희철: 우즈벡 여도 내가 오자 캤고 오늘도 내가 같이 가자칸 거 아이가!
만택: 참가비 야긴 와 안 하노?
희철: (뜨끔) 참 가 비라니?
만택: 참가비가 2백 4백이라꼬 속인 거 말이다.
희철: 알고 나?
만택: 걱정마라. 안 받겠단 소린 아이니까.
희철: (기어드는 ) 갚는다. 이자 쳐서
만택: 농고 댕일 때 삥뜯다 중학생 아덜한테 쥐어터지던 거 기억나나?
희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그 야긴 와 하노! 쪽팔리게.
마지막 남은 한 가치를 꺼내 물고, 담뱃갑을 구겨 쥐는 희철.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뱉어내자, 만택이 뺏어들어 깊게 들이 마신다.
희철: 안 피던 담밴 와 태우노?
만택: 이거라도 태우면 속이 덜 탈까 싶다.
잠시 침묵.
희철: 이래 가면 속 편하겠나? 후회 않겠나 말이다. (쥐고 있던 담뱃갑을 내던지며) 내 보기에 한국 간다꼬 낫는 병 아이다.
만택: (몇 모금 남지 않은 담배를 다시 희철에게 건네며) 누가 그냥 이래 간다 카드나.
씬 102. 거리/밤.
가로등이 희미한 거리.
T자형의 전신주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길게 전차 선로가 나 있다.
그 길 한 켠에 라라가 혼자 서 있다.
멀리 선로의 끝에서 굽이져 들어오는 전차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인다.
DISSOLVE.
라라가 서 있던 자리는 비어있고, 전차가 푸른빛의 스파크를 일으키며 멀어져 간다.
전차가 사라지는 방향에서 선로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만택의 모습이 보인다.
한참을 거리 두고 뒤따라오는 희철.
씬 103. 호텔방/아침.
‘때르릉’하며 울리는 요란한 전화벨 .
한참 버티던 희철이 뒤척거리던 끝에 짜증스런 얼굴로 깬다.
만택의 침대를 바라보면 이미 비어 있는 침대.
희철: (수화기를 들며) 여보세요 구내 식당요? 와요?
씬 104. 호텔 식당/아침.
희철, 두식, 상진이 편한 차림으로 앉아 있고, 회사 직원들도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그들 한국인으로 보이는 두 사내와 현지 경찰들이 서 있다.
사내1: 한 사람이 비는데, 누가 없는 거죠?
희철: 홍만택이요.
사내1: 어디 가신 거죠?
희철: (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아, 신경 안 써도 되요. 금방 올깁니더. 얼렁 용건이나 말 하이소.
사내2: 저희는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나왔 다름이 아니라 이번 OO사의 행사가 이곳 우즈베키스탄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간주되어, 모든 행사가 금지됨과 동시에 모든 관계자들은 48시간 이내에 출국하라는 현지 법원의 명령서가 나왔
술렁이는 사람들.
사내2: 따라서 이 시간 이후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저희 영사관 직원들의 보호를 받게 되며, 호텔 외부 출입이 일체 금지됩
씬 105. 브로드웨이 거리/낮.
독립기념일 행사로 무척이나 번잡한 거리.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의 행렬, 무용단의 공연들이 이어지
오가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만택.
거기가 거기 같아 보인다. 자꾸 왔던 길을 되돌아오는 만택.
고려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열심히 손짓을 해가며 묻기도 해본다.